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희야, 복들아. 보고 싶어. 나는 아직도 너희랑 헤어진 게 믿기지가 않아. 새집에 가면 왠지 너희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는데.
“여기가 네 방이야. 눈 감아 봐. 깜짝 놀랄걸!”
엄마가 그렇게 말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정말로 너희가 미리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어.
“자아, 두근두근, 짜잔!”
방문을 여는 소리에 나는 천천히 눈을 떴지. 그런데 거기에 너희는 없었어. 괜히 속상하고 화가 나지 뭐야.
“왜? 마음에 안 들어?”
엄마가 내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물었어. 나는 억지로 웃어 보이고 마음에 든다고 대답했지.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어. 방은 마음에 들었어. 밝은 초록색으로 꾸며진 방이었거든. 그건 내가 좋아하는 색이잖아. 아니, 우리가 좋아하는 색이지. 우리가 늘 뛰어놀던 잔디밭과 같은 색 말이야.
그런데 내 방은 그냥 색깔만 초록색일 뿐이야. 풀꽃도 없고 잔디도 없고 작은 곤충들도 없고 너희도 없고……. 그냥 초록색만 있는 네모난 방이었지. 괜히 심통이 나서, 나는 방을 휙 나가 버렸어.
“나 밖에 구경 갔다 올래.”
“아직 길도 모르잖아, 어딜 간다고?”
“놀이터.”
나는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대답하고 집을 나왔어. 등 뒤에서 엄마가 이렇게 말했어.
“여기 놀이터 정말 멋지더라! 가서 친구들 사귀고 와.”
놀이터? 응, 멋지긴 하더라. 시소, 그네, 미끄럼틀, 철봉, 정글짐, 뭐 없는 게 없더라고. 아이들은 거기서 꽤 즐겁게 놀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아이들이랑 놀고 싶은 기분이 아니어서 놀이터를 그냥 지나쳤어. 아파트를 나가자 내가 다닐 학교 이름이 적힌 표지판이 보였어. 나는 표지판을 따라 걸음을 옮겼지. 학교에 넓은 풀밭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학교는 아파트에서 그리 멀지 않았어. 학교 운동장에서도 아이들이 놀고 있었어. 넓은 풀밭이 아닌 넓은 모래 운동장에서. 전에 살던 곳에서는 어딜 봐도 온통 초록색이었는데, 여기서는 초록색 보기가 어려운 거 있지. 이곳을 좋아할 수 있을까? 나는 발걸음을 돌렸어. 딱딱한 아스팔트 길을 터덜터덜 걷고 있는데 문득 내 눈에 초록색이 들어오지 뭐야. ‘뭐든지 스티커’라고 적힌 초록색 간판이었어. 유리로 된 가게 문이 살짝 열려 있기에 나는 안으로 들어갔지.
가게 안은 조금 어두컴컴했어. 아무도 없나, 하고 둘러보는데 계산대 뒤에 한 아이가 앉아 있더라고. 내 또래로 보이는 여자아이였어.
“안녕.”
나는 조용히 인사하고 가게 안을 구경했어. ‘뭐든지 스티커’라는 이름답게 스티커 종류가 정말 많은 거 있지. 집, 비행기, 자동차, 외계인, 공룡, 나무, 공주, 음식 스티커까지. 내 키만큼 큰 스티커도 있고 손톱만큼 작은 스티커도 있었어. 홀로그램 스티커, 야광 스티커, 반짝이 스티커를 보고 있으니 눈이 어질어질할 정도였지.
“네가 찾는 건 거기에 없을걸.”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보니, 어느새 여자아이가 내 뒤에 서 있는 거야.
“내, 내가 찾는 거?”
“응. 넌, 그러니까, 좀 더 멋지고 즐거운 걸 찾고 있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어.
여자아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앞에 스케치북만 한 스티커 봉투를 내놓는 거야.
마치 아이가 마술이라도 부린 것처럼 봉투는 갑자기 나타났어.
나는 봉투를 건네받았어.
“아프리카?”
봉투 윗부분에 ‘아프리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어.
“그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거야.”
아이가 약간 으스대듯이 말했어. 세상에 하나밖에 없다면 가격이 비쌀 텐데. 걱정하면서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니 겨우 동전 서너 개만 만져졌어.
“이거 얼마야?”
내 질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이가 대답했어.
“99만 9천 원.”
“에엑! 너무 비싸! 나 그렇게 많이 없는데…….”
나는 화들짝 놀라서 봉투를 아이에게 다시 내밀었어. 그러자 아이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이렇게 말하는 거야.
“그럼 300원만 줘.”
“정말? 그래도 돼?”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어.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보니까 100원짜리 동전이 딱 세 개 있더라고. 나는 300원을 아이에게 건넸어. 아이는 동전을 확인해 보지도 않고 주머니에 넣는 거 있지.
“고마워. 얼른 집에 가서 붙여야겠다. 그럼, 잘 있어.”
