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의 여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블룸을 따라 더블린을 걷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사랑하는 더러운 더블린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서 주인공 리오폴드 블룸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돼지콩팥이다. 지금도 6월 16일 블룸스데이(Bloomsday)에 아일랜드 사람들은 돼지콩팥을 먹으며 축제를 즐긴다고 한다.

블룸은 푸줏간에서 싱싱한 돼지콩팥을 사다가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아내에게 차를 끓여다주는 선량한 남편이다. 또한 소심한 시민이자 낭만적인 구석을 지닌 중년의 샐러리맨이다. 그 평범한 남자의 하루를 서사적 영웅 오디세우스의 일생과 맞먹게 그려낸 작품이 바로 『율리시스』다.

22살에 노라 바너클을 만나 사랑의 도피를 떠난 제임스 조이스는 트리에스테, 로마, 파리, 취리히 등을 떠돌며 방외인으로 살았지만, 그의 문학은 한 순간도 “사랑하는 더러운 더블린”을 떠난 적이 없다.
그는 식민의 역사와 음주, 폭력, 가난, 섹스, 무기력, 정치적 부패, 종교적 위선 등으로 얼룩진 아일랜드를 자신이 잘 닦아낸 소설에 비치게 만들었다. 특히 더블린은 그가 사랑했고 증오했던 아일랜드의 심장과도 같았다. “나는 언제나 더블린에 대해 쓴다. 더블린의 핵심에 도달할 수 있다면 세계 모든 도시의 핵심에 도달할 수 있다.”라고 그는 말했다. 이 말처럼 그는 더블린이라는 고유명사를 세계문학의 일반명사로 바꾸어 놓았다. 더블린은 조이스의 소설을 통해 독특한 색채와 냄새, 소리와 풍경을 지닌 문학적 장소가 되었다.

지금도 더블린의 중심가에는 그의 청동 입상이 서 있다. 그는 유목민답게 지팡이를 짚고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르고 왜소한 체격, 약간 삐딱하고 장난기 어린 표정, 불편한 한쪽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시선. 그 입상 아래 피부색이 다른 행인들이 무심하게 앉았다 간다. 동상 바로 뒤에는 그의 단골카페였던 킬모어(kylemore)가 아직 남아 있다. 더블린을 누구보다 불편해했던 그가 이제는 더블린의 가장 편안한 의자가 되어 있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더블린에서의 며칠이 내게는 실제 도시가 아니라 소설 속의 공간에 갇혀 있는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더블린이 소설을 낳은 게 아니라 그의 소설 속에서 더블린의 이미지가 생겨났다고 할까. 실제로 더블린은 그리 큰 도시가 아니지만, 조이스의 소설처럼 속내를 쉽게 보여주지 않았다. 며칠 동안 같은 장소를 몇 번씩 다시 지나치게 되고, 같은 사람을 우연히 다시 마주치게 되고, 어이없는 곳에서 길을 잃거나 시간을 허비하고, 애써 찾아가면 문이 닫혀 있고…… 그럴 때마다 『율리시스』라는 미로 속을 헤매고 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오늘날의 더블린은 더 이상 조이스의 묘사처럼 “잿구멍과 묵은 잡초와 고기 찌꺼기의 악취가 분분한” 도시가 아니었다. IT강국의 문화예술도시로서의 품격과 낭만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 ‘바깥의 비판자’를 포용할 뿐 아니라 도시 곳곳에서 기리고 있었다.
율리시스 속의 하루
조이스는 『율리시스』속에 너무 많은 수수께끼와 퀴즈를 숨겨두었기에 앞으로 몇 세기 동안 학자들은 그것을 풀기에 바쁠 거라고 말했다. 이것이 자신의 불멸을 보장하는 길이라고 여겼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율리시스』가 미국에서 출간된 1934년 1월과 『피네간의 경야』가 출간된 1939년 5월, 두 번이나 《TIME》지의 표지모델로 등장할 만큼 그와 그의 소설은 일종의 ‘사건’이었다.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았고, 여러 가지 시비와 소송을 겪으며 금서 처분을 받기도 했다.
타임 지 표지에 등장한 제임스 조이스 사진
△ 타임 지 표지에 등장한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는 리오폴드 블룸과 스티븐 데덜러스라는 두 인물을 중심으로 한 18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일상적인 하루를 다루지만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와 맞물려 진행되기 때문에 서사적 스케일이 방대하고 정교한 짜임새를 갖추고 있다. 이를 위해 그는 등장인물, 장소, 모티프 등을 일일이 대응시켜 목록을 만들었고, 그 스키마를 통해 구상을 가다듬어갔다. “그것은 두 종족(이스라엘-아일랜드)의 서사시인 동시에 하루 동안에 일어난 작은 이야기와 인간 육체의 순환을 담고 있다”는 조이스의 말처럼, 각 장의 표제와 장면은 인간의 신체 기관과 연관된다. 이 소설 자체가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래서일까.

