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역사

동궐도에 숨어있는 효명세자에 대한 배려

동궐도에 숨어있는 효명세자에 대한 배려
고려대학교 100주년 기념관
고려대학교 찾아가는 길, 1. 고려대역 1번 출구에서 나와서 오른쪽 계단으로 올라간다. 2. 계단 끝에 오르면 왼쪽 정면에 고려대 100주년 기념관 도착!
딸:아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아빠:이곳 박물관에 소장된 동궐도라는 지도를 보러가는 거야!
아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아빠 이곳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동궐도라는 그림을 보러 가는거야.
동궐도? 그게 뭔데요?
'기록의 나라'라고 하는 조선에서 실록이나 승정원일기, 각종 의궤 등 모든 국가 기록을 다 뒤져봐도 동궐도(東闕圖)는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떤 이유로 왜 그렸는지 아무런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심지어 동궐도의 존재 자체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런 만큼 동궐도는 온통 비밀이 가득한 그림이다. 그러나 최근까지 많은 사람들의 연구성과에 의해 그 숨어있는 비밀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동궐도에 대해 개략적인 내용을 알아본 뒤, 육하원칙에 의거하여 하나씩 숨은 비밀을 파헤쳐보자.
딸:이그림은 우리집에는 도저히 걸 수 없을 것 같아요! 와!! 크다!!!
아빠:세로 2.7미터, 가로 5.7미터 정도 되니까 가정집에는 어림도 없지. 이 그림 걸 수 있는 큰 집에 살고 싶다는 건가...
와, 대단한 그림이다. 그런데 이 그림은 우리 집에는 도저히 걸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아빠 당연하지, 세로 273센티 가로 576센티미터니깐 웬만한 가정집에는 어림도 없어.
어떻게 보면 지도 같기도 한데…
우선 동궐도는 동쪽의 궁궐, 동궐을 그린 것이다. 조선시대 궁궐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처럼 각 궁궐의 고유이름으로도 불렸지만, 위치 및 방향에 따라 북궐, 동궐, 서궐로도 불렸다. 항상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바라보는 임금의 기본자세(君主南面)에 따라 조선의 가장 중심 궁궐(이를 법궁(法宮) 또는 정궁(正宮)이라 한다)은 북궐이며 이는 경복궁이다.
한편 법궁에 화재나 전염병 등의 이유로 임금이 머물 수 없는 경우를 대비하여 법궁의 인근에 여분의 궁궐을 만들었는데 이를 이궁(離宮)이라고 한다. 동쪽에 있는 이궁을 동궐, 서쪽에 있는 이궁을 서궐이라고 불렀다. 동궐은 창덕궁과 창경궁을 아울러 부르는 이름이고 서궐은 경희궁이다. 광해군 때 인목대비가 한때 유폐되었던 `서궁`은 옛 경운궁(덕수궁)의 일부이다.
동궐 지도-정궁(복궐)_경복궁, 동궐_창덕궁,창경궁, 서궐_경희궁
[여기서 잠깐]창덕궁, 창경궁 두개의 궐을 지칭하는 동궐

북궐과 서궐은 궁궐이 하나씩이지만 동궐은 예외적으로 두 개의 궁궐로 되어있다. 원래 법궁인 경복궁의 동쪽에는 창덕궁 하나만이 있었다. 그런데 성종 때 창덕궁의 담장에 덧붙여 새로운 궁궐을 만들었으니 그것이 창경궁이다. 그런 이유로 지금도 창경궁 내에는 성종의 태실이 모셔져 있다. 그렇다면 성종이 굳이 궁궐을 하나 더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대비들 때문이었다. 원래 임금에게는 선왕의 부인인 대비가 보통 한 분이거나, 아니면 많아야 할머니인 대왕대비까지 포함해서 두 분이다. 하지만 성종에게는 즉위 당시 대비가 무려 세분이었다. 자신의 친모인 인수대비, 선왕(예종)의 부인이었던 안순왕후, 게다가 자신의 할머니인 정희왕후(세조의 부인), 이렇게 세 분의 대비가 한 궁궐 속에 있어야 했던 것이다. 이런 드문 상황이 벌어진 것은 한명회의 농간으로, 세조임금 이후 왕위계승서열이 적장자우선이라는 원칙을 무시한 채 둘째 아들인 예종과 성종에게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예종과 성종의 공통점은 각각 한명회의 셋째 딸과 넷째 딸과 결혼한 사위였다.

