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동화

밤에 듣는 밤 이야기

밤에 듣는 밤 이야기
밤이 깊었다.
밤이다.
밤.
밤. 밤. 밤.
고소하고 담백하고, 은근히 달콤한데 고요한 밤.

아이는 눈을 반짝 떴다. 엄마, 아빠는 이미 깊이 잠들어 있었다.
째깍째깍.
초침 소리만 어둠 속에서 크게 울렸다.
아이는 조심스레 침대에서 일어났다. 뒤꿈치를 들고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어서 할머니 방문 앞에 섰다. 할머니 방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아이는 방문을 빼꼼 열고 안으로 몰래 들어갔다. 방의 한 쪽에서 할머니는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드르렁, 드르렁, 쿨쿨. 아이는 할머니의 이불을 살짝 들췄다. 이불에서는 늘 그렇듯 잠 냄새가 났다. 할머니의 배는 따뜻하고 물컹했다. 아이는 이불 속에 쏙 들어가서 환한 달처럼 둥근 할머니의 배에 몸을 찰싹 밀착했다. 그러자 둥글게 차올랐다가 홀쭉하게 이지러지는 달의 움직임을 따라 아이의 몸도 기우뚱거렸다.
밤에 듣는 밤 이야기 삽화1
할머니, 할머니 일어나.
할머니는 아이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 계속 쿨쿨 잠을 잤다.
할머니, 할머니, 일어나라고.
할머니의 숨소리는 거칠고, 요란하다. 아이는 분명히 할머니가 코를 고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할머니는 언제나 코를 골지 않는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어쩌면 할머니는 진짜로 코를 고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지금 할머니 코에서 나는 드르렁, 소리는 코고는 소리가 결코 아닌 것이다. 코를 골고 있지만 코를 골지 않는 할머니의 배를 아이는 간질였다.
할머니, 할머니.
아이는 좀 더 큰 소리로 할머니를 깨웠다. 아이의 커다란 목소리에 어둠이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떨었다. 어둠아, 미안. 어둠은 빛이 잠든 동안 세상을 지키고 있어야만 한다는 제 역할을 언제나 충실히 이행하는 성실하고, 겁 많은 친구였다. 그런 어둠을 놀라게 했으니, 아이는 어둠에게 살짝 미안했다. 그렇지만 미안한 마음도 잠시, 아이는 곧 이어 혹시 엄마, 아빠가 잠에서 깨지는 않을까 너무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잠을 자지 않고, 할머니 방에 와 있다는 것을 알면 엄마, 아빠가 아이를 야단칠 것은 틀림없었다. 엄마, 아빠는 언제나 정해진 시간에 잠을 자고,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아이에게 말했다. 그래야 몸도 건강하고, 학교에 가서 공부도 열심히 할 수 있고, 친구들도 많이 사귈 수 있다는 것이 엄마, 아빠의 논리였다. 엄마, 아빠는 정말 매일매일 정해진 시간에 잠을 자고 정해진 시간에 잠에서 깨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밤에 잠만 자는 것은 너무나도 아까운 일인 걸. 아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낮에는 결코 할 수 없고, 밤에만 할 수 있는 일들이 세상에는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어둠과 친구가 되는 일, 높은 건물들 위에 솟은 달을 관찰하는 일, 그리고 또……. 아이는 그것을 엄마, 아빠에게 설명하려고 했지만 엄마, 아빠는 아이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느 날은 용기를 내어 대화를 시도했지만 아이의 말을 한참동안 듣고 나서 아빠는 그저 “공부나 해라”라고 말했을 뿐이다. 아무튼 지금 이렇게 깨어 있다는 것을 엄마, 아빠에게 들키면 일이 귀찮아질 뿐이니까 들키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 아이는 생각했다. 아이는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조그만 목소리로, 그렇지만 그 대신 아까보다는 조금 더 세게 할머니를 잡아 흔들었다.
할머니!
할머니가 몸을 뒤척였다. 몸을 뒤척이자, 할머니의 뱃살이 또 한 번 파도처럼 출렁했다. 할머니의 몸에서 나는 따뜻한 냄새. 할머니가 잠결에 아이를 꼭 안았다.
할머니, 할머니.
할머니는 얼마나 깊이 잠든 걸까. 나는 꼭 할머니를 깨워야만 하는데. 밤마다 할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마저 들어야 하는데. 할머니의 두 팔에 안겨 할머니의 배에 코를 묻은 채 아이는 잠시 생각했다. 할머니를 깨울 방도에 대해서. 할머니는 어려서부터 아이에게 매일 밤마다 이야기를 해줬다. 할머니가 해주는 이야기들은 하나 같이 다 기상천외했다. 하늘을 나는 고양이와 거짓말을 하는 토끼, 은혜를 갚은 거북이 따위의 것들이 끝도 없이 등장하는 이야기들이었다. 어떤 이야기 속에서는 우애가 깊은 나무꾼 형제가 나무를 하다가, 여자로 변신한 두 마리의 구렁이를 만나 각자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도대체 왜 구렁이 따위와 사랑에 빠지는 거야? 하고 아이가 물으면 할머니는 그것도 모르냐는 말투로, 구렁이인 줄 몰랐으니까 그렇지, 하고 대답했다.
