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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동화

머나먼 현재에서 날아온 두루마리 편지

머나먼 현재에서 날아온 두루마리 편지
그 곳은 처음부터 동굴이었습니다. 인근에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고 집과 마을이 생겨나기 전부터 동굴은 그곳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해가 뜨고 바람이 불어 씨앗을 사방으로 흩날려 나무가 되어갔습니다. 침묵과 고독을 견딘 바위들이 산의 기둥이 되고 나무가 숲이 되어 동굴을 감싸 안았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그곳에 동굴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지요.
산새가 알을 품듯 산과 숲이 품어 오랜 시간 부화의 시간을 기다리던 동굴은 입구에서부터 단단한 고독의 알맹이가 되었습니다. 어둠이 동굴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 어둠의 틈새를 뚫고 한 무리의 학생들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말이지요.
“여기 좀 봐.”
앳된 얼굴의 소녀가 소리쳤습니다. 그 소리에 동굴에 고여 있던 어둠이 낮게 흔들렸습니다. 동굴 벽에 붙어 있던 박쥐들이 날아올랐습니다. 어둠 속에서 날아오른 성난 눈빛에 쫓겨 일행은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달려갔습니다.
“아무 것도 안 보여!”
“으악~ 뒤에서 뭐가 쫓아와!”
햇빛과 보호 속에서 자란 아이들은 어둠에 갇혀 울부짖었습니다. 다만 어둠 속으로 한 걸음, 첫 발을 내딛으며 동굴을 매만졌던 소녀만이 침묵했습니다. 소녀는 침묵 속에서 동굴의 벽을 매만졌습니다. 손가락 끝으로 애무하듯 동굴 벽을 매만지던 소녀가 마침내 허공에 팔을 뻗었습니다. 소녀의 손이 속삭이듯 옆에 서 있던 소년의 팔을 위에서부터 쓸어내렸습니다.
“소리치지 마. 여기 뭔가 있어.”
소녀의 말에 아이들은 일순 숨죽였습니다. 누군가 바지주머니 속에 찔러둔 핸드폰을 꺼냈습니다. 핸드폰의 액정 화면이 동굴 벽을 비추었습니다.
그것은 발자국 같기도 하고, 고대의 문자 같기도 했습니다.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본 적 없는 흔적들이 액정화면의 빛을 받아 푸르스름하게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소녀는 동굴 벽에 깊이 파여 있는 흔적들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유심히 들여다보았습니다. 마치 암호를 해독하기라도 하는 듯이 말이지요.
“이 빨간 자국들은 다 뭐야?”
“핏자국 아닐까?”
“여기 살던 원시인들이 살려고 서로 싸우다 죽으면서 피가 튄 거 아냐?”
“그럼 이 움푹 파인 자리들은?”
모든 것이 어둠에 가려져 있을 때보다 어설픈 빛 속에서 공포는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희미한 빛 속에서 어슴푸레 드러나는 동굴의 형상은 괴기스러웠고, 아이들은 서둘러 앞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아이들은 핸드폰의 액정화면에서 푸르스름하게 새어나오는 빛에 모든 것을 의지하면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단 한 사람, 소녀만이 동굴 벽에 움푹 패여 있는, 발자국 같기도 하고 손톱으로 긁은 자국 같기도 한 어떤 흔적들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앞으로 나아갔지요.
처음엔 열 개였던 빛이 아홉에서 여덟로 둘로 하나로 줄어들다 마침내 마지막 남은 핸드폰마저 꺼져버렸습니다. 어둠에 갇힌 것은 아이들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아이들의 시간도, 우정도, 인내심도 멈춰버린 시간과 함께 사라져 버렸습니다.
“왜 자꾸 내 발만 밟는 거야?”
“밀치지 말라고 했잖아!”
“다 너 때문이야!”
“무슨 소리야? 네가 먼저 가보자고 했잖아!”
아이들은 서로 밀치고 때렸습니다. 누군가의 머리가 동굴 벽에 부딪쳤습니다. 누군가는 주저앉아 아빠, 엄마를 소리쳐 부르며 주먹으로 동굴 벽을 내리쳤습니다. 누군가는 어둠을 저주하며 동굴 벽을 발로 걷어찼습니다. 그러나 동굴은 여전히 침묵했습니다. 아이들의 공포와 어두운 마음들을 그대로 흡수하며 침묵했습니다.
“내가 앞장설게.”
소녀가 어둠을 응시하며 말했습니다. 이제 누구도 앞서 걷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지요. 앞서 걷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거나 움푹 파인 웅덩이에 빠져 다치는 일이 수없이 반복되었기 때문이지요. 누구랄 것 없이 어둠 속에 웅크린 채 눈치만 보고 있었으니까요.
소녀가 앞을 응시하며 어둠 속에 팔 하나를 내밀었습니다. 아이들은 서로 질세라 먼저 소녀의 손을 잡으려 했고, 다시 한 바탕 소란이 일었습니다. 앞장 서 걷기가 무서운 것만큼이나 맨 뒤에 쳐지는 것 또한 무서웠으니까요.
