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보는 철학자

「밀회」 사랑,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착각!

드라마 보는 철/학/자 밀회 사랑,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착각!
어느 날 사랑이 내게로 온다면......
그야말로 특.급.칭찬!을 해주고 싶은 배우 유아인이 ‘오늘의 자신을 만든 캐릭터’라고 말한 이선재는 드라마 <밀회>의 주인공입니다. 실업계 고등학교를 나와 퀵서비스 일을 하던 이선재는 피아노를 ‘정식’으로 배우지 않고도 음대생보다 나은 실력을 갖춘 피아노 천재입니다. 이 드라마는 한때 피아니스트를 꿈꾸었지만 지금은 재단의 온갖 행정적인 일(?)을 도맡아 하는 오혜원 실장이 그의 천재성을 알아보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클래식 마피아, 음대 입시 괴담, 스폰서 권력 등의 스캔들을 드라마의 배경에 깔고, 고혹적 매력을 갖추었지만 주변인으로부터 연애불구자로 평가받는 마흔 살의 성공한 여성과 스펙 하나 없이 오직 젊음과 가능성만을 가진 스무살 피아노 천재와의 불륜 스캔들이 드라마 전면에 등장하는, 그래서 제목도 ‘밀회’인 드라마입니다.
그동안 <아내의 자격>, <밀회>, <풍문으로 들었소> 등 정성주 작가와 안판석 피디가 함께 만든 드라마가 세상에 던지는 여러 의미심장한 문제의식은 모두 걷어내고, 또 이 드라마에서 주요하게 등장하는 음악에 대한 내용도 다 들어내고 이번 글에서 제가 다루고 싶은 주제는 ‘마흔 살의 사랑’입니다. 드라마 초반 주인공 오혜원은 친구이자 자신이 모시는 상사 서영우에게 말합니다. “차라리 진짜 사랑을 해!” 그러자 늘 자신의 지위와 돈을 앞세워 남자를 만나왔던 서영우는 오혜원에게 되묻습니다. “진짜 사랑이 뭔데?”라고요. 마흔 살 서영우와 나이 어린 호스트바 직업 남성의 불륜과 비교해 스무 살 제자 이선재와 마흔 살 오혜원의 불륜은 무엇이 다를까요? 주인공이 하면 사랑이고 조연이 하면 불륜일까요? 아님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고 말하는 광고 카피처럼, 40년을 열심히 살아 온 오혜원 정도라면 면죄부를 받을 자격이 있어 주어진 선물 같은 행운일까요?
톨스토이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처럼, 평범한 사랑은 서로 비슷비슷하지만 불륜은 모두 저 마다의 이유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 드라마를 끝까지 지켜보면서 내내 품게 된 질문은 바로 ‘오혜원은 어떻게 이선재를 자신의 사랑으로 알아보았을까’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오혜원처럼 현명한 마흔 살의 여성이라면 자신의 선택이 결국엔 기차에 몸을 던지고 마는 ‘안나의 선택’으로 이어질 ‘현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랑도 유통기간이 지나면 그 달콤한 맛이 변하게 되는 현실을 말입니다. 게다가 스무 살의 나이 차이는 결코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예술적 교감이 큰 변수이긴 했지만 그것 역시도 시간이라는 상수 앞에서는 무기력한 것이니까요.
그럼에도, “겁나지 않니? 별별 일이 다 닥칠 건데....... 너는 나를 정말 좋아하나봐. 지독하게 사랑하나봐. 그래서 쫄지도 않나봐.” 라는 오혜원의 말에 이선재는 말합니다. “다 됐고, 그냥 내 기집애 해요.”
