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역사

경근당과 옥첩당에 숨어있는 조선왕족의 계보

경근당과 옥첩당에 숨어있는 조선왕족의 계보
경근당
경근당과 옥첩당 찾아가는 길 , 1. 안국역 1번 출구에서 풍문여자 고등학교 골목길로 들어간다., 2. 길을 따라 올라와 이화익 갤러리 바로 옆 사잇길로 들어간다., 3. 골목 길을 지나면 바로 보이는 종친부 경근당 도착!
아빠:[경근당과 옥첩당]이 두 곳은 조선왕실의 친족 관계 일을 맡아보던 곳들이란다., 딸:친족관계? 따로 관청을 둘 만큼 할 일이 많았나요?
아빠 이 곳은 조선왕실의 친족(親族)관계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의 하나인 종친부(宗親府)가 있던 곳인데 중앙의 큰 건물이 경근당(敬近堂)이고 옆의 부속 건물이 옥첩당(玉牒堂)이야. 원래 종친부는 이보다 훨씬 규모가 컸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건물의 많은 부분이 훼철되었고 지금은 이 두 건물만이 남아있지.
왕실의 친족관계, 쉽게 말하면 왕의 친척들 말씀이죠? 따로 관청을 둘 만큼 할 일이 많았나요?
혈연과 혼인으로 맺어진 사람이나 집단관계를 나타내는 말로써 보편적으로 쓰이는 말이 《친척》 또는 《친인척》이다. 이를 좀 더 세분화하면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나'를 기준으로 하여 아버지 쪽의 친가(親家, 또는 본가本家)를 말할 때는 내척(內戚)이라고 하고, 어머니 쪽의 외가(外家)를 지칭할 때는 외척(外戚)이라고 한다. 한편 혼인을 통해 아내 쪽의 처가(妻家) 또는 남편 쪽의 시가(媤家)가 추가될 때, 이를 '인척(姻戚)'이라 한다.
사극을 보면 대역죄를 진 죄인에게 《삼족을 멸하라》 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하는데, 이 때의 《삼족》이란 원래 《아버지, 아들, 손자》를 말하거나, 또는 《아버지의 형제자매, 아들의 형제자매, 손자의 형제자매》를 이르는 동성삼족(同姓三族)을 의미했다. 그런데 고려 후기부터 대체로 《친인척》으로 대표되는 《본가》, 《외가》, 《처가》의 삼족을 의미하는 것으로 확대해석되었다.
[여기서 잠깐]중국 역사상 최고의 멸족

중국의 경우에는 좀 더 스케일이 커서 《구족을 멸하라》라는 명령을 내리는 데, 역사상 남아있는 최고의 멸족기록은 10족이 멸문지화를 당한 《방효유》의 경우이다. 방효유(方孝孺)는 중국 명나라 초기의 학자인데 뛰어난 학식과 인품으로 이름을 떨쳤다. 1402년 연왕(燕王: 훗날 명나라의 제3대 황제인 영락제 / 우리나라의 세조에 비유될 수 있음)은 친조카로부터 황제자리를 찬탈한 뒤, 당시 조정내에서 덕망높은 방효유의 인정을 받고 싶은 맘에 즉위 조서를 쓸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방효유는 붓을 땅에 내던지며 죽음을 각오하고 거부하였다. 이에 연왕이 "구족이 멸문을 당하는 것도 두렵지 않느냐?"고 하니 방효유는 "설령 10족을 멸문한다해도 두렵지 않다!"고 답했다. 이에 분노한 연왕의 명령에 따라 기존의 《구족》에 방효유의 《문하생》들까지 더해 총 847명이 멸문지화를 당했다.
종친부는 조선시대 왕의 종친(부계(父系)의 친족)을 관리하던 부서인데,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종실제군(宗室諸君)에 관련된 일만을 관장했다. 따라서 왕의 전체 친인척을 관리한 것이 아니라 왕위계승서열에서 가까운 왕자들 및 그 후손들을 관리했다는 뜻이다. 종친부(宗親府)에 속하지 않는 종친과 외척에 대한 사무는 돈녕부(敦寧府)에서 처리하였고, 공주, 옹주 등과 혼인한 부마(駙馬)에 관한 일은 의빈부(儀賓府)에서 처리하였다.
