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의 여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雪國)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시마무라와 코마코의 발자국을 따라서...
“얼굴 그리고 목소리”
눈 덮인 산 풍경
1999년 1월 31일,
게이샤 출신의 평범한 할머니 한 분이 세상을 떠났다.
고다카 기쿠(小高キク), 향년 84세.
병석에 누워서도 책 읽기를 즐겨했다.
간호원이 지나가다 무심코 묻는다.
“연애소설이라도 읽으시나요?”
할머니는 읽던 책을 내려놓고 간호원을 빤히 올려다보며 대답한다.
“연애는 읽는 게 아니라 하는 거유.”
말하는 재치가 남다르다.
온천으로 유명한 니가타의 유자와에서 20대 중반까지 게이샤 생활을 한 이 할머니는 1934년 이제 막 스무 살로 접어드는 겨울에 소설을 쓰러 온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1899-1972)와 운명적으로 만났다. 그리고 거기서 『설국(雪國)』이 탄생하였다. 게이샤로서 이름은 마츠에(松榮)였다. 마츠에는 『설국』의 주인공 고마코의 모델로 알려져 있다.
여자의 인상은 뜻밖에 청결했다. 발가락 밑의 옴쏙 들어간 곳까지도 깨끗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온천 여관에서 남자 주인공 시마무라가 고마코를 처음 만나는 장면이다. 더 뒤로 가면 보다 상세한 묘사가 나온다. 날씬하면서도 오똑하게 솟은 코, 아름다운 자줏빛 환형동물의 테처럼 매끄러운 입술, 약간 밑으로 처진 듯한 눈썹, 아래로 눈초리가 치켜 붙지도 처지지도 않아서, 일부러 똑바로 그려놓은 듯한 눈, 산 빛이 물들었다고도 할 수 있는 백합이나 양파의 구근을 벗겨놓은 듯한 싱싱한 살결. 그리고 이 모습을 한마디로 ‘밝고 깨끗했다’라고 맺는다.
온천 여관 실내 풍경
시마무라는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여행과 무용공부를 즐기는 사람이다. 고마코는 도회지에 나가 게이샤가 되고, 기차가 다니게 되면서 번성해진 온천 마을에 와서 일을 하는 중이었다.
소설 속에서 마을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유자와가 그 무대임은 확실하다. 두 사람의 첫 데이트는 시마무라가 묵는 여관 아래 삼나무 숲 속에 있는 신사(神社)에서 시작한다. “여자는 얼른 돌아서서 삼나무 숲속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그는 말없이 따라갔다. 신사였다.  이끼가 돋아난 돌사자 옆의 번듯한 바위에 가서 여자는 앉았다”는 대목에서 나오는 신사, 돌사자, 번듯한 바위는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또한 유자와 온천과 게이샤 마츠에를 소설의 소재로서 인정하고 있다. 다만 실재와 소설 속의 그들을 굳이 혼동하지는 말아 달라고 말할 뿐이다. 마츠에는 열세 살이던 1928년에 유자와로 왔다가, 너무 한촌(寒村)이라 자신이 처음 게이샤가 된 이 웃의 나가오카  (長岡)로 돌아갔는데, 1932년에 다시 이곳으로 발길을 옮긴다. 실은 1931년 시미즈 터널이 뚫리고 도쿄로부터 철도가 연결되자 온천과 스키 관광객이 몰리면서 번성해졌기 때문이다.
철로 풍경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나라였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소설 『설국』의 저 유명한 도입부이다. 도쿄 역을 출발한 기차가 사이타마현을 지나 군마현과 니이가타현 사이의 경계에 서면 무슨 장벽 같은 거대한 산 덩어리가 앞을 가로 막는다. 이 장벽을 넘을 수 없어 기차는 13km의 굴을 뚫고 달려가는 것이다. ‘국경의 긴 터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리고 거기서 바로 ‘눈의 나라(雪國)’가 시작된다.
