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의 여로

도리스 레싱의 런던스케치

그녀가 런던에 관해 말할 때 도리스 레싱의 런던스케치
런던이라는 극장
특정한 도시를 표제로 삼은 문학작품들이 여럿 있다.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 고골의 『뻬쩨르부르그 이야기』, 폴 오스터의 『뉴욕 3부작』등이 우선 떠오른다. 찰스 디킨스의『두 도시 이야기』와 조지 오웰의 『파리와 런던 거리의 성자들』은 파리와 런던을 배경으로 한다. 영화로는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와 빔 벤더스의 《베를린 천사의 시》, 마이크 피키스의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등이 있다. 이 작품들로 각 도시는 독특한 피와 살을 입었다.
△ 런던의 야경
현대도시로서의 런던을 섬세하게 그린 소설로는 도리스 레싱의 단편집 『런던 스케치』가 있다. 이 책이 출간된 1992년으로부터 20년이 지났지만, 오늘날 런던의 모습은 소설에 그려진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만큼 런던은 변화가 별로 없는 도시라는 뜻도 될 것이다.

런던은 변화를 유보함으로써 몇 백 년의 시간성을 동시에 지닌 도시로 남아 있게 되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의 전시장이자 다양한 인종과 언어의 전시장. 이질적인 사람들이 공존하면서 매일 거리마다 무수한 이야기를 낳고 있는 거대한 극장. 도리스 레싱은 그 도시로 우리를 초대한다.
런던은 마치 위대한 극장 같다. 당신은 하루 종일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응시할 수도 있다. 나는 때때로 그렇게 했다. 당신은 카페나 벤치에 몇 시간이고 앉아 바라볼 수도 있다. 언제나 놀랄 만한 또는 재미있는 어떤 일들이 일어난다. 그리고 공원들. 리젠트 공원, 햄스테드 히스. 당신은 절대 싫증나지 않을 거다.
△ 리치몬드파크의 나무들과 벤치
「폭풍우」소설가 레싱이 주목한 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다. 그래서인지 빅벤, 웨스트민스터사원, 버킹엄궁전, 런던아이, 런던타워 등 세계의 관광객들을 끌어 모으고 있는 명소들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레싱은 런던에 도착한 첫 1년 동안 ‘악몽의 도시’처럼 느껴졌다고 회고한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공원에서 산책을 하다가 빛이 건물을, 나무를, 주홍색 버스들을 친숙하고 아름다운 무언가와 하나가 되게 만들었고, 나는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해졌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서는 문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사람들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함께 느껴진다. 여기 수록된 18개의 단편들에서 레싱은 서로 다른 계층, 인종, 세대, 성별 등으로 인해 일어나는 대립과 갈등을 담담한 필치로 그려냈다.

레싱이 이처럼 관찰자적인 시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이력과 관계가 있을 듯하다. 레싱은 영국인이지만 1919년 이란에서 태어나 아프리카 식민지인 짐바브웨에서 성장했다. 13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15살에 집을 나와 전화교환원, 타이피스트 등으로 일했고, 두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을 겪었다. 1949년 런던으로 이주하면서 작가로서의 본격적인 삶을 시작했다. 이런 경험 때문에 그녀는 영국 사회를 바라보는 ‘바깥의 눈’을 가질 수 있었다. 1950년대 영국 공산당에 참여한 레싱은 사회문제에 대해 소신 있게 발언하는 한편 인종차별, 여성차별, 문명의 폭력성 등의 주제를 즐겨 다루었다. 페미니즘의 고전으로 불리는 『황금 노트북』으로 2007년 노벨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올해로 95세가 된 레싱은 런던 외곽의 햄스테드에 살고 있는 듯하다. 그녀의 집을 직접 찾아보지는 못했지만, 햄스테드에 가면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이 동네 어디쯤에 노작가가 살고 있겠거니 생각하며 서성거리곤 했다. 공식 홈페이지(www.dorislessing.org)에는 2008년에 펴낸 『Alfred and Emily』가 마지막 책이라고 되어 있다. 90세까지 작품활동을 했다니, 정말 놀랍다. 홈페이지에 나온 생애의 주요 항목 중에 ‘그녀의 고양이와 함께’라는 코너가 있는데, 고양이와 찍은 흑백사진들과 관련 작품들이 언급되어 있다. 오랜 세월 혼자 살았던 그녀에게 고양이는 가족과도 같은 존재였던 모양이다.

