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역사

서울대학교병원에 숨어있는 사도세자의 눈물

서울대학교병원에 숨어있는 사도세자의 눈물
서울대학교병원
서울대학교병원 찾아가는 길, 1. 혜화역 3번 출구에서 서울대학교병원 입구까지 직진., 2.입구에서 의과대학 본관쪽으로 올라간다. 3. 의과대학본관 옆길로 들어가면 함춘원지 도착!
딸:서울대병원 안에 사도세자와 관련된 곳이 있다구요?, 아빠:병원 건물 뒤편에 있는 함춘원지가 오늘 살펴볼 곳이야.
서울대병원 안에 사도세자와 관련된 곳이 있다구요?
아빠 응. 병원 건물 뒤편에 있는 함춘원지가 오늘 우리가 살펴볼 곳이야.
함춘원지(含春苑址, 함춘원터)는 서울시 종로구 연건동에 위치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구내에 있는 조선시대 원유(園�, 여러 가지 식물을 심어 가꾸거나 여러 가지 동물을 기르는 일정한 장소)로써 사적 제237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안에 사도세자의 옛 사당인 경모궁이 있었기 때문에 경모궁지(景慕宮址)라고도 불린다.
"봄을 품고 있는 정원" 이라는 함춘원의 한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원래 함춘원은 창경궁의 부속 후원이었다. 창경궁을 만든 성종 임금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지세가 허약한 창경궁의 동쪽을 비보하기 위해서 동쪽언덕에 나무를 심고 담장을 둘러 잡인의 출입을 금했던 것이 함춘원의 시작이었다. 성종의 아들인 연산군은 함춘원을 대규모로 확장하였는데, 주변의 민가들을 철거한 뒤 기이한 화초들을 심어 별세계를 꾸며놓고 담 밖에 군사들을 배치해 일반인의 통행을 금하여 그 안에서 방탕한 생활을 즐기기도 하였다.
[여기서 잠깐]향락을 좋아했던 연산군

연산군에게 한양의 서쪽 세검정 근처에 봄의 풍류를 방탕하게 즐기려고 지었던 정자와 돈대인 탕춘대(蕩春臺)가 있었다면, 한양의 동쪽에는 함춘원이 있었으니 어디서든 봄을 즐기려 했던 연산군의 방탕함을 엿볼 수 있다.
함춘원은 그 후로도 역대 왕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상당 부분이 파괴된 후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고 방치되었다. 그 이후 인조 임금 때에는 함춘원의 절반을 임금의 가마와 외양간, 마구간 및 목장을 관리하던 관청인 사복시(司僕寺)에 할당해 이후 방마장(放馬場)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순조임금 당시의 창덕궁과 창경궁의 모습을 그린 《국보 제249호 동궐도(東闕圖)》에는 창경궁의 가장 우측 아래쪽에 벽이 없이 기다란 형태의 마구간의 모습이 그려져 있어 그 부분이 사복시의 궁궐 내 출장소 격인 내사복시(內司僕寺)임을 알려주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함춘원의 유적은 《함춘문》 뿐이며, 그 뒤로 보이는 돌로 만든 단은 후대 정조 임금 때 설치한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의 유적이다.
아빠:함춘원에서 남은 유적은 이 문 뿐이란다. 딸:이것만 봐선 연산군이 꾸몄다는 별세계가 상상이 안되요.
아빠 바로 보이는 것이 함춘문이야. 함춘원에서 남은 유적은 이 문 뿐이란다.
정말 휑하니 문만 남아있네요. 연산군이 함춘원에 꾸몄다는 별세계가 상상이 안되요.
함춘원의 정문이었던 함춘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앞면과 뒷면의 기둥은 원기둥을, 그리고 가운데 기둥은 네모기둥을 써서 지붕을 받치고 있다. 이는 하늘과 가까운 쪽은 양, 하늘과 먼 쪽은 음으로 설정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우리 전통의 천원지방 사상의 표현으로 여겨지며, 경복궁 근정전 행각에서도 비슷한 기둥 배치법을 확인할 수 있다.
아빠 함춘문 너머로 보이는 석단은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景慕宮)이 있던 자리야.
사도세자의 사당이 왜 여기에 만들어졌어요?
사람이 죽으면 살아생전 몸 속에서 조화롭던 음양의 기운이 각각 빠져나가는데, 사후(死後) 양(陽)의 기운인 혼(魂)을 모신 곳을 《사당(廟)》이라고 하고, 음(陰)의 기운인 백(魄)을 모신 곳을 《무덤(墓)》이라고 한다. (둘 다 한자의 발음이 `묘` 이므로 헷갈리지 않아야 한다.)
영조는 1764년(영조 40년) 봄 경복궁 서쪽 순화방에 원래 사도세자의 사당인 사도묘(思悼廟)를 지었다가 같은 해 여름, 창경궁 홍화문 밖 함춘원지로 옮겨서 수은묘(垂恩廟)라 하였다. 그런데 이때 사당의 위치는 아마도 함춘원지의 방마장(放馬場)을 제외한 나머지 땅에다 지었던 것 같다. 김정호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수도 한양의 지도인 <수선전도(首善全圖)>에 함춘원과 경모궁이 담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수은묘는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정조 대에 이르러 경모궁이라는 이름으로 격상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임금의 주거처인 동궐(창덕궁과 창경궁)에서 먼 거리에 떨어져 있던 사도세자의 원래 사당 위치를 창경궁에서 빤히 바라다보이는 함춘원지에 옮겨 놓은 것이 다름 아닌 영조라는 사실이다. 영조는 왜 그랬을까?
정신병을 앓은 데다가 종묘사직을 위해 부득이하게 희생될 수 밖에 없었던 아들 사도세자를 생각하는 영조의 마음은 편치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영조는 사도세자가 죽은 뒤 곧바로 죽은 세자를 애도하면서 생각한다는 뜻의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는데, 그 이유를 종사(종묘와 사직)를 위해서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그 부분에 대한 실록의 기록은 아래와 같다.
《 영조실록 제99권, 38년(1762 임오년) 윤5월 21일(계미) 》

