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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있는 역사

이량(李樑)의 묘에 숨어있는 권력의 무상함

이량(李樑)의 묘에 숨어있는 권력의 무상함
이량(李樑)의 묘
이량(李樑)의 묘 찾아가는 길 , 1. 원당역 6번 출구 앞에서 택시를 탄다. *버스이용시 약 50분이 소요되므로 택시이용을 추천!, 2. 약 10분 후 율원군사당 앞에서 하차한다., 3. 농로를 이용해 도보로 이동한다., 4. 이량묘에 도착!
아빠:여기는 이량의 묘란다. 명종의 신임을 받았지만 결국 탄핵을 받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 딸:이량? 대단한 인물이예요?
아빠 여기는 이량이라는 사람의 묘란다. 그는 조선 중기 명종 때의 왕족이자 외척인데, 명종의 두터운 신임을 배경으로 전횡을 일삼다가 탄핵을 받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인물이지. 오늘은 여기서 권력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해.
이량? 그 사람이 대단한 인물이예요? 권력이라, 뭔가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숨어있을 것 같아요!
공양왕릉이 바라다 보이는 맞은 편 언덕에 태종의 차남인 효령대군의 5대손으로 조선 중기 명종 때의 문신이었던 이량의 무덤이 있다. 이량은 자(字)는 공거(公擧)이고 율원군(栗原君) 이종(李)의 증손자인데, 그의 증조부 율원군의 사당과 재실인 충의재가 바로 공양왕릉으로 진입하기 직전 길목에 있다.
딸:저기 비석에 한자들이 빼곡하네요. 읽어봐야지~, 아빠:근데 다른 비석들과 다르게 특이한 것이 있어! 바로 띄어쓰기를 했다는 점이야!
저기 엄청 큰 비석이 있어요! 한자가 빼곡하게 가득 쓰여져 있네요! 읽어봐야지~
아빠 그 비석은 조금 특이한 것이 있어. 바로 띄어쓰기를 했다는 점이야.
아, 맞다!! 다른 비석은 글자들을 다 이어 썼던데, 왜 그렇죠?
이량의 무덤 앞에 있는 비석은 최근에 후손들이 다시 세운 것이다. 비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한자들 가운데 빈 공간이 드문드문 보인다. 빈 공간에 대한 힌트는 바로 빈 공간 다음에 이어지는 글자들이다. 그 글자들을 모아보면 다음과 같다.
△ 목조(穆祖), 익조(翼祖), 도조(度祖), 환조(桓祖), 태조(太祖), 태종(太宗)
그렇다. 바로 임금을 나타내는 글자다. 목조, 익조, 도조, 환조는 《태조 이성계》의 4대조이다.
원래 한자는 원칙상 띄어쓰기가 없다. 그럼에도 띄어쓰기를 한 것은 그 다음에 나오는 대상을 최대한 높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왕조시대에는 아무나 띄어쓰기를 해서는 안된다. 임금 또는 임금에 비견되는 경우에만 띄어쓰기를 한다. 정조대왕의 수원행차를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의 경우를 살펴보면 《정조임금》과 대비인 《혜경궁 홍씨》, 정조의 생부인 《사도세자》 그리고 《공자》의 앞에서만 띄어쓰기를 했다.
한자는 띄어쓰기를 하지 않다보니 해석할 때 어디서 끊어서 읽느냐에 따라서 글의 해석이 완전히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띄어읽기를 잘못해서 죽임을 당한 경우까지 있는데, 당쟁이 심하던 조선 후기 서인의 영수 송시열(宋時烈, 1607 ~ 1689)이 정적관계에 있었던 남인의 영수 윤휴(尹鐫, 1617 ~ 1680)를 사문난적(斯文亂賊, 주자적 유교에 대한 교리를 다르게 해석했던 선비를 비난하기 위해 사용한 말)으로 몰아서 처형시킨 것이 유명한 사례이다. 그럼 윤휴가 사문난적으로 몰린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논어 향당 鄕黨편 제12장에 이런 구절이 있다.
廐焚 子退朝 曰 (구분 자퇴조 왈)
마굿간(廐)에 불이났다(焚). 공자(子)께서 조정(朝)에서 물러나시면서(退) 가라사대(曰)
傷人乎 不問馬 (상인호 불문마)
사람(人)이 부상(傷)을 입었느냐(乎) 하시고 말(馬)에 대해서는 묻지(問) 않으셨다(不)
이 구절은 공자의 《인본주의》 사상을 드러낸다고 여겨지는 대표적인 구절 중의 하나이다. 주자를 비롯해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마굿간에 불이 났음에도 말 보다는 사람을 더 귀히 여겼다》는 취지의 해석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윤휴는 이 구절에 대해 《傷人乎 不問馬》로 해석하지 않고 《傷人乎不 問馬》로 해석했다. 이렇게 띄어읽기만 달리하면 해석이 어떻게 바뀔까?
윤휴의 해석은 상식에서 출발을 했다. 마굿간에서 불이 났으면 말에 대해 묻는 것이 상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윤휴는 《사람이 다쳤는가 혹은 다치지 않았는가(喪人乎不)》라고 해석했고 아울러 뒷부분은 《말에 대해서도 물으셨다(問馬)》라고 해석하였다.
심지어 그는 단순한 해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굿간에 불이 났으면 말에 대해 묻는 것이 상식이다. 주자가 돌아오면 자신이 틀리다 할 것이요, 공자께서 돌아오시면 자신이 맞다 할 것이다"라고 까지 주장해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 말이 정작 자신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갈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래서인지 윤휴는 사약을 받기 직전에 "나라에서 유학자가 싫으면 쓰지 않으면 그만이지 죽일 이유까지야 있느냐"라는 유명한 말도 남겼다.
