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의 여로

유재현의 시하눅빌 스토리

왕의 해변 휴양지에 깃든 그늘진 삶들 유재현의 시하눅빌 스토리
시하눅빌 스토리
시하눅빌 스토리는 2004년 출판된 유재현의 연작소설로 캄보디아의 작은 해안 도시 시하눅빌을 배경으로 그곳에 사는 여러 인물들의 일상사를 통해 ‘세계사에서 소외된 아시아’라는 징후적 문제를 다루고 있는 독특한 작품이다.

결혼을 약속했으나 고난에 찬 삶의 역정 속에서 서로를 배신하고 죽이게 되는 남과 여(「솜산과 뚜이안」), 혁명군 출신으로 파행적 자본주의화의 물결에 떠밀려 정체성을 훼손당한 마약상 삐(「대마는 자란다」), 괴물로 변한 군사정부와 관료주의에 희생당하는 삐(「그래도 대마는 자란다」), 혁명의 열정을 간직했으나 자본주의의 타락을 목도하는 북조선 출신 리(「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온 사나이」), 우여곡절 끝에 한 날 한 시에 결혼식을 올리는 미망인 찬나와 그녀의 딸 셍라이(「시하눅빌 러브 어페어」), 동성연애자 조르주, 가짜 학위소유자 릭, 자유주의자 샘과 토니 등 시하눅빌에 모여든 외국인들(「보헤미안 랩소디」) 등 여섯 이야기 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온 사나이」의 주인공 ‘리’를 제외하면 주인공은 모두 캄보디아인들이다.

작가는 땀과 피로 범벅된 그들의 삶들을 통해 서구의 침략에 의해 근대적 과제들이 해결되지 못한 채 살인과 마약, 도박과 매춘 알선 등 어두운 그늘 속에 묻혀버린 사람들의 마음속 단면들을 파헤치고 있다.
시하눅빌 모토택시 운전사, 솜산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에서 버스를 타고 해변 도시 시하눅빌에 가면 꼭 만나야 하는 사람이 있다. 야구 모자를 눌러쓰고 땀에 절어빠진 구멍 난 더러운 셔츠에 납작한 발가락 슬리퍼를 신고 있는 남자, 바로 모토 택시 운전사들이다. 그들이 모는 오토바이 뒷자리에 앉을 일은 절대 없으리라 생각하지만 별다른 교통수단이 없기에 결국 탈 일이 생기고 만다. 탈 때마다 흥정해야 하는 것은 물론 산뜻하지 않는 남자 등에 꼭 붙어 있어야 하기에 정말 싫다. 손님을 기다리며 그들이 하는 일이라곤 오토바이 배기통에 늘어져 잠을 자거나 푼돈을 걸고 하는 카드놀이다. 어떻게 잘 놀리면 한 판 크게 딸 수 있을까, 어찌나 몰두했는지 손님이 오는 줄도 모른다. 솜산 또한 그런 운전사들 중의 하나다.
시하눅빌 모토택시 운전사 풍경
크메르루주가 수도 프놈펜을 진격했던 여덟 살부터 이십여 년의 세월을 난민 수용소와 감옥을 전전하며 세월을 보낸 그는 자신의 삶을 재수 없는 인생의 연속이라고 생각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결혼을 약속한 여자에게서 집을 산다는 명목으로 받은 천 달러의 돈을 도박판에서 홀랑 탕진하고 만다. 재수가 좋았더라면 그 열 배로 터뜨릴 수도 있었는데! 한숨쉬고 있는 동안 그의 여자는 장작 패는 칼을 들고 시하눅빌 마을과 해변을 뒤집는다. 열여덟에 몸을 팔기 위해 시하눅빌로 온 지 십 년이 넘었지만 벌어놓은 돈도 없고 나이만 들어 퇴물 취급받는 베트남 창녀 뚜이안이다. 솜산과 마찬가지로 그녀 또한 인생에서 재수 없는 일만 자꾸 일어난다. 결혼이라는 꿈에 부풀어 가진 돈을 모두 털어주었는데, 무슨 인생이 이렇단 말인가. 그녀는 솜산을 갈갈이 찢어버리리라 이를 갈며 해변을 달린다.

