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간에는 온통 불안한 소식뿐입니다. 메르스라는 낯선 질병과 유례없는 가뭄. 모두 다 어쩌면 처음인 것들입니다. 이 낯선 것들 속에서 우리들은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명쾌한 답이 나오질 않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산다는 건 모호함 그 자체라고 말하는 누군가가 있습니다. 어둠이 가득한 긴 터널을 빠져 나와야 빛을 만나고, 그제야 존재의 의미가 드러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중인 걸까요?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형사 Duelist], [M] 등을 연출한 이명세 감독을 만나봤습니다.
모호함을 직시해야 한다. ·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새벽의 경의로움 - 새벽의 모호함을 직시하고 통과해야 비로소 빛에 이름
6월의 초입, 메마르고 빛나는 햇빛을 피해 몸을 숨겼던 그림자들이 서서히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던 오후, 이태원의 한 골목길에서 이명세 감독을 만납니다. 자전거를 타고 온 그는 무척이나 경쾌해 보입니다. 이명세라는 이름은 한국 영화계에서 독특한 위상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두고 스타일리스트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미지, 혹은 미장센의 장인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본인은 쿨하게 그런 평가들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대중이나 평론가들의 평가라고 하는 것은 작품이 나오고 그 당시의 맥락에서 적합한 표현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오히려 그의 화두는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이라고 말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영화에서 모순된 힘을 가진 이미지가 어떻게 생겨나는지가 그의 관심사인 것입니다.
이명세 :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그 뭔가가 이미지 하나로 임팩트 있게 전달될 때가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영화라는 매체가 갖고 있는 강력한 힘을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이미지는 사람들의 생각을 고정시켜 버릴 위험도 갖고 있거든요. A라는 걸 이미지로 표현할 때, A라는 것의 의미가 어떤 특정 이미지에 고착되어 버릴 때가 그런 거죠. 이미지는 그런 의미에서 양날의 검인 겁니다. 모순적인 거죠.
그래서 묻습니다. 그런 모순 때문에 빛과 어둠이라는 영화적 문법을 사용하시는 겁니까.
이명세 : 오히려 내가 경이롭게 느끼는 것은 새벽이에요. 어둠과 빛이 교차하는 순간, 그 여명에 존재가 드러나기 시작하는 거죠. 어둠은 사물을 감싸고 있어요. 빛은 그 사물의 존재를 조각합니다. 새벽에 빛이 드리우기 시작하면서 사물과 풍경이 살아나죠. 그런 빛나는 어둠을 늘 생각해 왔던 겁니다. 때로는 그런 모호함이 우리를 제대로 설명해 주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청춘의 시절 경이로웠던 새벽의 경험을 전하는 그의 말투에서 그 생생한 이미지가 그려지는 듯합니다. 새벽이 시작될 때 서서히 그 어슴푸레함을 거쳐 마침내 강렬한 햇살 아래 모든 존재가 발가벗겨지는 장면 말입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빛과 어둠은 서로를 배타적으로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공존함으로써 존재를 드러낸다는 것이죠. 빛과 어둠이라고 하면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게 선을 긋 듯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명세 : 나는 어떤 것을 하나로 이름붙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요. 말의 본성이라는 것이 그런 거죠. 고정시켜버리는 것. ‘사랑해’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말해 버리면, 그 신비함은 다 사라져버리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인생은 그런 게 아니잖아요. 뭔가 말할 수 없는, 말로 해 버리면 오히려 놓쳐 버리는 것 같은 그것. 그런 것들이 우리한테 더 소중하지 않나요?
그의 말이 조금 어렵기도 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랑하는데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그 마음을 어떻게 전해야 할까요? 사람들은 아무리 말로 표현하기 애매한 것들이라도 모두 명확한 단어로 확인받고 싶어 한다는 것을 떠올렸습니다. 그래서 영화관을 찾는 관객들에 대해 묻습니다. 모호한 것을 싫어하고, 대답 없는 질문을 버거워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냐는 질문입니다.
이명세 : 선명한 것을 좋아하는 서구적 문화, 어쩌면 헐리우드식 영화에 익숙한 탓이 아닐까 싶죠. 흑백논리에 가까울 정도로 분명한 걸 좋아하죠. 하지만 현실은 모호하잖아요. 말을 하기는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잖아요. 그 모호함이 주는 긴장감, 그래서 해석이 필요한 거고. 그래야 음미할 뭔가가 있잖아요.
하지만 저도 지지 않고 들이 댑니다. 요즘 현실이 워낙 답답하니까, 미래가 보이지도 않고, 그래서 뭔가 시원시원하게 결정되기를 원하는 것 아니겠는가, 하고 묻습니다. 그의 대답은 간단하고 명료합니다.
이명세 : 그 모호함을 직시해야 하는 거죠. 피할게 아니라. 어둠이 가득한 긴 터널을 통과해야 비로소 빛에 이르니까요.
어둠이 가득한 긴 터널을 통과해야 비로소 빛에 이르니까요.
