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역사

성균관에 숨어있는 동이(東夷)족 후예의 흔적

성균관에 숨어있는 동이(東夷)족 후예의 흔적
명륜당
성균관 찾아가는 길, 1. 혜화역 4번 출구에서 출발. 2. 성균관대입구 사거리에서 횡단보도를 건넌다. 3. 성균관 대학교 정문 옆 대성전 입구로 들어가면 명륜당 도착!
아빠:성균관 명륜당 뒤에 있는 육일각(六一閣)에 숨은 역사를 들려줄게. 딸:육일각? 6월 1일에 만든 건물인가...
아빠 오늘은 성균관의 명륜당 뒤에 조그맣게 자리하고 있는 육일각(六一閣)의 숨은 역사를 들려줄게.
육일각? 한자는 참 쉬운데… 6월 1일에 만든 건물인가?
아빠 혹시 학교에서 역사시간에 옛날 중국에서 우리 민족을 뭐라고 불렀는지 배웠니?
음… 배웠는데… 기억이…
고대 중국에서는 우리 민족을 가리켜 동이족(東夷族)이라고 불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동이족은 우리 민족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만주, 한반도, 일본 등 (중국의 입장에서 봤을 때) 동쪽 지역에 있는 이민족을 포괄적으로 부르는 말이었다.
한편, 중국 후한시대에 만들어진 한자사전인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의하면 오랑캐 이(夷)자는 큰 대(大)자와 활 궁(弓)자가 합쳐진 것으로,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활을 잘 다루는 민족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 동이족의 후예라서 그런지 현대 스포츠 양궁 분야에서는 대한민국이 전세계의 최선두를 달리고 있고, 역사적으로도 뛰어난 명궁들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은 그 이름부터 부여말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설화에 따르면 주몽은 보통 아이들과는 달라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조그만 파리를 맞출 정도로 백발백중이었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도 고려 말 장수시절에 활의 명수로 이름이 높았는데, 한번은 왜구들이 삼남지방으로 무려 군사 5천을 이끌고 쳐들어왔던 적이 있었다. 당시 왜장 '아지발도(阿只拔都)'는 창검을 쓰는 기술이 매우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머리부터 발 끝까지 투구와 두꺼운 갑옷으로 빈틈없이 무장하고 있어 이성계의 화살이 수차례 그를 명중시켰음에도 전혀 뚫지 못했다. 그런 적장이 지휘하는 왜구들은 나날이 기세 등등해졌고 전세는 고려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그 때 이성계는 동료 이지란과 함께 꾀를 내어 시간차 공격으로 아지발도를 공격했다. 먼저 이지란이 화를 쏘아 아지발도의 투구 끝에 맞추고, 투구가 약간 뒤로 젖혀진 그 순간 놀란 아지발도가 입을 벌렸을 때 이성계가 화살을 쏘아 그의 목구멍을 꿰뚫었다. 적장을 잃은 왜구들은 더 이상 싸울 생각을 못하고 패퇴하기 시작했고, 이성계는 그 기세를 몰아 크게 승리하였는데 이것이 1380년(우왕 6년)의 황산대첩이다.
아빠:육일각은 성균관의 무기고였어. 활과 화살, 과녁 등을 보관했지!, 딸:선비들이 공부하는 성균관 안에 무기를 뒀어요?
아빠 육일각(六一閣)은 간단히 말해서 성균관의 무기고였어. 이 곳에서는 국왕과 신하들이 활을 쏘는 예식인 대사례(大射禮)에 사용하던 활과 화살, 과녁 등을 보관했지.
선비들이 공부하는 성균관 안에 무기를 뒀어요? 원래 활은 무신들의 장비가 아닌가요?
조선은 양반의 나라다. 궁궐의 조정 마당에는 가운데 삼도(三道)라는 3차선 돌길이 깔려있고, 동쪽에는 문신(文臣)들이 그리고 서쪽에는 무신(武臣)들이 줄지어 선다. 그래서 문신을 동반(東班,문반), 무신을 서반(西班,무반)이라고도 부르고, 그 둘을 합쳐서 양반(兩班)이라고 하는 것이다.
성균관은 소과(小科)에서 급제를 하고 대과(大科)를 앞둔 문관(文官) 유생들이 공부를 하는 곳인데, 그 중에도 명륜당은 학생들이 모여 유학을 공부하는 강당이다. 그런데 그 뒤에 있는 작은 건물에 무슨 연유로 무기고가 있었던 걸까?