터널을 벗어나자마자 처음 만나는 신호소, 이제는 츠지타루라는 간이역으로 바뀌어 있다.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 요코가 창문에다 얼굴을 내밀고 늙은 역장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곧 튀어나올 것만 같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유자와 온천을 찾은 해는 1934년, 게이샤 마츠에가 이곳으로 다시 온 지 2년 뒤였다. 마츠에는 가와바타를 지극한 정성으로 모셨다. 심지어 아침 일찍 눈 쌓인 언덕을 기어올라 가와바타의 방으로 가서 제 일이 아닌데도 몸소 불을 피우고 목욕물을 데우곤 했다.
『설국』에서 고마코가 하던 대로다.
소설 『설국』은 10여 편의 단편이 연작소설처럼 이어져 있다. 처음 발표한 두 편이 ‘저녁 풍경의 거울’과 ‘하얀 아침의 거울’이었다. 1935년 벽두였다. 게이샤 마츠에는 책읽기를 즐겨 밤늦게까지 회중전등을 한 손에 들고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나 도쿄에서 나오는 문학잡지에 자신을 모델로 한 소설이 발표되었다는 사실은 몰랐다. 소설이 점차 알려지면서 주변 사람으로부터 듣고 처음에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믿어야 할지 모르지만,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이 때 사과의 편지와 함께 제1회분의 육필 원고를 마츠에에게 보냈다고 한다. 마츠에의 남편 고다카 히사오(小高久雄) 씨의 증언이다. 1937년까지 유자와를 오가던 가와바타가 발길을 끊은 다음, 마츠에는 3년 뒤 게이샤를 그만 두었고, 고향으로 돌아가 1942년 히사오 씨와 결혼하였다. ‘소설이지만 거의 실제 이야기’라고 남편에게만 고백했다는데, 시시콜콜 자신의 행적이 소설로 나온 이상 게이샤로 계속 일하기가 어려웠을지 모르겠다.

편지와 원고는 어떻게 되었을까? 게이샤를 그만 두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자신이 쓰던 일기(이 또한 소설에 나오는 대로다)와 함께 모두 불태웠다고 한다.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면서 이때까지의 일들을 모두 청산한다”는 뜻이었다고 히사오씨는 증언한다. 마츠에 아니 오다카 기쿠는 그 후 30년 만에 니가타를 찾은 가와바타와 단 한번 만났다.
여관 실외 풍경
소설 속의 주인공 고마코는 당돌하고도 격정적이다. 도리어 손님인 시마무라가 당혹스러워 할 정도이다. 게이샤라는 신분이 그렇게 만들었을 수 있으나, 고마코가 지닌 본디 개성이기도 했겠고, 그런 모습이 독자를 사로잡았으리라. 소설의 무대가 되었던 당시의 다카한 여관은 지금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지만 자리는 그대로이다. 가와바타가 묵었던 방이 옛날처럼 재현되어 바로 그 위치에 있고, 방 주변에는 몇몇 자료가 걸려 있는데, 거기서 게이샤 마츠에의 얼굴을 사진으로 볼 수 있었다. 소설에서 그리고 있는 고마코의 인상이 뚜렷이 떠오른다.
그런데 『설국』에서 진정 가와바타가 애정 어리게 그린 인물은 따로 있다. 춤 선생의 병든 아들을 극진히 모시다 화재로 죽는 요코이다. 국경을 넘어가는 기차 안에서 시마무라가 처음 만난 여자. 창문으로 역장을 불러 말을 나누는 요코의 목소리를 시마무라는, “슬프도록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높은 울림이 고스란히 밤의 눈을 통해 메아리쳐 오는 듯했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눈을 보면서 “뭔가 서늘하게 찌르는 듯한 처녀의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한다. 시마무라의 생각은 곧 가와바타의 생각이었으리라.

그런데 요코는 실제 인물인지 확실하지 않다. 가와바타가 만든 소설 속의 인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면서 소설에서는 줄곧 조연의 자리인데, 시마무라가 어두워져 가는 기차의 차창을 통해 비친 요코의 얼굴을 훔쳐보면서, “거울 속에는 저녁 풍경이 흘렀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가슴이 떨릴 정도였다”고 독백하는 대목을 만나다 보면 뜻밖에 이 소설의 처음 제목 ‘저녁 풍경의 거울’이 그대로 조합되고 있으니,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까.
고운기_시인. 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메이지대학 객원교수.
시집『나는 이 거리의 문법을 모른다』
저서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일연을 묻는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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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3-09-14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