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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편지

어렵게 한 결혼, 1년 만에 권태기가 찾아왔습니다. - 쇼펜하우어 편

철학자의 편지 쇼펜하우어 편
* 본 콘텐츠는 sksmssk님이 《철학자의 편지 신청》에 작성해 주신 글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사연소개
"어렵게 한 결혼, 하지만 1년 만에  
권태기가 찾아왔습니다"
저는 결혼한 지 이제 막 2년 차에 접어든 새신랑입니다. 남들이 봤을 땐 아직도 풋풋한 신혼이겠지만, 사실 저희 부부는 인생의 황혼기를 함께 하는 노부부 같습니다.

20살에 처음 아내를 만나 8년 동안 오로지 서로만을 바라보며 사랑해왔습니다. 취업준비도, 군대생활도, 유학생활도 제 인생의 거의 모든 부분을 아내와 함께 했습니다. 사실 아내는 저보다 좋은 곳에 취직도 했고 집안도 훨씬 좋아서 결혼하기까지 처가 쪽의 심한 반대가 있었지만 서로에 대한 믿음 하나로 결혼까지 골인하게 되었습니다.

결혼만 하면 모든 갈등이 끝나고 행복한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막상 아내와 1년 동안 신혼생활을 하다 보니 정말 솔직히 지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모든 역경을 다 물리치고 보물을 찾았는데 기쁘기보다는 그저 허무하다는 느낌...그런 느낌 같아요. 너무 오래 함께해서 내가 지나치게 한 사람에게 집착한 건 아니었는지... 너무 주변에서 반대를 하니까 사랑으로 믿어졌던 건 아닌지...정말 별별 생각이 다 듭니다. 이제 아내와 함께 이야기를 하는 것도, 여행을 가는 것도... 너무 지루하게만 느껴져서 더 괴롭습니다. 이 권태기를 어떻게 넘길 수 있을까요?
철학자의 편지
"결혼의 진실은   당신 상상보다 더 고약하다네.
그래도...알고 싶나?"
‘결혼’이라...미래에도 이 단어에 담긴 기대와 희망은 변함없나 보군.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염세주의자로 알려져 있지. ‘염세’란 세상을 괴로운 것으로 여겨서 비관적으로 보는 것을 말하고, 염세주의자는 그래서 세상에서 어떤 희망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네. 하지만 개념 있는 누군가는 나를 ‘삶의 고통을 철학적 주제로 선택한 용기 있는 철학자’로 평가하더구만. 흠흠 너무 잘난 척 하는 것 같다고? 어쩌겠나? 칭찬은 염세주의자도 춤추게 만든다네.

자, 그렇다면! 내가 왜 고통에 대해 그토록 냉철하게 말했는지. 슬슬 궁금해지지 않는가? 내가 살던 19세기 유럽은 인간의 이성을 강조한 낙관주의적 세계관이 지배하던 시절이었네. 그 시절에 나는 삶이 왜 인간에게 고통인지 그 근원을 파악해서 낙관적 인간관이 지닌 한계를 파헤치려고 했지. 낙관이 있다면 반드시 비관이 있듯이 나는 삶에 대한 균형적인 이해를 원했다네.

크리스트교에서 말한 대로 인간의 고통이 인간이 지은 죄의 결과라면 우리 인간은 그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겠지. 나도 고통의 근원에 대한 이런 종교적인 시각에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내가 더 주목하는 것은 인간이 범한 죄가 인간의 욕망과 결합되어 있다는 점이라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고 싶은 욕망을 이기지 못한 데서 인간의 고통이 시작된 것처럼 인간의 욕망을 제대로 파악해야 고통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치료할 수도 있을 것 아닌가?

자네가 느낀다는 권태의 고통도 마찬가지일세. 나의 대표작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지. 자네가 공부 좀 했다면 들어봤을 걸세. 이 책 제목은 나의 철학이 무엇인지 단적으로 보여주지. ‘표상’이란 철학자들이 쓰는 어려운 말이지만 쉽게 말하면 세상이 우리에게 드러나는 방식이라네. 세상이 다 똑같은 것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위에서 말했듯 어떤 사람에게는 낙관적으로 보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비관적으로 보이지 않는가? 그렇게 드러나는 방식이 다 표상이라네. 예를 들어 하늘에서 내리는 눈도 눈을 처음 본 열대 지방 사람의 눈에, 알래스카 사람의 눈에 다 다르게 보일 텐데, 그게 다 표상이 다르기 때문이지. 세상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표상으로 파악한 세상 너머에 의지의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네. 모든 표상의 배후에는 의지가 존재하기 때문이지. 세상의 진정한 본질은 의지이며, 맹목적인 삶의 의지가 우리가 표상하는 세상을 지배하는 걸세.

