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의 여로

파트릭 모디아노의 도라 브루더

1941년 겨울, 도라가 가장 예뻤을 때 파트릭 모디아노의 도라 브루더
나시옹 전철역
2008년 첫번째 목요일, 전철역에 내려 광장으로 나오니 칼바람이 확 달려든다. 이 광장엔 올 때마다 심하게 바람이 분다. 그리고 나는 매번 길을 헤맨다. 너무 커서 어느 모퉁이로 숨어야 할 지 모르겠다. 바람마저 소리 내어 방황하고 있다. 전철역 입구에 한 소녀가 허벅지를 때리며 달랑거리는 은색 징이 박힌 인조 핸드백을 들고 서 있다. 모두들 추워 죽겠다는 듯 총총히 사라지는데 그녀는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남자친구라면 이런 곳에 약속 장소를 잡다니, 바보다. 옷도 너무 얇게 입었다. 장갑도 없고 목도리도 두르지 않았다. 얄팍한 몸이 가난한 부모의 냄새를 풍긴다. 열다섯? 학교는 다닐까? 미용학교를 다닐 것 같다. 남자 친구는 무엇을 할까? 건달일 것 같다. 집은 어디일까? 내성적일까? 자매는 있을까? 친한 친구의 성격은 어떨까? 살며시 몸을 비틀면서도 그곳을 떠나지 않는 소녀에 대한 궁금증이 끝없이 솟아오른다. 무엇보다 그녀는 오늘 내가 찾아 나선 소녀, 도라를 떠올리게 한다.
전철역 입구에 서 있는 소녀
1941년 겨울 도라의 나이 열다섯이었다. 시베리아 혹한이 닥친 그 해 12월 그녀는 마리아 성심 기숙학교에 있었고 인생의 마지막 겨울 한 때를 이 나시옹 전철역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보냈다. '그리스도께서 늘 각별한 사랑을 베푸셨던 가정을 빼앗긴 아이들이나 사회의 문제아들이 주로 입소해서 먹고 자는 문제를 해결하면서 철통같은 기독교 규칙 아래 기술을 배우는 곳이었다. 그러나 도라는 바느질을 배우고 기도하기 위해 그곳에 가지 않았다. 그녀는 '나는 유대인이에요' 하는 징표인 노란별을 가슴에 달고 다녀야 하는 신분이었다. 매주 일요일,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외출 날이면 그녀는 기숙학교를 나와 부모가 사는 셋방 호텔로 갔다. 그리고 여섯 시가 되기 전에 다시 기숙사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해 12월 14일 일요일, 그녀는 외출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기숙사 기록부의 출교 이유는 도주였다.

어쩌면 도라는 이곳 나시옹 역 출구 한쪽에 저 소녀처럼 기대어 서서 발끝으로 얼어붙은 땅을 비비며 입술을 씹었을지도 모른다. 어디로 갈까? 광장 중앙에서 횃불을 든 당당한 여신 조각상을 휘감고 온 바람에 내 뼈가 얼어붙는 듯 하다. 나는 소녀가 기다리는 사람을 함께 기다리기를 포기하고 신문 가판대 뒤 카페를 향해 달려간다. 재빨리 뜨거운 밀크커피를 마셔서 몸을 데운 뒤 픽퓌스 거리를 향해 걸어간다. 이 거리는 별 특징이 없다. 좁은 골목길이 주는 다정함도 크게 뻗은 대로가 주는 시원스러움도 없다. 그 옛날 이 길에는 가톨릭 재단의 여러 부속 단체들이 있었는데 지금 보이는 것은 도라가 태어났던 로스차일드 병원과 트론 광장 기요틴에서 2주 동안 목이 잘린 1천200명의 시체가 묻힌 오라토리오 수도회, 그리고 71번지 '가난한 자들을 위한 수녀들'이라는 팻말이 걸린 집이 유독 시선을 끈다. 사라진 마리아 성심 기숙학교가 꼭 이렇게 생겼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픽퓌스 거리
흰색도 회색도 아닌 정체를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듯한 안개 같은 색으로 회 칠된 담 안에 나지막한 집이 보인다. 아기를 안은 예수상 아래로 난 현관문을 통과하면 네모난 작은 마당이 나오고 지붕 아래 벽시계가 박힌 본관 건물이 보인다. 도라는 기숙사 본관으로 들어가는 현관 위 벽시계가 여섯 시를 가리키기 전에 그 안에 들어가 있어야 했을 것이다. 일요일 저녁, 마당에 서서 원망스레 시계를 보았을 것이다. 여섯 시가 되는 순간 그녀는 시계를 향해 힘껏 돌멩이를 던졌을지도 모른다. 이것으로 끝이야. 노란별이 뭐야, 경찰요원이 뭐야, 알게 뭐야! 그냥 도망쳐버리는 거야! 파멸로 끝이 나도 좋아! 도라는 픽퓌스 거리를 달렸을 것이다. 어디를 향해? 남쪽으로 가는 기차가 있는 리옹역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파리의 12월 오후 여섯 시, 벌써 거리가 캄캄해져 있을 시간이다.

