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보는 철학자

「괜찮아, 사랑이야」 상처에 대처하는 사랑스런 자세

드라마 보는 철학자 괜찮아, 사랑이야 상처에 대처하는 사랑스러운 자세
이른바 미친 존재감이란!
흥행까지는 아니어도 탄탄한 마니아층을 거느린 노희경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남자주인공(이하, 남주)들은 대체로 캐릭터가 강하고 멋집니다. 그런 강한 캐릭터를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들 말 못 할 상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상처를 쿨하게 감출 줄 알고, 동시에 타인의 상처에는 깊이 공감할 줄 압니다. 그래서 그들이 더욱 강하고 멋지게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노희경 작가의 작품에는 강하지만 상처가 많은, 그러나 애써 상처를 감추기보다 오히려 상처를 드러내고 아파하는 모난 성격의 여자주인공(이하, 여주)이 등장합니다. 자신만이 상처받은 사람인 양 틈만 나면 대놓고 아파하는 이런 철없는 여주를 남주는 깊이 사랑합니다. <괜찮아, 사랑이야>의 남주 장재열(조인성 분)도 그렇습니다. ‘아니,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저렇게 완벽할 수가 있지?’라는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로 완벽한 캐릭터입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 장재열의 미친 존재감!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진짜로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남주 장재열은 현실의 출판계에서는 오직 전설로만 전해오는, 이른바 부와 명성을 다 가진 작가입니다. 내놓는 책마다 대박이 빵빵 터지고, 초절정 인기의 라디오 디제이에 입만 열면 촌철살인의 매력폭발, 그것도 모자라 출판업과 부동산 임대업까지 모두 섭렵한 사업가적인 자질까지! 그야말로 퍼펙트합니다. 무엇보다 그는 아저씨가 아니고 오빠입니다. 성공한 오빠 작가라니 현실에서는 정말 어려운 설정이죠. 애인이 죽마고우와 바람을 피워도, 또 자신의 소설을 표절해도 절대 스타일 구기는 법 없이 쿨하게 상황을 정리합니다. 또 엄마를 애인 대하듯 끔찍이 사랑하는 효자에다 교도소에 들어가 있는 형을 위해 재산의 일부를 뚝 떼어 줄만큼 우애도 깊습니다. 인정 많고 사려 깊으며,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위해 싸울 줄 아는 정의의 사도이면서도 강한 사람 앞에서 약해지지 않을 정도로 잘난 사람입니다.
남주 장재열을 조인성이 연기했다고 해서 특별한 감정이 이입된 건 맞습니다만, 조인성이라는 배우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위에 열거한 캐릭터에 반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외모력(力), 능력(力), 재력(力), 마력(力) 및 매력(力)... 지구상의 모든 파워(力)를 한 몸에 지닌 남자한테 말이죠. 비록 그가 강우(디오 분)라는 환영을 현실과 구분 못하는 정신분열을 앓고 있고, 또 침대가 아닌 욕실 변기에 기대거나 욕조 안에 들어가야 잠을 잘 수 있을 정도의 극심한 강박에 시달린다 해도 큰 문제될 것이 없어 보입니다. 이런 드라마적 장치는 같은 ‘환자’인 여주 지해수(공효진 분)의 아버지와 묘한 대조를 이룹니다. 그래서 냉정하게 보면 지해수가 겪어야 하는 기구한 ‘팔자의 대물림’이지만, 그 모든 문제를 전혀 심각하지 않은 것으로 만드는 ‘판타지’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이제 이 드라마에 장재열이라는 캐릭터를 만들고 있는 요소를 조금씩 걷어내서 그의 본질에 접근해 보겠습니다. 심리학적이라기보다는 철학적으로 말이죠.
우리가 그렇게 이상해?
Scene #01. 사랑이라는 무모한 도전
지해수“정말로 사랑이 저들을 구할까?”
장재열“그럼.”
지해수“너도 사랑지상주의자니? 사랑이 언제나 행복과 기쁨과 설렘과 용기만을 줄 거라고?”
장재열“고통과 원망과 아픔과 슬픔과 절망과, 불행도 주겠지.
