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편지

짜증만 나는 직장생활, 감정조절이 힘들어요! - 흄 편

철학자의 편지 흄 편
* 본 콘텐츠는 myyoon님이 《철학자의 편지 신청》에 작성해 주신 글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사연소개
"짜증만 나는 직장생활, 감정 조절이 힘들어요!"
안녕하세요. 저는 중소기업 3년 차에 접어든 회사원입니다. 3년 차가 돼서 대리를 달게 됐는데 신입 때보다 훨씬 힘들어요.

사실 일이 힘들긴 보단 감정조절이 힘듭니다. 신입 때는 그냥 시키는 일만 열심히 했는데, 이제 일이 익숙해지니까 귀찮은 일도 생기고, 하기 싫은 일도 보이고, 점점 일을 감정적으로 하게 되더라 구요.

입사 초엔 별명이 ‘스마일 보이’일 정도로 웃고 다녔는데 지금은 사람들이 저에게 늘 무슨 일 있냐고. 화났냐고 물어봅니다. 매일 출근 하면서 이렇게 일할 수 있는 게 얼마나 행복이냐 다짐하면서도 또 막상 일하다 스트레스에 치이면 다시 감정을 조절 하지 못하구요. 이젠 그냥 지나갈 수 있는 작은 일에도 쉽게 화를 냅니다. 어떻게 하면 제 감정을 조절할 수 있을까요?
철학자의 편지
"감정의 파도, 참는 것만으로 잔잔해지지 않는다오."
허허허,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젊은이가 가질만한 고민이구려. 맞소. 부모 그늘에서 벗어나 사회에 속하게 되면, 하고 싶지 않아도 일을 해야 되고 귀찮아도 해야 되니 어찌 감정의 파도가 일렁이지 않을 수 있겠나. 그런데 이것이 또 인간과 동물의 차이라네. 동물들은 아무 제어 없이 본능과 감정을 표출하지만 인간은 이성을 통해서 조절을 하거든. 그렇기 때문에 자네가 짜증난다고 일을 그만두는 대신에 이렇게 나에게 이성적으로 조언을 구하고 있는 거겠지. 끓어오르는 본능과 감정을 누르고 이성적 판단을 한다는 점, 그래서 대선배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고 정의 내렸던 것이라네.

선대 철학자들은 전통적으로 감정에 비해 이성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네. 본능이라고 해서 감정을 그대로 분출해 내면 동물과 다를 바가 없게 되고 인간으로서 올바로 살 수가 없다고 생각한 거지. 혈기왕성한 가슴만으로는 살 수 없고 차가운 머리를 훨씬 더 필요로 한다고 말일세.

나 데이비드 흄은 존 로크, 조지 버클리와 함께 경험주의 철학자로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 아마 흄이라는 내 이름을 자네가 까막눈이거나 귀머거리가 아닌 이상 한번쯤은 들어봤을 걸세. 흠흠. 어쨌거나 지식이 어디서 생기느냐는 문제에 대해 이성주의 철학자들은 이성을 강조했지만 우리 경험주의 철학자들은 감각에 의한 경험을 강조했지. 나는 경험주의를 도덕에도 적용했는데 그 내용은 이런 걸세. 어떤 도덕적 신념이 동기가 되어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겨지지. 나는 그런 도덕적 신념이 어디서 생기느냐는 문제를 파헤쳤어. 그래서 도덕적 신념들은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감정에 의해 생긴다는 것을 강조했다네. 감정에 따라 일어나는 생각을 ‘정념’이라고 하는데, 나는 감정보다는 정념이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했지. 그래서 남들은 나를 《정념의 철학자》라고 불리기도 했다네.

이성이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판단하는 지성을 갖추고 있다는 뜻인데 이것만으론 우리를 행동하게 하는 자극제가 되지 못 한다네. 우리의 행동 의지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정념이라네. 어려운 말 같지만 내가 쉽게 설명해주지. 집중하게나!

