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역사

고양시 왕릉골에 숨어있는 고려 공양왕의 회한

고양시 왕릉골에 숨어있는 고려 공양왕의 회한
공양왕릉
공양왕릉 찾아가는 길 , 1. 원당역 6번 출구 앞에서 택시를 탄다.(버스이용시 약 50분이 소요되므로 택시용을 추천!), 2. 약 10분 후 고려공양왕릉 앞에 도착!
아빠:여기는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의 무덤이야!, 딸:공양왕 무덤은 강원도 삼척에도 있다고 나오는데요?
아빠 이 곳이 고려왕조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의 무덤인데 능호는 고릉(高陵)이라고 해.
아빠, 인터넷으로 검색해 봤는데 강원도 삼척에도 공양왕의 무덤이 있다고 나오는데 어느 것이 진짜에요?
아빠 그 진위여부를 둘러싸고 고양시와 삼척시 양측의 주장이 아직도 팽팽하단다.
공양왕(恭讓王)은 그의 생애보다도 고려의 마지막 왕이라는 사실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비운의 공양왕은 태조 이성계에게 왕위를 넘겨준 뒤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되어 처음에는 강원도 원주로 유배되었다가 간성으로 유배지가 옮겨졌고, 다시 삼척으로 옮겨진 뒤에 그 곳에서 처형당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의 무덤이 경기도 고양시의 왕릉골에도 있거니와 강원도 삼척시의 궁촌리에도 있다는 점이다. 이는 어찌된 일일까? 일단 조선왕조실록에서 관련된 내용을 찾아보자.
태조 3년(1394) 4월 17일(병술) 3번째기사
▶ 삼척의 공양군에게 교지를 전하고, 그와 두 아들을 교살시키다
정남진 등이 삼척(三陟)에 이르러 공양군(恭讓君)에게 교지를 전하면서 말하였다.  ... (중략) ... 마침내 그를 교살(絞殺)하고 그 두 아들까지 교살하였다.
세종 19년(1437) 7월 17일(을사) 4번째기사
▶ 공양왕의 어진을 고양현 무덤 곁의 암자에 이안하도록 하다
안성군 청룡사에 봉안했던 공양왕의 어진(御眞)을 고양현(高陽縣) 무덤 곁에 있는 암자에 이안(移安)하라고 명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태조 3년에 분명 강원도 삼척에서 죽임을 당했는데, 세종 19년에는 공양왕의 무덤이 고양현(현 고양시)에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실록의 기록뿐 아니라 삼척의 공양왕릉이 있는 곳 지명이 궁말 또는 궁촌리(宮村里)이고 마을 입구 고개의 이름이 《살해재》인 것으로 봐서는 삼척에 공양왕이 유배를 가 있던 중 살해당한 것은 분명한 듯 하다. 그런데도 그로부터 43년이 지난 세종 19년에 무덤이 고양현에 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는 것은 처음 살해되어서 묻힌 곳은 삼척이었지만, 공양왕의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한양으로 불러 올린 후 고양현에 다시 묻은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듯 하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공양왕의 시신을 모두 보낸 것이 아니라 목을 잘라 머리만 보냈기 때문에 고양현에는 머리가 묻혔고, 삼척에는 몸둥이가 남았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공양왕이 일단 삼척에서 죽은 뒤 태종 때에 공양군에서 공양왕으로 복위되면서 고양현으로 옮겨간 뒤 삼척의 봉분을 허묘로 남겨두었을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현재 문화재당국의 공식적인 입장은 세종실록의 내용을 근거로 해서 고양시의 공양왕릉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아무튼 고려왕조의 마지막 왕릉이 두 개씩이나 된다는 사실 자체가 비운의 고려왕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잠깐]공양왕릉과 관련된 주변 지명

현재 고양시에는 공양왕릉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남아있는데, 공양왕릉이 있는 동네이름은 ‘왕릉골’, 공양왕릉의 맞은편 산줄기 너머에는 ‘대궐약수’가 있고, 인근의 ‘식사동’은 공양왕이 개성에서 나온 뒤 잠시 왕릉골에 숨어 있을 때 식사동에 있던 절에서 왕에게 밥을 해 주었다고 하여 식사(食寺)동이 되었다고 한다.