무너진 마리아 성심 기숙학교 자리에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층마다 햇빛이 충분히 쏟아지는 발코니가 있는 현대의 파리 사람들이 선호하는 아파트를 짓기 위해 한 치의 땅도 놀리지 않고 빼곡하게 건물을 지어 올렸다. 조그만 발코니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는 아파트 주민 누구라도 이곳에 예수님의 사랑은 각별히 받았지만 세상 사람들의 사랑은 조금도 얻어 보지 못한 우울한 청춘들이 살았던 집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따뜻한 물이 쏟아지는 욕실이 노란 순무 뿌리밖에 먹지 못한 소녀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던 차가운 돌바닥 예배당이었다는 것을, 초콜릿무스를 먹고 있는 푹신한 소파가 놓인 곳이 검은 옷의 소녀들이 줄지어 자는 난방장치도 없는 공동 침실이었다는 것을 떠올리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그곳에서 소녀시절을 보냈다가 아직 살아남은 누군가가 있다면 그 기억 속에서만 흐릿하게 남아있을 흔적이다. 누군가의 우울한 흔적 위에 따뜻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파리에서 어디 이곳뿐이랴.
생플롱 전철역
어쩌면 도라는 이곳 생플롱 역으로 되돌아왔을 것이다. 남쪽은 그녀가 모르는 곳, 비밀스러운 후원자가 없으면 열다섯 소녀로서는 감행하기 어려운 실천이다.오히려 그녀는 다시 전철을 타고 부모가 사는 이곳으로 돌아왔을 가능성이 높다. 친한 친구가 있고 어쩌면 남자친구도 있었을 이곳에서라면 무엇이든 모의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클리냥쿠르 종착역을 한 정거장 앞에 둔 이 역은 내리는 사람이 별로 없고 대체로 텅 비어 있다. 금요일 오전, 오르나노 대로에서는 시장이 펼쳐져 있다. 파리 북쪽 마을의 작고 가난한 시장이다. 중국산 속옷들과 싸구려 플라스틱 제품들, 채소가게 앞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다. 여느 시장과 같은 아기자기함이나 떠들썩한 활기 같은 건 없다.
생플롱 전철역 주변 거리
도라가 부모와 함께 살았던 이 거리 41번지 셋방 호텔은 새로 수리하고 색칠을 해 겉보기에는 깨끗하고 고풍스럽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옛날 셋방 호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아직도 이곳에는 가난한 세입자들이 살고 있다. 아무 천이나 있는 대로 쳐놓은 커튼들과 열린 창 너머로 보이는 천정까지 쌓인 누런 종이 박스들, 창문 밖으로 주렁주렁 내놓은 후줄그레한 빨래들이 세입자들의 신분과 생활수준을 말해주고 있다. 세탁기 놓을 곳도 빨래 널 곳도 없는 샤워실, 미어터지는 부엌의 선반, 좁은 방안에 가득 깔린 매트리스 위에 가난한 나라에서 온 외국인 가족들이 체류증에 대한 불안한 꿈을 꾸며 옹기종기 누워서 잠자는 풍경이 저절로 떠올려진다.
호텔 풍경
그 일요일 밤, 도라는 이곳 41번지 호텔 셋방으로 가지 않았다. 어디로 갔을까. 그 즈음 파리의 날씨는 최악으로 추웠고 엄격한 통행금지가 있었다. 누가 그녀를 숨겨줄 수 있었을까. 집에서 멀지 않은 북역 철로를 향해 무작정 걸어갔을지도 모른다. 나 또한 지도에서 표시된 넓게 흘러가는 철로의 바다가 있는 쪽을 향해 걸어가 본다. 어두컴컴한 골목길 여기저기 흑인 청년들이 기대어 서있다. 목적지에 닿기도 전에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얼른 오르나노 대로 쪽으로 돌아선다.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잔인한 나치와 비시 정부의 죄 없는 희생자가 되어 1942년에서 1944년 사이에 강제로 유배된 이 학교 학생들을 기억하며. 18구에 살았던 700여명의 이 학생들은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 모두 학살 되었다.” 도라가 사라진 지 2주일이 지난 뒤 그녀의 아버지가 경찰서를 향해 걸어갔을 에르멜 가 초등학교 벽에 이런 팻말이 붙어 있다. 18구 초등학교 벽 어디서든 볼 수 있는 문구들이다. 딸의 실종 신고를 하러 가던 그 아비 또한 당시 경찰들이 사용하던 유대인 가족 파일 위에는 추적 대상이라는 고무도장이 찍혀있는 인물이었다.