예를 들어 우리는 상한 음식을 보면 먹지 않아. 왜 먹지 않는다고 생각하나? 상한 음식을 먹으면 병에 걸린다는 지식이 그 음식을 먹지 않게 하는 근거를 제공하는 건가? 아닐세. 우리는 상한 음식을 먹고 병에 걸리면 아프다는 고통의 감정이 일어나기 때문이지. 바로 그 정념이 먹지 않는 행동을 하게 만드는 걸세. 어떤 대상에서 고통이나 쾌락을 예상할 때 이에 맞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네. 그래서 우리는 피하거나 받아들이거나 하는 선택을 할 수 있는 거지.

다시 정리하자면, 대상에 대한 지식은 우리에게 쾌락을 주는지 아니면 고통을 주는지 정보를 제공한다네. 이 정보 덕분에 대상에 대한 혐오나 욕구와 같은 정서적인 반응이 일어나고, 우리를 행위 하도록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정서적인 반응, 곧 정념인 것이라네. 그래서 내가 《인간 본성론》에서 말한 다음 구절은 철학사에서 아주 유명해졌지.

"이성은 정념의 노예일 뿐이고 또 단지 노예일 뿐이어야만 하며, 정념에 봉사하고 복종하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직무를 탐내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내가 정념을 강조했다고 해서 우리의 감정을 마음대로 표출해도 된다는 뜻은 아닐세. 그건 정념 또는 감정의 노예가 된다는 뜻이니까. 다만 우리 행동에서 머리의 역할 못지않게 가슴이 중요하고 어떤 점에서는 가슴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걸세. 자네가 아무 이유 없이 화를 내지는 않겠지. 만약 아무 이유 없이 화가 난다면 내가 도와줄 일은 없네. 그것은 병이니 의학적인 치료를 받아야지.

누군가가 자네에게 거짓말을 해서 화가 난다고 가정해보세. 일단 이성이 하는 역할은 누군가 자네에게 거짓말을 한다는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지. 그 믿음과 동시에 자네는 거짓말을 한 대상에게 혐오감이라는 감정을 가지게 되고 화를 내는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일세. 여기서 자네가 가진 믿음이 하나 더 있지. 그것은 누군가에게 잘못된 행동을 하면 화를 내야 한다는 믿음이지. 그렇지! 적절한 상황에서 적절한 감정을 가져야 한다고 알고 있는 게야.

이 감정이 적절한가, 그렇지 않는가를 판단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시간을 가지고 일단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방법이 있네. 나는 지금 왜 화가 났는지 자문해보게. 누군가가 나에게 거짓말을 했고 거짓말을 한 사람에게는 화를 내는 것이 정당하다고 믿기 때문에 화를 낸다고 답할 수 있겠지. 그렇다면 자네가 화를 내는 것은 자연스럽고 정당한 감정이라네. 단 위 믿음들이 옳다고 가정할 때 말일세. 예를 들어 어떤 계기로 모든 게 자네 오해인 걸로 밝혀질 수도 있네. 그걸 알면 화가 수그러드는 것이 당연한데 그런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화가 난다면 그것도 역시 정신과 치료를 권하고 싶구만.

노예인 이성은 바로 이런 식으로 주인인 정념에게 봉사한다네. 이성은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거나 하지 못하도록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고 했지만, 감정을 일으키는 믿음을 바로 잡는 역할을 하는 것일세. 다시 말하지만 이성이 바로 잡는 것은 감정이 아니라 감정을 일으키는 믿음이라네. 그 믿음이 틀렸다면 애초에 감정은 일어나지 않는 거지.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네

"어떤 정념이 거짓 가정에 기초하고 있거나 의도한 목적에 충분치 않은 수단을 선택한 경우가 아니라면 지성은 신념을 정당화할 수도 비난할 수도 없다."

자네가 너무 감정만 앞서기 때문에 고민이 된다면 걱정하지 말게. 일단 감정 즉 정념이 많다는 것은 어찌 보면 큰 장점일세. 우리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고 행복을 함께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공감의 능력이 있기 때문인데 공감은 우리를 다른 사람들을 동정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과 연대하게 하는 도덕적 감수성이라네. 그런 따뜻한 가슴 없이 차가운 이성만 있는 사람은 진정으로 도덕적인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거지. 내가 강조했듯이 머리만으로는 행동으로 옮길 수 없으니 말일세.