흔히 선비 사(士)자를 《글 공부하는 선비》라고 해석하며 문신(文臣)을 머리 속에 먼저 떠올리는데,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옛날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사(士)는 문무의 구별없이 그냥 보통 남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전사(戰士), 검투사(劍鬪士), 병사(兵士), 군사(軍士) 등 무(武)에 관련된 단어에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춘추시대 유학의 시조인 공자가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교육 내용인 육예(六藝)를 살펴보면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로 나눠진다. 《예》는 예법, 《악》은 음악, 《사》는 궁술(弓術), 《어》는 마술(馬術), 《서》는 서도(書道), 《수》는 수학(數學)이다. 이 중에서 《사(射)》 와 《어(御)》는 바로 《말이 끄는 전차를 몰면서 그 위에서 활을 쏘는 것》을 교육시킨 것으로, 훗날 전형적인 무인의 기술이 된다.
우리 조상들은 이런 이유로 비록 양반 중에서 문관이라 하더라도 활쏘기 연습은 소홀히 하지 않았는데, 육일각은 바로 그 공자의 교육내용인 《육(六)예 중의 하나(一)》 즉 활쏘기인 사(射)를 가리키는 것이다.
딸:문관들이 활쏘기까지 잘 해야 한다니!!, 유생들은 공부도 잘하고 탄탄한 근육도 가진 훈남이었을 것 같아요~, 아빠:활쏘기는 유생들의 심신수련 방법이기도 했어.
문관들이 활쏘기까지 하면 무관들의 전문영역을 침범하는 것 아닌가요?
아빠 쏘기는 무예이기도 하지만, 심신을 수련하는 방법으로도 쓰였어.
고대 중국에서는 활쏘기를 무예가 아닌 심신수양의 방법론으로 여겼다.  그 내용이 예기(禮記) 를 비롯하여 많은 동양고전에 등장을 하는데 공자의 어록인 논어에서도 여러 곳에 나온다.  예를 들어 매우 짧은 문장인 논어의 팔일(八佾)편 제 16장을 보자.
子曰 射不主皮  (자왈 사불주피)
공자 가라사대(子曰), 활을 쏘는 것은(射) 가죽(皮)획득을 주(主)목적으로 하지 않는다(不)
爲力不同科 (위력부동과)
또한 힘(力)을 사용하는(爲) 것에는 모두 같은 부류(同科)가 아닌데(不)
古之道也 (고지도야)
이것이 예전의(古之) 활쏘는 《도》였다(道也)
논어가 어려운 것은 그 글의 맥락이나 전후사정을 알 수 있는 부분이 생략된 채 달랑 공자와 제자들간의 대화내용 만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인해 논어를 읽는 사람에 따라서 해석내용이 다양하게 나올 수 있다. 팔일편 제16장도 마찬가지인데 글자는 그다지 어려운 것이 없으나 뜻의 파악이 좀 어렵다. 우선 앞부분 《사불주피》 부분과 뒷부분 《위력부동과》 부분이 서로 내용상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서로 독립적인 것인지에 따라서도 해석의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
지금껏 많은 사람들이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해석을 했는데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활을 쏠(射) 때 표적이 되는 과녁(皮)을 뚫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不主). 왜냐하면 활을 쏘는 힘(爲力)이 사람에 따라 달라서 한 등급(科)으로 같지 않기(不同) 때문이다.》
여기서는 가죽(皮)를 과녁으로 해석을 했다. 왜 그럴까? 옛날에는 활쏘기의 표적판을 가죽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활쏘기 표적을 가죽을 뜻하는 혁(革)이라고 불렀고 그 혁을 화살로 뚫는 것을 꿸 관(貫)자를 써서 관혁(貫革)으로 부르다가 그것이 《과녁》으로 바뀐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앞 뒤 문장이 독립적인 것으로 보고 해석을 해 보았다. 먼저 앞부분의 《사불주피》는 활을 쏘는 예법, 즉 사례(射禮)에 관한 것으로 해석을 했다. (특히 육일각은 사례 중에서도 대사례에 관련된 것이다.) 그래서
《군자가 활을 쏘(射)는 것은 가죽(皮)획득을 위한 사냥을 주(主)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不), 오히려 심신을 단련하기 위한 수단으로 한다》
라는 취지의 해석을 했다. 그리고 뒷부분의 《위력부동과》는 활쏘기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육체단련 운동이나 경기에서
《힘을 쓰는 것(爲力)에 체급이나 등급이 똑같지 않고(不同科) 사람에 따라 나눠지는 것이다.》
라는 취지의 해석을 했다. 즉, 그 옛날에도 체급별 스포츠가 있었다고 말이다.
아빠 고구려의 무용총 수렵도에도 활로 심신수련을 하는 장면이 나오지.
아.. 그게 뭐더라… 혹시 사냥하는 장면이 있는 그 그림이요?