여기서 맹목적인 삶의 의지라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살고 싶고, 번식하고 싶은 아주 본능적인 욕구’라네.사랑도 예외가 아니지. 낭만적이고 아름다워 보이는 사랑도 냉정하게 말하자면 종을 번식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실현된 것이라네. 동물들이 성적인 본능을 충족하기 위해 교미를 하듯이 인간도 자신의 후손을 세상에 퍼뜨리기 위해 서로에게 이끌리고 사랑을 나누는 것이야.

그렇다면 왜 우리는 특정 남자나 여자한테 끌리는 걸까? 종족 번식을 위한 본능 때문에 사랑을 하는 것이라면 동물처럼 아무 짝과 교미를 해도 될 텐데 말이지. 그것은 우리가 단순히 자손의 수만 많이 생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손의 질을 고려하기 때문이라네. 가장 건강하고 똑똑한 아이를 태어나게 하기 위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결점을 보완해 줄 사람을 찾게 되는 거지. 키가 작은 사람은 키가 큰 사람을, 납작코인 사람은 코가 오똑한 사람을 말이야. 신체적인 예만 들었지만 심리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자신의 성격적인 부분을 보완해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대부분 끌린다네. 그런데 막상 나에게 딱 맞는 짝을 만나 결혼을 하면 어떨 것 같은가? 아마 이 부분이 오늘 고민의 핵심인 것 같네만.

모든 욕구는 필요로부터 즉 결핍으로부터 생긴다. 그것이 충족되면 욕구는 사라진다. 그러나 충족된 욕구가 한가지라면 적어도 열 가지는 거부된 채로 남아 있다. 더구나 욕망은 오래 계속되고 욕구는 한이 없으며 충족은 잠깐이고 그나마도 부족하게 채워지기가 일쑤이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34장)

솔직하게 말하자면 사랑하는 사람을 못 찾아도 불행하지만 사랑이 결실을 맺어 결혼을 해도 불행한 건 마찬가지라네. 사랑은 종족을 번식하기 위한 수단이므로 목적이 완성되면 사랑은 식게 되는 거지. 사랑을 찾는 과정에서 종족 보존의 욕망을 드러내고 그것이 만족되지 않으면 짝을 못 찾고 고통스럽다가 결혼을 해서 그 욕망이 만족되면 실망감에 빠지게 되는 거라네. 욕망이 채워진 자리에 남는 것은 권태뿐이지. 그래서 결국 세상은 괴로움의 연속인 거라네.

그러면 자네는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냐고 물겠지. 음. 사실 나의 냉철한 의견으로 봤을 땐 고통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고 보지만. 나에게 상담까지 하며 괴로워하는 당신을 위해 조언을 하나 하자면.. 일단 다른 여인과 바람은 절대 피우지 말라는 거네. 간혹 어떤 사람들은 허망함과 권태로움을 벗어나기 위해 또 다른 종족 번식의 욕망을 발산하며 바람을 피지.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또 다른 권태일 뿐이라네. 고통과 권태를 줄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삶이 원래 그런 것임을 깨닫는 것이라네. (이 글을 읽고 있는 자네는 지금 내가 굉장히 무책임하고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겠군.) 하지만 사랑이 우리를 낙심하게 만들 때 사랑의 실체에 원래 행복이 없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크게 위안이 된다네.

예를 들어 당신이 만약 오아시스를 찾아 사막을 헤매고 있다고 생각해보겠나? 그런데 진실은 그 사막에는 오아시스가 없는 거지. 그런데 내가 “조금만 더 가다 보면 오아시스가 나올 거네” 라고 하는 것이 낫겠는가? 아니면 “ 이곳에는 오아시스가 없네. 다른 방법을 찾아보게나” 라고 하는 것이 낫겠는가? 자네가 어떤 쪽을 선택하든 나는 후자 쪽 사람이라네. 나는 자네가 단순히 고통과 권태만 느끼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네.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고 나 혼자만 고통스러워하고 외로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훨씬 나으니까 말일세.

