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역사

북한산 비석거리에 숨어있는 이괄의 한(恨)

북한산 비석거리에 숨어있는 이괄의 한(恨)
북한산 비석거리
북한산 비석거리 찾아가는 길
1. 구파발역 2번 출구 앞 버스 정류장에서 704번 버스에 승차., 2. 효자동마을회관 정류장에서 하차한다., 3. 북한천다리 출발점에서 중성문까지 걸어 올라간다., 4. 중성문을 지나 북한산 길을 올라가면 중흥사지 도착!
아빠:힘내! 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가면 비석들이 나올거야!, 딸:산속에 웬 비석이요? 공동묘지 가는 거예요!?
헉...헉... 아빠, 잠시만 쉬었다 가요.
아빠 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가면 비석들이 나올거야!
이런 산속에 웬 비석이요? 공동묘지라도 가는 거예요?
《북한산성 탐방지원센터》에서 출발하여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서 《중성문》을 지나 《대동문》 방향으로 조금만 더 길을 올라가다 보면 《태고사》에 조금 못미쳐 중흥사터 입구에 비석들이 모여있는 속칭 《중흥사지 비석거리》가 나오는데, 《탐방지원센터》로부터 약 3.5km 지점이다. 경사도가 그리 심하지 않아서 약간 느린 걸음으로 걸어도 약 90분 정도면 도착한다.
그런데 비석들의 내용을 읽어보면 백성을 어질게 다스린 벼슬아치를 표창하고 기리기 위해 세운 선정비 임을 알 수 있다. 그 증거가 되는 것이 바로 모든 비석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세 글자, '총융사(摠戎使)'다.
비석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세 글자, '총융사(摠戎使)'
《총융사》는 조선후기 5개의 중앙군영(오군영) 중의 하나로 인조 2년(1624년) 한양의 외곽인 경기일대의 경비를 위해 설치되었던 《총융청(摠戎廳)》의 수장인데 《관찰사》와 똑같은 종2품 벼슬이다. 그런데 이 곳에 유독 총융사의 선정비가 몰려있는 이유는 이 곳이 《북한산성행궁》으로 가는 길목이었을 뿐만 아니라, 관군 이외에 별도로 북한산성을 수비하던 승군의 총지휘부가 바로 옆 《중흥사》에 있어 가장 통행량이 빈번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총융청이 설치된 이유는 인조 임금 때 일어난 《이괄(李适)의 난》 때문이었다. 500년이 넘는 조선왕조 역사상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 때문에 임금이 수도 한양을 버리고 도망간 사례는 이괄의 난이 유일하다. 그만큼 이괄의 난은 조선정부에 큰 상처를 남겼다.
이괄 때문에 임금이 수도를 버리고 도망을 갔어요? 이괄의 난이 도대체 뭐예요?
아빠 이괄의 난에 대해서는 역사의 기록과 이괄 개인의 입장으로 나눠서 설명해줄게.
지금까지 이괄의 난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이괄이 인조반정 때 실질적인 공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1등공신이 아닌 2등 공신으로 책록되고, 더군다나 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부원수로 임명되어 한양이 아닌 변방에 부임하게 된 데 앙심을 품고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해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에 위와 같은 평가는 철저히 이괄의 입장이 무시된 채 일방적으로 서술된 것일 수 있다. 만약, 이괄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괄의 난은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
이괄은 원래 무과에 급제를 한 탁월한 무장출신이었다. 태안군수 등을 역임한 뒤 광해군 14년(1622년)에는 군사요충지인 함경도 북병영의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는데, 임지로 떠날 준비를 하던 중 반정세력의 권유로 인조반정(反正) 모의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런데 반정 거사 당일, 반군을 총지휘하기로 했던 김류(金瀏)가 반정계획이 일부 누설되었다는 이유로 망설이다가 제시간에 반정군의 진영에 도착하지 않았다. 결국 나머지 반정세력들은 이괄을 임시대장으로 선출해 병력을 재편했고, 반정은 이괄의 지휘 하에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인조반정은 표면적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가 즉위한 사건이다. 하지만 정권차원에서 보자면 인조를 내세운 《서인 및 남인》 연합정권이 광해군을 지지하는 《북인》 정권을 몰아낸 사건이다. 반정세력이 연합정권이었다는 점은 인조반정이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에 비해 대의명분이 부족했다는 점을 반증한다. 또한 연합정권이었기에 논공행상 과정에서도 불협화음이 많았는데, 결국에는 서인들이 남인들을 배제시키고 핵심권력을 모두 차지했다.