딸:분명 활로 동물 사냥을 하고 있는 그림인데..., 아빠:저기 화살촉이 뭉툭하게 그려져 있지? 동물 사냥이 목적이 아니었다는 증거야!
고구려 고분벽화 중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무용총의 수렵도》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말 위에서 자유자재로 호랑이와 사슴을 향해 활을 쏘는 장면이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은 화살촉이 뾰쪽하지 않고 뭉툭하게 생겼다는 것이다. 그런 화살은 신호용으로 쓰이는데, 울 명(鳴) 자에 화살촉 적(鏑) 자를 써서 명적(鳴鏑) 이라고도 하고, 다른 말로는 효시(嚆矢)라고도 한다. 어떤 것의 맨 처음을 비유적으로 쓰는 말인 효시라는 말은 `장자(莊子)` 의 `재유(在宥) 편` 에 나오는 말인데, 효는 울릴 효(嚆), 시는 화살 시(矢)자로 총이나 대포가 없던 옛날에는 전쟁을 시작할 때 우는 소리가 나는 화살을 쏘아 올려서,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용도로 사용했었다.
그렇다면 수렵하는 그림인 수렵도에서 왜 그런 화살을 썼을까? 사냥의 목적이 사냥감을 잡아 먹기 위한 것이라면 분명히 뾰족한 화살을 썼을 것이다. 하지만 사냥의 목적이 심신을 수련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굳이 살생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논어에서 말하는 사불주피(射不主皮)인 것이다.
활을 쏘는 예법을 사례(射禮)라고 하고 종류에는 대사례(大射禮)와 향사례(鄕射禮)의 두 가지가 있는데 주관하는 곳에 따라 임금이 주관하면 대사례, 대부나 지방관이 주관하면 향사례라고 하였다.
특히 대사례는 국가에 주요행사가 있을 때 임금과 신하가 한자리에 모여서 활을 쏘면서 그 예의 정도를 살피는 의례였다. 행사의 내용이 제사일 경우, 임금이 성균관에 나아가 석전례(釋奠禮)를 지낸 뒤 신하들과 활쏘기를 했고, 활을 쏘아 과녁을 맞힌 사람은 상으로 제사에 참례시키고 맞히지 못한 사람은 벌로 제사에 참례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대사례에서는 시기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종친을 비롯해서 품계가 3품 이상의 문무관원이 참가했는데 재미있는 것은 과녁을 맞힌 자와 맞히지 못한 자를 동서로 갈라서 세우고, 맞힌 자에게는 상품으로 옷이나 채단 같은 것을 하사하고, 맞히지 못한 자들에게는 벌주(罰酒)를 주어서 후일을 경계하는 것이 통례였다. 논어에도 바로 이런 장면을 묘사한 대목이 있다. 팔일편 제7장의 내용이다.
子曰 君子 無所爭 (자왈 군자 무소쟁)
공자 가라사대(子曰), 군자(君子)는 다투는 바(所爭)가 없다(無).
必也射乎 (필야사호)
(혹 있다면) 반드시(必也) 활쏘기에서 다툰다(射乎).
揖讓而升 下而飮 (읍양이승 하이음)
(활을 쏘기 전에는) 읍양(揖讓, 예를 다하여 사양하는 겸손한 태도)의 자세로 오르고(而升)
(활을 쏘고 나서 졌을 경우에는) 내려와서(下而) (벌주를) 마신다(飮).
其爭也君子 (기쟁야군자)
그러한 다툼(其爭)이 군자(君子)의 다툼이니라(也).
한편 어느 정도 예(禮)와 격식을 갖추었는지는 활을 쏘는 방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우선 한번에 쏘는 화살의 수를 4개로 정하였다. 그리고 유학에서 예(禮)와 악(樂)은 항상 붙어다닌다고 했듯이, 활을 쏠 때에는 7절로 되어있는 대사악장(大射樂章)이라는 음악을 연주하였다. 음악 연주가 시작되면 활을 쏠 준비를 하고, 제4절에 첫발을 발사한 뒤, 이후 매 음절마다 한발씩 쏴서 마지막 제7절이 끝나면 4발을 모두 다 쏘았다.
1743년(영조 19년)에 거행된 대사례 의식을 그린 대사례도(大射禮圖)는 현재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05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대사례의궤》가 그림의 내용을 분명하게 뒷받침하고 있어서 지금도 행사의 내용을 속속들이 다 알 수 있다.
과녁이라는 말이 가죽을 뚫는 관혁이라는 것에서 나왔다는 이야기가 참 재미있네요. 그럼 옛날의 과녁은 어떻게 생겼어요? 지금의 양궁처럼 동심원으로 되어 있었나요?