미래를 약속한 사이지만 그들의 운명은 서로를 죽이는 것으로 끝난다. 중국인 도박꾼들에게 가짜 캄보디아 처녀들을 주선해준 대가로 번 천 달러를 뚜이안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지만 솜산은 돈 대신 헤로인을 태운 맥주를 먹인 뒤 프놈펜을 향해 도망쳐버린다. 그깟 계집, 재수가 있으면 살고 없으면 죽겠지, 그는 전속력으로 오토바이를 몰며 잠깐 불쌍한 창녀를 생각하지만 그 또한 그리 재수 있는 놈은 아니다. 넉 달 동안 공짜로 뚜이안의 몸을 만질 수 있다는 대가로 솜산을 경이고 오토바이를 차지하기로 한 군인 잔톤이 프놈펜으로 가는 도로 언덕배기에 총을 겨누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장거리 택시 운전 기사, 뚜옥이

4번 도로 고갯마루 고랑에 처박힌 솜산을 발견한 것은 프놈펜에서 승객을 싣고 총알처럼 시하눅빌을 향해 가던 승용 택시 기사 뚜옥이다. 수도와 바다를 이어주는 이 도로는 역 주행 차와 정면충돌 사고로 죽는 것뿐만 아니라 총알 맞아 죽거나 강도의 칼에 찔려 죽거나 오토바이가 걸려 튕기도록 쳐놓은 철사 줄에 걸려 죽거나, 다양한 이유들로 목숨을 잃는 도로다. 그래서 이 도로 언덕배기에는 부처님뿐만 아니라 온갖 신들을 모신 조그마한 사당들이 있다. 4번 도로를 달리는 캄보디아인이라면 누구라도 이곳에 내려서 자욱하게 향을 피우고 절을 한다. 무사히 살아서 목적지에 도착하게 해달라는 기원이다.
캄보디아 사당 풍경
고랑에 처박혀 죽었으니 십중팔구 억울한 원혼이 근처에 서성거릴 것이라는 생각이 든 뚜옥은 모르는 척 지나쳤다가 죽은 사람의 화를 살까봐 두려워 차에서 내린다. 명복을 빌어주기 위해서 내린 뚜옥이 발견한 것은 시체의 손이 움켜쥔 달러 지폐이다. 모두 1천4백 달러, 일 년을 벌어도 만지기 힘든 돈이다. 그는 피 묻은 돈을 씻어 허리춤에 숨긴 뒤 이런 행운을 준 부처님에게 시주하고 솜산의 영혼이 천상으로 가도록 빌기 위해 절로 간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 돈을 또 다른 이의 손에 넘어가게 한다.
대마상, 삐

그는 다름아닌 창녀 뚜이안을 죽음으로 몰고 간 헤로인을 솜산에게 판매한 장본인이다. 그러나 삐는 그 헤로인이 그런 용도로 쓰일 줄은 몰랐다. 그에게 헤로인과 대마는 삶을 부드럽게 풀어주는 진정제 정도였다. 좀 더 질 좋은 대마를 구하기 위해 프놈펜으로 가는 길 그는 불쌍한 창녀 뚜이안의 영혼이 편히 천상으로 가기를 빌기 위해 절에 왔다 그곳에서 마주친 뚜옥이 택시를 타고 프놈펜으로 향해간다. 프놈펜에 이르기 전 삐의 또 하나의 목적은 솜산을 죽이고 그의 오토바이를 팔기 위해 달려가는 군인 잔톤을 처치하는 일이다. 삐의 권총에 맞아 도로변 호수 안으로 나자빠지는 잔톤을 보고 기겁한 뚜옥이 피 묻은 돈이 든 보따리를 팽개치고 도망쳐버린다. 이렇게 해서 솜산의 돈과 오토바이는 삐의 손에 들어온다.
캄보디아 거리 풍경
이윽고 프놈펜, 세상의 어느 도시와도 닮지 않은 캄보디아의 수도. 도로 위에는 굴러가는 모든 것들이 나와서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다. 수많은 오토바이, 인력거, 자전거, 손수레, 소 수레, 행상 수레들이 서로 걸리고 엉키어 도로 한 가운데서 넘어지고 자동차들은 아슬아슬하게 그들을 비켜간다. 도로 가 인도에는 숯불에 고기를 굽고 밥을 하고 국수를 말아 파는 사람들의 좌판과 옥수수며 사탕수수 즙이며 조개며 열대 과일이며 하는 팔 만한 것이면 뭐라도 들고 나온 조잡스러운 행상들, 지저분한 탁자 앞에 앉아서 먹고 떠드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가난한 삶이 와글와글 요동치는 거대한 용광로다. 삐는 이 도시에 행운을 걸고 전 재산을 올인했지만 결국엔 빈털터리 신세가 되고 만다.
시하누크 왕의 경호원, 리