종친부 건물인 경근당(敬近堂)은 왕과 가까운(近) 종친을 공경(敬)한다는 뜻이고, 옥첩당(玉牒堂)의 옥첩은 왕실의 계보를 가리키는 말이니 왕실의 족보와 관련된 일을 하는 곳이란 뜻이다. 경근당과 옥첩당은 두 건물이 복도로 연결되어 있는 구조인데 경근당 앞쪽의 드넓은 월대는 경근당의 위상을 높여주고 있다. 또한 경근당은 옥첩당보다 앞쪽에 배치가 되어 있을 뿐 아니라, 기단도 높고 정면 칸수도 더 많아서 두 건물 간의 위계질서를 한 눈에 알 수가 있다. 한편, 경근당과 옥첩당은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 앞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는 종친과 외척 및 인척, 부마, 상궁들은 건춘문으로 드나들게 했던 궁궐의 제도 때문이다.
경복궁, 건춘문, 종친부
딸:경근당과 옥첩당이 정말 복도 하나로 연결되어 있네요!, 두 건물 간에 오갈 일이 많았나 봐요!, 아빠:상대적으로 더 높고 큰 경근당이 본채, 옥첩당은 곁채라고 할 수 있지.
종친부에서 담당했던 업무의 세부내용을 살펴보면, 종부시(宗簿寺)의 기능을 일부 수용하여 역대 국왕의 계보와 초상화를 보관하고, 상의원(尙衣院)의 기능을 일부 흡수하여 국왕과 왕비의 의복을 관리했다. 종실 및 제군의 인사 문제와 이들간의 다툼 등에 관한 문제를 의논하고 처리하는 일도 종친부에서 맡았다.
역대 국왕의 계보라면 전주 이씨의 족보 말인가요?
아빠 아니야. 조선왕실의 족보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지!
조선왕실의 족보는 전주 이씨의 족보와는 완전히 다르다. 그리고 왕실의 족보는 무려 3가지의 종류가 있는데 선원록(璿源錄), 종친록(宗親錄), 유부록(類附錄)이 바로 그것이다.
원래 조선왕실의 족보가 처음부터 3가지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을 통해 무력으로 왕좌에 오른 태종은 자신의 사후에 혹시라도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날지도 모를 분쟁을 우려하여 1412년에 왕실 족보를 선원록, 종친록, 유부록의 세 가지로 분할하여 작성토록 명했다.
이때 《선원록》에는 전주이씨의 시조인 이한 (李翰)을 비롯하여 목조, 익조, 도조, 환조, 태조, 태종 자신까지의 직계만을 수록하고, 《종친록》에는 왕의 아들 중에서도 적자를 대상으로 하여 태조 이성계와 자신의 아들만을, 그리고 《유부록》에는 딸과 서자들을 수록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왕위계승 가능성의 범위를 선원록의 범주 안쪽으로 최대한 축소시켰다.
태종 12년(1412) 10월 26일(무인) 2번째기사
▶ 선원록, 종친록, 유부록을 만들다
선원록(璿源錄) 종친록(宗親錄) 유부록(類附錄)을 만들었다. 임금이 일찍이 하윤(河崙) 등과 의논하고, 이때에 이르러 이숙번, 황희, 이응을 불러 그들에게 비밀히 말하였다.
"이원계(李元桂)와 이화(李和)는 태조의 서형제(庶兄弟)이다. 만약 혼동하여 선원록에 올리면 후사(後嗣)는 어찌하겠는가? 마땅히 다시 족보(族譜)를 만들어 이를 기록하게 하라."
곧 3록(三錄)으로 나누어 조계(祖系,조상의 내려오는 계보)를 서술한 것은 '선원(璿源)'이라 하고, '종자(宗子, 종실의 남자 자손)'를 서술한 것은 '종친(宗親)'이라 하고, 종녀(宗女, 종실의 여자 자손)와 서얼(庶孼)을 서술한 것은 '유부(類附)'라 하여, 하나는 왕부(王府)에 간직하고, 하나는 동궁(東宮)에 간직하게 하였다. ... (후략)
이렇게 족보를 정리해놔야 나중에 내 후손들이 왕위 계승을 하는 데 문제가 없지!
