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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여로

윌리엄 워즈워스의 빛과 그늘

윌리엄 워즈워스의 빛과 그늘
호수가 시인들에게 준 것 - 호수지방
잉글랜드 서북부의 호수지방(Lake District)을 여행하다 보면, 영국 낭만주의가 왜 그곳에서 꽃을 피웠는지 실감하게 된다. 아름다운 산과 호수, 구릉에서 풀을 뜯고 있는 양떼, 푸른 하늘과 풍성하게 피어나는 구름, 소박한 집과 농부들…… 그야말로 목가적인 자연이 눈앞에 끝없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를 비롯해서 사무엘 테일러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 로버트 사우디(Robert Southey) 등은 낭만주의 1세대로 호수지방에 살면서 시적 교감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호수에 관한 시도 여러 편 남겼다.
건축물들 사진
특히, 이 지방 출신인 워즈워스는 『호수지방 안내서』까지 펴냈다. 시인의 고향 사랑에 부응하듯 호수지방은 워즈워스의 기억을 잘 간직하고 있고, 지금도 그의 명성으로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다. 호수지방에는 다섯 개의 큰 호수와 수많은 작은 호수들이 흩어져 있다. 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나갈 정도로 좁은 길이 구불구불 마을과 호수를 이어주고, 길 양쪽에는 낮은 돌담과 풀꽃들이 정겹다.
Hawkshead Grammar School에 있는 워즈워스의 명패 사진
나는 먼저 혹스헤드(Hawkshead)라는 마을로 갔다. ‘매의 머리’라는 뜻의 그 마을에는 워즈워스가 캠브리지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공부했던 그래머스쿨이 남아 있다. 크지 않은 학교의 교문에는 워즈워스가 1779년부터 8년 동안 수학했다는 명패가 걸려 있다. 당시 학교 교장이던 윌리엄 테일러 목사는 일찍이 워즈워스의 시적 재능을 알아보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워즈워스의 시적 자서전인 『서곡(The Prelude, or Growth of a Poet's Mind)』을 읽어보면, 그도 여느 시인들처럼 학과공부에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한 것 같다. 그 시절을 “배움의 꽃들을 마음 내키는 대로 두서없이 꺾으면서, 자유로이 쏘다니는 것에 익숙”해져 갔다고 회고하고 있으니 말이다. 교실 수업보다는 자연이 그의 주된 배움터였다. 시골에 살았던 그에게는 물놀이, 새잡기, 개암따기, 썰매타기 등으로 보낸 유년시절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또한 웨일즈 지방과 프랑스, 독일, 알프스 등으로 떠난 도보 여행은 그로 하여금 광대한 자연의 힘에 눈뜨게 해주었다.
호수가 사진
그래서 워즈워스는 스스로를 “자연의 아이(A Child of Nature)”라고 표현했다. 그만큼 ‘유년’의 기억과 ‘자연’이 주는 영감은 그의 시세계를 만든 중요한 원천이었다. 사실 그의 유년시절이 그리 행복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8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13살에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다. 다행히 친척들의 보살핌 속에서 큰 고생은 하지 않고 자랐지만, 부모가 없는 마음의 공백은 쉽게 메꾸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외롭고 힘들었던 유년시절은 그의 시 속에서 자연과 하나된 충일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반면, 런던과 같은 대도시를 향해서는 “지나치게 분주한 세상의 벌판에 세워진 그대 괴물 같은 개미 동산이여”라고 탄식한다. 도시의 군중들 사이를 배회하다가도 그는 도망쳐 나와 “피신처같이 조용한 곳”을 찾았다. 군중들 속에서도 그의 시선을 끄는 존재들은 가난한 소녀, 노동자, 눈 먼 걸인 등처럼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내 영혼은 아름다운 파종기를 보냈고, 나는/ 미와 두려움 모두에서 자양분을 얻으며 자랐네”라는 시구처럼, 그는 고통과 두려움의 기억을 ‘아름다운 파종기’로 만드는 재능이 탁월했다. 이러한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도시에 대한 생래적인 거부감이 그를 평생 호수지방에 남아 있도록 했다.