그리고 그것들을 이겨낼 힘도 더불어 주겠지. 그 정도는 되어야 사랑이지.”
지해수“그건 또 누구한테 배웠니?”
장재열“사랑한테 배웠지. 어떤 한 여자를 미치도록 사랑하거든. 그녀의 이름은 엄마.”
아이러니하게도 정신과 의사이면서 불안증에 시달리는 여주 지해수는 자신의 남자사람 친구가 심한 우울증 환자와 결혼하려고 하자 극구 만류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결혼을 막지 못했고 위태로운 신혼부부는 임신까지 하게 됩니다. 임신 중엔 우울증 약을 중단해야 했기에 임신부는 계속해서 우울증과 자살충동에 시달리다 급기야는 강물에 뛰어 듭니다. 마침 이들을 만나러 간 해수의 일행이 다행히도 물에 빠진 임신부를 구해내게 됩니다. 위 대화는 이 해프닝 후 서로를 감싸 안은 친구 커플을 보며 해수와 재열이 나눈 이야기입니다. 얼핏 들으면 손발이 오그라드는 진부한 대사 같지만, 저는 드라마 전체를 아우르는 작가의 기획의도를 바로 이 대화 속에서 봅니다. 마치 지해수와 장재열이 함께 겪어야만 할 험난한 사랑의 빛과 그림자가 드러나는 장면 같았기 때문입니다.
사랑 지상주의자 장재열은 사랑을 믿지 않는 지해수에게 남녀가 사랑을 하면 배우게 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좋은 기분과 인내, 그리고 배려. 요즘처럼 남녀 간에 사랑은 무기한 보류하고 그저 썸만 타는 시대에 말이죠. 놀라운 건 그가 믿는 사랑이 달콤함만이 아니라 쓰고 맵고 떨떠름함을 모두 아우른다는 점과, 이 모든 나쁜 맛들을 사랑의 달콤함으로 반드시 견디고 이겨내겠다는 신념입니다. 장재열은 그런 사랑의 힘을 엄마로부터 배웠습니다. 극 중 장재열의 엄마는 정말 놀라운 캐릭터입니다. 하나를 취하기 위해 다른 하나를 버려야 할 상황에서도 둘 다 잃지 않을 방안을 모색합니다. 형에게 다 갚지 못할 빚이 있는 동생과 자신의 남은 인생을 다 걸고서라도 동생을 죽이려는 형, 이 두 자식을 모두 사랑으로 끌어안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드라마 곳곳에 나옵니다.
상처는 다친 자리, 혹은 그 흔적을 뜻합니다.
좀 야박한 잣대를 들이댄다면 지금 들여다보고 있는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에 ‘정상’인 사람은 없습니다. 정신분열과 강박증에 시달리는 장재열만 미친 사람이 아니라 해수도 수광이도, 그리고 동민과 재범이도 모두 조금씩은 미쳐 있으며, 이런 기준을 현실에 적용한다 하더라도 ‘정상’인 사람보다 ‘비정상’인 사람이 훨씬 많은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름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상처는 다친 자리, 혹은 그 흔적을 뜻합니다.
아무리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곱게 살아간다 해도 감기 한번 안 걸리거나 상처 하나 없는 신체로 살아갈 수 없듯이,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마음의 상처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신체의 병이나 상처는 늘 염려하면서도 마음의 상처로 인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음을 간과할 뿐입니다.
괜찮아 사랑이야 드리마 장면
몸이 아픈 것은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때로는 위로받으려 하지만 마음이 아픈 것은 감추고 은폐합니다. 타인의 상처와 고통은 더더욱 외면하려고 합니다. 시인 황인숙은 <강>이란 시에서,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나에게 말하지 말고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고 합니다. 그러고는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고 합니다. 그만큼 내 마음의 상처는 물론 다른 사람의 마음의 상처에도 인색합니다. 그래서 이 드라마에 나오는 정상인 듯 정상 아닌 사람들이 서로의 오랜 상처를 이해하고 뛰어넘기 위해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점이 전혀 진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잊고 살았던 사랑의 힘을 일깨워준 시도가 참신하기까지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우리는 내 상처 때문에, 내 상처를 보호하느라 타인에게 상처를 주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위 ‘정상’인 사람들이 말입니다.