아빠 하나씩 설명해줄게. 우선 과녁은 두 가지가 있었어.
딸:과녁이 '가죽을 뚫는 관혁'에서 나왔다는 이야기가 재밌네요!, 아빠:녀석, 과녁에 관심이 많구나? 설명해줄게.
육일각에 보관하던 물품중 과녁에 해당하는 것을 웅후(熊侯), 미후(�侯) 라고 불렀다. 조선은 성리학에 의해 신분 및 사회질서가 유지된 나라이기 때문에 모든 것에 질서와 서열이 엄격히 정해져 있었고 활쏘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웅후(熊侯)는 왕의 활쏘기에 이용되던 과녁이다. 과녁의 중앙에는 붉은 바탕에 곰의 머리를 그려서 사용했다.
유교의 예법에 따르면 천자(황제)의 과녁으로는 호랑이 모양을 그려 넣은 `호후(虎候)`를 사용하고, 제후(왕)의 과녁으로는 웅후를, 경대부(卿大夫) 이하는 큰 사슴머리를 그려 넣은 `미후(�侯)`를 사용하였는데, 당시는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스스로 제후국임을 자처한 조선의 국왕은 과녁을 웅후로 삼은 것이다. 크기는 사방 5m정도였는데 사수와 과녁 사이의 거리는 약 110m 정도의 거리를 유지했다. (올림픽 양궁의 경우 거리는 70미터 이다.)
활쏘기와 관련된 다른 문화재들은 없나요?
사례는 단순히 선비가 갖추어야 하는 육례(六禮)의 하나인 활쏘기의 기량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드러나는 활쏘는 사람 덕(德)을 보는 데 의미를 두었다. 이와 관련된 동양고전들을 살펴보면 예기(禮記) 사의(射義)편에는 아래와 같은 구절이 나온다.
射者 仁之道也 (사자 인지도야) 射求正諸己 (사구정저기)
활을 쏘는(射) 것(者)은 인의 길(仁之道)이다(也).
활 쏘는 것(射)은 자기자신(諸己)을 올바르게(正) 할 것을 요구한다(求).
己正然後發 (기정연후발) 發而不中 (발이부중)
몸(己)을 바르게(正) 한 연후(然後)에야 발사(發)하며,
쏜 화살이(發而) 과녁에 적중하지 못했으면(不中),
則不怨勝己者 (즉불원승기자) 反求諸己而已矣 (반구저기이이의)
즉시(則) 나를 이긴 자(勝己者)를 원망하지 말고(不怨)
돌이켜서(反) 잘못을 자신(諸己)에게서 구할(求) 따름이니라(已矣)
또한 활을 쏘는 정자인 사정(射亭)들 중에서 관덕정(觀德亭)이라는 이름이 많이 보이는 이유는 예기(禮記)의 사의(射義)편 제2장과 제3장에서 《활을 쏜다는 것으로써 덕(德)이 왕성함을 볼(觀) 수 있다》 또는 《활과 화살을 살펴서 견고히 잡은 연후에야 과녁에 적중할 것을 가히 말할 수 있고, 이것으로써 가히 덕(德)의 행함을 볼(觀) 수 있다》 라는 구절에서 관덕이란 말을 발췌했기 때문이다.
持弓矢審固 (지궁시심고)
활과 화살(弓矢)을 살펴서(審) 견고히(固) 잡고(持)
然後可以言中 (연후가이언중) 此可以觀德行矣 (차가이관덕행의)
그런 연후(然後)에야 과녁에 적중(中)할 것을 가히(可以) 말할(言) 수 있고,
此可以觀德行矣 (차가이관덕행의)  - 《사의 제2장》
이것(此)으로써 가히(可以) 덕(德)의 행함(行)을 볼(觀) 수 있다(矣)
射者 所以觀盛德也 (사자 소이관성덕야)  - 《사의 제3장》
활을 쏜다는 것(射者) 그것으로써(所以) 덕(德)이 왕성(盛)함을 볼(觀) 수 있다(也)
제주 관덕정은 보물 제322호이고, 대구와 광주에도 관덕정이 있으며, 창경궁의 후원에도 있다.
아빠 자, 다음엔 고려대학교로 가보려고 해.
고려대학교면… 조선의 궁궐과도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인데, 거기엔 어떤 역사가 숨어있어요?
아빠 그 곳에 아주 특별한 그림 하나가 보관되어 있거든! 그 속에 아주 재미난 역사가 숨어있지!
성균관대학교에서 아빠와 딸
최동군(글로벌사이버대학교 문화콘텐츠학부 외래교수)
사진/그림
박동현(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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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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