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역사

연산군시대 금표비에 숨어있는 조선 백성들의 피눈물

연산군시대 금표비에 숨어있는 조선 백성들의 피눈물
금표비
연산군시대 금표비 찾아가는 길 , 1.삼송역 8번출구 앞 버스정류장에서 037번 버스를 탄다., 2. 필리핀참전비 정류장에서 026번 버스로 환승한다., 3. 경기축산 정류장에서 하차한다., 4. 길 건너 약300m 도보로 이동하면 연산군시대금표비 도착!
딸:주변에 무덤도 없는데 비석이 있네요!?, 아빠:이 비석은 출입을 금지하는 표석으로 세운거야!
주변에 무덤도 없는데 웬 비석이죠?
아빠 이 비석은 무덤에 세우는 비석이 아니라 출입을 금지하는 표석으로 세운 거야. 연산군시대에 세워진 비석이기 때문에 《연산군시대 금표비》라고 불리지.
연산군시대 금표비(이후 연산군 금표비)는 비교적 최근인 1995년에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그러나 처음 발견된 위치는 지금의 자리가 아니라 근처에 있는 금천군(錦川君)의 묘역으로 알려져 있다. 금천군은 성종임금의 서자인 경명군(景明君)의 손자로, 그의 후손들이 금천군 묘역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출토되었다고 한다.
이 비석은 그 내용으로 보아 연산군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는데, 그 이유는 조선왕조실록에 연산군이 세운 금표비의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 남아있는 우리나라의 금표비 중에서 연산군시대의 금표비가 실물로 발견된 곳은 대자동이 유일하다.
중종 1년(1506) 9월 2일(무인) 2번째기사
▶ 연산군의 죄상에 대한 사신(史臣)의 논찬
(전략) ... 도성(都城) 사방 1백 리 이내에는 금표(禁標)를 세워서 사냥하는 장소를 만들고, 금표 안에 들어오는 자는 기훼제서율(棄毁制書律)로 논죄했다. 항상 단기(單騎)로 새벽과 밤을 가리지 않고 치달리고 왕래하였으며 따로 응사군(鷹師軍) 1만여 명을 설치하여 사냥할 때는 항상 따라 다니게 하였다. ...(후략)
딸:근데 뭐라고적혀 있는 거예요? 출입금지! 이렇게 네 글자만 써놔도 될 거 같은데…., 아빠:사람들을 얼씬도 못하게 한 마디 써놓은 거지! 한자를 하나씩 해석해볼까?
비석의 내용은 《禁標內犯入者論棄毁制書律處斬(금표내범입자논기훼제서율처참)》이다. 처음 보는 사람은 도대체 무슨 뜻인지 막막하게 느껴지겠지만, 적당히 띄어읽기를 하면 의외로 쉽게 뜻을 알 수다. 일단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서 뜻을 파악해 보자.
금표내범입자논기훼제서율처참
(1) 禁標內(금표내) 犯入者(범입자)
금표(禁標) 안쪽(內)으로
침범(犯)하여 들어온(入) 자(者)는

(2) 論(논) 棄毁(기훼) 制書律(제서율)
'기훼(棄毁) 제서율(制書律)'로 논하여(論)

(3) 處斬(처참)
참형(斬)에 처한다(處)
첫 번째 부분과 마지막 부분은 비교적 내용이 쉽다. 이 금표비의 안쪽으로 허락 없이 침범하여 들어온 자는 목이 잘리는 참형에 처한다는 뜻이다. 문제는 가운데 부분의 해석이다. 아마도 참형에 처하는 이유나 근거가 적혀 있을 것이라고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가운데 부분의 첫 글자인 논(論)은 논한다는 것이고, 마지막 글자인 율(律)은 법률을 뜻한다. 이를 해석하면 어떤 법률로 논한다, 즉 어떤 법률을 적용시킨다는 뜻이다. 이제 네 글자만 남았다. 앞쪽의 기훼(棄毁)는 동사인데, 뜻은 《폐기》하거나 《훼손》하다라는 뜻이다. 한편, 뒤쪽의 제서(制書)는 명사인데, 임금이 제도에 관련된 명령을 백성들에게 알릴 목적으로 적은 문서를 가리키는 것으로 비슷한 용어로는 조서(詔書)라고도 한다. 이를 종합해보면 《임금이 내린 명령서를 폐기하거나 훼손하는 자를 처벌하는 법률(기훼제서율)에 의거하여, 금표내에 침범한 자는 참형에 처한다》는 뜻이다.