띄어읽기 한번 잘못해서 죽임까지 당했다니, 정말 놀랍고도 무시무시한 얘기네요. 그런데 이량의 무덤에서 권력이야기를 해 준다고 하셨는데 어떤 이야기인가요?
아빠 이 사람의 일생을 이야기 할 때는 《윤원형》과 《정난정》을 빼 놓을 수 없지.
이량이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기 전까지의 조선은 중종의 세 번째 왕비이자 명종의 생모인 《문정왕후 윤씨》의 세상이었다. 심지어 여제(女帝)라는 소리까지 들었던 문정황후는 자신의 아들인 명종의 즉위 초에는 수렴청정을 했을 뿐만 아니라 명종이 성년이 되어 친정을 시작하고 나서도 국정에 지나친 간섭을 했는데 심지어 명종이 자신의 청을 들어주지 않는다고해서 왕에게 매질을 하거나 독설을 쏟아붓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명종은 조선 왕들 중에서 유일하게 마마보이라는 웃지 못할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문정왕후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객관적인 평가는 어떠할까?
명종 20년(1565) 4월 6일(임신) 2번째기사
▶ 대왕 대비(문정왕후)가 승하하다
김감(金勘) 등이 계유문(戒諭文)을 지어 올렸는데,
사시(巳時)에 대왕 대비가 창덕궁 소덕당(昭德堂)에서 승하하였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윤씨는 천성이 강한(剛)하고 문자(文字)를 알았다. ... (중략) ...  그렇다면 윤비(尹妃)는 사직의 죄인이라고 할 만하다. 《서경(書經)》 목서(牧誓)에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것은 집안의 다함이다.' 하였으니, 윤씨(尹氏)를 이르는 말이라 하겠다.
문정왕후 때문에 조선의 국정은 말이 아니었다. 부정부패가 온 나라에 만연했고 백성들에 대한 수탈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의적 임꺽정이 활동했던 시기도 바로 이 때였다. 문정왕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남동생인 《윤원형》은 한술 더떠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 짰다. 모든 관직은 매관매직되어 윤원형에게 뇌물을 바쳐야만 가능했는데 실록의 기록은 그가 축재한 뇌물이 더 이상 쌓아 둘 곳이 없어서 집 앞에서 시장을 열기까지 했다고 전한다.
또한 윤원형의 첩인 《정난정》은 원래 아버지가 양반이었지만 친모가 관비출신이어서 노비수모법(奴婢隨母法)에 따라 노비의 신분이었다. 미천한 신분에서 벗어나고자 윤원형에게 접근하여 첩이 되어서는 윤원형의 정실부인 김씨를 독살하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했는데, 또 다른 첩의 소생인 아들을 죽여 시체를 강물에 버리는 패륜을 저지르는 등 윤원형과 마찬가지로 온갖 부정과 만행을 저질러 백성들의 지탄을 받았다.
정난정:첩이 된 걸로는 만족 못해!, 윤원형:내가 문정왕후 남동생이야! 나한테 잘 보여야 되는 거 알지?, 문정왕후:이 애미 말만 들으면 됩니다., 명종:네, 어마마마., 임꺽정:세상이 엉망이구만! 내가 나서야겠어!!!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니 문정왕후의 눈치를 보던 명종도 더 이상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자신의 외삼촌이기도 한 《윤원형》에게 온 나라가 휘둘리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서 이번에는 명종의 왕비였던 《인순왕후》의 외삼촌 《이량》을 끌어들였다.
하지만 명종의 두터운 신임을 등에 업은 《이량》은 명종의 기대와는 달리 《제2의 윤원형》이 되어 자신만의 사리사욕을 채웠고, 그 때문에 또 다른 외척이었던 심통원과 더불어 백성들로부터 삼흉(三凶)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되었다.
명종:처외삼촌께서 좀 나서주셔야 겠습니다., 이량:어이쿠, 저야 영광이지요~, 천하의 임금도 내 말 한마디면 어쩌지 못한다니까?, 대체 얼마나 받아먹으려는거야?, 윤원형 보다 더 악질이군….
우리는 흔히 타이거(Tiger) 라는 동물을 《호랑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자면 호랑이는 한가지 동물만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호랑이는 '호랑(虎狼)' 이라고 하는 한자말에 '이' 라는 순우리말 접미사가 붙어서 생긴 말이다. 여기서 호(虎)는 범 호(虎)자이고, 랑(狼)은 이리 랑(狼) 자이기 때문에, 원래 《호랑이》라는 말은 순 우리말로 하자면 가장 무서운 것을 지칭할 때 쓰던 말로써 '범'과 '이리(늑대)' 를 동시에 나타내는 말이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윤원형》을 범, 《이량》을 이리(늑대)에 비유하기도 했는데, 여기서 이량의 '량'은 이리 '랑'자와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량의 후손들도 한때 권력자로 군림하다가 초라한 최후를 맞이했지…., 음~ 그럼 이량은 어떻게 몰락했어요?
[여기서 잠깐]바둑을 잘 두었던 이량의 일화