궁궐의 전각은 ‘전,당,합,각,재,헌,루.정’이라는 서열이 있다. 조선에서는 왕과 왕비의 건물이거나 선왕의 유물을 보관하는 곳 또는 대비처럼 임금의 웃어른이 사는 건물에만 전(殿)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 국가서열 2위인 왕세자도 건물에 전(殿)을 쓰지 못하고 당(堂)을 쓴다.(경복궁의 자선당과 창덕궁의 중희당) 그러니 창덕궁 하나에 대비전을 3개나 마련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같은 대비들이 좁은 궁궐 안에 셋이나 함께 생활하는 것은 서로에게 불편한 일이었다. 게다가 중전의 경우에는 시어머니 두 분에 시할머니까지 모셔야 하니 보통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성종은 대비들을 위한 창경궁을 만들었다.

그런데 창경궁은 원래 목적이 대비들을 위한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궁궐이라 창덕궁에 비해서는 격을 한 단계 낮춰 만들었다. 그래서 방향을 남향이 아닌 동향으로 했고, 3문 구조가 아닌 2문 구조로 만들어서 홍화문과 명정문을 거치면 바로 임금의 법전(法殿)인 명정전이 보이도록 했다. 또한 법전을 경복궁의 근정전이나 창덕궁의 인정전은 2층인 반면, 창경궁의 명정전은 단층으로 만들어서 위계질서를 확실히 했다.
국보 제249호인 동궐도는 현재 2점인데, 각각 고려대와 동아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런데 고려대 소장본은 16권의 접이식 책자 형태이고, 동아대 소장본은 16폭짜리 병풍 그림으로 되어 있다. 처음에는 두 그림이 서로 다른 그림인 줄 알고 원본에 가까운 고려대 소장본을 국보로 지정하고, 병풍으로 가공을 거친 동아대 소장본은 보물로 지정했는데, 이후 두 그림을 정밀감식한 결과 그림의 내용이 동일하고 제작기법이나 방식이 거의 같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래서 동아대 소장본도 보물 지정을 취소하고 국보로 승격시켰다.
△ 동궐도 16권 접이식책자 (고려대 박물관 소장)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고려대 소장본의 16권의 표지 제목인데, 각각 東闕圖人一, 東闕圖人二, 東闕圖人三, . . . ,東闕圖人十六 으로 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번호나 숫자를 부여할 때 1,2,3,4. . . . 와 같은 자연수 이외에도, 천지현황. . . . 과 같이 천자문의 순서를 따른다든지, 갑을병정. . . . 과 같이 천간지지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꼭 4개를 구별할 때는 춘하추동으로 구별하고, 꼭 3개를 구별할 때는 천지인으로 구별하기도 했는데, 고려대 소장본에 사람 인(人)이 쓰여졌다는 것으로 보아 원래 천(天)과 지(地)까지 총 3본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동아대 소장본은 병풍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원본이 `천`인지 `지` 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발견된 2점의 동궐도 외에 최소 1본은 더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잠깐]동궐도를 볼 수 있는 또 다른 곳이 있다?

동궐도의 진본은 각각 고려대 박물관과 동아대 박물관에 소장중이다. 진본을 가까이서 보는 것이 약간 부담이 된다면, 모사본을 통해 동궐도를 눈앞에 놓고 자세히 관람하는 방법을 추천한다. 동궐도의 실물 모사본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1층) 국립중앙박물관(1층), 서울역사박물관(2층)에 전시되어 있다. 특히 국립고궁박물관과 서울역사박물관은 서궐도안 까지 함께 전시되어 있어서 동궐과 서궐을 비교해 가면서 공부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참고로, 진본이든 모사본이든 동궐도가 전시된 박물관은 모두 무료입장이다.
딸:그림 하나만으로 동궐도의 비밀을 밝혀낸다니! 완전 흥미진진해요~, 아빠:그럼 시작해볼까? 동궐도의 진실을 찾아서!!!
아무런 기록이나 단서없이 단지 그림 하나만으로 동궐도의 비밀을 밝혀낸다니, 사도세자가 죽은 장소를 찾는 것만큼이나 흥미진진한데요?
아빠 그럼 이번에도 탐정놀이를 한번 해볼까? ‘그것이 알고 싶다’ 동궐도의 진실 편!!!