어쩌면 도라는 집에서 멀지 않은 황금 물방울 동네로 숨어들었을지도 모른다. 도라의 부모는 오르나노 대로에 살기 전에 이 동네의 폴롱소 거리에 살았다. 많은 역들이 뜨내기 촌을 하나씩 껴안고 있듯 파리 북 역 또한 그 발치에 가난한 나라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이루어진 황금 물방울 동네가 있다. 맨 먼저 서쪽 유럽의 이민자와 유대인들이 이곳에 와서 자리를 잡았고 그 이후엔 아프리카 인들이 몰려와서 현재 황금 물방울 동네는 아프리카 동네가 되었다.
온통 아프리카 가게와 흑인들뿐이다. 그 이름과는 달리 풍경이 으스스하기 짝이 없는 동네이다. 뜨내기들, 수배자들이 몸을 숨기기에 꼭 좋은 곳이다. 어두컴컴한 골목길은 도망자들에게 오히려 편안한 안식처가 되어주었을 것이다.
Cafe Vins Polonceau - Hotel
쫓기는 처지의 허술한 마음을 그대로 닮은 골목과 집들, 도라는 부모가 살았던 폴롱소 거리 어느 뒷방에 몸을 숨겼을지도 모른다. 이 거리에 있던 셋방 호텔 32번지 건물은 별로 변한 것이 없다. 호텔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그 옛날 입주자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다. 창 밖으로 내놓은 지저분한 침대 시트가 늘어진 벽은 여기저기 갈라지고 페인트가 벗겨져 남루하기 짝이 없다. 정상적인 월급을 받고 사는 파리 사람이라면 '폴롱소 호텔 포도주 카페'라는 이름이 붙은 저 횡뎅그레한 카페로 선뜻 들어가지는 못할 것 같다. 하긴 이 길을 걸을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동네 누군가에게는 잔 술을 마시며 따뜻한 추억을 만들어갔던 카페일 것이다.
릴라 전철역
도라가 이곳에 전철을 타고 온 적은 없었을 것이다. 분명 그녀는 경찰 호송차에 실려 이곳에 왔을 것이다. 1941년 12월에 기숙사에서 '도주'한 도라는 다음 해 4월까지 아무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어느 골목길로 사라져서 누구와 함께 무엇을 했을까. 아무도 모른다. 인생 마지막 몇 주 동안의 겨울과 봄 안에 숨겨진 영원한 그녀만의 비밀이다. 사실 그녀 인생에서 정확한 것은 공적인 서류에 남아있는 몇 줄이 전부다. 출생증명서와 마리아 성심 기숙사의 입출소 기록, 경찰서의 실종 신고, 그리고 아우슈비츠로 떠나가는 열차의 탑승명단, 이것이 전부이다. 그녀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몇 개의 공적인 서류 안의 날짜들로 도라의 인생을 모자이크로 짜보지만 모든 것이 추측일 뿐이다.