어린 시절부터 꿈은 내 인생의 화두였다. · 은유의 미학- 영화감독으로서 은유의 의미
최근에 이명세 감독은 오랜 우정을 나눈 시인 채호기 씨와 함께 주고받은 이야기를 책으로 냈습니다. 시에 시어가 있다면 이명세 감독의 영화에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대사보다는 이미지로 메시지를 전합니다. 일종의 은유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M. Heidegger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로 유명합니다.
그가 말하는 언어는 시어에 가깝습니다. 시어는 은유의 미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유명한 ‘내 마음은 호수요’ 라는 문장처럼, 내 마음을 전혀 다른 의미의 호수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것이 은유입니다. 마찬가지로, 죽음이 비로소 삶의 의미를 빛나게 한다는 실존적 체험 또한 은유의 미학을 통해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죽음에 임박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지나간 삶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또 결정되어 있지 않은 미래의 모호함으로 인해 우리는 현재의 소중함도 깨닫습니다. 이명세 감독은 이러한 모순된 것들의 상호작용을 잘 살펴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명세 : 영화감독은 드러내면서 감추어야 한다고 봐요. 물론 영화들 중에는 설명적인 영화들도 있죠. 하지만 진짜를 꿈꾸는 자라면 그려내면서 감추고 누군가가 발견해주길 기다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말하고자 하는 것을 감추고 누군가 발견해주길 기다리는 것, 그가 만들어 놓은 이미지들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왠지 그의 영화를 다시 보고 싶어집니다. 그럼 그가 생각하는 영화의 장인은 어떤 사람일까요?
이명세 : 잠시 미국에 있었을 때, 내가 머물던 곳이 묘지 근처였어요. 아주 좁은 방이었죠. 어느 날 새벽, 커피를 갈아 내려 마시면서 그 향이 가득한 채로 [브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라는 영화를 봤어요. 눈물을 흘리며 말이죠. 거기서 장인의 향기를 본 것 같아요. 제작자나 감독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그저 노년의 음악가들을 조명하는 방법. 그런 일을 하는 게 장인이고 예술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이명세 감독의 영화에 대한 가치관이 조금씩 가슴에 와닿습니다. 어느새 그가 추구하는 모호함에 동화된 것만 같기도 합니다. 이번엔 이명세 감독에게 당신의 인생을 이끈 화두를 묻습니다. 이 물음에 이명세 감독은 꿈을 이야기 합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꿈을 많이 꾸면서 꿈의 의미를 해석하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꿈 속에서 보는 이미지들이 대체 어떻게 생겨나는지 알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 수수께끼를 가슴에 품은 채 영화 감독이 되었고, 이것이 바로 그의 영화 속 이미지들을 만들어 내는 원천이 된 셈입니다.
이명세 : 어린 시절부터 꿈은 내 인생의 화두였어요.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도 있었죠. 왜 그럴 때 있지 않아요? 죽었는데, 갑자기 관에서 깨어나면 어쩌지 하는 상상 말이에요. 그러면서 꿈은 죽은 자와 산 자를 연결해 주는 통로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죠. 유독 저는 데자뷰 같은 경험이 많았는데 그것이 꿈에서 본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어떤 신비한 체험인지.. 아무튼 그런 경험들이 쌓이면서 어떻게 내면의 욕망들이 이미지화되는 가에 대해 고민하게 됐죠.
그래서 버티기입니다. · 한 발을 내딛어 자신의 한계를 넘다 - 본질을 놓치고 있는 현 영화계에 대한 아쉬움과 자신의 철학
하이데거가 말한 실존적 삶에는 미래가 중요한 화두입니다. 미래는 희망을 뜻할 수도 있고, 죽음을 직시하는 불안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미래는 과거와 함께 현재를 이루는 또 하나의 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영화의 미래에 대해 물었습니다. 마침 채호기 시인과 함께 쓴 책에 “영화가 죽어가고 있다”는 구절도 있었습니다.
이명세 : 쓰였다고 해서 다 글은 아닌 것처럼, 영화관에 걸렸다고 진짜 영화는 아니겠죠. 저만의 생각이기는 하지만 요즘은 점점 진짜 영화들이 줄어들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제 감성으로는 너무 설명적이죠. 영화의 본질을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자꾸 들어요.
그리고 영화 속 연기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이명세 : 영화의 연기와 연극의 연기는 다르다고 봐요. 영화의 연기는 딱히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관객이 그 장면의 의미를 읽죠. 해석하는 겁니다. 저는 그것이 스크린에서 필요한 연기라고 봐요. [미션]이라는 영화가 있죠. 사람들은 주인공으로 나오는 로버트 드 니로를 봅니다. 물론 훌륭한 배우죠. 하지만 저는 그 옆에 있던 제레미 아이언스를 봅니다. 그 영화에서 제레미 아이언스는 말없이 존재로서 말을 하는 사람 역할을 해냈거든요.
영화에 대한 이야기지만 듣다 보니 우리네 일상을 생각하게 합니다. SNS만 봐도 알 수 있듯 다들 한결같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애를 씁니다. 잊혀질까 하는 두려움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모호함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야기를 듣는 중에 이렇게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니, 이명세 감독의 재주인가 봅니다.