1. Who?누가 그렸는가?
우선 누가 동궐도를 그렸는지 살펴보자. 이 그림은 절대 아무나 그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궁궐의 내밀한 곳까지 완전하게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궁궐에 출입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 궁궐의 구조와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그렸을 것이라는 점이다.  또한 이런 대작은 한 사람이 그릴 수 없다. 규모로 보아 여러 사람이 모여서 그려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사람마다 화풍이 달라 그림의 통일성을 해칠 수 있다. 따라서 그리는 작업에 동원된 모든 사람들의 화풍이 동일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조건을 모두 갖춘 사람은 조선시대에는 단 한 단체에 속한 사람들 뿐인데, 바로 도화서의 화공들이다. 관청에 소속된 사람이어서 허가만 받으면 궁궐출입에 크게 지장이 없었고, 도화서 소속 화공들은 관직의 숫자만큼 여러 명 이었을 뿐더러, 국가의 주요 그림을 그리는 본업의 특성상 화풍을 모두 통일하고 있기 때문에 동궐도의 제작에는 이들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2. When?언제 그렸는가?
관련 기록이 전무하다는데도 그림이 그려진 시기를 알 수 있을까? 물론 가능하다. 동궐도의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몇몇 건물은 주춧돌만 남은 채 빈터로 남아있다. 그것은 화재 등의 이유로 그림이 그려질 당시 건물이 없었다는 것을 반증하는데, 그 건물들이 화재로 소실된 기간을 조사하면 공통적으로 겹치는 구간이 있다.
동궐도
또 한 가지가 더 있다. 위의 경우와는 정반대로 그림 속에는 온전한 건물로 그려져 있지만 각종 기록을 조사하여 화재로 소실되거나 상당기간 빈터로 존재했던 건물들도 많다. 따라서 이런 건물들의 존재유무를 시기별로 종합해보면 최종적으로 동궐도의 제작시기는 순조 26년(1826)~순조 30년(1830) 사이로 압축된다.
그림을 그린 시기는 춘하추동 사계절이 모두 대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동궐도의 시간적인 배경은 이른 봄에 맞춰져 있다. 이는 의도적인 것이 내포되어 있다. 만약 여름이나 가을을 선택했을 경우 무성한 나뭇잎 등으로 인해 전각에 대한 집중도가 떨어졌을 것이다. 겨울을 배경으로 했을 경우에는 그림의 느낌이 너무 황량했을 것이다. 그래서 시기는 새생명이 돋아나는 이른 봄에 맞췄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늘어진 버드나무에 노란색 새순이 돋아나고 있고 궁궐안의 과수원에도 연분홍빛 복숭화꽃이 피고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3. Where?어디서 그렸는가?
앞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도화서에서 이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그런데 이 그림은 조선의 그림 중에서는 드물게 서양의 원근법이 적용되어 있다. 그림의 관점은 오른쪽 하늘에서 비스듬히 내려다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따라서 그림의 성격 이외에도 지도의 성격도 함께 가지고 있다.
바로 이런 점이 동궐도의 존재를 극비에 부치는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만약 이 동궐도의 존재가 외부에 알려지고 유출되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국왕의 생명과도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실제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자객이 정조가 거처하던 전각의 지붕 위까지 침입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4. What?무엇을 그렸는가?
실제 동궐의 모습을 하나도 빠짐없이 그렸다. 각 전각의 칸수까지 정확하게 그렸으며 여러 가지 장식물까지도 세밀하게 묘사해 놓았다. 심지어 선정전 근처에는 측간(화장실)까지 그려놓았다. 이는 아마도 동궐도의 기능 중의 하나가 대규모 화재 등으로 인해 궁궐의 복원이 필요할 경우를 대비한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5. How?어떻게 그렸는가?
고려대 소장본이 16권짜리 접이식 책자로 되어 있다고 했는데 이는 결국 여러 명이 세로로 16개의 구획을 나눠 작업을 한 뒤 하나로 모아서 붙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자세히 보면 좌우의 그림이 서로 약간 어긋나는 경우도 목격하게 된다. 또한 동궐도와 비슷한 성격의 서궐도안(보물 제1534호)을 보면 방안지에 그린 것처럼 밑줄을 치고 그린 흔적을 볼 수 있는데 동궐도 역시 그런 방식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6. Why?왜 그렸는가?
