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의 여로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

제프리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 중세 순례자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캔터베리로 가는 길”
중세시대 영국인들의 순례가 시작되던 서더크(Southwark)를 찾아간 것은 공교롭게도 사월의 첫날이었다.
제프리 초서(Geoffrey Chaucer, 1340-1400)가 『캔터베리 이야기』의 프롤로그에서 사람들은 성지순례를 떠나기 원한다고 했던 것처럼.

“사월의 달콤한 소나기가 삼월의 가뭄을 / 뿌리까지 깊이 꿰뚫을 때”
물론 영국문학에서 사월이 화창한 생명의 계절로만 묘사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월은 엘리어트의 『황무지』에서 ‘가장 잔인한 달’로, 조지 오웰의 『1984』에서 ‘밝고 차가운 날’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 잔인함이나 불길함마저도 사월의 봄기운이 자연과 사람의 내면을 흔들어 깨우는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감지된 것이 아닐까 싶다.

초서가 살았던 중세에는 믿음의 표현이자 영적 성장의 계기로 성지순례가 유행이었다. 순례의 경로는 런던 서더크 성당에서 출발해서 다트포드(Dartford), 로체스터(Rochester), 시팅본(Sitting bourne)등을 거쳐 캔터베리(Canterbury) 성당으로 이어졌다. 서더크는 템즈강 남쪽에 위치해 있는데, 좁고 오래된 골목들이 구불구불 이어지고 있어서 강 북쪽보다 서민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캔터베리 성당 전경
『캔터베리 이야기』는 순례를 떠나기 전날 밤 서더크의 타바드 여관(Tabard Inn)에 모여든 스물아홉 명의 사람들이 순례를 가는 동안 지루함 을 달래기 위해 각자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는 가장 재미있고 교훈적인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에게 돌아온 후에 저녁식사를 대접하겠다는 여관 주인의 제안에 따른 것이다. 순례자들의 계층이나 성격이 다른 만큼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내용도 다양하고 흥미롭다.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하기 위해 마상시합을 벌이는 기사의 이야기, 늙은 목수의 아내가 하숙생인 옥스퍼드 대학생과 연애하면서 남편을 골탕 먹이는 방앗간 주인의 이야기, 다섯 번이나 결혼하고도 여성이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하는 바쓰의 여장부 이야기 등은 엄숙한 중세에 씌어졌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대담하고 외설적이기까지 하다.

이 작품의 매력은 형식과 구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화자가 바뀔 때마다 어법과 문체가 달리 구사되기 때문에 목소리의 개성과 실감이 잘 살아난다. 그리고 이야기를 단순히 나열해놓은 것이 아니라 인물들이 서로 질문을 던지거나 논쟁을 벌이게 함으로써 이야기들 사이의 유기성이 높은 편이다.

『캔터베리 이야기』가 복카치오의 『데카메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되 그보다 더 입체적인 작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결국 미완으로 남게 되었지만, 이 작품은 방대한 분량과 스케일, 독특한 액자식 구성, 다양한 화자들의 목소리, 당대 풍속에 관한 실감 있는 묘사, 시와 이야기의 자연스러운 결합 등에 힘입어 꾸준한 사랑을 받아왔다.
△시인 '존 가우어'의 무덤
얼핏 재미 삼아 풀어놓는 만담처럼 보여도 중세의 타락한 사회 풍속이나 종교적 세태를 신랄하게 풍자하는 대목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바쓰의 여장부는 다양한 문헌들을 인용하면서 그것들이 얼마나 남성 중심적인 편견으로 가득한가를 설파한다.

그녀의 두 번째 이야기에서도 “모든 여자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남편을 지배하는 것”이라는 페미니즘적 전언이 들어 있다.
그런가 하면 면죄부 판매자는 ‘모든 악의 근원은 탐욕’이라는 설교를 통해 자신이 얼마나 돈을 잘 거두어들이는지를 보여주려다가 오히려 여관 주인에게 욕을 먹는다.
이렇게 저주와 논박을 주고받으면서도 그들은 이내 어울려 에일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다음날의 순례를 이어간다.