선원록(璿源錄):전주이씨의 시조부터 태종까지의 직계 수록., 종친록(宗親錄):태조 이성계와 종실의 남자 자손(적자)만을 기록., 유부록(類附錄):종실의 여자와 서얼 자손을 기록.
아빠 그런데 왕족이면서도 왕실족보인 선원록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 무려 268년이나 기다린 사람들이 있었어.
268년씩이나요? 왜요? 뭔가 복잡한 절차라도 있나요?
왕족이면서도 왕족으로 인정받지 못해 무려 268년이나 기다린 사람들, 그들은 바로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회안대군 이방간(이성계의 4남, 태종 이방원(5남)의 바로 윗형)의 자손들이었다.
제1차 왕자의 난은 《이방원》이 주동이 되어 이복동생인 《방번》과 《방석》을 살해하고, 이성계의 2남인 《방과》를 왕(제2대 정종)으로 등극시킨 사건이다. (이성계의 장남은 이때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실질적인 쿠데타의 주동자였던 《방원》이 자신이 직접 왕위에 오르지 않은 이유는 스스로가 제1차 왕자의 난의 대의명분을 《유교적 적장자를 왕으로 세운다》는 것으로 대내외에 표방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유약하고 무능한 형 《정종》에게서 곧 임금자리를 쉽게 넘겨받을 자신이 있었던 것으로도 보인다.
이후 노골적으로 《정종》을 압박하는 《방원》의 행위에 다른 왕자들이 분개하게 되었는데, 결국 참지 못한 이성계의 4남인 이방간이 일으킨 것이 바로 제2차 왕자의 난이다. 이방원은 치열한 시가전을 거치면서 이를 제압하고 정종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아 당당하게 조선 제3대 태종으로 즉위한다.
이로써 회안대군 이방간은 졸지에 왕자신분에서 조선왕조의 대역죄인이 되었다. 원칙적으로 이방간은 살아남을 수 없는 죄를 지었으나 차마 동복형을 죽이지 못하는 태종의 배려로 유배형 정도로 감형되어 천수를 누렸다. 하지만 역적의 신분이 되어 선원록에는 이름을 올릴 수는 없었다. 그런 이유로 방간의 후손들은 역적집안의 자손이라는 멍에를 짊어져야 했고, 왕족으로서 누려야 할 각종 혜택을 전혀 누릴 수 없었던 것은 물론, 심지어 일반 백성들과 같은 온갖 군역, 부역의 의무까지 져야만 했다.
방간의 후손들은 어떻게든 왕족으로 복귀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썼지만 역적집안이라는 꼬리표가 발목을 붙잡았다. 게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먹고 살기가 힘들어져, 국왕이 바뀔 때마다 매번 상소를 올리는 노력을 하기도 했지만 그 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싸늘했다.
그러다 선조임금때가 되어서야 그들에게 약간의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선조는 조선 최초의 서자출신 왕이기에 출신성분에서 콤플렉스가 있었고, 그래서 선원록에 크게 집착하지 않는 듯 했다. 하지만 선조가 그들을 왕족으로 받아들여주기 전에 그만 사망했고, 방간의 후손들은 천금같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역적의 후손:우리도 왕족인데, 이 꼴이 뭐요!?, 기회가 있을거야, 조금만 더 참아보세. 나도 저기(선원록)에 이름을 올리고 싶다!!!
결국 그들은 인조때에 가서야 다시 희망의 싹을 보게 되는데, 이에 관한 조선왕조 기록이 다음과 같이 남아있다.
인조 18년(1640) 3월 19일(경자) 1번째기사
▶ 왕자의 난을 일으켰던 이방간의 후예에게 천역(賤役)을 면제해 주다
회안 대군(懷安大君) 이방간(李芳幹)은 태조(太祖)의 아들이다. 태종(太宗)이 대군으로 있을 때 방간이 가병(家兵)으로 공격하였는데, 일이 실패되었다. ... (중략) ...