이제 지금까지 알아낸 단서를 가지고서 이 동궐도를 왜 그렸는지에 대해 알아보자. 단순한 궁궐의 복원 지침을 위해 그림을 그렸다고 보기에는 뭔가 설명이 부족한 것이 많아 보인다. 그래서 좀 더 단서들을 더 찾아서 종합적으로 따져 보겠다.
동궐도-중희당의 과학기자재들
(1) 그림의 배경시기가 이른 봄이다.
(2) 그림이 그려진 시기가 순조 26년~순조 30년이다.
(3) 세자의 정당(正堂)인 중희당에 풍기대, 해시계, 측우기, 소간의 등 과학기자재가 몰려있다.
(4) 세자가 공부하는 성정각 주변에 붉은색 판장들이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5) 원근법에 의한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뒤쪽 후원에 있는 규장각 부분이 매우 확대되어 있다.,
아빠:추가적인 단서에서 왜 동궐도가 그려졌는지 따져보자!
와, 딸:아빠! 오늘은 뭔가 준비를 많이 하셨네요!
위의 단서들을 종합해보면 이 동궐도를 그린 목적은 한 사람에게 초점이 모아진다. 그 사람은 바로 다름아닌 순조의 아들이면서 비운에 간 `효명세자` 이다.
세자는 떠오르는 태양이므로 동궁이라고도 불리고, 오행에 따르면 사계절 중 봄에 해당한다. 그래서 세자의 교육을 책임지는 세자시강원을 춘방(春坊)이라고 했다. 또한 순조 26년 ~ 순조 30년은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던 시기다. 대리청정이란 임금을 대신해서 국사를 처리하는 제왕실습기간을 뜻한다. 그래서 세자에게 최신 문물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중희당에 당시로서는 첨단 과학기구를 많이 설치했고, 또한 공부방인 성정각 주변에는 세자의 공부에 방해가 되지 말라는 뜻에서 임시 담장을 집중적으로 배치한 것이다.
또한 세자의 정당인 중희당과 침전인 연영합 사이의 건물은 우리식이 아닌 중국풍으로 지어졌는데, 이는 곧 중국으로 대표되는 신문물을 받아들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중국풍 건물
한편 규장각을 일부러 강조한 이유는 규장각을 만든 사람이 바로 효명세자의 할아버지인 정조임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속에서 왕다운 왕 노릇을 제대로 못하던 순조의 입장에서는 자기 아들에게 제대로 된 제왕의 모델로써 자기 아버지인 개혁군주 정조를 은연중에 부각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효명세자는 짧은 대리청정 기간 동안에 안동 김씨 일족을 배제하고 소외된 소론과 남인을 기용하는가하면, 자신의 장인 및 처가사람들인 풍양 조씨 세력을 끌어들여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견제하려고 했다.
그러나 문제는 세자의 건강이었다. 대리청정을 통해 왕성하게 제왕실습을 하던 22살의 젊고 촉망 받던 세자는 1830년 윤4월 각혈을 한 뒤 겨우 12일만에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효명세자의 요절은 조선이 회생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물거품처럼 날아간 사건이었다. 급작스레 요절하는 바람에 안동 김씨 일족으로부터 독살당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잠시 일기도 했으나 전혀 근거가 없기 때문에 그 문제는 더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아빠 창덕궁으로 들어가는 길을 자세히 보면 돌다리를 기준으로 해서 바깥쪽은 그냥 길인데 안쪽은 보도블럭처럼 생겼어요.
아빠 그 부분은 풍수지리적인 접근이 필요하지!
동궐도 - 돌다리
궁궐은 기본적으로 명당지역이라고 했다. 그런데 명당기운은 물길로 둘러싸야만 다른 곳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궁궐은 물길로 둘러싸여 있고, 그 물길을 건너가는 돌다리가 반드시 있다. 풍수의 관점에서 보면 돌다리의 안쪽은 명당이고 바깥쪽은 명당이 아니다. 따라서 동궐도는 명당지역에만 전돌을 깔아둔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외관상 궁궐의 경계는 궁궐담장이 되겠지만 내용상으로는 궁궐의 경계는 바로 궁궐을 싸고 있는 명당물길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왕과 왕비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돌다리를 절대 건너가지 않는다. 심지어 왕비는 자신의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셔도 돌다리까지만 나와서 거기서 친정집을 향해 예를 올리는 것으로 조문을 대신했다. 이를 망곡례라고 한다.