이량은 왕실 외척들 중 가장 바둑을 잘 두기로 소문이 나 있었는데, 어느 날 명종 때 천민출신이었지만 바둑에서 동방제일의 고수라는 평을 받고 있던 《신구지》라는 사람이 이량을 찾아왔다. 신구지가 이량에게 인사를 올리자 이량 역시 신구지의 바둑 명성을 오래 전부터 듣고 있었던 터라 매우 반가웠다. 그리고 한판 대국을 펼쳤는데, 신구지가 지고 이량이 이겼다. 이량은 동방제일의 고수를 꺾었다는 생각에 내심 몹시 기뻐했다.

며칠 후 신구지가 또다시 이량을 찾아뵙고는 "지금껏 다른 사람과 바둑을 두어 한번도 져 본일이 없는데 대감께 한판을 패한 이후로는 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며 이번에는 내기바둑을 제안했다. 이때 신구지는 전 재산을 팔아서 마련한 귀한 보석 갓끈을 걸었는데, 이번에도 내기 바둑에서 신구지가 또 패했다. 이렇게 되자 이량은 매일 그 보석 갓끈을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내 보이며 자신이 동방제일의 신구지를 이겨서 얻은 것이라며 자랑을 했다.

다시 며칠이 지나 신구지가 이량을 찾아와 또 내기바둑을 제안했다. 이량은 이번에 자신이 지게 된다면 신구지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다 들어준다고 통 큰 약속을 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신구지는 본 실력을 드러내고는 내리 세 판을 이겼다. 그것도 이량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세 판 모두 거의 질 듯 질 듯 하다가 마지막에 가까스로 이기는 식이었다.