딸:공양왕릉 뒤에 있는 무덤들은 더 높은 왕들의 무덤인가요?, 아빠:아니, 왕의 무덤이 아니라 그냥 조선시대 신씨 집안의 무덤이야
공양왕릉의 바로 위쪽으로 무덤들이 몇 있다.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산줄기를 따라 《신홍지》, 《신진》, 《신홍정》, 《신광한》, 《신홍해》, 《신형》의 무덤들이 차례대로 나오는데 한눈에도 신씨 집안의 무덤임을 알 수 있다. 위쪽 뿐만 아니라 주변에도 무덤들이 많다. 보통의 조선왕릉은 조성 당시에 왕릉주변을 화소지역이라고 해서 민간인의 출입금지 구역으로 설정하고 그 안에 있던 모든 민가나 무덤들은 강제로 이전시켰다. 그래야만 왕릉의 성역화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왕릉의 평균 화소구역 면적은 약 24만평이다. 하지만 망국의 공양왕릉에서 그런 것을 바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더욱 서글픈 것은 봉분 둘레에 공간을 구획하는 담장인 곡장이라도 쳐놓았다면 지금처럼 옹색해 보이지는 않았을텐데, 내용을 잘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이것이 과연 왕릉일까 하는 정도의 의심이 들 정도다.
[여기서 잠깐]공양왕릉 위 무덤들의 주인공

공양왕릉의 뒤로 가장 위쪽에 있는 무덤의 주인공 《신형》이 계보상 가장 웃조상인데, 그는 《신숙주》의 7번째 아들로서 세종 때 병조판서를 지낸 《정연》(鄭淵,송강 정철의 고조할아버지)의 사위였다. 사후에 처갓집인 연일 정씨의 산에 묻힌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신씨들 무덤 사이에 《정연》의 아들인 《정자양》(鄭自洋)의 무덤이 있고, 신씨들 무덤 주위로 정연의 후손들 무덤이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정연》의 손녀사위였던 수춘군(壽春君, 세종의 6번째 왕자)의 무덤도 인근에 함께 있기 때문에, 수춘군 역시 당시 잘나가던 처갓집 산에 묻힌 것으로 짐작된다.
딸:왕릉 앞에 이상한 돌조각은 뭐예요? 뭔가 못생겼는데..., 아빠:무덤을 수호하는 석수인데 지금은 그 형상을 알아보기 힘드네.
왕릉 앞에 이상한 돌조각은 뭐에요?
아빠 무덤을 수호하는 석수인데, 비바람에 마모가 심해 원래 형상을 알아보기가 어려워.
왕릉 앞에 있는 돌조각상의 정체는 공식적으로는 석호, 즉 돌호랑이다. 석호는 무덤의 봉분을 지키는 역할을 하는데 조선왕릉의 봉분을 둘러싸고 있는 석물 중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런데 공양왕릉의 석호는 조선왕릉의 석호와 비교했을 때 뭔가 좀 다른 구석이 있다. 일단 조선왕릉의 석호는 2쌍 또는 4쌍으로 존재하며, 석호 뿐만 아니라 석양도 함께 있다. 그런데 공양왕릉의 석호는 석양도 없고 숫자도 단 한 하나뿐이다. 왜 그럴까? 혹시 석호가 아닌 다른 존재는 아닐까?
여기서 새로운 가설을 하나 제시해본다. 공양왕릉 앞의 돌조각상은 ‘석호가 아닌 석사자’라는 것이다. 이 새로운 가설에 대한 나름대로의 몇 가지 근거는 다음과 같다.