내가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서는데 아이가 뒤에서 속삭이듯 말하는 게 들렸어.
“재밌게 놀아.”
응? ‘잘 가’가 아니라 ‘재밌게 놀아.’라고? 뒤를 돌아보니 아이는 어느새 계산대 뒤에 앉아 있는 거야. 그때까지 계속 무표정한 얼굴이더니, 웬일로 활짝 웃으면서 사진 찍는 것처럼 손가락으로 V 표시까지 만들고서 말이야. 나는 아이를 따라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이고 가게를 나왔어.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내 방으로 뛰어 들어갔지. 그리고 스티커 봉투를 열고 스티커를 꺼냈어. 거기에는 아프리카 동물들이 들어 있었어. 기린, 코끼리, 표범, 타조, 작은 새들, 그리고 커다란 아카시아 나무까지. 나는 침대 옆 벽에 스티커를 붙이기로 했어. 잠잘 때마다 아프리카 동물들과 만나는 꿈을 꿀 수 있게 말이야.
중간쯤에 아카시아 나무를 붙였어. 그리고 오른쪽에 나뭇잎을 뜯어 먹으려는 기린을 붙였지. 코끼리는 기린이랑 놀고 싶어 할 것 같으니까 기린 뒤에 붙여야지. 나무 위에는 작은 새 열 마리가 날고 있고, 하늘에는 하얀 구름이 둥실둥실 떠다녀. 나무 왼쪽에는 타조가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고, 표범은 나무를 잘 타니까 나무 위에서 쉬면 되겠다! 마지막으로 이곳의 이름, ‘AFRICA’ 글자 스티커까지 붙이고 나니까 진짜 아프리카가 내 방에 들어온 것만 같았어.
그런데 그날 밤, 잠을 자는데 말이야, 어디선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거야. 소리는 꼭 내 옆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어. 아니, 정말로 내 옆에서 들려오고 있었어. 눈을 뜬 나는 깜짝 놀랐어. 내 옆에 표범이랑 기린이랑 코끼리랑 타조가 있는 거야! 침대 한쪽에서 몸을 최대한 웅크린 채로 말이야.
“너희, 거기서 뭐 해?”
“일어났네. 계속 안 일어나서 우리끼리 가려던 중이었어.”
코끼리가 말했어.
“가다니? 어딜?”
“아프리카! 너도 같이 갈 거지?”
기린이 물었어.
“응! 나도 갈래!”
“그럼 내 등에 타, 친구!”
이번에는 표범이 말했어. 나는 벌떡 일어나서 표범 등에 올라탔지.
“자, 아프리카로 출발!”
갑자기 표범이 침대 옆 벽을 향해 돌진하는 게 아니겠어?
“꺄악!”
나는 깜짝 놀라 소리치며 눈을 질끈 감았어. 그런데 조금 있으니까 내가 바람 사이를 달리고 있는 느낌이 드는 거야. 나는 조심스레 눈을 떴어.
“우와!”
믿어지니? 내 눈앞에 넓은 아프리카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는 게? 표범은 나를 등에 업고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 아래를 쏜살같이 달렸어. 뒤에서 두다다다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타조가, 그리고 그 뒤에는 기린이랑 코끼리까지 달려오고 있었어. 하늘에는 하얀 구름이 둥실 떠 있고, 새들이 멋진 곡예를 부리며 날고 있었지. 우리 앞에는 커다란 아카시아 나무도 보였어.
표범은 나무 아래에서 멈추었어.
“아프리카 태양은 뜨겁지. 그늘에서 좀 쉬자고, 친구.”
표범은 나를 그늘에 내려놓고는 잽싸게 나무 위로 올라갔어. 역시 표범은 나무를 잘 탄다니까. 어느새 표범은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숨어 버렸어.
“휴우, 오랜만에 달렸더니 배가 조금 고프네. 조금만 먹어야지.”
기린이 고개를 쭉 뻗어 나뭇잎을 뜯어 먹었어. 말로는 조금만 먹겠다더니 글쎄, 나무를 통째로 먹을 듯이 우걱우걱 나뭇잎을 뜯어 대는 거 있지.
“정말 멋지다! 나 또 달리고 싶어!”
나는 나무를 올려다보며 말했어. 표범이 내려와서 또 태워 주길 바라고 한 말이었는데 표범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 거야. 대신 타조가 등을 내밀면서 말했어.
“내가 태워 줄게.”
나는 얼른 타조 위에 올라탔어. 그런데 타조는 빨리 달리지 않고 천천히 걸으면서 나무를 한 바퀴 돌았어.
“달리면 안 돼? 너 다리 아파서 그래?”
내가 묻자 타조는 커다란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대답했어.
“아니, 그런 게 아니야. 나는 그냥 네가 걱정돼서 그래.
내가 빨리 달리다가 네가 떨어져서 다치기라도 하면,
어머, 어떡해, 정말 큰일이잖아. 그러면 난 정말 슬플 거야.”