내기에서 진 이량은 약속대로 신구지에게 원하는 것을 물었더니 자신의 딸이 곧 혼례를 치를 예정인데 평안도 일대에서 혼수를 구하고자 하니 대감께서 서한을 몇 자 적어달라며 50장이나 되는 백지를 내밀었다. 이량은 원래 글씨를 잘 썼고 서한에도 민첩했기 때문에 일필휘지로 50장을 가득 메워 신구지에게 주었다. 신구지는 말과 노복을 갖추고서 평안도 여러 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며 각 고을 수령들에게 이량의 서한을 전했고, 최고 권력자의 서한을 받은 수령들은 모두들 버선발로 달려 나와 신구지를 영접했다. 그렇게 신구지는 평안도 수령들에게서 얻은 재물을 수레에 가득 싣고 돌아와 일거에 큰 부자가 되었다고 전한다.
그토록 막강한 권력을 누리던 이량은 어떻게 몰락했나요?
아빠 반대파로부터 탄핵을 받았는데, 실질적인 원인은 그간의 온갖 비리와 부정부패였지만, 표면적인 이유는 전랑자천제(銓郞自薦制)를 위반했기 때문이었어.
이량은 1563년에 조정의 모든 인사권을 쥐고 있는 이조판서가 되었는데, 당시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있던 그의 아들 이정빈은 상피제(相避制, 친족간에는 같은 관서 또는 통속관계에 있는 관서에 근무하지 못하게 하거나 연고가 있는 관직에 근무하지 못하게 했던 법)에 따라 사간원으로 전직되었다. 이에 이량은 공석이 된 이조좌랑에 이정빈의 친구인 유영길을 후임으로 추천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일부 사림 세력의 반발을 샀다. 이는 누가 보더라도 명백하게 전랑자천제를 위반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량:니가 내 아들 친구지? 그럼 이조좌랑에 한 자리 주마! 우리 아들이랑 친하게 지내~, 유영길:감사합니당~, 사림(士林) :이량 이놈! 딱 걸렸다. 넌 지금 전랑자천제를 위반했어! 이건 완벽한 탄핵감이야!
[여기서 잠깐]전랑자천제 (銓郞自薦制)

전랑자천제(銓郞自薦制)란 이조전랑직(吏曹銓郞職) 등에서 자신의 후임 인사를 스스로 천거하여 임금과 대신들의 압력을 이겨내도록 하는 역할을 했던 제도이다. 여기서 전랑이란 《정5품 정랑》과 《정6품 좌랑》을 한꺼번에 일컫는 말인데, 이들은 비록 품계는 높지 않지만 조정에서 언로(言路)의 핵심으로 일컬어지는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임명제청권을 가지고 있었다.

즉 이조판서에게 모든 인사권이 있으면 왕에게 보고되는 언로가 막히게 되므로 언관들의 임명제청권만은 이조판서가 아닌 이조전랑들이 행사를 하도록 제도화 하였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이조전랑들이 그들의 상관인 이조판서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있게 행동할 수 있도록 자신들의 후임은 스스로가 천거하도록 했다. 물론 아무나 천거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평판과 대의명분에 맞는 사람을 천거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조전랑은 삼사와 더불어 대표적인 청요직(청렴해야하는(淸) 중요한(要) 자리(職)라는 뜻)에 속했는데, 이량은 그토록 중요한 이조좌랑 자리에 노골적으로 자기사람을 심으려다 반대세력의 반발을 산 것이다.

전랑자천제와 연계된 유명한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선조 대에 《김효원》 이라는 사람과 《심의겸》이라는 사람이 이조전랑직을 놓고 서로 다투게 되었다. 이때 조정은 크게 김효원을 지지하는 세력과 심의겸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양분되었는데, 김효원의 집은 한성의 동쪽인 건천동에 있었고 심의겸의 집은 서쪽인 정릉방에 있었다. 그래서 김효원을 지지하는 무리를 《동인》, 심의겸을 지지하는 무리를 《서인》이라고 불렀고, 이것이 이른바 당쟁으로 일컬어지는 동서붕당의 시작점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앙심을 품은 이량은 몇몇 무리들과 모의해서 사림의 반대세력을 조정에서 몰아내려 했으나 오히려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 당하였고 평안북도로 유배된 후 풀려나지 못한 채 1582년에 평안북도 선천에서 사망하였다.
아빠 이제 겨울도 다 끝나가고, 3월이면 너도 곧 중3이 되는구나.
네, 그간 아빠를 따라다니며 학교 역사과목 수행평가로 《숨어있는 역사》 공부를 한지도 1년이 훨씬 넘었어요. 그리고 저는 줄곧 역사 수행평가에서 만점을 받았는데 이게 모두 아빠 덕분이에요.
아빠 지금까지는 학교 시험과 숙제를 위해 역사공부를 했지만 앞으로는 너 자신을 위해 역사공부를 하렴. 역사는 결코 케케묵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야. 역사를 제대로 알면 자신의 미래가 보이거든.
아빠 말씀을 꼭 명심할게요. 그런데 여기를 둘러보느라고 한참 돌아다녔더니 슬슬 배가 고픈데 이제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이량 묘에서 아빠와 딸
최동군(글로벌사이버대학교 문화콘텐츠학부 외래교수)
사진/그림
박동현(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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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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