도라가 다시 나타난 것은 맹추위와 폭설의 세월이 지나고 파리의 유리창이 전율하는 무지막지한 폭격과 공습경보, 아버지의 체포, 우박 섞인 봄철 소나기가 지나간 어느 4월 클리냥쿠르 경찰서 서류 위에서였다. 열여섯이 된 그녀는 어디선가 알 수 없는 곳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체포되어 경찰서로 넘겨졌지만 미성년이었기에 오르나노 대로에 사는 어머니에게로 보내졌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가출을 했고 어디선가 잡혀 다시 경찰서로 넘겨졌다. 노란별을 달지 않았거나, 라디오 혹은 자전거를 가졌거나, 여덟 시 이후 외출 금지령을 어겼거나, 몸을 팔았거나,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거나, 점령 분기선을 넘어 자유지대로 도망을 치려했거나, 전화를 걸었거나, 그녀가 잡혔을 이유는 무엇이든 가능했다.

구역 경찰서를 돌며 다른 유대인과 함께 도라를 실었을 그 호송차는 파리 끝에 있는 투렐 수용소를 향해 달려갔다. 운명의 호송차가 그녀를 데리고 간 투렐 수용소는 하나의 간이역과 같은 곳이었다. 1차로 이곳에 억류된 파리의 여자 유대인들은 언제 이름이 불려져 어디로 갈지 알 수 없는 처지였다. 도라는 이곳에서 두 달을 지낸 뒤 어느 목요일 아침 이름이 불려졌다. 마로니에 나무 아래서 아침을 먹은 뒤 그 동안 함께 지낸 또래 친구와 손을 잡고 수용소 마당 마로니에 나뭇잎 사이로 마지막 파리의 하늘을 보았을 것이다. 버스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녀를 데리고 간 곳은 드랑시 유배지, 이곳에서 그녀는 3월부터 억류 중이던 아버지를 만났다. 두 사람은 그 해 9월 함께 아유슈비츠로 가는 열차를 탔다. 다섯 달 뒤 그녀의 어머니도 그들 뒤를 따라 아이슈비츠로 가는 열차에 올랐다.
죽음의 수용소
죽음의 수용소로 가던 사람들을 억류했던 건물은 가로수를 낀 긴 돌담에 감춰져 있다. 돌담 위에는 두꺼운 단도를 엮어서 만든 것 같은 쇠창살들이 단단하게 쳐져 있다. 저 담을 넘으려 했다간 팔이나 다리가 잘리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것 같다. 지붕 위에는 길고 둥근 안테나들이 수북하게 숨겨져 있다. 투렐 병영, 그러나 군인도 대포도 보이지 않는다. 그 고요함이 왠지 수상쩍다. 알고 보니 군사 정보부와 같은 곳이다. 건물과 거리는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닮는다. 한때 슬픔과 회한으로 울렁거렸던 이 긴 벽은 싸늘하게 그런 것들을 떠올리기를 거부하고 있다. 머리에 두껍고 날카로운 단도 화환을 쓰고 묵묵히 주어진 군사적 업무를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아래로 비탈진 텅 빈 담을 따라 내려가니 그 끝에 이런 팻말이 걸려있다. “군사 지역, 사진 촬영 금지.” 나는 재빨리 금지된 행위를 해본다. 재수 없으면 감옥행이다, 생각하니 뒷골이 뻐근해진다. 나는 힘세지 않는 나라에서 온 아무것도 아닌 여자일 뿐이다. 별 것 아닌 사진 한 장으로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투렐 병영, 처음 와보는 이 거리 돌담길은 오늘이 마지막 산책길이 될 것이다.
신이현(소설가)
소설 『숨어있기 좋은 방』, 『잠자는 숲 속의 남자』
에세이『알자스』
역서 『에디트 피아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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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3-12-10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