* 본 콘텐츠는 sweetpea님이 《철학자의 편지 신청》에 작성해 주신 글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습니다.
"강아지를 키우고 싶은데 자신이 없어요!"
맞벌이를 하고 있는 부부입니다. 결혼하기 전에 강아지를 오랫동안 키워서 그런지 문득문득 강아지를 키우고 싶은 마음이 들곤 하는데요. 강아지가 하루 종일 집에 혼자 있어야 될 걸 생각하니 마음이 짠하고, 강아지를 키우려면 목욕, 대소변 등 신경 써야 되는 부분도 많은데 과연 끝까지 잘 책임 질 수 있을 지에 대한 자신이 없어서요.
충동적으로 강아지를 데리고 오기에는 부족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큰데, TV에서나 혹 산책하는 강아지를 보면 정말 부럽고 키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요. 강아지도 행복하고 저도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사람은 사람대로, 동물은 동물대로!"
허허허. 동물에 지나지 않는 강아지에게 목욕도 시켜주고 대소변도 살펴주고 한다니, 내게는 무척 낯선 고민이구만. 이런~! 내가 너무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하는 건가? 하긴…자네와 나와는 수 천 년의 세월 차이가 있으니 그 시대 때는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구만. 그런데 고민을 죽 읽어보니 이것은 동물이 아니라 사람을 키우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이는군. 게다가 강아지가 하루 종일 집에 혼자 있을 것까지 걱정한다니, 자네가 키우는 강아지는 웬만한 사람보다 더 팔자가 좋겠구만! 솔직히 말해서 내가 모시는 군주가 그런 고민을 했다면, 그 정성으로 백성을 돌보라고 말해 주었을 것이네.
하지만 내가 살던 시대와 자네가 사는 세상이 다를 것이니 조금 다른 차원에서 이야기를 해 보겠네. 아무리 자네가 동물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다고 해도, 자네의 고민에는 몇 가지 어려운 점이 있다네. 그것은 바로 "사람은 사람대로, 자연은 자연대로" 라고 풀어서 말할 수 있는 ‘천인분이’(天人分二)의 사상이네. 이미 내가 지은 책 《순자(荀子)》에서 자세하게 말했지만, 자네를 위해 조금 더 쉽게 들려주겠네.
내가 살던 때에는 우리를 둘러싼 자연의 세계를 ‘하늘’(天)이라고 불렀네. 하늘에 떠 있는 해와 달과 별, 사계절의 변화, 더위와 추위 등등 이 모든 것은 ‘하늘’의 현상으로 이해했지. 그런데 이 ‘하늘’에 대해 사람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하고 명령하는 존재로 생각하고 믿기도 했다네. 심지어 하늘에 계신 조상들이 여전히 살아가 자손들을 돌본다고 생각했다네. 사람들이 제사를 지낸 까닭이 바로 그 때문이었다네. 그래서 나는 이런 생각을 바로 잡아야겠다고 생각해서 《순자》에 들어 있는 "하늘(자연)에 관한 논의"라는 뜻을 가진 〈천론(天論)〉이란 글을 지었네. 그 글에서 나는, 사람들은 일식이나 월식, 때 아닌 폭풍우, 생각지도 않은 괴상한 별 같은 현상이 나타나면 괴상하게 여기는 것은 이해할 만하지만 두려워할 일은 아니라고 말했네. 그런 것은 그저 사람과 상관없이 일어나는 자연현상일 뿐이기에 그런 것이네.
사람의 노력과 정치가 중요한 것이 바로 여기로부터 비롯된다네. 커다란 재난이 계속해서 일어나더라도 사회가 안정되고 준비가 철저하다면 걱정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라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사람의 능동적 노력과 준비라네. 가뭄과 홍수가 들더라도 저수지가 충분하게 마련되어 있고 제방이 잘 갖추어져 있다면 도대체 무섭고 두려워할 까닭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하늘은 하늘대로 사계절의 운행이 있고, 땅은 땅 대로 만물을 낳고, 사람은 사람대로 마땅히 다스려야 할 일이 있으니, 이것을 능참(能參)이라 한다." 즉 우리 인간은 하늘이나 땅과 같은 자연과 독립된 존재로서, 오히려 하늘과 땅의 법칙을 잘 헤아리고 이해해서 잘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네. 바로 이런 인간의 위대한 능력을 나는 ‘능참’이라고 불렀다네.