가깝고도 먼 이웃이라는 말은 캄보디아 양쪽에 붙은 나라 태국과 베트남에도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두 나라는 틈만 나면 캄보디아를 탐내며 야금야금 땅 따먹기를 했는데 지도를 보면 양쪽에서 몇 입 파먹다 만 사과 같다. 이웃 태국과 베트남이 아름다운 풍광의 바다와 많은 섬을 가진 것에 비해 이 나라엔 변변한 해조 섬조차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시하눅빌이 있다는 것이다. 뜨거운 태양이 과일은 달고 부드럽게 만들겠지만 사람의 마음은 더욱 질기게 만든다. 머리에 이글거리는 태양을 이고 먼지투성이의 길을 걷노라면 이렇게 팍팍한 것이 인생이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때 캄보디아 사람들은 시하눅빌을 가고 싶어 한다. 가난에 시달린 마음을 풀어주기에 적당한 정도의 크기와 서민적은 아름다움을 가졌다. 나 또한 이곳 바다에서 헤엄치면서 캄보디아라는 나라에 대해 마음을 열 수 있었다. 뜨거운 태양 덕분에 바닷물은 온천물처럼 따뜻하다. 우기의 소나기가 바람과 몰아칠 때도 바다만은 따뜻하다. 그래서 모두들 소나기를 맞으면서 행복한 얼굴로 파도에 휩쓸려 다닌다. 자연이 그렇게 따뜻하게 사람 몸을 만져주는 것에 감복되어 저 바깥에서 벌어지는 거친 난장판의 삶이 용서되어 버린다.

이 시하눅빌 바다에 매일같이 먼 바다를 향해 헤엄치며 마음을 달래는 한 동양남자가 있으니,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서 온 사나이 리다. 원래 그는 시하누크 왕을 경호하는 것이 주 임무인 캄보디아 왕실의 특수경호대 소속 경호원이었는데 수상 경호원과 마찰을 빚고 경질되어 이곳에서 세월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위대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장렬하게 산화할 각오로 군인이 된 그였지만 지금은 남의 나라 왕을 보좌하다 시하눅빌이라는 낯선 바다에서 단원이라고는 청소하는 남자애가 전부인 태권도장 사범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이곳에서 그에게 흥미를 가지는 사람은 웬 놈을 처치하기 위해 살인청탁을 하는 클럽 주인 정도이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들은 모두 인민의 적이야."
시장통의 연인, 리차니와 셍라이
과일 쟁반을 머리에 올리고 있는사람 사진
시하눅빌 시장은 바다를 가까이 두고 있지만 생선보다 유난히 과일이 많다. 바나나와 수박에서부터 과일의 여왕이라는 두리안은 물론 잭플러, 망고스틴, 란부탕, 용과, 망고…….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강한 빛깔과 신기한 모양새의 과일들이 뿜어내는 향기가 이름을 알 수 없는 풀 냄새와 사람 냄새, 하수도 냄새, 바다 냄새와 뒤섞여 묘하게 떠돌고 있다. 시하눅빌에서 가장 건강하게 삶이 요동치는 곳이다. 이 시장통에서 밀고 당기고 시름하며 연애하는 청춘들이 있으니 바로 리차니와 셍라이다.