국립초상화미술관(National Portrait Gallery)에는 작가들의 초상화를 모아둔 전시실이 하나 있다. 그 중에는 오일파스텔로 그린 레싱의 초상화 한 점과 연필 데생 한 점이 있다. 이국적인 패치워크와 소품을 배경으로 앉아 있는 레싱의 표정은 다양한 삶의 파도를 거쳐 온 노련한 사공처럼 보인다. 젊은 시절의 관능적인 모습은 사라졌지만 흰 머리를 간결하게 묶고 헐렁한 조끼를 걸쳐 입은 레싱의 눈빛은 아직도 총기를 잃지 않았다.

『런던 스케치』의 원제목은 『London Observed: Stories & Sketches』다.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단편들은 대체로 서사 중심의 스토리와 묘사 중심의 스케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스케치의 대상은 카페, 공원, 지하철, 공항, 택시, 병원 등의 공간이다. 또한 스토리의 대상은 미혼모, 여자들, 자매, 모녀, 이혼한 남녀 등으로 여성적 삶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런던을 산책하는 것은 그 공간과 사람들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기도 하다.
스케치-런던의 장소들
지하철 거울에 비친 퇴근길 풍경 사진
△ 지하철 거울에 비친 퇴근길 풍경
영국의 주요 교통수단은 빨간 이층버스와 언더그라운드(Underground) 또는 튜브(Tube)라 불리는 지하철이다.
1863년 세계 최초로 개통된 런던 지하철은 1백50년이나 되었으니 시설이나 철로가 노후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지하철과 전국을 잇는 철도가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어느 한곳에서 고장이나 사고가 생기면 교통 전체가 몇 시간씩 마비되곤 한다. 작년에 올림픽을 치르면서 약간 개선되었지만, 도시 곳곳에서는 땜질공사가 끊일 날이 없다.

나 역시 지난여름 교통대란으로 워털루 역에서 서비튼 가는 기차를 타는 데 두 시간 이상을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 했다. 콩나물시루처럼 꽉 찬 기차가 언제 출발할지도 알지 못한 채 사람들은 서로의 땀 냄새를 맡으며 붙어 서서 기다렸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불평을 하지 않는 걸 보면서 정말 특이한 민족성이구나 싶었다. 땀범벅이 된 한 남자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오면서 “아, 나는 런던의 교통수단을 사랑해!”라고 외치는 게 아닌가. 그의 말에 사람들은 웃으며 동의를 표했다. 바로 이런 게 런던식 위트인 듯했다. 레싱 또한 런던의 지하철을 다음과 같이 변호한다.

에스컬레이터는 자주 고장이 난다. 한 달 전 직원들이 승객들에게 생각을 전달할 때 사용하는 칠판에 깨끗한 흰 분필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에스컬레이터가 왜 그리 자주 고장 나는지 궁금하시죠? 저희가 알려드리죠! 그건 에스컬레이터가 낡았기 때문이지요. 미안합니다! 멋진 하루를 보내시기를!” 냉소적이면서도 잔인하기도 한, 완벽한 런던식 유머로 차 있는 이 메시지로 인해 사람들은 기분이 좋아지고 긴 층계를 걸어 내려갈 준비를 한다.
「지하철을 변호하며」
이런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런던의 지하철은 문화적 공간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지하철 광고 사이에 시가 끼워져 있기도 하고, 지하도의 통로마다 비틀즈의 후예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지하철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신문이나 책을 읽는다. 냉난방 시설이 잘 되어 있는 지하철에서 예외 없이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우리나라의 지하철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다시 레싱의 관찰을 참조하자.

열차의 한쪽 편에서는 열네 명의 승객들 중에서 세 명이 책을 읽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신문을 읽고 있었다. 아침에 출근할 때 사람들은 자기가 선호하는 것을 읽는다. 《타임스》, 《인디펜던트》, 《가디언》, 《텔레그라프》, 《메일》. (중략) 밤에는 《이브닝 스탠다드》가 추가된다. 세 사람이 읽고 있다. 내 오른쪽 팔꿈치 옆에는 한 남자가 『일리아드』를 읽고 있었다. 통행로 맞은편에서는 한 여자가 『모비딕』을 읽고 있었다. 내가 밀치고 나가는데 젊은 여자가 품속에서 잠든 어린아이의 머리 위로 『폭풍의 언덕』을 들고 있었다.「지하철을 변호하며」
지하철에서 독서하는 사람들 사진
△ 지하철에서 독서하는 사람들
퇴근길 내가 지하철에서 몰래 찍은 사진 속의 세 사람도 무언가를 열심히 읽고 있다. 가운데 중년 남자는 《타임스》를, 젊은 여자는 『Philanthro-capitalism』을, 젊은 남자는『The international bestseller』를 읽고 있다. 그들이 들고 있는 책이 『일리아드』 『모비딕』 『폭풍의 언덕』 등의 고전에서 현대적인 주제로 바뀌었을 뿐, 지하철과 버스 안에서 책읽기를 즐기는 영국인들의 습관은 여전하다. 그들의 문화적인 저력은 이렇게 생활화된 독서에서 나오는 듯하다.
리치몬드파크의 나무들과 벤치 사진
△ 리치몬드파크의 나무들과 벤치
리치몬드파크의 펨브로크 롯지 사진
△ 리치몬드파크의 펨브로크 롯지
런던에서 가장 부러운 공간은 역시 공원이다. 비좁은 지하철과 집을 감수하며 사는 대신 누구나 할 것 없이 드넓은 공원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내가 즐겨 찾는 공원은 리치몬드파크인데, 차로 한 바퀴 도는 데 십 분 넘게 걸릴 정도로 광활하다. 수백 년 된 아름드리나무들과 평원을 떼 지어 다니는 사슴들,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과 수많은 오솔길들. 리치몬드파크에는 버틀란트 러셀이 자랐던 집을 개조한 카페 펨브로크 롯지(Pembroke Lodge)가 있다. 그곳의 야외의자에 앉아 안개 속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런던이 대도시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 레싱은 공원의 즐거움을 이렇게 말한다.