임금의 명령을 담은 비석을 훼손하면 참형에 처한다니 조선의 법률은 정말 무섭네요.
아빠 그런데 《기훼제서율》은 조선의 법률이 아니란다.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 때 반포된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는 정작 《기훼제서율》이 없다. 대신 명나라의 법률인 대명률(大明律)에서 기훼제서율을 찾아볼 수 있다.
대명률의 《이율(吏律) - 기훼제서인신조(棄毁制書印信條)》
"임금(황제)의 교지 및 사신에게 내리는 역마 발급에 관한 어인이 찍힌 문서와 사신에게 내리는 승선에 관한 문첩 또는 관청의 인장 및 야간순찰에 관한 동패를 고의로 내버리거나 파손한 자는 참형에 처한다 (凡棄毁制書 及起馬御寶聖旨 起船符驗 若各衙門印信 及夜巡銅牌者 斬)"
연산군은 무슨 근거로 이 법률을 적용시킨 것일까?
조선은 개국 초부터 철저히 중국에 대한 사대를 표방했다. 태조 이성계가 내세운 위화도 회군 당시의 명분 속에 ‘소국이 대국이 칠 수 없다’는 것이 첫 번째로 들어있는 것을 보면, 조선왕조 내내 이어졌던 중국에 대한 지독한 사대주의는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잠깐]이성계가 위화도 회군 당시 주장한 4불가론(四不可論)

① (以小逆大) 작은 나라로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은 옳지 않다
② (夏月發兵)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옳지 않다
③ (擧國遠征 倭乘其虛) 거국적인 원정을 하면, 왜적이 편승하여 그 헛점을 노린다.
④ (時方暑雨 弓弩膠解 大軍疾疫) 무더운 장마철은 활의 아교가 풀어지고 전염병이 염려된다.
조선은 경국대전이라는 자체의 법전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법제를 더 우선시했는데, 심지어 경국대전을 편찬한 성종이나 그 아들인 연산군 당시에도 명나라의 법전인 대명률(大明律)에 많은 부분 의존을 했다. 이런 경향은 조선후기로 갈수록 법률 뿐만 아니라 예법에서도 점점 심해져서 결국 예송논쟁과 같은 사건의 단초가 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연산군은 이 금표비를 무엇 때문에 세웠나요? 함부로 들어오는 사람을 참형시킬 정도라면 매우 중요한 일을 했던 것 같은데…
아빠 그래, 뭔가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어서 금지했겠지?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야.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로는 연산군이 자신의 유흥지에 일반 백성들의 출입을 금지시키기 위해서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연산군이 굳이 한양도성에서 2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는 고양시의 대자동까지 와서 단순한 유흥지를 만들었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연산군은 이미 한양에도 궁궐뿐만 아니라 궁궐에서 가까운 장소에 《탕춘대》와 《함춘원》 등 호화 유흥지를 많이 만들어두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한양에서 제법 거리가 있는 고양에는 어떤 유흥을 위해 금표비를 설치했던 것일까?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그 단서가 될 만한 기록이 일부 남아있다.
연산군 10년(1504) 8월 9일(병인) 1번째기사
▶ 김감 등이 금표를 세운 이유를 사냥과 군사 조련 등으로 계유문을 지어 올리다
김감(金勘) 등이 계유문(戒諭文)을 지어 올렸는데,
“지금 도성 밖 동서 근방 지역에 표를 세워 사람의 출입을 금지함은 봄·가을 사냥과 군사 조련를 위한 데로 식치(食治)하고 수렵하는 장소이므로 모두 국가에서 폐할 수 없는 일이다. 또 도성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사람이 올라가 바라보는 것을 금지함은 이미 정한 법이 있으나, 백성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아 올라가 궁궐을 내려다 볼 뿐만 아니라, 키우는 수목을 베어 가는 자까지 있다. 풍속의 투박함이 날로 이러하므로 금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인데, 만약 금방(禁防)하려면 또한 그 한계를 넓혀 사람의 종적을 멀리하지 않을 수 없다. (후략)
이로써 우리는 금표로 출입을 제한한 고양시 대자동의 유흥지란 왕의 사냥터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왕의 사냥터가 뭐길래 금표비까지 세워가면서 출입을 통제했을까?