워즈워스의 생애에서 그와 분리해 생각할 수 없는 두 사람이 있다. 정신적 반려자 역할을 했던 누이동생 도로시와 대학 후배이자 문학 동료였던 콜리지는 그에게 분신과도 같았다. 콜리지와 더 자주 만나기 위해 그가 사는 곳 가까이 이사를 할 정도였다. 이들은 함께 산책하거나 여행하면서 시를 얘기했고, 문학적 공동체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 두터운 우정의 산물로 워즈워스와 콜리지는 1798년 『서정담시집(Lyrical Ballads)』을 공동으로 펴냈다. 그 서문에서 워즈워스는 시인을 이렇게 정의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말하는 하나의 인간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는 보통 사람이 가진 것보다 좀 더 많은 생동하는 감수성을 타고난 사람이며, 좀 더 생에 대한 열정과 애정을 가진 사람이고, 인간성을 더 잘 아는 사람이며, 좀 더 포용성이 큰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열정과 의욕에 기뻐하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영혼에 다른 사람보다도 더 많은 기쁨을 느낀다.”
도브 코티지 옆의 워즈워스 박물관의 안내판 사진
△ 도브 코티지 옆의 워즈워스 박물관의 안내판
시인이 보통 사람들보다 비범한 감수성과 열정, 살아 있는 영혼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는 정의는 낭만주의적 시인관을 대변해준다. “좋은 시는 강렬한 감정의 자발적인 흘러넘침”이라는 그의 유명한 말도 마찬가지다.
「무지개」의 한 구절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 가슴은 뛰노라”에서처럼, 자연이 불러일으키는 신성한 감흥은 낭만주의 시의 가장 중요한 동력이었다. 자아와 세계가 하나 된 그 ‘영원한 현재’ 속에서 산과 호수는 이상적인 풍경으로 채색된다.