리차니는 앙코르톰의 베이욘 사원에 있는 사면상 얼굴과 꼭 닮은 캄보디아 미남이지만 딱하게도 머리가 텅 빈 모토택시 운전사다. 다른 운전사들이 손님들을 잽싸게 낚아채가는 동안 그 민첩한 대열에 끼지도 못하고 손톱으로 자기 콧구멍이나 찔러 피나 흘리고 있는 작자다. 그러나 잘 생긴 외모 덕분에 그를 흠모하는 여자가 있으니 말할 수 없이 추녀이지만 아주 총명한 여자 셍라이다. 실랑이 끝에 결혼하지만 시장 안의 가난한 사람들처럼 그들의 앞날 또한 마냥 밝다고 만은 할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이에게 하루 세 번의 행복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지는 캄보디아 전설이 있다. 아침에는 얼굴을 닦음으로써, 점심에는 뜨거워진 몸을 물에 담가 시원하게 함으로써, 저녁이면 잠자리에 들기 전에 발을 닦음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 그 답이다. 갓 결혼식을 올린 이 가난한 청춘 또한 적어도 하루에 세 번은 행복한 순간을 가질 것이다.
벙깍호수의 보헤미안, 조르주

솜산이 4번 도로변 고랑에서 이승을 하직하던 날 새벽 뚜옥이 모는 택시에 실려 시하눅빌로 내려온 손님은 프랑스 출신 동성애자 조르주였다. 프놈펜 벙깍 호수 주변의 게스트 하우스에서 살고 있던 그는 다른 놈과 바람을 피운 애인과 치고받고 싸운 뒤 시하눅빌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프놈펜 벙깍 호수를 둘러싼 게스트 하우스들, 여행 중 잠깐 머물기 위해 이곳에 온 이들은 하루 이틀, 한달, 두 달, 그러다 아예 집으로 가는 것도 잊어버리고 만다. 세상 떠돌이, 삶의 일탈자를 만들어내는 호수다. 그들은 이곳에서 또 다른 일탈자를 만나 사랑하고 싸우며 산다. 판자로 지은 방은 좁고 궁색하지만 도시 한 가운데 고인 큰 물과 거기에 뿌리를 내린 풀들을 보노라면 어머니의 양수로 돌아온 듯한 포근함이 있다. 이곳에 올 때마다 나는 끝없이 집 밖으로 떠돌아야 했던 나의 청춘이 생각난다. 자유로우면서도 심장은 얼마나 불안하게 뛰었던가.
벙깍호수의 보헤미안, 조르주 풍경 사진
시하눅빌은 프놈펜에서 밀린 이들이 내려오는 또 다른 일탈의 도시다. 인간이 가장 지쳤을 때 찾아가보는 곳, 바다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바다를 보면 무엇인가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이곳에 온다. 조르주는 이곳 해변에서 스물다섯에 집을 떠나 수년째 가짜 대학 학위증으로 영어 선생 노릇을 하는 릭을 만나 또 다른 삶을 시작한다. 릭뿐만 아니라 이 해변가에는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언제 떠나버릴 것인지 알 수 없는 뿌리 뽑힌 삶들로 가득하다. 이 보헤미안들의 인생은 카페를 순례하며 앙코르 맥주를 비우며 흘러간다. 그리고 바다를 보며 이렇게 퀸의 노래 가사를 중얼거린다. '내겐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아. 바람이 어느 쪽에서 불어오든, 어디로 불든. 난 그저 바람이 되고 싶을 뿐이야. '
신이현(소설가)
소설 『숨어있기 좋은 방』, 『잠자는 숲 속의 남자』
에세이『알자스』
역서 『에디트 피아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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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3-11-18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