서더크 성당에서 『캔터베리 이야기』와 직결된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었지만, 초서와 셰익스피어의 기념물, 그리고 초서와 같은 시대의 시인 존 가우어의 무덤이 남아 있었다. 자신이 쓴 책 세 권을 베고 누워 있는 가우어의 모습과 그 맞은편에 누워 있는 셰익스피어의 모습은 마치 제단을 지키는 두 마리 사자 같았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셰익스피어 전용극장인 글로브(Globe)가 있다. 셰익스피어의 등 뒤로 당시 극장 모습이 보이는데, 현재의 모습도 그가 활동하던 16세기 후반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라고 한다. 글로브 극장의 재건축에 감사한다는 팻말과 함께 셰익스피어의 동생 에드먼드가 여기 묻혀 있다는 설명이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성당과 극장의 관계가 밀접했음을 알 수 있다.
△왼쪽에서부터) 셰익스피어 대리석 입상 / 초서의 무덤 / 사원 바닥에 있는 시인들의 기념석
“전통과 현대, 왕정과 민주주의.
두 얼굴을 독특한 방식으로 공존시킨 영국”


템즈강 북쪽으로 오면, 거대한 짐승처럼 빛나는 황금색 빅벤과 그것이 거느린 그림자처럼 웨스트민스터 사원이 있다. 국회의사당으로 쓰고 있는 빅벤이 현대 의회정치의 중심이라면,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유구한 왕정시대의 역사가 집약되어 있는 상징적 공간이다.

두 건물이 나란히 서 있듯이 영국은 오랜 세월 전통과 현대, 왕정과 민주주의라는 상반된 두 얼굴을 독특한 방식으로 공존시켜온 나라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지금도 하루에 한 번씩 예배가 열리고 왕실의 중요한 의식이 치러지는 곳이다. 역대 수많은 왕과 왕비, 작가와 사제, 과학자 등이 안장되어 있는 거대한 공동묘지이기도 하다. ‘메멘토모리’라는 중세의 전언처럼, 그들에게 일상과 종교는 죽음을 기억하고 죽음과 공생하면서 이어져 왔음을 실감하게 된다.

왕족들의 호화로운 무덤과 기념비를 지나면 ‘시인들의 코너(The Poets' Corner)’에 이르게 된다. ‘영문학의 아버지’인 초서는 이 사원에 처음으로 안장된 작가이며, 그 후로 40명이 넘는 작가들이 묻혔고 60명이 넘는 작가들의 기념물이 남아 있다. 사실 초서가 여기에 안장된 것은 문학적 공적 때문이 아니라 당시 웨스트민스터 궁전의 현장감독이자 관리로 일했던 경력 덕분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왕궁이나 귀족들과 인연을 맺으면서 세속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공직에서 물러난 말년에는 작가로서 『캔터베리 이야기』를 집필하는 데 공력을 기울였다.초서 다음으로 ‘시인들의 코너’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역시 윌리엄 셰익스피어다. 셰익스피어 대리석 입상의 손가락은 그의 마지막 희곡 『 템페스트』의 한 대목을 가리키고 있고, 그의 눈길이 닿는 바닥에는 배우 로렌스 올리버의 이름이 적혀 있다.

셰익스피어 왼편으로 워즈워드의 입상이 보이고, 그 밖에도 사원 바닥과 스테인드글라스에는 엘리어트, 오든, 바이런, 브라우닝, 디킨슨, 조이스, 휴즈 등의 이름과 생몰연대가 새겨져 있다. ‘시인들의 코너’는 작은 방이지만, 그야말로 압축된 영국문학사를 보는 것 같았다.

“민중의 낭만적 사랑과 유머를 담은 캔터베리 이야기”

캔터베리를 향해 또 다른 순례를 떠난 것은 그로부터 열흘 뒤였다. 아니, 700페이지 가까운 『캔터베리 이야기』를 읽는 동안 나는 이미 그들의 순례에내내 동행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다양한 등장인물들과 함께 말을 타고 중세의 여러 도시와 마을을 다니며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말이다. 런던에서 자동차로는 두 시간 정도 거리지만, 당시에 걷거나 말을 타고 캔터베리에 이르려면 며칠은 족히 걸렸으리라.