그는 자전적 경험을 자주 활용했지만 같은 모티프도 작품에 따라 다르게 변용했다. 『더블린 사람들』의 단편에 나오는 인물이나 삽화가 장편 속에 다시 등장하기도 한다. 아일랜드의 신화, 종교, 철학 등은 물론이고 유럽의 다양한 문학, 연극, 음악, 회화 등이 수시로 인용되거나 패러디되고 있어서 각주 없이는 도저히 읽어낼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율리시스』는 그 모든 요소와 인물들을 하나로 녹여낸 거대한 용광로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의 여로를 따라가기 전에 소설 속에 나타난 두 사람의 동선을 정리해본다. 1904년 6월 16일 오전, 작가 지망생이자 초등학교 선생인 스티븐은 마텔로 탑에 살고 있는 친구 벅 멀리건을 만나고 오전 수업을 마치고 나와 샌디마운트 해변을 배회한다. 같은 시간대에 블룸은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목욕탕에 들렀다가 친구들과 함께 장례식에 참여한 뒤 자신이 일하는 신문사로 향한다.
마텔로 탑과 제임스 조이스 박물관 사진
△ 마텔로 탑과 제임스 조이스 박물관
마텔로 탑에 재현된 율리시스 1장의 무대 사진
△ 마텔로 탑에 재현된 율리시스 1장의 무대
이렇게 별개로 움직이던 두 사람의 동선이 오후부터 국립도서관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연결되기 시작한다.
블룸이 도서관에서 광고를 복사하고 나가면서 셰익스피어에 대한 얘기를 주고받던 스티븐 일행과 마주치게 된다. 도서관에서 나와 더블린 거리를 배회하던 블룸은 마사에게 연애편지를 쓰고 키어넌 주점에서 논쟁에 휘말린다. 그의 아내 몰리는 소프라노 가수로 수많은 남자들과 연애를 했고, 현재는 보일런과 만나고 있다. 블룸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타이피스트인 마사와 연애편지를 주고받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주점에서 위기를 모면하고 나온 블룸은 혼자 해변을 산책하고 밤 12시 코헨의 사창가에서 스티븐과 린치를 만난다. 그곳에서 춤을 추던 스티븐이 죽은 어머니의 환영에 놀라 전등을 깨고 뛰쳐나가는데, 거리의 수병에게 맞고 쓰러진 스티븐을 블룸이 도와준다. 스티븐의 모습에서 죽은 자식 루디의 환영을 본 블룸은 스티븐을 데리고 ‘역마차의 오두막’으로 간다. 새벽 2시 블룸의 집으로 걸어온 두 사람은 부엌에서 대화를 나눈다. 스티븐이 떠난 뒤 블룸은 아내에게 그날 일어났던 일을 이야기한다. 잠든 블룸 곁에서 아내 몰리가 독백 형식으로 젊은 시절의 사랑을 회상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스토리 라인 자체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그러나 인물들의 발걸음은 한없이 어긋나고 유예되고 흐트러진다. 마치 모래사장 위에 끊임없이 파도가 밀려오면서 조금씩 다른 궤적을 남기는 것처럼. 극적인 사건은 거의 일어나지 않지만 그 속에는 사랑과 욕망, 삶과 죽음, 일상과 초월 등을 오가는 진자가 섬세하게 흔들리고 있다. 그 진자운동은 다양한 형식실험이나 화법을 통해서만 포착되고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서술자와 화자의 경계를 넘나드는 자유간접화법이나, 환영과 관념이 아무 매개 없이 펼쳐지는 의식의 흐름기법 등이 자주 사용되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이런 다채로운 문체와 형식은 전혀 다른 독법으로 이 소설을 읽기를 요구한다.