영상 홍서봉이 의논드리기를, "신이 일찍이 태조조의 《일기》를 고찰해 보니 방간이 태종에게 실로 대역(大逆)의 죄를 지었습니다. 선조께서 전교하신 것은 권도(權道)에 따라 처리하여 종친(宗親)을 보존하려는 성대한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후손들은 단지 천역(賤役)만 면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홍서봉의 의논에 따라 다시 수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인조는 선왕인 선조의 체면도 있고해서 힘든 부역을 면제하는 정도에서 방간의 후손들에게 약간의 혜택을 주었지만 선원록에 다시 수록되어 완전한 왕족이 되는 것까지는 허락하지 않았다. 이들이 소원을 성취하는 것은 이로부터 또다시 40년이 흐른 숙종임금 때의 일이다. 무려 268년을 기다린 끝에 다시 왕족의 일원이 된 것이다. 이때의 실록을 살펴보자.
숙종 6년(1680) 11월 3일(무오) 5번째기사
▶ 이방간의 자손을 《선원록》에 기록하게 하다
이방간(李芳幹)의 자손을 《선원록(璿源錄)》에 기록하라고 명하였다. 방간은 태조(太祖)의 아들로서 처음에 회안 대군(懷安大君)에 봉해졌었는데, 죄를 입어서 선계(璿系)에서 삭제되었었다. 이번에 이정청(釐正廳)을 설치하여 선계를 수정하게 되었는데, 본청(本廳)에서 방간의 자손을 수록하느냐 않느냐에 대하여 의문이 있어서 임금께 아뢰자, 임금이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 (중략) ... 임금이 하교하기를,
"일찍이 태종조 때 박포(朴苞)만 죽였을 뿐 방간을 안치(安置)한 것은 진실로 지친의 의를 끊지 아니하려는 성덕(盛德)이었고, 선조 대왕의 하교가 정녕하게 진정으로 측은히 여기셨으므로, 당시의 여러 대신들도 모두 그 뜻을 받들어 곧 윤허를 받았는데도, 해시(該寺)에서 끝내 등록하지 않은 것은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지금에 와서 두분 임금의 거룩한 뜻을 받들어 특별히 등록을 허용하는 것이 열성을 받드는 도리에 합당할 것이다."
딸:종친부라는 관청이 있다면 종친들도 정치에 관여를 했나봐요?, 아빠:조선 초기에는 활발하게 정치에 참여했지만 성종 이후엔 정치 개입을 할 수 없었다고 해.
종친부라는 관청이 있었던 것으로 봐서는 종친들도 정치에 관여를 했나봐요?
아빠 그건 시대에 따라서 달랐단다. 조선 초기에는 종친들도 활발하게 정치에 참여했지만, 성종임금 이후에는 상황이 바뀌어서 관직과 봉급은 받아도 실제 정치에는 개입할 수 없었지.
조선 초기에 정치에 참여했던 대표적인 종친을 꼽으라면 우선 태종과 세조를 들 수 있겠다. 이들은 정상적으로 세자를 거쳐 왕위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무력으로 왕위에 오른 사례이다. 따라서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원래 《정안대군》과 《수양대군》이라는 대군신분, 즉 종친이었다.
정안대군(태종 이방원)은 조선건국보다 10년이나 앞선 1382년 과거에서 급제를 했는데, 예상외로 무인집안이었던 이성계 가문에서 문과에 급제를 했다. 때문에 그 소식을 들은 이성계가 버선발로 뛰어나와 이방원을 반겼다고 한다. 또한 수양대군(세조)도 형인 《문종》이 승하하고 어린 조카 《단종》이 즉위하자 스스로 영의정 겸 섭정이 되어 정권을 장악하였다.
한편 세조는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지난 시절 형인 《문종》은 병약했고, 조카인 《단종》은 너무 어린 나이로 즉위했던 탓에 신권이 왕권을 넘어서려는 것을 목격했다. 이에 세조는 비대해진 신권을 견제하는 카드로 뛰어난 자질을 가진 두 명의 젊은 종친을 중용했다. 아무래도 피붙이가 더 신뢰가 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중 한 사람은 유명한 《남이》 장군이다. 남이는 태종의 4녀인 정선공주의 손자로, 촌수로 따지면 세조는 남이의 오촌 《당숙》이 된다. 나머지 한 사람은 《구성군(또는 귀성군) 이준》인데 구성군은 수양대군의 동생인 임영대군의 2남이다. 촌수로 따지면 세조는 구성군의 《삼촌》이다.