조선과 같은 왕조 시대때, 《왕의 사냥》이라는 행사는 그냥 재미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왕이 궁중 밖에 사냥을 나가는 일을 가리켜 그냥 사냥이 아닌 ‘무예를 강습한다’는 뜻으로 ‘강무(講武)’라고 불렀다. 사냥이라는 형식을 통해 왕이 여러 부대를 효율적으로 지휘통솔하면서 군사훈련을 실시했는데, 아울러 사냥을 통해 잡은 짐승을 조상신에게 바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강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조선의 예법서인 《국조오례의》에도 실려있다. 강무의 절차를 살펴보면 행사 7일 전에 병조에서 인원을 징발하여 사냥할 들판에 경계를 표시하고, 당일 새벽까지 군사를 집합시켜 사냥터를 포위한다. 이때 동원되는 군사의 숫자가 5천에서 1만에 육박하기 때문에 사냥이라기 보다는 실질적으로 사냥감을 적으로 간주하는 일종의 군사훈련이라고 할 수 있다. 이윽고 왕이 사냥터에 이르면 북을 치고 군사들이 행진하며 사냥이 시작되는데 이때 몰이하는 기병을 출동시킨다.
왕의 주변에는 호위하는 장수들과 대군, 왕자들이 함께 하는데 반드시 임금이 짐승을 쏜 후에 여러 대군, 왕자들이 쏘고 그 뒤를 이어 장수와 군사들이 차례로 쏜다. 이를 마치고 몰이하는 기병이 철수하면 백성들의 사냥이 허락된다. 행사가 끝나면 잡은 짐승은 모두 한곳에 모으는데 큰 짐승은 관(官)에서 가져가고 잡은 짐승중에서도 특별히 좋은 고기는 사자를 시켜 종묘에 보내 제사를 지냈다. 나머지는 그 자리에서 요리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작은 짐승은 개인이 가지고 가기도 했다.
임금:이번 주말에는 고기 파티를 한 번 해야겠구먼!, 난 최고의 왕이야. 역시 못하는 게 없어!, 아빠:저 안에서 호랑이도 잡았단다!,딸: 임금이 호랑이도 잡아요?, 대단하네!
아빠 강무의 목적 중에는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는 호랑이를 잡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단다.
그 무서운 호랑이를 잡아요?
조선시대에는 호랑이가 아주 흔했다. 그래서 호랑이 때문에 백성들의 생활이 크게 위축되었고 심지어 호랑이에게 잡아 먹히는 사례도 종종 있었다. 그러다보니 강무의 목적 중에는 호랑이를 잡아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것도 포함되었다. 1만 명이나 되는 군사들이 넓은 지역을 포위하여 몰이를 하다보면 당연히 그 속에는 호랑이도 여러 마리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호랑이는 쉽게 잡을 수 있는 짐승이 아니다. 그래서 호랑이를 잡기 위한 특수군사를 두었으니 그들을 가리켜 착호갑사(捉,잡을 착/虎,범 호/甲,갑옷 갑/士,선비 사)라 불렀다. 호랑이를 잡는 갑옷입은 군사라는 뜻이다. 하지만 아무리 용맹하고 특수훈련을 받은 착호갑사라 하더라도 운이 나쁘면 호랑이에게 당할 수도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그런 기록이 남아있다.
세조 12년(1466) 1월 28일(신미) 1번째기사
▶ 서교에서 호랑이를 잡다가 갑사 박타내가 죽다
김감(金勘) 등이 계유문(戒諭文)을 지어 올렸는데,
서교(西郊)에 거둥하였다. 대가(大駕)가 의묘(懿墓) 남쪽 산에 이르러 호랑이를 포위하였는데, 겸사복(兼司僕) 태호시내(太好時乃)가 달려 들어가서 호랑이를 쏘려고 하자 호랑이가 말 다리에 상처를 입혔으므로 겨우 화를 면하였다. 갑사(甲士) 박타내(朴他乃)는 창을 가지고 나아가서 잘못 찔러서 호랑이에게 물려 거의 죽게 되었으므로, 도승지 신면(申면)에게 명하여 극진히 약으로 구호하게 하고 드디어 환궁하였는데, 이튿날 박타내가 죽었다.
연산 11년(1505) 2월 8일(갑자) 5번째기사
▶ 선전관 등에게 화포, 기계 등을 가지고 금표 안에 들어가 범 등을 잡아오게 하다
선전관(宣傳官)과 군기시(軍器寺)의 관원을 시켜 화포(火砲), 기계(機械)를 가지고 겸사복 이담손과 함께 금표(禁標) 안에 들어가서 곰[雄], 범[虎]을 사로잡아 오라 하고, … (중략) … 대호(大虎) 15여 구(口)를 사로잡고 곰, 돼지, 노루, 사슴이 매우 많았는데… (후략)
군사:엊그제 착호갑사가 호랑이에게 당했다는구먼.
