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의 여로

신경림의 목계장터

시의 고향을 찾아서 - 신경림의 「목계장터」
고향마을 앞 전경
우리들 생의 영원한 어머니이신 고향은 자신이 배태한 것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 나아가 삶의 원리와 지혜를 안겨준다. 마을의 지킴이 당산나무처럼 붙박이로 남아있는 사람이든 피치 못할 사연으로 야반도주한 사람이든 혹은 야망의 실현을 위해 남다른 각오와 결의를 가슴에 품고 떠난 사람이든 고향은 파란만장과 우여곡절로 점철된, 요람 이후 요철 심한 긴 여로의 뚜렷한 지표이자 기준이며 열쇠가 되어 방향과 균형을 잡아준다. 그러므로 너무 멀리 걸어왔다는 자책이 불쑥 고개를 내밀 때마다 우리는 부지불식간 생의 출발지이자, 삶의 원천인 고향을 떠올려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지상에 태어나 족적을 남기고 가는 것들에게는 모두가 예외 없이 원천회귀의 향수가 있다. 신경림 시인의 지금까지의 시세계를 거칠게나마 요약한다면 고향을 구심점으로 삼아 그곳으로부터 발원하여 원심력으로 경향각처를 떠돌다가 다시 회귀하는 원의 순환을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고향은 생의 첫 질문이 시작되는 곳이고 거듭되는 생의 의문에 대한 답을 내려주는 곳이다. 그러나 그 때의 답은 논리나 합리 등의 산술적인 의미보다는 암시와 우회 등의 비유의 표정으로 오는 경우가 더 많다.

사람의 한 살이와 마찬가지로 시인이 지은 詩에도 태어나 자란 고향이 있다. 그토록 게으른데다가 인색하기까지 했던 가을이 모처럼 공활과 청명을 베푼 시월 첫주 토요일, 삶아 헹군 광목처럼 눈부신 볕을 벗 삼아 우리 시대 가장 뛰어난 서정시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록될 신경림 시인의 고향을 찾았다.
시인 신경림은 1935년 4월 6일 충북 충주군(지금의 충주) 노은면 인하리 상입장 470 번지에서 4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전남 구례와 경남 거제에서 충주군 노은면 보련골로 이주해서 터 잡고 집성촌을 이루며 산 지 무려 이백여 년 만에 그가 태어난 것이다. 당시 전남 구례에서 터를 옮겨온 아주 신씨들은 대부분 직계들로서 연하리 보련골에, 일부 방계가 연하리 상입장(장터 윗동네)에 무리 지어 살게 되었는데, 그의 가계는 아주 신씨들 가운데 직계 아닌 방계로서 연하리 상입장에 자리 잡은 십여 호 가운데 하나였다.
생가의 모습
△ 생가의 모습
그의 가계의 승계는 일반 가계의 승계와는 좀 다른 특이한 면이 있었다. 조부가 증조부에게 양자로, 증조부가 고조부에게 양자로, 고조부께서는 구례 지방에서 양자로 들어와 가계를 승계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그의 가계는 양자에서 양자로 대를 이어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던 것이 그의 할아버지 대부터 순수 혈통만으로 대를 잇게 되었다. 그러므로 시인 신경림은 그 순수 혈통의 3대째를 잇는다고 볼 수 있다.
목계나루터 앞에 세워진 신경림 시비
△ 목계나루터 앞에 세워진 신경림 시비
다소 지루하게 이 짧은 지면에 그의 가계사를 적은 데는 이유가 없지 않다. 그의 초기와 중기 시편들에 나타나는 떠돌이 정서는, 위에 적시한 바와 같이 정착보다는 유목에 더 가까운 가계사에서 기인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문학예술 종사자들에게는 자신만의 고유한 문체가 있다. 문체는 단순한 장식적 수사가 아니다. 동일한 대상에 대한 인식 차이가 문체의 차이를 가져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체는 그 사람의 생과 삶의 총체라고 말할 수 있다. 문체의 차이를 결정짓는 요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유전적 형질, 지역, 계급, 성별, 세대, 경험 등의 다양한 요소가 음양으로 작동한 결과 대상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가져오고, 그 차이가 결국 그 시인의 고유한 개성적 문체를 결정짓는 것이다. 따라서 문체는 그의 세계관 가치관의 반영이랄 수 있다.
시인 신경림의 시적 문체는 그의 특이한 가계사와 그가 태어나 자란 마을과 동국대 영문과 수학과 청장년기의 오랜 방황과 서울에서의 생활 등속이 만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신경림, 「목계장터」 전문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새우 끓어넘는 토방 뒷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시인 신경림은 어떤 사람인가. 어찌 한 사람의 성향과 기질을 말과 글로 형용할 수 있겠는가. 수십 년 지근거리에 지켜본 경험으로 다만 어림해볼 뿐이다. 그는 일체의 허울과 관행, 허식 따위를 생래적으로 기피한다. 그의 체질 속에는 개화의 강렬한 피가 흐르고 있다. 이것은 그가 조상으로부터 유전적 형질로 이어받은 것이다. 그의 조부는 일찍이 일제시대부터 양력설을 주장했고 신문학의 필요성을 깨달아 자손들의 배움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 영향 때문인지 그는 유교적 허례허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일테면 그는 관혼상제 같은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는 천성적으로 방랑벽이 깊은 허무주의자이다. 그 무엇에도 얽매이기를 꺼리는 유목민의 저 오랜 습성인 유랑의 피를 지닌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가 부평초마냥 시간의 바람에 몸을 맡기는 떠돌이 기질만을 현실의 삶으로 살아내느냐 하면 꼭이 그렇지만은 않다. 그는 방랑에 대한 열망 못지않게 정착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인의 출생지임을 알리는 안내판
△ 시인의 출생지임을 알리는 안내판
그가 태어나 자란 곳은 정착만을 의미하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과는 다르다. 그가 태어나 자란 마을은 농사일이 주가 되는 농촌이 아니라 때로 농사는 뒷전이거나 부업이 되고 뒷산의 광산 일이 주업이 되는 조금은 이질적인 색다른 풍속이 자리한 그런 농촌 마을이었던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당시의 광산에는 경향 각처의 별별 사람이 다 모여들었다. 그의 고향마을은 일제 징용에 끌려갔다 돌아온 사람들의 느려터진 방언과 평안도 함경도에서 온 억센 사투리들이 엇섞여 북새통을 이루었다. 시끌벅적 장터가 들어서고 색싯집이 생겨나고 풍문이 들려오고, 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느새 든 사람이 그 빈 곳을 채우는 활기 넘치는 마을의 유다른 풍속이 감수성 예민한 소년 신경림에게 미친 영향은 실로 적지 않았으리라.