권력을 장악한 서인공신들은 반대 세력을 심하게 경계했는데, 반정 직후 김류, 이귀 등 서인공신들은 특히 이괄을 의도적으로 견제하고 배척했다. 무신 출신으로 반정에 참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괄이 그 공을 인정받아 권력을 차지하는 것에 불만을 가졌던 것이다. 반정에 대한 논공행상 과정에서 이괄이 실질적인 반정지도자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김류와 이귀 등 서인공신들보다 한 등급 아래인 정사(靖社,종묘사직을 평안하게 함)공신 2등에 봉해지는 데 그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여기서 잠깐]조선의 공신(功臣)들

공신(功臣)이란 국가나 왕실을 위하여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주던 칭호인데, 이는 중국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다. 공신이 기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의 개국공신인데, 조선시대에도 공신책록은 계속되었으며 《개국공신》부터 시작하여 왕자의 난, 계유정난, 중종반정과 인조반정 등 주요 정치적 사건에 공을 세운자들에게 공신책록이 되었다. 한편 정공신(또는 친공신)과는 별도로 원종공신(原從功臣,元從功臣)을 책록하였는데, 그들은 친공신(직접적인 공신)의 아래로, 보조적인 역할을 한 공신이었다. 아래는 주요 공신의 종류이다.

▶개국(開國)공신 : 1392년(태조 원년) 조선개국에 공이 많은 신하들 - 정도전 등
▶정사(定社)공신 : 1398년(정종 즉위년) 제1차 왕자의 난때의 공신 - 이방간, 이방원 등
▶좌명(佐命)공신 : 1400년(태종 원년) 제2차 왕자의 난때의 공신 - 민무구, 민무질 등
▶정난(靖難)공신 : 1453년(단종 원년) 계유정난(세조가 김종서 제거)때의 공신 - 수양대군 등
▶좌익(左翼)공신 : 1454년(세조 원년) 단종을 폐하고, 세조를 추대시킨 공신 - 한명회 등
▶적개(敵愾)공신 : 1467년(세조 13)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신 - 남이, 구성군 등
▶익대(翊戴)공신 : 1468년(예종 즉위년) 남이 등의 반역 혐의 처단한 공신 - 유자광 등
▶정국(靖國)공신 : 1506년(중종 원년) 중종반정 공신 - 박원종 등
▶호성(扈聖)공신 :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한 공신 - 이항복 등
▶선무(宣武)공신 :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나라를 중흥시킨 공신 - 원균, 이순신 등
▶정사(靖社)공신 : 1623년(인조 원년) 인조반정 공신 - 김류, 이귀 등
▶진무(振武)공신 :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을 평정한 공신 - 장만 등
딸:공을 세우고도 인정을 못 받았으니… 이괄 입장에서는 굉장히 억울했겠네요!
그랬겠지? 하지만 이괄은 상황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자리에서 다시 최선을 다했어.
이괄은 큰 불평 없이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임명되어 최전방 지역으로 부임했다. 당시 조선의 북방지역은 매우 강성해진 후금이 계속해서 힘을 키워나가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괄처럼 전략에 밝고 통솔력이 뛰어난 무장이 꼭 필요했다. 이괄은 그런 상황을 잘 파악했기 때문에 부임하자마자 자신의 병력을 열심히 훈련시켜 최정예 병력으로 만들었다.