히스 벌판 옆에 있는 이 공원은 가장 쾌적한 축에 속하는데 이곳에는 집 안에, 심지어는 아파트에 갇혀 슬픈 한 주일을 보냈을 개들이 몰려든다. 그들은 해방, 그러나 조건부로 해방된다. 그토록 짧은 시간 동안 그것도 묵인 하에 밧줄에서 풀려난다. (중략) “이봐, 잠깐만.” 그들의 본능이 그들에게 속삭인다. “개가 반드시 인간을 따라다닐 필요는 없어.” 개들은 꼬리를 흔들며 서로에게 접근한다.
「공원의 즐거움」


「공원의 즐거움」의 주인공은 철조망 속의 새들과 방목지의 사슴과 염소 등이다. 야생동물의 생존방식에서도 드라마를 읽어내는 작가의 눈이 예리하다. “울타리 안에는 야생동물이 있다. 울타리 밖 자유로운 쪽으로는 인간과 개들이 있다. 사슴들은 개가 울타리에 와서 코를 비비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작가의 관찰에 따르면, 개는 인간과 야생동물 사이에서 길들여진 존재다. 그러나 잠시나마 밧줄에서 풀려나면 오래된 본능을 기억해낸다.
히스 언덕에서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 사진
△ 히스 언덕에서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
레싱이 즐겨 찾는 햄스테드 히스 공원에 갔던 날에는 눈이 내렸다. 히스 언덕에 오르니, 개를 산책시키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남자가 눈 위에 풀어 두었던 개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다섯 마리는 얌전히 돌아왔지만 세 마리가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야생의 기억이 좀 더 강하게 남아 있는 녀석들일 것이다. 어쩌면 개들을 길들여 온 인간 역시 야생과 문명 사이에서 스스로를 길들여 왔는지 모른다. 런던 곳곳에 남아 있는 공원들은 그 야생의 기억을 잠시 일깨우는 마지막 공간이다.

런던의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공간은 카페다. 「참새들」 「사회복지부」 「새 카페」 「로맨스 1988」 「늙은 여자 둘과 젊은 여자 하나」 등의 배경도 모두 카페다. 서양인들에게 카페는 단순히 차를 마시거나 식사를 하는 장소가 아니다. 대부분의 대화가 카페에서 이루어지고 무심한 관찰자가 되어보는 것도 카페에서다. 밖을 향해 나란히 놓인 의자에 앉아 지나는 사람들과 새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여유가 그들에게는 아직 남아 있다. 하지만 옆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귀를 기울이면 세상이란 얼마나 고통과 모순으로 가득 찬 곳인지 실감하게 된다.

「참새들」에서는 먹이를 찾아 몰려든 참새들에 대한 태도가 세대와 성별, 인종에 따라 각기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새끼 참새에 대해 중년부부가 보이는 태도 차이는 그대로 자식의 독립에 대한 의견 대립으로 이어진다. 「사회복지부」는 사회복지부의 파업으로 길에서 구걸하던 여자와 사회복지부에서 일했던 한 남자가 카페에서 나누는 대화를 중심으로 한다. 남자의 호의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극도의 불신과 불만의 태도를 거두지 않는다. 「로맨스 1988」은 히스로 공항 카페테리아에서 만난 두 자매 이야기로, 자유분방한 동생의 거침없는 말에 곤혹스러워하는 언니와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흥미롭다. 이처럼 카페는 현대인의 무관심성이 좁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잠시 서로에 대한 관심과 접촉으로 전환되는 공간이다. 그러나 카페 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그 관심은 다시 유리창 너머 익명의 공간으로 증발하고 만다.
스토리-런던의 사람들