그런데 자네는 지금 동물에 속하는 강아지를 마치 사람처럼 가족처럼 생각하고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네. 잘 생각해 보게나. 사람은 사람으로 돌봐야 하고 동물은 동물로서 다루어야 하지 않겠나? 물론 동물도 감정을 느끼겠지. 주인을 봤을 때 꼬리를 치며 반가움을 전하고 낯선 이를 봤을 때 짖는 경계심, 또 동물을 키워본 사람들이 얘기하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교감을 느낀다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동물이 사람과 같은 대우를 받을만한 자격이 생겼다는 것도 아니지.
이것은 사람과 동물이 당연히 차별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닐세. 오히려 사람의 기준으로 동물들의 감정과 생활을 판단하는 것 자체가 이기적인 생각이라는 거지. 자네는 강아지에게도 사람처럼 목욕을 시켜 위생적으로 키우고 싶고, 대소변을 가리지 않는 강아지에게 사람처럼 대소변을 가릴 것을 원하고 있네. 하지만 이런 일은 강아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네를 위한 것이라네. 동물로서의 강아지가 지닌 삶의 방식을 자네는 ‘사람처럼’ 만들고자 하는 것이네. 물론 강아지와 같은 동물은 영민해서 잘 반복해서 잘 훈련시키면 대소변을 가리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나도 잘 안다네. 그렇다면 함께 살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훈련을 시킨다든가, 혹은 사람의 공간과 동물의 공간을 따로 나누는 방법들을 생각할 수 있겠지.
그러나 모든 것을 떠나서 내가 자네에게 바라는 것은 그런 방법적인 고민에 앞서서 스스로 동물을 동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보라는 걸세. 동물을 사람의 기준으로 그저 한없이 돌봐주고, 훈련시키고, 책임져야 할 대상으로 생각한다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부담이 커질 걸세. 사실 동물은 자연에서 생활하면 얼마든지 스스로 생존 가능한 강하고 독립적인 개체라네. 그러나 함께하고 싶다는 이유로 인간과 함께 산다면 동물 입장에서도 불편한 점이 많지 않겠나?
대소변을 가린다던 지, 인간의 물건을 어지르지 않는다던 지 이런 것 말일세. 그런데 그런 문제가 생길 때마다 동물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가두고, 혹은 귀찮다고 버린다면 그것은 애초에 시작하면 안 될 일이 아니겠는가? 혹여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너는 동물이니 대소변을 못 가리는 것은 당연하다. 이 부분은 내가 냄새가 나서 불편하니 치워야겠다’ 이런 마음으로 동물과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일세.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강아지를 키우는 일이 뭐 그리 어려운 일이겠나? 이미 강아지가 사람과 함께 살아 온 일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 않는가?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것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소중한 생명이라는 사실 앞에 평등하다는 걸세. 순간의 외로움이나 소유욕에 앞서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지. 자네 부부가 동물을 동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된다면 그때 생각해도 늦지 않을 걸세.
직하(稷下)에서
순자(荀子)가
합리적 자연주의자, 순자의 《순자(荀子)》
고대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사상가 순자(荀子, B.C. 298-238)는 공자(孔子)와 그의 뒤를 이은 맹자(孟子)와 더불어 가장 유명한 유가 사상가이다. 그는 조(趙) 나라 출신으로서 당시 가장 유명한 학술기관으로서 수많은 최고의 학자들이 모여 학문을 토론하였던 제(齊) 나라의 직하(稷下)의 좨주(祭酒)(오늘날의 대학총장 격에 해당)를 세 번이나 역임하였다. 그의 유명한 제자 가운데에는 법가를 종합한 한비자(韓非子), 진시황(秦始皇)을 도와 천하를 통일하는 데 일조하였던 이사(李斯) 등이 있다. 그가 남긴 말과 글을 모은 책은 《순자(荀子)》로서 《순경신서(荀卿新書)》 혹은《손경자(孫卿子)》라고도 불린다.