이명세 : 요즘은 딱 한 가지 기준으로 영화를 보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있어요. 재미있다. 재미없다. 그러다 보니 자꾸만 자극적인 것으로 가게 되죠. 어차피 영화가 대중성에 호소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숙명이기는 한데, 그래서 점점 더 자극적으로 변하고...
요즘 잔인한 영화들이 많다는 추임새를 넣자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이명세 : 그런 영화들이 하나 같이 인간 내면에 있는 몬스터들을 꺼내는 겁니다. 물론 고발한다는 의미는 있지만...그게 과연 좋은 일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결국에는 짧은 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인데 그런 이야기만을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죠.
짧은 한 세상을 살아간다는 말이 그의 허무주의가 갖고 있는 모순적 열정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자신이 허무주의자에 가깝다고 말하는 쿨함의 이면에 자기만의 세계에 대한 고집이 엿보입니다. 영화감독 이명세가 말하는 허무주의는 자유에 대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이명세 : 인간은 본래 유한하죠. 언제나 근원을 찾아 물어가요. 하지만 도달하지는 못하죠. 우리한테는 늘 어떤 한계들이 있어요. 그 한계를 한 발만 넘어서면 세상의 것들이 완전히 다르게 보일 때가 있죠.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 한계에서 뒤돌아서 버려요. 마지막 한 발만 더 내딛으면 다른 게 보이는데 말이죠. 물론 그 한 발을 더 내딛어도 보이지 않을 때도 많아요. 언제가 마지막으로 내딛어야 하는 한 발인지를 모른다는 게 문제죠. 그래서 허무하기는 한 건데, 그래도 자신의 한계를 넘어가 보느냐 아니면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경험은 중요한 것 같아요.
그가 영화를 만들면서 하나의 장면을 연출해 내기 위해 고심했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자리에 함께 있던 일행이 이명세 감독이 한 특강에서 ”그래서 버티기입니다” 라고 했던 말을 회상해 냅니다. 우리 모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명세 :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3편에 보면 투명 유리로 만들어져 보이지 않는 다리가 나옵니다. 엄청난 절벽이 입을 벌리고 있는데 그 위로 한 발을 내딛기란 쉽지 않죠. 존스는 아버지가 남긴 말을 믿습니다. 그리고 한 발을 내딛죠. 비로소 그 보이지 않던 다리가 드러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빛을 향해 가는 과정에 있다. · 영화를 통한 끊임없는 신호 - 영화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관객이 읽기를 기다리다
가능한 한 쉽게 읽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이명세 감독의 영화는 고약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시를 읽듯 끊임없이 장면과 장면 사이에 개입해서 해석을 해야 하는 영화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짓궂게 물었습니다. “관객이 감독님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읽는 데 어려움을 느끼면 어떻게 합니까?”
이명세 : 읽어 주시는 분들이 있죠. 그리고 기다려야겠죠.
그 대답이 경쾌하지만 의미는 자못 무겁습니다. 감독은 영화를 통해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는 거라고 말합니다. 그 신호를 받는 사람은 작품에서 뭔가를 읽어낼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명세 : 나는 일종의 유전자 같은 것이 있지 않나 생각해요. 내게 약간 그런 정서가 있나봐요. 서머셋 모옴의 [달과 6펜스]에 나오는 고갱의 삶이 좋아요. 카잔차키스의 작품들에 나오는 사람들에게도 같은 유전자가 있다고 봐요. 나도 그런 사람들 중에 한 명이고, 내 관객들 중에도 그런 분들이 있겠죠. 결국은 자유를 찾아 가는 것 아니겠어요? 생명체들이 그렇듯이 그런 유전자들도 계속 전달되는 거죠. 난 그렇게 믿어요. 우리는 끊임없이 빛을 향해 가는 과정에 있다고 말이죠.
어두운 터널을 지나야 빛이 생기고 비로소 존재의 의미가 드러난다는 그의 말이 마지막 이야기에서도 다시 반복됩니다. 모호한 삶 속에서 빛을 찾아가야 하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명세 감독의 영화 [M]에서는 정훈희의 노래 ‘안개’가 마치 루프처럼 반복적으로 흘러나옵니다. 안개는 모호함의 가장 완벽한 상징입니다. 그런 모호함을 통해 이명세 감독이 우리에게 보내는 신호가 무엇일지 다시 생각해 봅니다.
불투명한 미래를 향해 자신을 던져라!
철학자 하이데거는 불투명한 미래를 향해 자신을 던지라고 말합니다. 모호함은 우리를 불안하게 합니다. 그러나 혼신의 힘을 다해 그 불투명한 미래속으로 자신을 던지라는 것입니다. 그 경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우리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겁니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내가 아니라 남들이 만들어 놓은 도식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현실의 모호함을 직시하고, 미래를 향해 자신을 내던져 보라는 것입니다. 인터뷰가 끝나고 홀홀히 자전거를 타고 골목길의 길어진 그림자들 사이로 미끄러져 가는 이명세 감독의 뒷모습에서 그가 구하고 있는 자유의 흔적을 봅니다.
- 글
- 박승억 (숙명여자대학교 교양교육원 교수)
- 사진
- 김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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