사람들의 이야기가 좀 더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단편들은 「데비와 줄리」 「장애아의 어머니」 「자궁병동」 「장미밭에서」 「흙구덩이」 「진실」 등이다. 주로 여자들의 결혼과 이혼, 임신과 출산, 질병과 죽음, 모성과 연대 등에 관한 일화들이다.
「데비와 줄리」에서 임신한 가출소녀 줄리는 역에서 만난 데비의 집에 머물게 된다. 커다란 개가 지켜보는 어두운 창고에서 혼자 아기를 낳고 집으로 돌아온 줄리는 자신이 유기한 아기에 대한 뉴스를 보며 “난 이제 세상을 알아”라고 생각한다. 비정상적인 출산을 통해 너무 일찍 조숙한 어른이 되어버린 것이다. 「장미밭에서」는 매사에 좌충우돌하는 딸 셜리가 3년 만에 장미밭에 있는 엄마 마이러를 찾아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딸은 엄마와 화해를 하러 온 것이지만 두 사람의 대화는 번번이 어긋난다. 모녀 사이에도 단절감은 쉽게 회복되지 못한다.

「장애아의 어머니」에는 어린 딸의 장애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는 파키스탄인 어머니가 등장한다. 사회복지사가 여러 번 방문해서 특수학교에 보낼 것을 설득하지만, 칸 부인은 남편의 부재를 핑계로 약속을 유예하며 일반학교에 보내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작가는 사회복지사 스티븐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가족들이 그 애를 극진히 위하고 사랑하는데 그 여자애는 가족에게 얻는 것보다 더 좋은 무엇을 특수학교에서 배울 것인가?”

「자궁병동」은 자궁에 문제가 있는 여덟 명의 여자가 한 병실에 누워 밤을 보내는 이야기다. 가족들이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자 마일드리드는 남편 없이 혼자 남는다는 두려움에 울기 시작한다. 흐느낌이 밤늦게까지 계속되자 참다못한 미스 쿡이 일어나 그녀를 달랜다. “당신이 일생 동안 매일 밤 누군가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할 수 있었다면, 그건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린” 거라고. 아이도 없고 결혼한 적도 없이 자궁을 들어낸 미스 쿡이 남편과 하룻밤도 떨어져 본 적이 없는 마일드리드를 안고 위로하는 모습이라니! 간신히 잠이 든 그녀를 보며 미스 쿡은 말한다. “아, 살면서 배우는 거지.”

「흙구덩이」와 「진실」은 이혼한 부부의 재회 또는 재혼에 관한 이야기다. 「흙구덩이」에서 사라는 10년 전에 이혼한 전남편과 재회한다. 그녀는 심리적으로는 일치감을 느끼면서도 현재의 아내인 로즈 때문에 전남편을 뿌리치고 여행을 떠나버린다. 「진실」은 이혼한 부부와 각자의 새로운 애인들이 함께 한 주말여행을 통해 이혼을 둘러싼 남녀의 복잡한 심리와 양육문제 등을 다루고 있다. 우리의 문화에서는 이런 모임 자체가 성립되기 어려울 것 같은데, 그들의 대화는 솔직하고 거침이 없다. 이혼을 했으면서도 완벽하게 헤어질 수 없고, 새로운 사람을 만났으면서도 완벽하게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이 씁쓸하게 확인해야 했던 불편한 진실이다.

이처럼 레싱은 런던의 화려한 외관이나 역사적 사건보다는 도시의 뒷골목에서 피었다 시드는 개인의 희노애락에 주목한다. 특히 여성의 소외와 고통에 대해 민감한 감응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성찰이 페미니즘적 관점에만 머물지 않고 인간의 본성과 사회의 모순에 대한 보편적인 탐구로 이어진다.

그런 일상의 풍경들이 모여 런던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모자이크를 완성한 것이 『런던 스케치』다. 몇 개의 단편들은 얼핏 소품처럼 보이지만, 극적인 상황의 절묘한 설정이나 곳곳에 박힌 명문장들은 역시 대가다운 솜씨를 느끼게 한다.

이 책을 덮고 난 뒤에도 계속 귓속을 맴도는 말이 있다. 「폭풍우」에서 사연 많은 택시 운전사는 이렇게 외친다. “인간들은 악하고 어리석어요.” 이 비관적인 전언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그 아픈 진실을 공유했다는 점에서 일종의 ‘동지’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자궁병동의 여자들이 각기 다른 삶을 살아왔지만 희미한 달빛 아래 나란히 누워 밤을 견뎠던 것처럼. 그런 점에서 런던에 관한 레싱의 스케치는 오늘 우리가 사는 도시의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삭막하고 우울하지만 약간의 온기가 남아 있는.
나희덕_시인.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시집『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야생사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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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3-10-25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