오늘날 순자는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에 반대하여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보다는 고대의 유가사상을 종합하고 정리한 사상가로서 그 의미가 더 크다. 대단히 합리적이고 실질적인 이론적 성향을 지녔던 순자는 한(漢) 나라 이후 유가의 주류였으나 송(宋) 나라 이후 성리학이 흥기하면서 유가의 이단자로 비판 받기도 했다.
순자는 맹자와 달리 인간의 이기적 본성에 주목하여 이를 교육을 통해 변화시킴으로써 사회의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특히 이러한 과정에서 성인(聖人)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인간은 인간의 본성에 합당하게 지어진 예(禮)에 따름으로써 가능하며, 합리적인 지성의 사용을 강조하였다. 특히 미신적이고 초자연적인 ‘하늘’(天)을 숭배했던 당시에 하늘(자연)은 인간의 의지와 무관한 별개의 과정으로서 "하늘의 직분과 인간의 직분은 다르다"(天人之分)는 합리적 자연관을 정초한 것은 오늘날 높게 평가되고 있다.
"하늘과 인간은 가는 길이 다르다!"
"농사일에 힘쓰고 비용을 절약해서 쓰면 하늘도 사람을 가난하게 할 수 없다. 의식이 풍족하고 운동을 제 때에 한다면 하늘도 사람을 병들게 할 수 없다. 도리를 따라 어기지 않게 하면 하늘도 사람에게 화를 내릴 수 없다. 그러므로 홍수나 나고 한발이 들어도 사람을 굶주리게 할 수 없고, 추위와 더위도 사람을 병들게 할 수 없으며, 요괴도 사람에게 흉해를 끼치지 못한다. (...) 하늘을 원망해서는 안 되니 도리가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자연)과 사람의 직분이 다르다는 것을 밝히면 지극한 사람(至人)이라 말할 수 있다."(《순자》〈천론〉)
순자에 따르면, 지극한 사람(至人)은 무엇보다 하늘(자연)과 사람이 맡은 직분이 다르다는 점을 제대로 밝힌 사람이다. 자연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되는 자연의 현상이다. 하늘(자연)은 사람과 달리 어떤 의지나 목적을 갖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하늘과 인간의 직분은 다르다. 이것을 순자는 "하늘과 자연의 직분의 다름"(天人之分)이라고 한다.
이렇게 보면 사람이 겪는 다양한 불행과 재난은 하늘의 책임이 아니라 실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열심히 농사지어 비축하고 비용을 절약하여 쓰면 흉년이나 가뭄 등으로 인한 굶주림을 막을 수 있고, 충분히 몸을 보호하고 잘 먹고 운동하면 건강도 상하게 되지 않는다. 이러한 인간의 능동적인 활동이야말로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이다.
따라서 인간은 인간대로, 하늘은 하늘대로 각각의 직분에 주어진 대로 충실하게 살아가면 그 뿐이다. 재앙이 났다고 하늘을 원망해봐야 소용없고, 전염병이 돈다고 하늘을 욕해봐야 소용이 없다. 순자는 이와 같이 자연현상이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독립적이며, 인간의 삶 또한 하늘의 의지나 목적에 종속되거나 간섭 받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순자는 오히려 이러한 자연의 객관적인 현상을 지적으로 이해하고, 인간의 삶에 응용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순자의 자연관은 고대 중국에서 놀라울 정도의 합리적인 사고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오늘날의 학자들 중에는 맹자보다 순자에게서 현대적인 의미가 더욱 풍부하고 현실적인 유교 사상의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출근하면서 강아지들에게 얘기한다. 아빠:"어이구~ 우리 예쁜 강아지들. 아빠는 일하고 올게, 얌전히들 있어." 탁!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강아지1:"야호! 자유다-!!", 강아지2:"옷 벗으니 진짜 편하네!" 퇴근하고 돌아와서 어지러워진 집을 본 아빠는 화를 내며 말한다 아빠:"얌전히 있으랬잖아! 왜 이렇게 말을 안듣니?" 강아지들은 속으로 생각한다 강아지1:"자기 맘대로 해 놓구선...", 강아지2:"이 자세도 불편해!" 사람은 '사람'대로 자연은 '자연'대로
- 글
- 김시천(경희대학교 교수)
- 구성
- 이은지(작가)
- 그림
- 박동현(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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