군사:그게 그들 직업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난 그냥 제사에 쓰일 멧돼지나 잡아야겠다.,아빠:멧돼지를 잡으면 종묘에서 제사용으로 올렸다고 해., 딸:비싼 소고기가 아니라 멧돼지 고기를요??
아빠 사냥에서 잡는 짐승 중에 일부는 종묘에 제사용으로 썼는데, 제사용 돼지고기를 위해서는 특히 멧돼지를 잡는 것이 중요했단다.
왜 그렇죠? 제사용으로 쓸 돼지라면 민간에 얼마든지 있을텐데…
가축 중에서 소는 새끼를 한번에 한 마리씩 낳지만, 돼지는 십 수 마리를 한꺼번에 낳고 번식률도 높다. 따라서 우리는 조선시대에도 집에서 기르는 가축 중에서 소보다는 돼지가 훨씬 숫자가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는 돼지는 매우 귀한 가축이었고 소가 훨씬 더 많았다.
그 이유는 가축의 먹이 때문이었다. 민간에서 소는 농사용으로도 꼭 필요한 존재였을 뿐만 아니라 채식을 하기 때문에 풀만 먹여서도 충분히 키울 수가 있었다. 하지만 돼지는 잡식성으로 인간과 먹을 것을 놓고 경합관계에 있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항상 보릿고개가 있을 정도로 사람도 먹을 것이 모자랐던 판에 돼지까지 키우는 것은 상상도 하기 어려웠다. 그런 이유로 사냥에서 멧돼지를 잡아 제사용으로 쓰려했던 것이다.
딸:그런데 금표비가 많이 누런 것 같아요!, 아빠:그건 연산군의 폭정에 분노한 백성들이 금표비를 땅에 파묻어 수백년 동안 빛을 못봐서 그렇단다.
아빠 근데 금표비가 많이 누런 빛을 띄고 있어요. 이유가 있나요?
그건 연산군의 폭정에 격분한 백성들이 중종반정 이후에 이 비석을 땅 속에 파묻었기 때문이야. 그 뒤 수백 년동안 땅속에 있었기 때문에 저렇게 색깔이 변한 것이지.
연산군은 집권 초기에는 해동증자로 불릴 정도로 나라를 잘 다스렸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폭군으로 바뀌게 되는데, 국가의 주요 군사행사였던 강무행사 역시 초기에는 제대로 실시했지만, 나중에는 개인의 유희를 위한 단순한 사냥놀이로 변질시켜 버렸다. 또한 금표비 안으로 들어온 사람을 참형에 처한다는 것도 그냥 경고문에 그친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집행한 사례가 여러 건 실록에 등장한다.
연산 10년(1504) 8월 7일(갑자) 3번째기사
▶ 금표에 대한 원망은 위를 능멸한다고 보아, 삼족을 멸하는 특별법을 만들게 하다
연산 10년(1504) 8월 18일(을해) 2번째기사
▶ 금표를 범한 자를 참형에 처하여 효수하게 하다
전교하기를, “서쪽 금표(禁標) 안을 범하여 들어온 두 사람을, 의금부로 하여금 수레에 갖추어 서소문(西小門) 밖으로 싣고가 법대로 참형에 처하여, 동서 금표에서 효수(梟首)하되, 그 죄명(罪名)을 써서 널리 보이라."
연산 10년(1504) 11월 3일(기축) 3번째기사
▶ 금표 안을 범한 천동을 참수하여 효수하게 하다
전교하기를, “금표 안을 범한 사람 천동(千同)은 머리를 베어, 전례대로 금표 근처에 효수(梟首)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보도록 하라." 하였다.