공양왕릉에는 인근 주민들에게 옛날부터 구전되어 오는 삽살개의 전설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공양왕은 도망 다니다가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자, 왕과 왕비가 함께 호수에 뛰어들어 자결을 했는데 그 호수가 있던 자리가 바로 지금의 공양왕릉 앞이라고 한다. (지금도 공양왕릉 앞에는 그 호수의 흔적으로 조그만 연못이 있다.) 그런데 평소 공양왕이 데리고 다니며 귀여워하던 삽살개가 한 마리 있었다. 그 개는 사라진 공양왕을 찾아 헤매던 신하들에게 자신의 주인이 호수에 빠져죽은 사실을 알리고는 그 자신도 호수에 몸을 던져 주인을 따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왕릉골의 주민들은 아직도 석물을 삽살개라고 부른다.
우리가 전설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삽살개다. 삽살개는 우리 토종개로 외관상의 가장 큰 특징은 털복숭이 개라는 것이다. 지금이야 비바람에 마모가 되어 돌조각상의 원래 형상이 호랑이였는지 사자였는지가 구분이 안되지만 처음 석상이 만들어졌을 때는 분명 구분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호랑이와 사자는 외관상 큰 차이가 있다. 호랑이에게는 없는 것이 사자의 갈기다. 즉 털이 부푼 듯이 많으면 호랑이가 아닌 사자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구전되는 전설의 주인공이 삽살개라면 호랑이보다 사자의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공양왕은 고려의 왕이다. 따라서 비록 조선왕실에서 공양왕릉을 만들어주었다고 해도 조선식이 아닐 고려식으로 공양왕릉을 조성해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석물이 웅장하고 큰 조선초기의 왕릉과는 달리 현재 공양왕릉에 남아있는 문인석과 장명등, 석수와 같은 석물들이 한결같이 작은 것은 원래 고려왕릉의 석물들이 크지 않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게다가 고려는 불교가 국가의 종교였다. 조선은 유교가 국가의 종교역할을 했으므로 극동지방을 지역기반으로 하는 유교적인 세계관에서 수호동물은 호랑이가 적합했다. 그래서 조선왕릉의 수호동물은 석호, 즉 호랑이다. 하지만 불교는 열대지방인 인도를 지역기반으로 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종교적으로 사자를 수호동물로 내세웠다. 부처의 말씀을 사자후(獅子吼 사자가 울부짖는 소리라는 뜻으로, 석가의 설법에 모든 악마가 불교에 귀의하였다는 말) 라고 하고, 석가모니의 좌협시보살인 문수보살은 사자를 타고 다닌다. 그래서 불교가 융성했던 신라의 고분(예를 들어 괘릉)에서도 호랑이는 찾아볼 수 없고 대신 사자상을 많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을 종합해 보면 공양왕릉의 돌조각상을 석호 하나로 규정짓는 것 보다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삽살개:주인님~~!!, 나는 누구인가... 삽살개인가, 사자인가!, 신하:명색이 고려왕인데, 무덤은 고려식으로 만들어줍시다. 그럼 사자상을 무덤 앞에 놓아야겠군!
공양왕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조금 더 해 주세요.
아빠 공양왕은 왕이 되기 싫었던 사람이었어.
공양왕은 원래 왕이 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미 실권은 이성계 일파가 다 쥐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공민왕의 아들인 《우왕》과 우왕의 아들인 《창왕》이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공양왕은 왕위계승서열에서도 한발 물러나 있었다. 그렇지만 이성계 일파는 《우왕》을 《공민왕》이 아니라 신돈(辛旽)의 아들이라며 주장하면서 "가짜를 내쫓고 진짜를 세운다(廢假立眞)"는 논리로써 우왕과 창왕을 밀어내고 고려 제20대 신종의 7대손인 《공양왕》을 강제로 왕으로 옹립했는데, 그야말로 이름뿐인 허수아비 왕이었다. 《공양왕》의 존재는 이성계가 왕위에 오를 때까지의 임시직이었다.  