전통적으로 조선의 전술은 견벽청야(堅壁淸野)라고 하여 주변에 적이 사용할 만한 모든 군수물자와 식량 등을 없앤 뒤 산성 속에 들어가서 장기 농성전을 전개해 적군을 지치게 만드는 전술을 사용해왔다. 하지만 이괄의 생각에는 '후금의 군대가 산성을 건드리지 않고 한양으로 곧바로 쳐들어간다면 오히려 더 큰 위험이 빠질 수도 있다'고 판단하여 적극적인 공격 전술로 군사들을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이괄의 이런 예상은 병자호란때 그대로 적중했는데,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할 시간이 없어서 남한산성으로 쫓겨갔고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중앙에 있던 서인세력은 이괄의 이런 군사조련 과정을 역모가 의심된다며 고변하였고, 인조는 역모죄 여부의 조사를 명분 삼아 이괄 대신 이괄의 외아들을 압송하기 위해 현지로 금부도사를 파견했다.
[이괄]공격 전술을 연마하라!!! 더 이상 산성에 숨어서 방어하는 전술로는 역부족이다…
[서인세력]무슨 군사 훈련을 저렇게 혹독하게 하는거야?, 역모다!!!!,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해!
우와~ 2등공신으로 떨어진 것도 억울한데, 이번에는 정상적인 업무수행을 역모로 몰다니!!!
아빠 토사구팽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지. 내가 이괄의 입장이라도 가만있지는 않았을 거야.
역모죄에 대한 조사는 결국 고문에 의한 죽음의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이괄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조정에서 파견된 금부도사 일행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괄은 항왜병(降倭兵) 130여 명을 선봉으로 삼고, 휘하의 전병력을 이끌고 평안도 영변을 출발하여 한양으로 진군하였는데, 병력손실을 염려해서 도원수 《장만》이 주둔하고 있던 평양은 우회했다. 장만은 이괄의 반란정보를 입수했지만 휘하의 군사로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도저히 이괄의 정예군의 상대가 되지 못함을 깨닫고는 정면승부는 피하고 각지의 관군을 끌어 모은 뒤 이괄의 뒤를 쫓았다.
[여기서 잠깐]항왜병과 김충선 장군

이괄이 선봉으로 삼은 항왜병은 임진왜란때 조선에 투항한 왜군을 뜻한다. (영화 《명량》 에도 등장하는 항왜 준사(俊沙)는 난중일기에도 기록되어 있는 실제인물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 중에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불만을 가진 자들이 꽤 많았는데 그들 중 상당수가 조선군에 투항했고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사람은 바로 김충선(金忠善) 장군이다.

김충선 장군은 본명은 사야가(沙也可)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좌선봉장으로 내침하였으나, 조선의 문물이 뛰어남을 흠모하여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朴晉)에게 귀순하였다. 임진왜란부터 병자호란까지 여러 차례 큰 공을 세워 정2품 정헌대부(正憲大夫)를 제수받았다. 도원수 권율, 어사 한준겸의 주청으로 '김해 김씨'성과 '충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는데 임금이 하사한 성씨라고 해서 사성 김해 김씨라고 부른다. 이괄의 난 때에도 부장(副將) 서아지(徐牙之)를 잡아 죽인 공으로 사패지(賜牌地)를 하사받았다.
그런데 이괄은 왜 하필이면 항왜병을 선봉으로 삼았을까? 그 이유는 인조실록에 자세히 나와있다.