사도세자가 훙서(薨逝)하였다. 전교하기를, “이미 이 보고를 들은 후이니, 어찌 30년에 가까운 부자간의 은의(恩義)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세손(世孫)의 마음을 생각하고 대신(大臣)의 뜻을 헤아려 단지 그 호(號)를 회복하고, 겸하여 시호(諡號)를 사도세자(思悼世子)라 한다. (후략)
한편, 비운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향한 정조의 효심은 실로 대단했다. 아버지의 사당을 수은묘에서 경모궁으로 승격시킨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거처하던 창경궁 쪽과 서로 통할 수 있도록 경모궁의 서쪽 편에 문 두 개를 만들었다. 각각의 이름은 일첨문(日瞻門)과 월근문(月覲門)인데, 첨(瞻)은 볼 첨이니 매일 바라보겠다는 뜻이고, 근(覲)은 뵐 근이니 매달 찾아뵙겠다는 뜻이다.
아빠:여기 있던 사도세자의 사당은 종묘에 모셔져 있단다. 딸:그럼 사도세자의 무덤은요?
아빠 여기 있던 사당은 사도묘, 수은묘, 경모궁을 거쳐 현재는 종묘에 모셔져 있단다.
그럼 사도세자의 무덤은요? 무덤은 어떤 변화를 겪었나요?
사도세자의 무덤은 처음에 수은묘(垂恩墓)라 불렸다. 그런데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사도세자를 완전히 복권시키고 장헌세자라는 존호를 올리면서, 사당인 경모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무덤인 수은묘(垂恩墓)의 이름을 일단 영우원(永祐園)으로 격상시켰다. 하지만 이름이 바뀐 후에도 무덤 그 자체는 초라하기 그지 없었기에 정조는 영우원을 수원의 화산으로 옮긴 뒤 현륭원(顯隆園)이라고 하고 왕릉에 버금가는 규모로 다시 지었다.
당시 정조의 속마음 같아서야 아버지를 장헌세자라는 존호에 올리는 정도로 만족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살아생전에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려는 시도도 여러 번 했지만 번번히 정치적 실세인 노론의 반발에 부딪쳐 무산되고 말았다. 결국 사도세자가 왕으로 추존되어 장조가 되는 것은 훗날 고종 때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무덤 역시 조선의 왕릉으로 인정받아 현재는 `융릉`으로 불리며, 바로 옆에 있는 정조의 무덤인 `건릉` 과 아울러 `융건릉`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사도세자의 사당과 무덤에 대해서는 이제 잘 알겠어요! 근데 실제로 뒤주에 갇혀 죽은 장소는 어디에요?
아빠 사도세자에 대해 궁금한 게 많구나? 그 장소는 풍수지리의 기본적인 원리만 알면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단다. 한번 같이 찾아볼까?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곳을 찾아내는 것은 풍수지리의 기본적인 원리만 알면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다.
우선 아무리 죄인의 신분으로 전락하여 폐서인(죄를 지어 그 신분과 지위를 잃고 서인庶人으로 강등되는 것) 되었다 하더라도 일국의 세자였던 이의 형 집행을 저잣거리에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당연히 궁궐 내에서 형을 집행해야 하는데, 궁궐은 기본적으로 명당인데다 그 기운이 밖으로 흘러나가지 못하도록 명당 물길로 둘러싸여 있다. (그래서 모든 궁궐은 돌다리를 건너야만 궁궐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사람이 죽는 것은 그 자리에서는 나쁜 기운이 생겨나는 일이기 때문에 형의 집행장소는 궁궐의 명당기운을 해치지 못하도록 궁궐 내에서도 가장 명당기운이 약하거나 다른 곳에 나쁜 영향을 주지 않는 곳이어야 했을 것이다. 이런 기본적인 풍수원리를 적용하여 사도세자의 처형 장소를 찾아보자.
아빠:일국의 세자였던 이를 저잣거리에서 죽게 하진 않았을테니, 장소는 궁궐 내부에 있을거야!, 사람이 죽어서 생기는 나쁜 기운이 궁궐에 나쁜 영향을 주지 않는 곳이어야겠지!
사도세자는 당시 동궐(창덕궁+창경궁) 속의 시민당(時敏堂) 건물을 정당(正堂)으로 쓰고 있었기 때문에 동궐 속에서 처형 장소를 결정해야 했다. 따라서 동궐에 해당하는 두 궁궐 중의 하나, 즉 창덕궁과 창경궁 중에 한 곳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창덕궁은 조선 후기 국왕의 법궁으로 활용된 궁궐이고, 창경궁은 성종 때 대비들을 위해 만들어진 부수적인 보조궁궐이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떨어지는 창경궁이 처형 장소로 적합하다. 그렇지만 창경궁도 매우 넓은 공간이다. 거기서도 또 2차 선택을 해야 한다.
모든 궁궐에는 가장 중심이 되는 중심전각이 있는데, 그것을 정전(正殿) 또는 법전(法殿)이라고 하며 궁궐 내의 전각 중 2층 또는 가장 큰 규모로 짓는다. 창경궁의 법전은 ‘명정전’으로 그 앞의 조정마당에는 삼도(三道)라 하여 3차선 돌길이 깔려있다.
일반적인 궁궐의 경우에는 그 삼도를 중심으로 남쪽을 바라보는 임금(군주남면)의 왼쪽(동쪽)은 문신들이 줄지어 서고, 임금의 오른쪽(서쪽)은 무신들이 줄지어 선다. 무신은 원래 전쟁을 통해 사람을 죽이는 것이 본업이다. 따라서 처형 장소는 무신들이 있는 서쪽 방향이 된다. 그런데 창경궁은 독특하게도 남향이 아니라 동향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임금의 오른쪽은 방위상 서쪽이 아니라 남쪽에 해당한다. 따라서 사도세자의 처형 장소는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의 남쪽 방향이다. 하지만 여전히 장소가 매우 넓다. 범위를 더 줄여야 한다.
아빠:처형 장소는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 남쪽이야!, 딸:오 아빠! 완전 명탐정 같아요!!!
또 한가지 고려해야 하는 것은 궁궐 내에서도 명당인 곳이 있고 명당이 아닌 곳이 있다는 점이다. 그 두 구역을 가르는 것이 바로 물길인데, 명당 기운이 명당 기운이 물을 건너가지 못하는 성질을 이용한 것이다. 결국 풍수기법을 적용해 찾아본 처형 장소는 창경궁의 옥천교 밑을 흐르는 명당 물길 바깥 쪽, 그것도 궁궐에 영향을 최대한 덜 주는 물길이 거의 끝나는 쪽이 된다.
그렇다면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각종 사료를 통해 실제 사도세자의 처형 과정을 정리한 데이터와 풍수 기법의 추리 과정을 비교해 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 영조실록 38년 윤5월 13일 》
ㆍ왕세자가 대명(처분을 기다림) 하다
ㆍ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안에다 엄히 가두다