어찌 보면 『율리시스』는 한 편의 서사시로 읽혀지기도 한다. 제임스 조이스는 소설가로 알려져 있지만, 『실내악』『한 푼짜리 시들』등의 시집을 펴낸 시인이기도 했다. 또한 피아노와 기타를 잘 다루었고 음악적 재능이 풍부했다. 그의 소설이 지닌 시적인 리듬감과 발성법은 시와 소설의 장르 구분이 별 의미가 없음을 말해준다. 그가 메모해 두었다가 작품에 즐겨 활용한 에피파니(epiphany) 역시 “기억할 만한 국면의 갑작스런 정신적 계시”로서 시적인 산물에 가깝다. 현대시가 탐구해 온 온갖 문체의 극한이 이미 그의 소설 속에 망라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그의 자신만만한 예언은 적중했다고 할 수 있다.
스티븐을 따라 걷다

『율리시스』첫 장의 배경인 샌디코브 해변과 마텔로 탑을 발견한 것은 우연한 행운이었다. 더블린 작가 박물관에서 < Mountains to Sea >라는 북페스티벌과 국제시축제 안내문을 보고, 그 길로 무작정 버스를 탔다. 행사가 열리는 던 레어리는 더블린에서 버스로 40분쯤 거리에 있는 아름다운 항구도시였다. 종점에 내리니 바닷가에 꽤 멋진 파빌리온 극장이 보였다. 북페스티벌 오프닝 행사로 맨부커상을 받은 소설가 하워드 제이콥슨(Howard Jacobson)과 젊은 아일랜드 소설가 폴 머레이(Paul Murray)의 낭독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낭독회 시간이 가까워오자 극장 로비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일랜드식 발음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낭독회보다 오히려 사람 구경하는 게 더 흥미로웠다. 독특한 옷차림을 한 예술가들과 지적인 교양이 넘치는 아일랜드인을 한곳에 모아놓은 것 같았다. 아일랜드 문화귀족들의 표정과 눈빛은 거리나 버스에서 만난 시민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들은 애비(Abbey) 극장을 세웠던 민족시인 예이츠를 비롯해 소설가 오스카 와일드,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의 후예들처럼 보였다.