인조 2년(1624) 2월 4일(무자) 4번째기사
▶ 정충신, 남이흥이 황주에서 적에게 대패하고 박영서가 죽다
정충신, 남이흥이 황주 신교에서 적(이괄의 반란군)과 싸워 크게 패하고 선봉장 박영서가 죽었다. 적이 관군이 뒤에 다가오는 것을 보고 곧바로 황주 길로 나아가는데, 정충신, 남이흥 등이 적과 교전하면서 사람을 시켜 역순(逆順)의 의리를 크게 외쳐, 와서 투항하여 죽음을 면하게 하니, 적의 5영(營)에 속한 군사 1천여 인이 일시에 흩어지고 적장 허전, 송립 등도 군전(軍前)에 와서 투항하였다. 항복받을 즈음에 관군이 소요하였는데, 적이 항왜(降倭)로 하여금 칼을 휘두르며 돌진하게 하니, 관군이 바라보고 흩어져 달아나서 드디어 후퇴하였다. ...(후략)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가장 무서워했던 것은 사실 '조총' 이 아닌 '일본도' 였다. 조총은 활에 비해서 사정거리도 짧고 재장전에 활보다 시간이 훨씬 더 많이 소요되기 때문에, 전투가 진행되면서 이런 조총의 특징을 파악한 뒤로는 조총에 대한 공포감은 많이 감소되었다. 하지만 일본도의 위력은 대단했다. 특히 일본은 오랜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근접전에 최적화된 일본도와 검술을 지니고 있었다. 일부 기록은 '우리는 칼집에서 칼을 꺼내기도 전에 적의 칼에 두동강이 났다'고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의 치열했던 전국시대를 경험한 항왜병들은 대부분 검술이 뛰어나고 조총을 잘 다루는 데다 죽음을 무릅쓰고 돌격하는 용맹한 자들이었기에 이괄은 휘하의 항왜병들에게 선봉을 맡겼고 그 효과를 톡톡히 보았다. 오죽하면 조선조정에서는 이괄 부대의 항왜병을 막기 위해 동래의 왜관에 머물고 있던 왜인들을 구원병으로 요청하려는 어처구니없는 계획까지 세웠을까!
인조 2년(1624) 2월 10일(갑오) 1번째기사
▶ 이경직을 청왜사(請倭使)로 삼아 구원을 청하려다 그만두다
(전략) ... "적(이괄의 반란군)이 항왜를 선봉으로 삼아 승세를 타고 저돌하니, 교련시키지 못한 군졸로서는 저항할 수 없는 것입니다. 동래(東萊)의 왜관(倭館)에 머물러 있는 왜인이 1천 인에 가깝다 하는데, 사신을 보내어 글을 전하여 굳이 청할 수만 있다면, 와서 이 적을 칠 것은 틀림없을 것입니다. ... (중략) ...
이경직이 떠나려 할 때 조정에 여쭙기를, "관왜(館倭)가 즉시 와서 구원하지 않고 도주(島主)에게 알린다면 반드시 지연될 것이고 반면에 대거로 몰려온다면 또한 어떻게 처치하겠습니까." 하였다. 영상 이원익이 그 말을 아뢰니 상이 대신을 불러 이르기를,
" ... (중략) ... 혹시 우리가 도움을 청함에 따라 병마(兵馬)를 많이 보내 오면 뜻밖의 환난(즉, 제2의 임진왜란)이 반드시 없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려우니, 보내지 말도록 하라."
[이괄]복수할거야!!! 모두 가만두지 않을테다!!, 감히 잠자는 사자의 콧털을 건드려?, 타앙! 탕!! 탕! 타앙! 탕!! 탕!
이런 식으로 이괄의 반란군은 이동경로 상에서 대항하는 관군들을 차례로 격파하고는 한양에 근접했고 이 소식을 접한 인조는 공주로 도망을 갔다. 이괄의 반란군은 마침내 한양에 입성해서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된 경복궁 자리에 주둔하였다. 한양을 접수한 이괄은 곧 선조의 아들 흥안군 이제(李堤)를 왕으로 추대하고, 새로운 행정 체제를 갖추려고 하였다.
이 무렵 이괄의 뒤를 쫓던 도원수 장만은 각지에서 규합한 대규모 관군을 이끌고 한양 근처에 도달했다.
이괄의 군대는 최정예이고 천하무적 항왜병까지 합류해 있는데, 관군이 상대가 되겠어요?
아빠 방심은 절대금물이라는 말 들어봤지?
장만이 생각하기에 개활지에서의 전면전과 같은 대등한 전투조건에서는 이괄의 정예군을 상대로 이기는 것은 승산이 너무 적었다. 그래서 장만이 선택한 작전은 유리한 지형의 이점을 최대한 이용하는 것이었고, 고심끝에 선택한 장소는 이괄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던 경복궁에서 가장 가까운 고개인 안산(鞍山,무악산)의 길마재(안현,鞍峴,무악재)였다.