《 영조실록 38년 윤5월 21일 》
ㆍ사도 세자가 훙서하다. 왕세자의 호를 회복하다
실록에 따르면, 1762년 윤5월 13일, 영조는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휘령전(현 창경궁 문정전) 앞 뒤주 속에 세자를 가두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8일 뒤인 윤5월 21일 사도 세자의 사망이 확인되자 세자의 위호(位號)를 복구하고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여기서 눈여겨 봐야 할 부분은 세자를 처음 뒤주에 가둔 곳은 휘령전 앞마당인데, 사도세자는 여기서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휘령전은 지금의 문정전인데, 그 곳은 곧 창경궁의 편전으로 왕이 신하들과 함께 일상정치활동을 하는 곳이다. 따라서 이내 뒤주를 선인문(宣仁門) 앞마당으로 옮겼다. 이렇게 굳이 뒤주를 옮긴 이유는 죽을 장소를 따로 정해두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제 창경궁 지도를 꺼내서 선인문 앞마당을 찾아보면 신기하게도 우리가 풍수기법으로 찾아본 장소와 거의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창경궁 지도(옥천 명당물길 옆 창경궁 선인문 앞마당)
불쌍한 사도세자… 창경궁 선인문 앞마당에 가서 사도세자를 위한 묵념이라도 올려야 겠어요.
아빠 그래. 멀지 않으니 조금 있다가 가보기로 하고, 대학로에 나온 김에 성균관대학교에도 들러서 숨은 역사를 한번 살펴볼까?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아빠와 딸
최동군(글로벌사이버대학교 문화콘텐츠학부 외래교수)
사진/그림
박동현(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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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11-28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