<밀회> 사랑,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착각! 사진 - 1
Scene #01 시간은 거꾸로 흐르지 않는다
이처럼 드라마 <밀회>는 어떤 바보 같은 연애를 그리고 있습니다. 사회적 통념이란 기준에서 볼 때, 주인공 오혜원과 이선재는 따먹어서는 안 될 사랑의 선악과를 삼키고 몸과 마음을 다해 죄를 짓습니다. 다만 이들이 살고 있는 세계가 에덴동산이 아니라, 온갖 부정과 추문, 괴담들이 난무하는 비리의 총본산이라는 점이 특이한 점이지요. 진짜 지옥이라면 죄를 지은 사람이 벌을 받겠지만 이곳은 악은 더 큰 악으로, 추문은 더한 추문으로 덮는 더럽고 무서운 세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 오혜원과 이선재의 사랑은 마치 진흙 속에 피어오른 연꽃처럼 보이지만 진흙의 논리에 따르면 바보 같은 연애입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었던 순간, 모든 것을 던져버렸으니까요. 진흙 세상에선 이해받을 수 없는 바보짓입니다. 동시에 사회적 통념의 기준에서도 보더라도 왜 배울 만큼 배우고 그 세계를 알 만큼 아는 오혜원이 왜 그런 바보 같은 선택을 한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 드라마의 최종회 법정 장면에서 오혜원의 최후진술을 통해 드러납니다.
“저는 지금 오직 제 자신한테만 집중하려고 합니다.”
“한성숙 이사장, 서필원 회장을 대신해서 피고인 자리에 앉아계신 홍태형 이사, 그리고 변호인단을 총 지휘하시는 김인겸 전무님까지. 저분들이 어떤 벌을 받던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주범이 아니라는 말로 선처를 구할 생각도 없습니다. 제가 행한 모든 범법행위는 그 누구의 강요도 아닌 오직 저의 선택이었습니다. 잘못된 거죠. 그 덕에 저는 분에 넘치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법인카드 재단 명의의 집, 고용인. 제 성장 배경이나 능력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들이라 그 모든 것을 제 것으로 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포기한 음악의 세계에도 맘껏 힘을 행사하고 싶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유전자에 저금이 되어 있던 것처럼 아무도 빼앗지 못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정말 뜻하지 않게 제 인생에 대차대조표가 눈앞에 펼쳐졌어요.
제 인생의 명장면이죠. 난생처음 누군가 온전히 저한테 헌신하는 순간이었어요. 저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것도 아니고 절절한 고백의 말을 해준 것도 아니었어요. 그 친구는 그저 정신없이 걸레질을 했을 뿐입니다. 저라는 여자한테 깨끗한 앉을 자리를 만들어주려고 애썼던 것뿐인데 전 그때 알았습니다. 제가 누구한테서도 그런 정성을 받아 보지 못했던 걸요. 심지어 나란 인간 나 자신까지도 성공의 도구로만 여겼다는 걸. 저를 학대하고 불쌍하게 만든 건 바로 저 자신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고 살면서 저도 기억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한테 상처와 절망을 줬겠죠. 그래서 저는 재판 결과에 승복하려고 합니다. 어떤 판결을 내려주시던 항소하지 않겠습니다. 이상입니다.”
밀회 오혜원(김희애) 법정에서
스무 살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남녀가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생각해보면, 한쪽이 어려지는 방법과, 다른 한쪽이 급성숙해지는 방법, 그리고 두 사람이 열 살씩 성숙해지고 어려지는 방법이 가능할 듯합니다. 그런데 위의 최후 진술로 정리되는 두 사람의 사랑은 모두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그 모습 그대로 서로를 사랑하였음이 드러납니다. 선재의 마지막 대사, 하루가 되었든 십년이 되었든 일단 살아보자는 스무 살의 순수함과 이만하면 되었으니 그만 떠나도 괜찮다는 혜원의 품격 있는 쿨함으로 인해 이 드라마는 일반적인 불륜 드라마와 구별됩니다. 동시에 이 장면은 한 사람의 철학자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Scene #02 허위로 가득 찬 세상을 부셔버리는 방법
한 때 ‘해체’라는 말이 마치 가방 뒤에 매달린 액세서리처럼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포스트모던이 트렌드였던 시절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데리다는 “진짜 의미를 드러내려면 글을 해체하고, 우리를 옭아매 온 편견과 우리를 둘러싼 낡은 시스템을 해체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선 자기 자신마저 파괴해야 합니다. 마치 오혜원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말하기 위해 규정을 합니다. 사랑을 말하기 위해 사랑을 규정합니다. 그 규정을 벗어나면 곧바로 사랑이 아니라 불륜이 되고, 미친 짓이 됩니다. 그렇게 의미를 규정하는 껍데기가 견고해질수록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기게 됩니다. 