지역의 안내판을 보다가 마텔로 탑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행사장에서 빠져나왔을 때는 이미 주위가 어두워져가고 있었다. 탑까지는 샌디코브(sandycove) 해변을 따라 한 시간 가까이 걸어야 했다. 중간에 ‘제임스 조이스 탑’이라고 적힌 도로 표지판이 보였다. 스티븐이 근무했던 초등학교 이름인 ‘달키’라는 지명도 보였다. 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진 뒤였다. 원통형의 탑과 옆에 딸린 작은 창고는 오늘날 제임스 조이스 박물관이 되었지만, 개관시간이 지나 내부를 볼 수 없었다.
블룸스데이 광고 포스터
△ 블룸스데이 광고 포스터
할 수 없이 다음날 마텔로 탑을 다시 찾았다. 박물관 규모는 작아도 육필원고, 사진, 편지, 메모, 초상, 유품, 초판본 등 흥미로운 전시물이 많았다. 벽에는 해마다 열리는 블룸스데이 포스터들이 붙어 있고, 다양한 언어로 번역된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들이 책장에 가득했다. 1932년에 다섯 권으로 번역된 『율리시스』의 일본어판도 보였다. 미국에서 1934년, 영국에서 1936년에 초판이 출간된 걸 감안하면, 번역에 관한 일본인들의 관심과 노력이 놀라웠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의 1930년대 소설에 등장하는 ‘산책자’가 그 일본어판과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과 이상의 『날개』 등의 주인공은 어쩐지 블룸을 연상하게 한다. 그들이 이 소설을 일본어판으로 읽었든 안 읽었든, 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무기력한 일상과 사변은 아일랜드 지식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조이스가 1909년 잠시 고국에 돌아와 ‘Volta Cinema’라는 더블린 최초의 영화관을 운영했다는 사실도 자료사진을 통해 알게 되었다.
1932년에 나온 율리시스 일본어판 사진
△ 1932년에 나온 율리시스 일본어판 사진
마텔로 탑 내부는 눅눅한 냄새와 습기로 가득했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니 2층에는 소설 도입부에 등장하는 방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바다 쪽으로 난 작은 창문, 선반 위의 그릇들, 작은 난로와 허름한 침대, 책상 위에 놓인 책, 의자에 걸쳐진 검은 외투, 낡은 거울과 세면대…… 금방이라도 벅 멀리건이 면도기와 물종지를 들고 나타날 것 같았다. 조이스는 실제로 이 탑에서 의대생 친구와 캠핑을 했던 적이 있다고 한다. 마텔로 탑에서 노라에게 쓴 편지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었는데,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이 1904년 6월이고, 편지를 쓴 것이 9월, 사랑의 도피를 떠난 것이 10월이니 아주 빠른 속도로 연애가 진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마텔로 탑에서 아침을 먹은 뒤 스티븐은 학교로 가고 벅 멀리건은 수영하러 바닷가로 내려간다. 책을 읽으면서 아침부터 무슨 수영인가 싶었는데, 그곳에 가보니 궁금증이 이내 풀렸다. 탑 근처에 있는 ‘forty foot’라는 구역에서 마을 사람들이 아침이든 밤이든 수영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꽤 쌀쌀한 날씨에 어린아이부터 노인들까지 수영팬티만 입고 다니는 모습을 보며 아일랜드가 과연 오랜 해양국가라는 걸 실감했다. 몇 월까지 수영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일 년 내내’라고 대답했다. 특히 크리스마스 무렵 눈 내리는 바다에서 수영하는 재미가 끝내준다며 한 노인은 활짝 웃었다.
블룸을 따라 걷다

시내로 돌아와 이번엔 블룸의 행적을 따라 걸었다. 더블린은 그리 큰 도시가 아니어서 번화가인 오코넬 거리, 트리니티 대학, 리피 강변 등은 여러 번 지나치는 지점들이다. 동네 하천쯤 되어 보이는 리피 강을 따라 걷다보면 ‘기네스’ 간판을 내 건 펍들이 눈에 많이 띄고, 트리니티 대학 주변에는 국립박물관, 미술관, 도서관 등이 밀집해 있다. 서울 명동과 비슷한 그래프톤 거리나 템플바 지구도 대학가와 인접해 있고, 『걸리버 여행기』를 쓴 조너선 스위프트가 사제로 있었던 성 패트릭 성당도 거기서 멀지 않다.
더블린 중심가의 제임스 조이스 입상 사진
△ 더블린 중심가의 제임스 조이스 입상
보도블럭 위에서 발견한 율리시스 동판 사진
△ 보도블럭 위에서 발견한 율리시스 동판
예이츠 전시가 열리고 있는 국립도서관
△ 예이츠 전시가 열리고 있는 국립도서관
오전에는 트리니티 대학의 유서 깊은 건물과 기념물들을 둘러보는 투어에 참여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가장 중요한 명물은 보지 못했다. 9세기에 스코틀랜드 수도승들에 의해 만들어진 켈스서(Book of Kells)와 고문서가 소장된 65m의 긴 방을 보기 위해 한 시간 이상 줄을 서야 했기 때문이다. 인근의 국립도서관에서는 예이츠와 관련된 전시와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애비 극장에서는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연극으로 만들어져 상연 중이었고, 제임스 조이스의 단편 「죽은 이들」을 각색한 연극도 12월부터 상연될 예정이었다. 수많은 작가를 배출한 도시답게 더블린은 문학과 관련된 전시나 공연이 풍성했다.