아빠:동궐도도 사람이 그리다 보니 실수한 부분이 있는데, 찾아볼래?, 찾으면 네가 전에 사달라고 한 아이패드를 사주마!, 딸:아빠도 참, 너무하시네!!!, 그냥 안사준다고 말해요!
아빠 이 동궐도도 사람이 그리다보니 실수를 한 것이 있는데 한번 찾아보겠니?
아빠, 너무하신 거 아니예요? 이 그림 속에서 어떻게 실수를 찾아요!!!
동궐도에서 실수한 곳이 몇 군데 있는데 대표적인 것을 하나 꼽으라면 신독재 건물이다. 신독재 건물은 창경궁의 깊숙한 쪽에 있는 건물인데, 건물의 측면에 올라가는 계단은 있지만 정작 출입문은 없고 창문만이 그려져 있다.
딸:아앗! 정말 출입문 없이 창문만 있네요!
또한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은 실제로는 우진각지붕인데 그림에는 팔작지붕으로 그려져 있다.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이 팔작지붕인데 헷갈린 모양이다. 좀더 세밀하게 찾아보면 창덕궁의 돌다리인 금천교의 다리 난간 기둥이 그림에는 5개로 그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6개이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실수 때문에 오히려 인간적인 면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동궐도는 거의 사진에 가까울 정도로 정밀하게 그려졌다는 사실에 감탄을 금할 수 없는데 예를 들어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 안쪽의 나무에 까치집까지 그린 것은 사람의 혀를 내두르게 한다.
한편 창경궁의 중궁전인 통명전은 터만 남아 있는데 바로 그 왼쪽편에는 장독대가 2개가 보인다. 그런데 큰 장독대는 담도 돌담이고 그 안에 있는 소금창고인 염고(鹽庫)의 지붕이 기와지붕인 반면에, 아래쪽에 있는 작은 장독대는 담도 싸리담이고 그 안에 있는 염고의 지붕도 초가지붕이다. 이것은 왜일까?
이는 아마도 장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신분에 따라 서열을 달리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즉 왕실의 장독대와 궁중에서 일하는 내시, 궁녀들의 장독대를 분리해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동궐도에서도 풍수를 알 수 있다고 하셨죠?!
풍수지리의 기본원리만 안다면 동궐도에서 풍수가 반영된 것을 찾기란 매우 쉽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두 궁궐의 법전(法殿)부분이다. 풍수명당 기운은 그냥 땅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산줄기를 타고 온다. 산줄기가 흘러내려오는 것은 나무들이 많이 심어져 있는 곳을 유심히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창덕궁의 법전인 《인정전》 뒤쪽에는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어서 명당기운이 인정전에 들어가고 있음을 한 눈에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동궐도 - 창덕궁의 법전인《인정전》
하지만 창경궁의 법전인 《명정전》의 뒤쪽에는 산줄기의 흐름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산줄기가 명정전 옆에 붙어 있는 편전 《문정전》의 앞마당 담벼락쪽으로 흘러내리는 것이 보인다.  이는 창경궁이 대비의 궁궐이므로 정상적인 왕기(王氣)가 《명정전》으로 흘러들 경우 왕기가 분산되어 자칫 왕권쟁탈전의 소지가 생길 것을 우려해 일부러 정혈(正穴) 자리가 아닌 허혈(虛穴)자리에 《명정전》을 세운 것으로 풍수가들은 해석을 한다.
동궐도 - 명정전
와, 동궐도 속에는 정말 숨은 비밀들이 무궁무진한 것 같아요.
아빠 그렇지! ‘아는 만큼 보인다’ 라는 말 보다도 ‘보는 만큼 알게 된다’ 라는 말을 실감나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이 동궐도의 매력이야. 다음엔 연산군 시대의 유산인 《금표비》를 직접 보러 가볼까?
금표비? 그게 뭐지… 뭐, 보는만큼 또 알게 되겠죠! 기대할게요. 아빠!
동궐도를 보고있는 아빠와 딸
※ 자료 및 촬영 협조 : 고려대 박물관
최동군(글로벌사이버대학교 문화콘텐츠학부 외래교수)
사진/그림
박동현(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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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01-07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