캔터베리 성당은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고딕양식의 성당으로, 작은 도시 어디에서나 그 첨탑을 볼 수 있었다. 이곳이 영국의 성지가 된 것은 헨리 2세에게 죽임을 당한 토마스 베켓 성인 때문이다. 왕과의 타협을 거절하고 교회의 독립성을 지키다 희생당한 그를 기리기 위해 수많은 순례자들의 발길이 이곳을 향했던 것이다. 성당에 있던 무덤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지만, 그의 유해가 있던 자리에는 지금도 커다란 초 한 자루가 타오르고 있었다.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가 쓰인 시기는 토마스 베켓의 순교로부터 두 세기가 지나서였다. 신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초서는 죽기 전에 이 작품 중에서 지나치게 세속에 기울어진 몇몇 이야기들을 태워 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런 세속성이야말로 이 작품이 딱딱한 교훈조의 설교에서 벗어나 당대의 종교적 관념이나 생활상을 리얼하게 보여주도록 한 힘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랜 궁정생활에도 불구하고 그가 시인으로서 주목한 세계는 우아한 귀족사회가 아니라 외양간 냄새나는 평민들의 일상이었다.

초서가 살았던 시대는 밖으로는 프랑스와 백년전쟁을 치러야 했으며, 안으로는 흑사병이 창궐하고 농민반란이 번져가던 격변기였다. 그러나 『캔터베리 이야기』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비극적 시대상이 아니라 민중의 낭만적 사랑과 건강한 유머다.
△왼쪽에서부터) 캔터베리이야기 책과 인형들 / '캔터버리이야기 방문센터' 바쓰의 여장부 코너 / 조셉 콘래드의 서재
성당에서 나와 ‘캔터베리 이야기 방문센터’에 들렀다. 작품의 몇 대목을 세트로 재현해서 방문자들이 극적으로 체험하도록 만들어진 곳이었다. 성우의 목소리와 함께 영상과 음향, 지독한 오물냄새 등이 실감을 더해 주었다. 스무 개 남짓한 이야기들 중에서 기사, 방앗간 주인, 바쓰의 여장부, 수녀원 신부, 면죄부 판매자 등을 중심으로 프로그램이 짜여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캔터베리 박물관으로 걸어가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박물관에는 캔터베리의 역사, 문화, 예술 등이 비교적 잘 정리되어 있었다. 700년경 바이킹 문화에서부터 앵글로색슨족, 노르만족, 빅토리아시대, 세계대전 등을 거치면서 이 지역이 어떻게 변모해 왔는지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 조셉 콘래드의 흉상과 집필실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의외의 수확이었다.

콘래드는 원래 폴란드 사람이지만 선원생활 끝에 캔터베리에 정착해 소설을 썼기에 그의 유품과 유골은 여기에 남겨졌다. 그 역시 머나먼 바다를 건너 이곳에 문학의 닻을 내린 순례자였던 셈이다.

“사월의 순례는 이렇게 끝이 났다.”

차를 몰고 돌아오는 길에 순례의 몇몇 이미지들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 이미지들은 높다란 첨탑이나 화려하게 장식된 성당과 무덤이 아니었다. 도심의 좁고 지저분한 뒷골목, 공사 중인 다리의 녹슨 난간, 성당 문 앞에 앉아 있던 늙은 고양이의 눈빛, 서더크 성당 제단의 절규하는 예수상, 그 전신에 꽂힌 수많은 못들, 웨스트민스터 사원 바닥에서 사람들의 발에 밟히고 있는 시인들의 이름, 캔터베리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웃음소리, 조셉 콘래드의 책상 위에 놓인 낡은 타자기…

결국 이런 것들을 향해 고단한 발길을 옮기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는 생각이 든다.

『캔터베리 이야기』에서 중얼중얼 새어나오는 목소리를 따라 걷고 있는 동안 나는 잠시 중8동안어느 언덕을 넘고 있는 것 같았다. 순례란 성지를 찾아 떠나는 긴 여행이지만, 그들은 또한 이렇게 말해주었다. 누추하고 냄새나는 일상이야말로 우리가 하루하루 새롭게 시작하는 성지순례라고.
나희덕_시인.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시집『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야생사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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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3-09-28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