할머니, 할머니 일어나 봐.
아이는 할머니에게 안긴 채, 할머니의 배에 대고 말을 했다. 아이의 목소리 탓인지 할머니의 배가 웅, 웅, 울렸다. 할머니가 아이를 좀 더 꽉 껴안더니, 자자, 자자, 잠결처럼 중얼거렸다. 자자, 자자. 자장가처럼 낮고 단조로운 장단.
아냐, 아냐, 자지 말고 일어나.
아이는 가까스로 할머니의 품에서 벗어났다. 할머니가 또 다시 몸을 뒤척였다. 이제야 일어나려는 걸까? 그렇지만 할머니는 여전히 쿨쿨 잠을 자고 있었다. 아이는 할머니 옆에 가만히 누워 어떻게 해야 할머니가 일어날까 곰곰이 고민해 보기 시작했다. 아이가 조용히 있자 어둠도 따라 조용했다. 그들의 주변으로는 그저 시계의 초침만 또 다시 째깍거리기 시작했다. 째깍, 째깍, 째깍, 아니, 드르렁, 째깍, 드르렁, 째깍. 코를 안 고는 할머니의 코 고는 소리는 정말 요란하기도 하지. 아이가 어둠에게 속삭이자, 어둠이 킥,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어둠은 언제나 좋은 친구였다.
아침이 오는 것은 싫어. 아이는 생각했다. 아침이 오면 사람들은 누구나 분주하게 하루를 준비해야했다. 엄마, 아빠는 아침마다 서둘러 씻고, 옷을 갈아입고, 아침 식사를 먹었다. 빨리 씻고 옷 갈아입어라! 엄마의 커다란 목소리가 집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허둥지둥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오면 아이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학교 가는 길에 보는 수많은 차들. 바삐 걷는 더 많은 사람들. 엄마, 아빠는 아이에게도 그렇게 빨리 빨리, 걸어서, 자꾸만 자꾸만 걸어서, 어딘가를 향해 가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대체 어디로 가야하는데? 아이는 정말 알 수가 없었다.
할머니, 할머니.
아이는 다시 할머니의 몸을 흔들었다. 할머니의 쪼글쪼글한 얼굴이, 뿌리 쪽으로 하얗고 꼬불꼬불한 머리카락이, 커다란 귀가 흔들렸다.
대체 왜 깨지 않는 거야.
아이는 할머니 옆에 쪼그리고 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덜컥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 이대로 밤이 끝나면 어떻게 하지. 아침이 오고, 할머니가 영원히 깨지 않으면 어쩌지.
할머니, 할머니.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아이는 할머니를 다시 한 번 깨웠다. 너무나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그러자 드르렁 거리던 요란한 소리가 멎었다. 마법처럼 할머니의 눈꺼풀이 스르르 열렸다. 할머니가 커다란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만졌다. 왜 울고 있니. 할머니가 졸음 섞인 목소리로 아이에게 물었다.
할머니, 할머니, 밤 이야기 해줘.

밤 이야기?
응, 응. 밤에 밤이 나오는 이야기. 밤을 까고, 까고, 또 까면 그 안에서 갇혀 있던 캄캄한 밤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이야기. 그 캄캄한 밤에, 어느 밤나무에서 밤이 주렁주렁 열리는 이야기. 밤송이가 밤바람에 후두둑 떨어지면, 떨어진 밤송이가 터지면서, 새까만 밤이 터지듯 시작되는 이야기. 밤이 자꾸만 자꾸만 자라는데 그 밤이, 이 밤(栗)인지, 저 밤(夜)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야기.
할머니가 웃었다. 할머니가 아이를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그래, 이야기를 해주마. 이야기가 듣고 싶어 울었던 게냐, 내 새끼.
어둠이 아이와 할머니의 곁에 얌전히 앉아, 동이 트려면 아직 멀었으니 걱정 말라고 아이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이는 안심하고 할머니의 둥근 배에 얼굴을 묻었다.
달님처럼 크고 둥근 할머니의 배.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할머니의 배가 웅, 웅, 웅.
할머니는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 흠, 흠, 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깊고 깊은 밤이었다.
밤에 듣는 밤 이야기 삽화2
백수린_소설가. 1982년생 소설 『폴링 인 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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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01-19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