Scene #02. 타인은 지옥이다?
프랑스의 실존철학자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존재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태어난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냥 세상에 던져졌고, 따라서 우리의 존재는 우연으로 인해 생겨났습니다. 이성주의자들이 말하듯 어떤 필연적인 원인이나 소명 때문에 생겨난 존재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인간은 그 우연으로 말미암아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매일매일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야만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만나는 타인들도 우리 자신과 똑같이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입니다. 가끔씩 우리가 타인의 마음속을 파고들고 싶어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불가능하며, 따라서 타인은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사르트르가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여러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대사가, “나 다운 게 뭔데?” 혹은 “네가 나에 대해 뭘 알아?” 이지 않습니까. 이처럼 타인의 속은 알 수 없다는 뜻일 겁니다. 이런 점에서 사르트르의 입장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는 정반대입니다. 프로이트는 타인의 마음을 과학적으로, 또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요.
노희경 작가는 이 드라마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즉 무의식 속에 억압되어 왜곡되어 있는 상처를 꺼내 의식의 단계로 끌어올리면 신경증이나 강박증이 치유된다는 가설을 활용하여 이야기를 끌어가는 한 편,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실은 타인을 지옥이라고 말한 사르트르도 후기에 가서는 입장을 조금 바꿉니다. 앙가주망, 참여를 통해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라고 말입니다. 그런 정황을 조금 넓은 의미이기는 하나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도 있을 듯합니다. 타인에게 아예 무관심하든가, 그렇지 않으려면 고통스럽지만 끊임없이 감내하며 개입하고 타인과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장재열이 자신과 엄마를 그토록 모질게 폭행하는 의붓아버지를 둔 것은 엄마의 자유로운(?) 선택이었을지는 모르나 재열에게는 우연이었고, 폭행 피해자인 재열을 돌봐주지는 못할망정 때린데 또 때린 형 재범의 동생인 것 역시 우연이며 재열의 탓이 아닙니다. 어리고 약한 동생을 대신해 자신이 의붓아버지를 찌른 걸로 하자고 허세스레 제안한 재범의 선택 또한 강압이 아닌 자유의지였으며, 이후 찌질하게도 그 선택을 번복했으나 이를 외면한 것은 엄마와 재열의 선택이었습니다. 이 모든 우연과 선택이 뒤얽힌 삶에서 재열과 엄마는 사랑으로 자신들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끝까지 가져갑니다.
결국 사르트르의 말처럼, 장재열과 장재범, 그리고 이들의 엄마, 나아가 지해수와 해수를 둘러싼 가족과 인물들이 서로 내면의 상처를 안고 있고, 누구도 그 깊은 속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타인은 지옥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의 일상이 늘 그렇듯이. 그래서 사르트르의 초기 입장처럼 철저한 개인주의로 사는 것이 어쩔 수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작가는 그런 상황에 해법을 제시합니다. 그냥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해법은 “괜찮아! 사랑이야~~!!” 그렇게 해서 소박한 개인주의를, 흔히 그렇듯 자신의 상처에만 몰입하여 아무렇지 않게 타인에게는 더 큰 상처를 주는 그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타인의 마음에 그리고 상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함께 끌어안고 함께 극복하는 방법으로 ‘사랑’을 제안한 것입니다.
개천에서 용 나오기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 불가능해진 세상에, 그처럼 불우한 환경에서도 비현실적인 인생역전의 대박을 터트린 장재열이라는 캐릭터가 터무니없어 보일 수 있지만, 오히려 작가는 그 점을 의도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성공한 작가이지만 중증 정신분열증 환자 장재열과 남녀관계의 불안증에 시달리고 냉소적인 정신과의사 지해수는 드라마 곳곳에 숨은 타인의 상처에 개입하다가 자칫 내가 다칠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결국 사랑만이 그 해법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힘을 확고하게 믿는 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해 보입니다. 너무나 잘 나서 시샘나는 장재열이 미워 보이지 않습니다. 그가 미워 보이지 않는 까닭은 그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김정민 (철학 큐레이터, 스토리밸류센터장, 성균관대 철학과 졸업)
이미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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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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