제한된 시간에 볼거리가 많아 마음은 급했지만 나는 블룸처럼 최대한 천천히 걸어 다녔다. 도심에서 ‘Dublin Literary Pub Crawl’이라는 팻말을 발견하고 따라가 보니, ‘Bailey’라는 펍이 보였다. 그곳에 블룸가의 문짝이 보관되어 있다는 걸 읽은 기억이 나서 물었더니, 리모델링하면서 제임스 조이스 박물관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그제서야 전날 마텔로 탑에서 보았던 문짝이 생각났다. 조이스의 커다란 초상화 아래서 아일랜드 아가씨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고, 바에는 블룸과 비슷한 연배의 한 남자가 앉아 우두커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벽면에는 ‘제임스 조이스 펍 상’ 동판과 더블린이 배출한 작가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전통 있고 괜찮은 펍들을 선정해서 제임스 조이스 초상과 사인을 넣은 동판을 걸어주는 모양이다. 아마도 이 근처가 조이스가 즐겨 다니던 펍들이 모여 있고 주인공 블룸이 점심을 먹고 산책하며 생각에 잠겼던 장소들이었던 것 같다.
베일리 펍의 내부 모습 사진
△ 베일리 펍의 내부 모습
유화로 그려진 아일랜드 작가들의 초상 사진
△ 유화로 그려진 아일랜드 작가들의 초상
베일리에서 차를 한 잔 하고 더블린 작가박물관으로 갔다. 파르넬 스퀘어 앞에 더블린 작가박물관, 아일랜드 작가센터, 더블린 시립미술관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 작가박물관에는 더블린 출신 작가들의 초상화, 편지, 노트, 타자기 등이 전시되어 있을 뿐 아니라 시기별로 자료가 잘 정리되어 있어서 아일랜드 문학의 흐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첫날 제대로 둘러보지 못한 자료들을 찬찬히 읽어보면서 아일랜드문학이 영국문학과 태생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음을 절감했다. 아일랜드의 문학은 늘 배고픈 자의 문학이었고 자유를 빼앗긴 자의 문학이었다. 대기근과 식민지 등을 겪으면서 역설적으로 문학의 꽃은 더 화려하게 피어날 수 있었다.

더블린 작가박물관에서 나와 배회하다가 다시 펍 골목으로 발길을 돌렸다. 유흥가의 골목들은 밤늦게까지 술 마시는 젊은이들로 흥성거렸다. 펍을 지나지 않고서는 더블린을 통과할 수 없다는 조이스의 말처럼 ‘기네스’와 ‘펍’을 빼놓고 아일랜드를 이야기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고 보니 『더블린 사람들』에 실린 거의 모든 단편에 술이나 술집이 등장하고, 『율리시스』의 중요한 사건들도 유흥가나 사창가에서 일어났다.
제임스 조이스 펍 상 동판 사진
△ 제임스 조이스 펍 상 동판
조이스가 즐겨 다녔다는 펍 ‘stag's head’를 어렵사리 찾아냈다.
조금 쇠락한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입구에는 역시 ‘제임스 조이스 펍 상’ 동판이 걸려 있었다.
지금은 이 전통적인 펍보다는 젊은 취향의 맞은편 펍이 더 성황이었다. 밤이 깊을수록 사람들이 늘어났고, 술잔을 들고 골목에서 떠들어대는 젊은이들과 끌어안고 있는 연인들도 여기저기 보였다.

낮에는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던 더블린이 갑자기 빠른 맥박 속에서 살아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펍의 작은 무대에서 두세 곡 정도 부른 가수들은 기타를 메고 또 다른 무대를 찾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더블린의 펍을 순례하고 밤길을 걷고 있는데, 보도블록 위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게 보였다. 네모난 동판에 『율리시스』의 한 구절과 블룸이 걷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걸어가던 블룸이 나에게 ‘역마차의 오두막’으로 가서 따뜻한 차라도 한 잔 하자고 말할 것 같았다.
리피 강변의 야경 사진
△ 리피 강변의 야경
나희덕_시인.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시집『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야생사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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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3-10-25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