그러나 워즈워스의 시를 목가적 전원시 정도로 이해한다면 그 시세계의 상당히 많은 부분을 놓치게 된다. 특히 프랑스혁명에 경도되었다가 좌절한 청년기의 경험이나 당시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을 지켜보면서 갖게 된 사회적 인식은 그의 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그는 『서곡』에서 스물두 살에 프랑스혁명을 직접 목격하게 된 것에 대해 “그 새벽에 살아 숨 쉰 것도 축복이었다”고 회고한다. 또한 평생에 걸쳐 『은둔자』라는 제목으로 철학적인 시를 쓰기 위한 원대한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여기에는 철학을 공부했던 콜리지의 영향과 격려가 컸을 것이라 짐작되는데, 그 장편 서사시의 입구에 해당하는 『서곡』만이 완성되어 몇 차례에 걸친 개정판이 나왔을 뿐이다. 만일 이 시가 완성되었다면, 낭만주의자 워즈워스의 면모는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시인의 두 집 - 도브 코티지와 라이달 마운트
그래스미어(Grasmere)는 호수지방에서 가장 큰 호수다. 거기서 멀지 않은 마을에 워즈워스가 살았던 도브 코티지가 있다. ‘dove cottage’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비둘기 오두막’ 정도일 텐데, 실제로 오두막이라고 부를 만큼 아주 작지는 않았다. 흰색의 이층 건물에 장미 넝쿨이 드리워져 있어서 아담하고 사랑스러운 느낌이다. 집 뒤로는 야트막한 언덕처럼 생긴 정원도 있다. 워즈워스는 도보여행을 하다가 이 집을 발견하고는 너무 마음에 들어서 다시 찾아와 세를 들었다고 한다. 워즈워스의 창작력이 가장 왕성했던 시기가 도브 코티지에서 보낸 10년이었으니, 창작공간으로서 집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도브 코티지의 워즈워스 방에 놓인 의자 사진
△ 도브 코티지의 워즈워스 방에 놓인 의자
세간들은 별로 남아 있지 않지만, 워즈워스의 방 한가운데에는 ‘시인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오베르에 있는 고호의 다락방에서 보았던 ‘화가의 의자’가 떠올랐다. 예술적 소재와 영감은 방 바깥에서 얻어오지만, 그것을 언어나 색채로 표현하는 고단한 작업은 그 의자만이 감당할 수 있었으리라. 그리고 작은 창문만이 세상을 향한 좁은 통로였으리라. 어두운 방 속의 오래된 의자 하나가 결국 시인이 남긴 자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집에서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누이동생 도로시의 방이었다. 그녀의 방은 신문지로 도배를 했다고 하는데, 지금도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도로시는 워즈워스가 결혼한 뒤에도 내내 같은 집에서 살았다.
「틴턴사원 몇 마일 위에서」라는 시에 “내 귀하고 소중한 친구”로 불리던 그녀는 나중에 자신의 이름으로 시와 일기를 발간하기도 했다. 도브 코티지 옆에는 워즈워스와 도로시의 유고와 유품들이 전시된 작은 박물관이 있다.
워즈워스가 말년을 보낸 라이달 마운트의 전면 사진
△ 워즈워스가 말년을 보낸 라이달 마운트의 전면
라이달 마운트 전시실에 있는 호수지방 지도 사진
△ 라이달 마운트 전시실에 있는 호수지방 지도
이번에는 워즈워스가 여생을 마친 앰블사이드(Ambleside)의 라이달 마운트(Rydal Mount)로 걸음을 옮겼다. 작가들이 꿈에 그릴 만큼 넓고 우아한 품격을 지니고 있는 집이었다. 서재에 가득한 양장본들, 고급스러운 가구와 은은한 스탠드 불빛, 벽면에 걸려 있는 초상화와 풍경화들…… 모든 것이 잘 갖추어져 있고 정돈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사실은 그 안락한 집에서 워즈워스가 보낸 문학적 삶은 그리 풍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상투적인 말이기는 하지만, 시인은 가난해야 좋은 시를 쓴다는 말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2층은 워즈워스와 호수지방 시인들에 관한 전시실로 쓰이고 있었다. 호수지방 지도 위에는 시에 등장하는 지점들이 표시되어 있고, 파란 리본을 따라가면 그 시의 원문이 적혀 있었다. 전시된 자료들을 통해 호수지방의 자연과 문화, 낭만주의 시의 계보, 시인들의 교류 등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었다. 정원을 향한 창가에는 시인의 책상이 놓여 있었다. 그 자리에 서서 오래도록 창밖을 바라보았다. 정원에는 어느덧 꽃이 지고, 그늘 아래 나란히 놓인 의자에는 시든 꽃잎들이 내려앉고 있었다.
워즈워스의 책상과 책장 사진
집 밖으로 나와 워즈워스의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멀리 호수가 보이고, 온갖 나무와 화초들이 잘 가꾸어진 그 길에서 워즈워스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말년의 그를 떠올리면 조금 씁쓸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귀족의 도움으로 웨스트모어 랜드의 우체국장이 된 그는 일정한 연봉을 받을 수 있었고 경제적으로 안정되어갔다. 또한 여왕과 접견하거나 계관시인의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혜택으로 인해 그가 잃어버린 것도 적지 않았다. 친구 콜리지와의 관계가 소원해졌고, 후배들의 비판도 적지 않게 받았다. 로버트 브라우닝이 “은전 백 냥을 위해, 윗저고리에 꽂을 리본을 위해, 그는 우리 곁을 떠났다”고 말한 것도 그의 변절을 겨냥한 것이었다. 말년의 그는 시작활동을 거의 하지 못하고 자신이 일구어놓은 명성에 안주했던 것 같다. 정치적으로도 보수화되어서 노예해방을 반대하거나 영국의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물론 낭만주의의 속성 자체가 젊음의 산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나이가 들어서까지 혁명적 신념과 참신한 상상력을 한결같이 유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서정적 자아가 유아론적(唯我論的) 주체로 갇혀버릴 수 있는 가능성을, 또는 고향에 대한 사랑이나 국토 예찬이 민족주의로 기울 수 있는 위험성을 스스로 경계하지 못한 것은 아쉽다. 자신이 쓰고 싶어 하는 시와 실제로 쓸 수 있는 시 사이에 가로놓인 간극을 넘어서기란 의지만으로는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시인의 흉상 사진
라이달 마운트의 집 사진
시인이 거쳐 간 도브 코티지와 라이달 마운트를 차례로 돌아보는 동안 워즈워스의 빛과 그늘을 함께 느꼈다. 도브 코티지가 검소한 생활 속에서 정신적 긴장을 유지했던 워즈워스를 보여준다면, 라이달 마운트의 집은 말년의 영광을 누리면서 정신적 긴장을 잃어버린 워즈워스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가 자신의 모든 사상과 지식을 집대성해서 쓸 계획이었던 『은둔자』가 끝내 쓰이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진정한 시는 원대한 기획이 아니라 실존의 정직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다섯 번의 여름과 겨울 - 틴턴사원
틴턴사원 위쪽 와이계곡의 풍경 사진
△ 틴턴사원 위쪽 와이계곡의 풍경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즈워스에 대한 애정을 끝내 거둘 수 없는 것은 틴턴사원(Tintern Abbey) 앞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틴턴사원 몇 마일 위에서 쓴 시」는 『서정담시집』 제일 마지막에 실려 있다. 꽤 긴 시인데, 유장한 호흡 속에 자연과 시간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 담겨 있는 작품이다. 젊은 시절 웨일즈를 여행하다 틴턴사원에 갔던 워즈워스는 5년 뒤 누이동생 도로시와 그곳을 다시 찾았다.