남이 장군과 구성군 이 두 사람의 역사적 활약상은 너무나도 유명해서 굳이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인데, 재미있는 것은 이 두 사람이 모두 1441년생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똑같이 27세가 되던 해에 병조판서를 역임했는데, 구성군은 그 다음해에 약관 28세로 영의정에 오름으로써 조선왕조 최연소 영의정의 타이틀까지 거머쥐었다. 그만큼 그 두 사람은 능력이 탁월해 백성들 사이에서는 왕이 될 재목이라는 소문도 돌 정도였다.
하지만 세조가 죽자 정치환경이 급속도로 바뀌었다. 세조를 이은 예종은 보잘 것 없는 자신과 비교했을 때 젊은 두 종친들의 뛰어난 활약상이 영 못마땅하였을 뿐만 아니라 시기와 질투까지 했다. 그래서 우선 유자광의 모함을 이용하여 남이를 제거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잠깐]남이의 최후

예종이 즉위한 지 얼마 안 된 1468년 남이는 숙직을 서면서 혜성이 나타난 것을 보고 "묵은 것을 없애고 새것이 들어설 징조"라고 했다. 이것을 엿들은 유자광은 그가 영의정 강순 등과 모여 역모를 꾸민다고 모함하여 하옥되었다. 이 때 유자광은 평소 남이가 자신의 호방함을 표현한 시를 교묘하게 위조했다.

▷ 白頭山石磨刀盡 (백두산석마도진) /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어지고
▷ 豆滿江水飮馬無 (두만강수음마무) / 두만강 물은 말이 마셔 다 말라 없어졌네
▷ 男兒二十未平國 (남아이십미평국) /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를 태평하게 못 하면
▷ 後世誰稱大丈夫 (후세수칭대장부) /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칭하리

유자광은 이 시에서 '男兒二十未平國 (남아이십미평국)'을 '男兒二十未得國 (남아이십미득국)' 으로 한자를 살짝 바꿔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를 얻지 못하면'으로 해석하여 역적의 누명의 씌웠다. 1468년 10월 남이는 군기감 앞 저자거리에서 강순 등과 함께 거열형(車裂刑)을 당하였다.
예종 역시 불과 재위 14개월 만에 승하하였다. 그리고 《예종》의 뒤를 이은 새임금은 왕위계승서열에서 제안대군과 월산대군에게도 밀리는 제3순위였던 자을산 군이었으니 그가 바로 《성종》이다. 성종의 즉위는 순전히 권신 한명회의 농간이었다. 예종과 성종 모두 한명회의 사위였던 탓에 왕위계승서열에서 후순위로 밀려도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성종이 즉위했을 때 이미 남이는 제거되고 없었지만, 아직 구성군 이준은 살아있었다. 하지만 구성군 역시 역적의 누명을 쓰고 유배형으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이렇듯 자질이 뛰어난 종친들이 왕권 경쟁자로 부상하는 사례가 잇따르자 성종은 왕족의 정치참여를 배제하자는 것을 공론화하여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명시하게 되었다.
[여기서 잠깐]구성군(귀성군) 이준의 최후

남이가 죽은 2년 후인 1470년 최세호가 귀성군이 왕의 재목이라고 한 것을 정인지가 역모로 엮어서, 1월 14일에 최세호와 권맹희는 죽임을 당하고, 귀성군은 경상도 영해(寧海)로 유배를 가게 된다. 그로부터 9년 후 1479년 39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성종이후로는 종친은 왕의 4대손까지 종친부의 관직을 제수하고 봉급을 지급했지만, 종친이 맡을 수 있는 관직은 종친부의 관직, 외교사신의 역할, 중요하지 않는 관청의 도제조, 제조, 부제조 등 명예직이나 임시관직 또는 교대로 근무하는 오위도총부의 도총관, 부총관 정도의 관직에 한정되었기 때문에 실제 정치에는 제도적으로 개입할 수 없게 되었다.
지금 조선 왕실의 족보들은 어디 가면 볼 수 있어요?
아빠 여기 근처 국립고궁박물관에 '선원록'만 보존이 되고 있단다. 날이 많이 풀린 것 같은데, 다음엔 우리 산에나 가볼까?
오! 김밥도 싸가지고 가요!!~
경근당에서 아빠와 딸
최동군(글로벌사이버대학교 문화콘텐츠학부 외래교수)
사진/그림
박동현(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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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02-27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