그래서 나는 타조에게 빨리 달리라고 조르지 않았어. 다시 나무를 한 바퀴 더 돌고 나서, 타조가 힘들까 봐 땅으로 내려왔지. 그때까지 계속 나뭇잎을 뜯던 기린이 갑자기 “끼에엑!” 소리를 지르지 뭐야. 깜짝 놀라서 바라보니 기린이 목을 휘청휘청하면서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어.
“하하하, 넌 참 잘 놀라는군, 친구.”
표범이 나뭇잎 사이로 얼굴을 내밀면서 그르릉 웃어 대고 있었어. 우리도 다 배를 잡고 웃었어. 기린만 빼고 말이야.
“어휴우우, 정말 놀랐단 말이지!”
“코호홍, 저 녀석 정말 놀랐나 봐. 움츠리느라 목이 쏙 들어갔네!”
기린 뒤에 서 있던 코끼리가 코를 위로 쭉 뻗으면서 기린을 놀렸어.
한참을 그렇게 웃고 있으니 너희가 생각났어. 우리 복들이도 참 겁이 많은데. 조그만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서 나를 참 많이 웃게 했잖아.
“너 괜찮아? 아주 슬퍼 보이네.”
코끼리가 내 곁으로 다가와 물었어. 다른 동물 친구들도 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지.
“으응, 사실은 말이야.”
나는 동물 친구들에게 너희 이야기를 들려주었어. 어릴 때부터 늘 내 짝꿍이었던 너희 이야기를 말이야. 시골에서 큰 도시로 이사 오면서 너희를 데려올 수 없었던 슬픈 이야기.
“옆집 아주머니 아저씨가 복희랑 복들이를 키워 주시기로 했어.
원래 그분들이 애들 주인이었으니까 잘 돌봐 주실 거야.”
너희가 보고 싶어서 또 눈물이 날 것만 같았어. 다정한 동물 친구들이 나를 위로해 주지 않았다면 정말 펑펑 울어 버렸을지도 몰라.
“복희랑 복들이도 데려와서 같이 놀면 되지, 친구!”
“그래, 네 친구는 우리 친구이기도 하니까 말이지.”
“하지만 어떻게 데려올지 방법을 모르겠네.”
“복희랑 복들이를 못 보면 나도 슬플 거야.”
나는 동물 친구들이 걱정하는 게 미안해서 일부러 씩씩하게 말했어.
“내일 스티커 가게에 다시 가 봐야겠어! 그 아이라면 방법을 알지도 몰라!”
우리는 다시 기운을 차리고 아프리카를 신나게 뛰어다녔어. 스티커 가게에서 그 아이가 나에게 “재밌게 놀아”라고 말했던 게 이제 이해가 되는 거 있지.
다음 날, 나는 ‘뭐든지 스티커’에 들렀어. 가게 출입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가게 안은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어. 그리고 그 아이 대신 한 아저씨가 계산대 앞에 서 있는 게 보였어.
“아저씨, 걔는 어딨어요?”
“응? 걔가 누군데?”
그러고 보니 그 아이 이름도 모르는 거 있지. 이름이라도 물어볼걸,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지 뭐야.
“어제 가게 보던 여자애요.”
그러자 아저씨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거야.
“어제? 어제는 우리 가게 문 안 열었는데?”
“네? 제가 어제 여기서 아프리카 스티커 사 갔는데요?”
“아프리카 스티커? 글쎄, 그런 스티커는 처음 들어 보는데?”
아저씨는 슬슬 귀찮다는 듯이 말하더니, 다른 손님들이 들어오자 그쪽으로 휙 가 버렸어.
나는 아쉬운 마음에 가게를 나서다 말고 문득 뒤를 돌아보았어. 그 아이가 어느새 나타나 계산대 뒤에 앉아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야. 계산대 뒤는 텅 비어 있었어. 하지만 내 눈에는 마치 그 아이가 거기 있는 것처럼 보였어. 어제처럼 활짝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V 표시를 만들고 있는 그 모습 말이야. 그제야 나는 또 이해가 됐어. 그 아이가 그런 동작을 했던 이유를 말이야. 그 아이는 어제 이미 나에게 너희를 만날 방법을 알려 준 거야. 응? 그게 뭐냐고? 히히. 조금만 기다려 봐. 나는 지금 표범처럼 빨리 집으로 달려가는 중이니까. 얼른 집에 가서 너희 사진을 아프리카 친구들 옆에 붙일 거야. 그럼 너희도 아프리카로 올 수 있겠지? 복희야, 복들아! 조금만 기다려. 우리 오늘 밤에 아프리카에서 만나!
- 글
- 김지은
- 본 콘텐츠는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받는 저작물입니다.
- 본 콘텐츠는 사전 동의 없이 상업적 무단복제와 수정, 캡처 후 배포 도용을 절대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