[여기서 잠깐]길마재=무악재

길마재는 서대문구 봉원동에 있는 산 또는 고개를 가리키는데 산은 안산(鞍山) 또는 무악산(毋岳山)으로 불린다. 고개를 가리킬 때는 안현(鞍峴) 또는 무악재(毋岳峴)로도 불린다. 안산은 산의 모양이 길마(소의 등에 짐을 싣기 위해 얹는 일종의 안장)처럼 생겼다고 해서 한자로 안장 안(鞍)자를 써서 안산(鞍山)이라고 불렀다.

한편, 무악산은 원래 어미 모자를 쓰는 모악산(母岳山)이었는데, 서울의 진산인 삼각산(북한산)은 다른 이름으로 부아악(負兒嶽,아기 업은 산)이라고도 불렸다. 인수봉이 어린애를 업고 나가는 모양새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막기 위하여 길마재를 어머니의 산이란 뜻으로 모악이라 했다가 무악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때 부원수 정충신은 가장 먼저 길마재에 도착하자마자 정상으로 달려가서 봉수대를 점거한 뒤 평상시처럼 1개의 봉화만을 계속 올리도록 해서 이괄의 진영에서는 길마재가 탈취된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했다. (봉화가 1개면 평상시, 2개면 적의 발견, 3개면 적이 근접함, 4개면 국경침범, 5개면 교전중이라는 의미다.) 이괄은 초반에 연전연승한 것에 취해서 상대를 너무 얕보게 되었고, 방심한 상태에서 관군에게 길마재를 너무 쉽게 넘겨주었다.
이튿날이 되어서야 길마재가 탈취된 사실을 안 이괄은 항왜병을 앞세워 유리한 지형을 선점한 관군과 대접전을 벌였지만 결국 패하였고, 도망가던 중 배반한 부하장수들에게 살해당함으로써 조선을 흔들었던 이괄의 난은 허무하게 종지부를 찍었다.
반란군에 의해 한양이 점령된 이괄의 난은 조선 사회에 엄청나게 큰 파장을 몰고왔다. 이괄의 난 이후에 수도 방위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인조반정 이후에 국왕의 호위를 위해 설치된 《어영청(御營廳)》이 한양의 방위를 담당하는 중앙군으로 확대개편되면서 북한산성을 중심으로 한양의 북쪽을 방어하는 《총융청》이 신설되고, 뒤를 이어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한양의 남쪽을 방어하는 《수어청》이 추가로 만들어졌다.
또한 북방의 방어를 담당하던 최정예 군대가 반란과 그 진압을 위해 동원되면서 관서 지방의 방어 체제가 크게 약화되었는데, 결국 북방부대의 부재는 훗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불씨가 되고 말았다.
그럼 당시 이 일대는 군사지역이었겠네요! 지금은 등산객들이 참 많이 다니는 길목인데~
아빠 그렇지, 모르고 지나는 사람들도 많을 거야. 알고 보면 이 도시 곳곳에 숨은 역사들이 가득한데 말이지!
아빠랑 이렇게 이곳 저곳을 답사하면서 우리 역사를 참 많이 알게 된 것 같아요. 그런데 오늘이 마지막이라니, 아쉽네요.
우리 부녀는 그 동안 서울과 주변 도시 곳곳으로 숨어있는 역사를 찾아 다녔다. 처음엔 딸 아이의 사회과목 수행평가를 위해 시작한 기행이었지만, 교과서 밖의 실제 현장에서 눈으로 보고 느끼며 우리 역사를 즐길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휴일의 달콤한 늦잠을 포기하고 소중한 추억을 함께 해 준 딸 아이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북한산 비석거리에서 아빠와 딸
최동군(글로벌사이버대학교 문화콘텐츠학부 외래교수)
사진/그림
박동현(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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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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