연산군의 실정은 비단 강무의 변질 뿐만 아니라 국정전반에 걸쳐 나타났다. 그러니 여기저기서 연산군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연산 10년(1504) 12월 13일(기사) 2번째기사
▶ 도성 안 동서 금표에 성을 쌓는 등 역사가 끊이지 않아 백성들의 원망이 가득하다
연산 12년(1506) 2월 2일(임자) 5번째기사
▶ 금표의 한계를 정하니, 도둑들이 숨어 살아도 잡지 못하여 백성들이 괴로워하다
하지만 연산군은 그런 비판과 견제가 매우 싫었다. 연산군의 관점에서는 조선왕조가 생겨난 이후 자기처럼 완벽한 조건을 지닌 상태에서 제대로 제왕수업을 받고 왕위에 오른 사람은 별로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름 자부심이 대단했다. 사실 연산군 이전까지 왕위에 오른 조선의 왕들 중에서 건국이념인 성리학적 사상에 부합하는 적장자로서 왕위에 오른 사람은 문종과 단종 밖에 없었는데, 그나마 문종은 병약하여 재위기간이 겨우 2년 남짓이었고, 단종 역시 숙부인 세조에게 억울한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위엄을 갖춘 제왕으로서의 면모를 보이지 못했다.
태종은 태조의 다섯 번째 아들이었고, 세종도 세 번째 아들이었으며, 세조는 두 번째 아들, 예종도 두 번째 아들, 그리고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 역시 두 번째 아들이었다. 그 때문에 연산군의 생각에 조선은 신권이 왕권을 강하게 견제하는 나라가 된 것으로 인식했고, 자신이 추락한 왕권을 회복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의 숙종도 연산군과 마찬가지로 적장자로서 왕위계승을 한 가장 완벽한 조건을 갖춘 군주였기에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환국정치를 통해서 신하들을 쥐락펴락 했던 것이다.)
하지만 방법론이 잘못되었다. 왕권강화를 국가를 위한 목표로 삼았어야 했는데 엉뚱하게도 개인을 위한 목표로 삼는 우를 범했다. 연산군은 자신을 견제하려는 양반사대부 계층의 비판여론을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통해 눌러버렸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로부터 터져 나오는 원망과 비판의 목소리는 잠재우기가 쉽지 않았다. 양반들이야 대의명분 때문에 목숨을 걸고서라도 상소문을 올려서 스스로 화를 당했지만 백성들은 한자를 몰랐기 때문에 상소를 올릴 수도 없었다. 기껏해야 한글로 된 벽보를 여기저기에 몰래 붙이는 것으로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고자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자신의 실정을 비판하는 한글투서에 격분해서 그에 연루된 사람들을 끝까지 찾아내서 처벌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아예 한글자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때 적용한 법규 역시 금표비에 등장한 《기훼제서율》이다.
백성:금표 하나 넘었다고 사람을 그렇게 죽일 수가 있나!!, 양반:그러게나 말이야!, 임금:뭐라? 이것들이 글 좀 쓸 줄 안다고 날 욕해?, 다 잡아들여! 한글도 못 쓰게 하란 말이다!
1504년 연산군은 전교를 내려
"언문(한글)을 쓰는 자는 기훼제서율로써
(諺文行用者 以棄毁制書律)
그리고 알고서도 고하지 않는 자는 제서유위율로써 논단하고
(知而不告者 以制書有違 論斷)
조사의 집에 소장하고 있는 언문으로 구결을 단 책은 모두 불사르되
(朝士家所藏 諺文口訣書冊 皆焚之)
한자를 언문으로 번역한 책은 금지하지 말라
(如飜譯 漢語諺文之類 勿禁)"고 명령하였다.
조선판 분서갱유가 바로 연산군 때에도 있었던 것이다. 연산군의 폭정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결국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쫓겨나가자 그동안 자신들을 옭아매었던 금표비를 땅속에 파묻었던 것이다.
중종 1년(1506) 9월 2일(무인) 5번째기사
▶ 홍 숙의, 박숭질을 복권하고 폐주의 동서 금표를 폐하다
홍 숙의(洪淑儀)의 직첩을 도로 주어 자수궁(慈壽宮)에 들게 하고 박숭질(朴崇質)의 벼슬을 복직시키고, 동서 금표(東西禁標)를 혁파할 것을 명하였는데, 모두 대신의 말을 쫓은 것이다.
백성들의 끓어오르는 분노가 서린 비석이군요! 미처 몰랐어요!
아빠 그래. 그냥 모르고 지날 뻔 한 이 비석에 그런 연산군의 폭정과 백성들의 피눈물이 서린 역사가 숨어있었지! 자, 고양시에 온 김에 이제 왕릉골에 한번 가볼까?
금표비를 보고있는 아빠와 딸
최동군(글로벌사이버대학교 문화콘텐츠학부 외래교수)
사진/그림
박동현(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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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01-19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