왕조사회에서 일단 왕이 되었다가 쫓겨난다는 것은 결국 죽음을 의미했다. 또한 왕위계승 서열에서 매우 가깝다는 것도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이 세자 자리에서 쫓겨나고 셋째 아들 충녕대군(세종)이 세자가 되었을 때, 둘째 아들 효녕대군이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된 것은 불교가 좋아서가 아니라 스스로 왕권에 뜻이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목숨을 부지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왕이 되기 싫었던 공양왕의 속마음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그대로 남아있다.
나는 왕이 되기 싫다!!!(질질질~), 조금만 더 기다리시오. 때가 되면 놓아줄테니!(이성계)
태조 1권, 1년(1392 임신 / 명 홍무(洪武) 25년) 7월 17일(병신) 1번째기사
▶ 태조가 백관의 추대를 받아 수창궁에서 왕위에 오르다
태조가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위에 올랐다. … (중략) … 마침내 왕대비의 교지를 받들어 공양왕을 폐하기로 일이 이미 결정되었는데, 남은(南誾)이 드디어 문하 평리(門下評理) 정희계(鄭熙啓)와 함께 교지를 가지고 북천동(北泉洞)의 시좌궁(時坐宮) 에 이르러 교지를 선포하니, 공양왕이 부복(俯伏)하고 명령을 듣고 말하기를,

“내가 본디 임금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나를 강제로 왕으로 세웠습니다. 내가 성품이 불민(不敏)하여 사기(事機)를 알지 못하니 어찌 신하의 심정을 거스린 일이 없겠습니까?”

하면서, 이내 울어 눈물이 두서너 줄기 흘러내리었다. 마침내 왕위를 물려주고 원주(原州)로 가니, 백관(百官)이 국새(國璽)를 받들어 왕대비전(王大妃殿)에 두고 모든 정무(政務)를 나아가 품명(稟命)하여 재결(裁決)하였다. … (후략)
이렇듯 공양왕을 잘 활용(?)했던 태조 이성계는 자신이 왕위에 오르자 이제는 필요가 없어진 공양왕을 제거하고자 했다. 그럼 이성계가 공양왕을 제거할 때의 명분을 담은 교지를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보자.
“신민(臣民)이 추대하여 나를 임금으로 삼았으니 실로 하늘의 운수이요. 군(君,공양군 즉 공양왕)을 관동(關東)에 가서 있게 하고, 그 나머지 동성(同姓)들도 각기 편리한 곳에 가서 생업을 보안하게 하였는데, 지금 동래 현령 김가행과 염장관 박중질 등이 반역을 도모하고자 하여, 군(君)과 친속(親屬)의 명운(命運)을 장님 이흥무에게 점쳤다가, 일이 발각되어 복죄(伏罪)하였는데, 군(君)은 비록 알지 못하지만, 일이 이 같은 지경에 이르러, 대간(臺諫)과 법관(法官)이 장소(章疏)에 연명(連名)하여 청하기를 12번이나 하였으되, 여러 날 동안 굳이 다투[固爭]고, 대소 신료들이 또 글을 올려 간(諫)하므로, 내가 마지못하여 억지로 그 청을 따르게 되니, 군(君)은 이 사실을 잘 아시오.”
내용은 현대어로 해석, 요약하면 이렇다. 비록 공양왕 당신 자신은 전혀 몰랐다 하더라도 반역의 무리들이 잡혀 죄를 실토했는데 그 와중에 당신 이름이 나왔다. 그 일로 신하들이 당신을 연좌하여 죽이라고 하니 나는 싫지만 어쩔 수 없이 신하들의 의견을 따른다. 그러니 나를 원망하지 말라, 이런 뜻이다.
태조 이성계의 변명이 참 어설프네요. 그 놈의 권력이 뭔지, 참…
아빠 권력 이야기가 나왔으니 바로 앞쪽 산 언덕에 있는 이량의 무덤에서 권력이야기를 더 해 줄게.
공양왕릉에서 아빠와 딸
최동군(글로벌사이버대학교 문화콘텐츠학부 외래교수)
사진/그림
박동현(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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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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