이렇듯 소년 신경림은 정착과 유랑의 접경이자 교착점이랄 수 있는 고향 마을의 특유한 생태 환경 속에서 자랐다. 훗날 시와 생활에서 보이는 그의 양면적 기질(정착과 유랑, 부드러움과 강함)은 그가 태어난 자란 마을의 풍속에 힘입은 바 크리라.
강변횟집 주인 사진
△ 강변횟집 주인
목계나루터의 현재 모습 사진
△ 목계나루터의 현재 모습
십년 만에 다시 찾아간(필자는 1990년대 중반 케이블 TV에서 '시인의 고향 방문'이라는 코너의 출연자로서 그의 고향을 처음 방문한 적이 있었다) 시인 신경림의 고향이자, 시 「목계장터」의 영감의 원천인 ‘목계나루’는 옛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강안에 처박힌 남루한 조각배 하나만이 그곳이 나루터였음을 가까스로 존재 증명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강변에는 시인의 시비가 세워져 있었다. 강변도로에 위치한 ‘강변횟집’ 여주인(그녀는 그곳에서 20년째 살고 있었는데 시인의 시 「목계장터」를 너무 좋아해서 군에서 목계나루에 시비를 세우기 전에 손수 자비를 들여 시비를 세웠다 한다. 또한 그녀는 그녀의 장성한 자녀들이 결혼할 때마다 시인의 시 구절 중 “산서리 맵차거든 풀속에 얼굴 묻고 /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두 시행을 필사하여 손에 쥐어주었다며 수줍게 웃고 있었다)의 말에 따르면 70년대 물난리가 한바탕 마을을 휩쓸고 지나간 후 번잡과 활기로 흥성거리던 장터가 이웃마을로 이주해가고 난 뒤 제방을 쌓아 정비한 것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고 한다. 미상불 강변은 아이들의 상고머리처럼 깔끔하게 정돈되어 전경이 시원하게 한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강물의 흐름이란 흥청거리는 장단완급의 가락을 지으며 흐르는 것이 격에 어울리는 일인데 그 품새를 잃고 혹은 버리고 반듯하게 일정한 보폭으로 걸어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자니 바람 든 무처럼 가슴 한 구석 괜스레 서늘한 바람이 휑하게 지나가는 느낌을 어쩔 수 없었다.

시인이 유년을 보냈던 생가는 아직 무너지지 않고 옛 모습을 힘에 부친 듯 어렵사리 지켜내고는 있으나 너무 함부로 방치되고 있었다. 시인의 빼어난 시를 낳은 산실이 저토록 무관심 속에 홀대와 냉대를 받고 있어야 하는가? 모처럼의 청명한 가을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까닭 없이 울분과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생가 앞길에서 고개를 외로 틀어 바라보니 지금은 채석장으로 바뀌어 버린 그 옛날의 광산자리로 뿌연 연기를 일으키며 육중한 트럭이 소란스레 드나들고 있었다. 너무 많은 재부를 지닌 탓으로 여직 사람의 욕망을 앓고 있는 그 산에 대해 불현 연민과 동정이 일었다.

분필 가루가 되어 분분히 떨어지는 가을 오후 햇살 속 길 끝 대추나무의 붉은 열매들 사이로 책보를 어깨로 둘러맨 어린 신경림이 자꾸 손을 까불며 나를 부르는 환각과 환청에 잠시 몸과 마음이 어지러웠다.
이재무(작가)
시집『섣달그믐』, 『온다던 사람 오지 않고』, 『벌초』, 『몸에 피는 꽃』, 『위대한 식사』, 『시간의 그물』,『푸른 고집』, 『저녁 6시』,『경쾌한 유랑』
시평집『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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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01-24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