다섯 해가 지나갔다. 다섯 번의 여름과
기나긴 겨울이! 그리고 나는 다시
듣는다 이 강물 소리를.
산골 샘에서 흘러나와
조용히 흐르는 이 벽지의 물소리.


시인은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며 5년 전에 자신이 “한 마리 사슴처럼/ 자연의 부름을 받아/ 깊은 강, 외진 냇물을 지나/ 산을 뛰어넘고 하였”던 것을 기억해낸다. 그러면서 자신이 힘들 때마다 그곳의 풍경이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고백한다. 웨일즈에 처음 갔던 무렵, 워즈워스는 프랑스혁명의 좌절과 더불어 프랑스에 남겨두고 온 연인 아네트와 자신의 아이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준 것은 변함없이 그의 곁을 지킨 누이동생과 자연의 힘이었다.

이제 다섯 번의 여름과 겨울이 지나 그곳에 돌아온 시인은 이렇게 탄식한다. “그때의 나를/ 지금 마음속에 그릴 수는 없다”고. 하지만 이 탄식이야말로 그가 ‘현재와 나’와 ‘과거의 나’ 사이에서 가장 정직하고 치열하게 서 있다는 증표일 수도 있다. 그때의 자신을 되찾을 수는 없지만 그는 여전히 자연의 “크나큰 세계” 속에서 새로운 “감각의 언어”를 발견한다. 워즈워스가 “자연을 바라보는 법”에 있어서 새로움을 보여주었다는 점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시인이 머물던 집 부변 경관 사진
시인이 머물던 집 부변 경관 사진
자연 속에서 감각의 언어 속에서
내 무구한 생각의 닻을
내 가슴의 젖어머니
길잡이 수호자를,
내 정신적 존재의 요체를
알아보는 것이 참으로 기쁘다.
나는 호수지방에 다녀오고 나서 두 달 뒤쯤 웨일즈의 틴턴사원을 찾아갔다. 계곡을 등진 채 사원이 우뚝 서 있고, 맞은편에 작은 마을이 보였다. 사원 근처에서 풀을 뜯고 있는 소들의 모습이 평화로웠다. 12세기에 돌로 지어진 사원은 뼈대만 남은 채 쇠락해가는 모습이었지만, 그 폐허의 모습은 어떤 신성한 기운을 느끼게 했다. 터너나 콘스타블 같은 풍경화가가 그곳을 화폭에 담고 워즈워스가 그곳을 노래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예술작품들 덕분에 관광지가 아닌 그곳을 찾는 발길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듯하다. 돌기둥 사이로 천천히 걷고 있는 사람들 몇 명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자주 발길을 멈추고 돌기둥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파아란 하늘이 거기 남아 있는 신의 얼굴인 것처럼.
틴턴사원 주변의 풍경
누군가 틴턴사원은 저녁에 가는 게 제 맛이 난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 모두가 죽음과 소멸을 향한 존재라는 것을 그 폐허가 말해주고 있어서일까. 틴턴사원이 자리 잡고 있는 와이(Wye)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서 나는 워즈워스가 어디쯤 서 있었을까 두리번거렸다. 왜 그는 「틴턴사원에서」라고 하지 않고 「틴턴사원 몇 마일 위에서」라고 썼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시를 다시 읽어보니 사원에 대한 언급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가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붙잡고 싶은 것은 지난날의 자기 자신이었다. “다섯 번의 여름과 겨울”이 지난 뒤에 다시 듣게 된 벽지의 물소리가 그의 내면을 흔들어 깨웠던 것이다. “그때의 나를/ 지금 마음속에 그릴 수는 없다”고 말하면서도 그는 자연이 주는“드높은 생각의 먹이”를 받아먹으며 사랑의 힘을 되찾는다. 기억의 상류에 서 있는 그가 멀리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나희덕_시인.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시집『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야생사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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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3-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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