“내 팔은 하나 뿐이야.”
소녀의 음성은 나직했지만 힘이 있었습니다. 침묵을 뚫고 한 소년이 어둠을 더듬어 행렬의 맨 뒤로 가서 섰습니다.
“뒤는 내가 맡을게.”
소녀는 자주 발을 헛디뎠습니다. 그 때마다 뒤에 서 있던 아이들의 발걸음도 흔들렸습니다. 그 때마다 아이들은 동굴 벽을 짚으며 몸을 지탱하려 애썼습니다. 소녀는 자주 넘어졌습니다. 그 때마다 아이들도 함께 넘어졌습니다. 그때마다 아이들은 두 팔을 내밀어 앞서 걷는 아이를 먼저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 때마다 땅바닥에 닿아 있는 아이들의 무릎엔 평소보다 더 많은 힘이 들어갔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요?
손 하나는 뒤따라오는 아이에게 내민 채, 나머지 한 손으로는 동굴 벽에 생채기처럼 아로새겨져 있는 흔적들을 매만지며 걷다 소녀는 우뚝 멈춰 섰습니다. 동굴 입구에서 계속 이어져 있던 흔적들이 더 이상은 만져지지 않았습니다.
소녀는 두리번거렸습니다. 그렇게 하면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낼 수 있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지요. 뒤따라오던 아이들 모두 멈춰서야 했습니다.
“무슨 일이야?”
“뭐가 나왔어?”
아이들은 다시 혼란에 빠졌고, 아이들의 웅성거림은 어둠 속에 웅크려 있던 벌레들과 박쥐들을 성나게 했습니다. 침묵 속에서만 살아온 박쥐들은 낯선 소리가 들리자 사방으로 날아다니며 아이들의 몸에 상처를 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서로가 꼭 붙잡은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둥글게 서로를 감싸 안아 자신의 몸과 팔에 상처를 냈습니다. 내가 아닌 친구를 보호하기 위해서.
다시 소녀가 일어섰을 때, 아이들은 누구랄 것 없이 함께 일어났습니다.
“길은 없어. 아무래도 저 위쪽으로 올라가야 하나봐.”
소녀는 막다른 곳에 서 있었고, 이제 남은 길은 단 하나, 천정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향해 위로 올라가는 것뿐이었습니다.
“나를 밟고 올라가.”
소녀가 이마의 땀방울을 손등으로 훔쳐 닦으며 물었습니다. 아직 소년이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모두의 발판이 되어준 소년은 정작 딛고 올라갈 발판이 없었으니까요. 아이들은 다시 손을 맞잡았습니다.
손을 놓으면 그 순간, 모두 곤두박질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서로 손을 맞잡아 소년을 위한 밧줄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소년이 위로 올라왔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지쳐 쓰러졌습니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습니다.
옷은 이미 땀에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떨어져 동굴 바닥을 적셨습니다.
똑똑, 빗장을 꽉 채운 문을 노크하듯이 자신의 내부를 두드리는 그 부드러운 속삭임에 동굴은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자신의 내부에 새겨져 있는 흔적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아이들의 팔다리에서 튀긴 핏자국과 바닥을 움푹 들어가게 만들 정도의 간절함의 흔적들을 말이지요.
동굴은 서서히 기지개를 켰습니다. 순간, 악다물고 있던 동굴의 문이 열렸습니다. 희미하게 그러나 더없이 강렬하게 빛이 새어들어 왔습니다. 아이들은 서둘러 빛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아이들 모두 동굴 밖으로 나와 기쁨에 겨워 소리치고 울었습니다.
빛 속에서 얼싸안고 기뻐하느라 아이들 대부분은 보지 못했습니다. 빛에 드러난 동굴 바닥과 동굴 벽에 아로새겨져 있는 흔적들이 과연 무엇이었는지를 말이지요. 틈새라 부를 수도 없을 만큼 작아져버린 동굴의 입구가 닫히기 전, 다만 소녀와 소년만이 똑똑히 보았습니다. 발자국 같기도 하고, 고대의 문자 같기도 하고, 핏자국 같기도 하고, 굶어죽거나 서로 싸우다 죽으면서 손톱으로 마구 후벼 판 자국 같기도 했던 흔적들, 그 흔적들이야말로 실은 빛을 찾기 위해 나아가던 모든 이들의 간절함의 무늬였다는 것을요. 산이 알처럼 품고 있는 이 동굴이야말로 공포와 두려움과 어둠 속에서도 절대로 꺾이지 않는 생(生)의 의지를 고스란히 기록해놓은 두루마리 편지, 그 자체였다는 사실을요.
이명랑_소설가, 동화작가, 문학하다 대표. 1973년생 동화 『재판을 신청합니다』 『나는 개구리의 형님』 『할머니의 정원』청소년소설 『구라짱』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춘기라서 그래?』소설 『꽃을 던지고 싶다』 『삼오식당』 『나의 이복형제들』 『천사의 세레나데』 『입술』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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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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