나의 방식으로 권태를 이기는 방법은 다른 종류의 희망을 가져보게나. 무의식적이긴 하지만 종족 보존의 본능만을 좇다 보니 그것이 충족되었을 때 허탈하고 지루하게 될 걸세. 그러니 부부끼리 열정적인 사랑이 아닌 다른 감정, 가령 공통의 취미나 인간관계를 공유하면 사랑은 실질적인 우정으로 바뀌게 되는 거지. 열정적인 사랑은 이미 충족이 되었으니 끝내고, 실질적인 우정으로 삶을 함께 한다면 자네의 권태감이 조금은 치료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우정이 또 싫증나면 어떻게 해야 되냐고? 그럼 또 다른 희망을 갖는 거지.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내가 아는 유일한 세상이었고, 자네에게 미리 알려주고 싶은 인생의 작은 힌트라네.

PS. 미래의 벗이여! 현실을 꿈꾸지 말게나. 현실은 단순히 살아가는 거라네.
프랑크푸르트에서
쇼펜하우어가
오늘의 철학자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 사진
1788년에 태어나 1806년까지 산 독일의 철학자이다. 부유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 자살한 아버지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지만 그의 어린 시절 기억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석가모니가 젊었을 적에 병든 사람이나 노인, 고통과 죽음을 목격하고 그랬던 것처럼 삶의 비참함에 사로잡혀 지냈다. ... 이 세상은 ... 악마의 작품인 것 같은데, 그 악마는 고통에 일그러진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기쁨을 느끼기 위해서 생명체들을 존재하도록 했다.”라는 말에서 보듯이 어린 시절부터 생긴 세상에 대한 혐오가 그를 염세주의 철학자로 이끈 듯하다. 서양 철학사에서는 그리 주요한 인물로 취급되지 않고 있으나 대중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철학자이다. 주저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인데, 이 책보다는 수필과 금언을 모은 『여록과 보유』(우리나라에서는 『쇼펜하우어의 인생론』이라고 번역됨)가 큰 인기를 끌었다. 우리나라에서는 20세기 초반 서양 철학을 수입할 때 ‘데칸쇼’(데카르트, 칸트, 쇼펜하우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다.
철학자의 한마디
"젊은 시절을 ... 방해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 행복이란 살아생전에 꼭 손에 넣어야 하는 것이라는 확고한 가정 아래에서 행복 사냥에 나서는 일이다. 여기서부터 희망은 늘 좌절하기만 하고 그로 인해서 불만이 생겨난다.
우리가 꿈꾸는 막연한 행복의 기만적인 이미지들이 변덕스러운 모습으로 우리들 앞을 맴돌고, 우리는 그 실체들을 헛되이 찾고 있다. ...

적절한 충고와 가르침으로, 젊은이들의 마음에서 이 세상이 그들에게 줄 것이 아주 많다는 그릇된 관념을 털어낼 수 있다면, 그들은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이다."
(『부록과 보유』)
당시 철학자들이나 과학자들이 세계를 합리적으로 보고 세상은 점점 진보하고 인간은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그의 주저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세상은 결코 합리적이지 않고 비합리적이고 맹목적인 의지에 의해 움직인다고 주장했다. 동물이 살려고 하는 충동과 욕망이 바로 이 의지이며, 동물뿐 아니라 식물이 자라려고 하는 것이나 심지어 물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자연 현상도 이 의지로 설명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 충동과 욕망이 언제나 실현되는 것은 아니므로 세상은 언제나 고통을 받는다. 인간은 이 충동과 욕망을 억제해야만 삶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위 인용문에서 보듯이 세상에 대한 기대를 줄이면 그나마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철든생각, 의지와 표상, 눈보라가 치는 산속 오두막에서 조난 당한 두 사람이 있다. 그때 창 밖으로 그림자가 보이는데 한 사람은 그 모습을 보고 포악한 곰을 생각하고 다른 한 사람은 구조대원을 생각한다. 과연 그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을까? 당신이 보고 싶은 것. 믿고 싶은 것. '진실'은 그 너머에 있다.
최훈(강원대학교 교수)
구성
이은지(작가)
그림
박동현(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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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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