세상이 변하고, 그 세상 속에 살고 있는 내가 변하고 있는데 그 규정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그런 껍데기들이 두꺼워질수록 그 껍데기 속에 사는 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람마다 한두 해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마흔 살쯤 되면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온다고 합니다. 혜원의 표현대로라면 ‘자기 인생의 대차대조표가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이 혜원의 경우처럼 명장면이 되게 하려면 커다란 ‘용기’가 필요할 것입니다. 보잘 것 없는 한 명의 개인이 허위와 위선이 가득 찬 세상을 부셔버리는 방법, 두꺼워질 대로 두꺼워진 껍데기를 부수고 나올 수 있는 방법은 바로 그런 세상이 자신에게 강요한 것들을 스스로 거부하는 일부터 시작하기 때문이지요. 그런 세상이 용인하지 않는 것들을 행동하는 겁니다. 금지된 사랑을 하고,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내려놓고, 그렇게 자기 자신을 해체함으로써 자신을 옭아맨 커다란 체제에 저항하는 겁니다.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면서. 오혜원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다시 말해 누구나 이런 상황에서, 그러니까 자기 인생의 대차대조표를 받아 들고 뭔가가 크게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옭아맨 커다란 체제에 자기 자신을 해체시키면서까지 저항할 용기를 낼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더군다나 오혜원처럼 ‘자기 자신마저 성공의 도구로 여겼던’ 경우라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그깟 대차대조표는 무시하고 넘길 수도 있었을 테고 현실은 부인하면 되었을 테니까요. 남은 생을 어찌 살 거냔 물음 따윈 품을 이유도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 물음에 귀를 기울이고 스스로를 해체하겠다는 결심을 한 혜원의 용기는 이 드라마에서 스무 살 선재의 순수함만큼이나 빛나는 마흔 살의 품격 있는 사랑이라 생각됩니다.
결국 오혜원은 그런 몸부림을 통해, 낡은 자신의 해체를 통해 무엇을 얻었을까요? 바로 자기 자신일 겁니다. 진짜 오혜원. 어쩌면 이선재 마저도 오혜원의 ‘진짜 자기 찾기 프로젝트’의 조연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끝까지 즐겨주는 거.”라고 말하는 선재의 거침없고, 순수한 모습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 모습에서 혜원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또한 깨닫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사건이기도 하니까요. 오늘의 유아인이라는 배우를 있게 한 이선재라는 캐릭터가 그저 오혜원 자기 찾기의 메신저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조금 불쾌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참아야만 합니다. 선재는 누가 어떤 말을 하건, 누가 어떤 시선으로 보건 개의치 않을 거니까요. 그 거침없는 순수함이 오혜원을 일깨운 것이니까요.
아무리 극단적인 음모와 극적인 반전에 반전을 거듭했던 드라마도 최종회는 보통 이해할 수 없는 휴머니즘과 갑작스런 시간의 흐름으로 싱겁게 마무리 되는 것이 우리 드라마의 공식처럼 되어있지만 이 드라마 <밀회>의 엔딩 장면은 정말 훌륭했습니다. 교도소 울타리 곁에 쪼그리고 앉아서 손으로 쏟아지는 햇빛과 동시에 감방 동료들에 의해 엉망으로 잘려나간 앞머리를 슬쩍 가리며 올려다 본 파란 하늘은 마치 면회 왔던 선재가 하고 간 약속처럼 혜원 앞에 펼쳐질 미래를 암시하거나 사랑의 뻔한 결과를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영원한 사랑이란 그저 ‘착각’일 뿐임을 말해주는 증거는 학술논문부터 앞서 언급했던 <안나 카레니나> 같은 문학작품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많고, 그래서 우리 시대의 사랑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그 단어가 ‘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사랑을 원하고, 일단 사랑을 하게 되면 그 사랑이 영원할 거란 착각에 빠집니다. 그래서 사랑이란 어쩌면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는 힘인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결말이 뻔한 사랑에 빠지기보다 차라리 썸을 선택하더라도 어떤 용감한 사람들은 착각이든 말든 사랑을 선택합니다. 설령 착각이라 하더라도 사랑할 땐 사랑은 믿고 사랑에 속더라도 또 다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 있는 사람, 사랑을 통해 사람됨을 깨닫는 사람, 아마도 혜원은 그런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김정민 (철학 큐레이터, 스토리밸류센터장, 성균관대 철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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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10-26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