단, 이 한 가지만 기억해주게나. 감정의 파도 앞에서 늘 스스로 자문하라는 것! 정념을 표출하기 전 스스로 여러 단계를 만들어 검증하고 또 검증해보게나. 그래도 그 믿음이 변함없다면 당당하게 표출하게. 정념을 잘 다룬다면 자네의 인생을 망치기보단 더 좋은 방향으로 전환시켜주는 좋은 계기가 될 걸세!

현명한 미래의 젊은이여. 감정의 파도를 잘 다스려 행복한 인생의 항해사가 되길 바라네.
스코틀랜드에서
데이비드 흄이
오늘의 철학자
경험론을 완성시킨 철학자, 데이비드 흄
데이비드 흄 사진
데이비드 흄(1711~1766)은 스코틀랜드의 철학자이다. 존 로크와 조지 버클리를 이어 영국 경험론을 완성시킨 철학자로 평가 받는다. 《인간 본성론》, 《인간 지성에 대한 탐구》, 《자연 종교에 대한 대화》 등의 중요한 철학 저서를 남겼지만, 살아 생전에는 철학 책들보다는 6권짜리의 《영국사》의 저자로 유명했다. 선배 경험론자인 로크와 버클리보다 더 철저한 경험론의 원칙을 유지했다. 우리에게 확실하게 있는 것은 감각 경험밖에 없으므로, 인과 관계는 객관적이고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습관에 의해 생긴 산물이라고 주장했으며, 외부 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믿음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인식론적 회의론을 지지하였다. 그리고 도덕의 문제에서도 행위의 직접적인 동기를 제공하는 도덕적 신념들은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감정 또는 정념에 의해서 생긴다고 주장했다.
철학자의 한마디
"이성은 정념의 노예다"
공자가 말하였다. "기미를 아는 것이 신묘한 지혜다! 군자는 윗사람 사귐에 아첨하지 않고 아랫사람을 사귐에 업신여기지 않으니 기미를 아는 것이다. 기미란 은미하게 일어나는 움직임이고 길함과 흉함이 나타난 것이다. 군자는 기미를 보고 일을 신속하게 하니 날이 다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우리의 정념과 상반되는 원리는 이성과 같은 것일 수 없고, 부적절한 의미에서만 이성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가 이 정념과 이성의 싸움을 말할 때, 우리가 말하는 것은 엄밀하지도 않고 철학적이지도 않다. 이성은 정념의 노예이고 또 노예일 뿐이어야 하며, 정념에게 봉사하고 복종하는 것 외에 결코 어떤 직무도 탐내어서는 안 된다." (《인간 본성론》)
우리는 누구나 도둑질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왜 도둑은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흄에 의하면 도둑질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안다는 지식이 곧바로 도둑질을 하지 않음으로 이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성은 어떤 행동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를 분별하게 해 준다. 하지만 이성은 감정을 일으키는 믿음을 바로잡는 역할을 할 뿐,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거나 하지 못하도록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흄은 이성은 정념에 봉사하고 복종하는 노예일 뿐이라고 말한다.
철든생각, 올바른 정념 사용법
나:"에고... 오늘 하루에만 화재출동을 세 번이나 나갔더니... 온 몸이 쑤시고 피곤하구나...엇?" 낑낑 거리며 무거운 수레는 옮기는 할머니가 보인다. 그걸 보는 나는 여러가지 생각이 든다. 무겁겠네... 하지만 나도 오늘 너무 피곤한걸...꼭 내가 도와줘야 하나? 저런 일은 경찰이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닌가? 지나가는 다른 사람이 도와줄 수도 있고...그냥 무시하려고 했지만 가슴 한켠이 욱씬 욱씬하다. 나:"그래..., 누가 도우면 어때. 지금 도울 수 있는 내가 하자." 팔을 겉어 붙이면 할머니에게 말을 건넨다. 나:"무거우시죠?" 때론 차가운 이성보다 뜨거운 가슴이 통할 때가 있다.
최훈(강원대학교 교수)
구성
이은지(작가)
그림
박동현(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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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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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