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역사

연세대학교에 숨어있는 사도세자 생모의 눈물

연세대학교에 숨어있는 사도세자 생모의 눈물
연세대학교 루스채플
연세대학교 루스채플 찾아가는 길, 1. 신촌역 3번 출구에서 연세대학교 방향으로 올라간다. 2. 연세대 사거리를 건너 연세 대학교 정문을 지나, 100주년 기념관쪽으로 올라간다. 3. 학생회관 뒤 루스채플 도착!
아빠:연세대학교 안에 사도세자를 낳은 '영빈 이씨'의 무덤터가 있단다. 딸:학교 안에 무덤터가!? 왠지 으스스한데요.
아빠 오늘은 연세대학교에 안에서 숨은 역사를 찾아볼까? 그 주인공은 바로 비운의 사도세자를 낳은 ‘영빈 이씨’인데, 그녀의 무덤터가 학생회관 건물 뒤에 있어.
학교 안에 무덤터가 있다구요? 왠지 으스스한데요~
딸:여기가 무덤터라니, 말 안하면 모르겠는데요? 아빠:아니야, 가만히 보면 여기가 무덤자리였다는 확실한 증거가 보일거야.
연세대학교 내 대학교회인 루스채플은 마치 조선왕릉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독립된 작은 언덕 위에 올라가 있다. 교회 건물로 올라가는 돌계단만 없다면 영락없는 조선왕릉의 사초지(왕릉언덕, 강(岡)) 모습이다. 게다가 루스채플의 정면에는 그 자리가 원래 무덤자리였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가 하나 남아 있다. 바로 수경원의 정자각(丁字閣) 건물이다. 정자각은 조선의 왕릉(王陵)이나 원(園)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봉분 앞에 고무래 정(丁)자 모양으로 지은 집이다. 따라서 [정자각]이 아니라 [정짜각]으로 발음해야 한다. 수경원이 서오릉으로 이전하고 난 후, 정자각은 연세대학교 역사기록보존소로 활용되고 있다.
아빠: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이 정자각이 바로 루스채플이 무덤자리였다는 증거란다! , 딸:아! 고무래 정자모양이라서 '정짜각'으로 발음하는 거군요.
[여기서 잠깐]연세대와 봉원사를 잇는 버리고개의 유래

연세대와 봉원사를 잇는 버리고개의 유래
현재 연세대학교에서 봉원사로 넘어가는 고개의 옛이름을 《벌고개》 또는 《버리고개》라고 한다. 버리고개는 옛 수경원으로 이어지는 명당 산줄기(이를 풍수용어로는 수경원의 주룡(主龍)이라고 한다)를 가로지르고 있는데, 이 고개를 함부로 다니는 사람은 명당지맥을 손상시킨다고 하여 불경죄로 벌을 주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버리고개라는 명칭은 이 곳 이외에도 서오릉으로 넘어가는 고개에도 붙여졌으며 대체로 사람의 왕래가 많아 땅이 낮아지면서 명당지맥을 손상시킬 염려가 있는 곳에 포괄적으로 사용된 듯 하다.
지금의 연세대학교 터 및 주변의 신촌일대는 조선 건국직후 한양으로 도읍을 정할 때 한때 도성의 후보지로 거론되기도 할 정도로 명당기운이 충만한 지역이었다. 다만 땅이 좁은 것이 흠이어서 결국 최종 심사에서 탈락하고 말았다고 한다.
《태조실록 제5권, 3년(1394) 2월 18일(무자) 2번째기사》
좌시중(左侍中) 조준(趙浚)과 영삼사사(領三司事) 권중화(權仲和) 등 11인을 보내어 서운관(書雲觀)의 원리(員吏) 등을 거느리고 《지리비록촬요(地理秘錄撮要)》를 가지고 가서 천도할 땅을 무악(毋岳) 남쪽에서 살펴보게 하였다.

《태조실록 제5권, 3년(1394) 2월 23일(계사) 2번째기사》
영삼사사 권중화와 좌시중 조준 등이 무악(毋岳)으로부터 돌아와서 아뢰었다. “무악(毋岳) 남쪽은 땅이 좁아서 도읍을 옮길 수 없습니다.”
좌도 도관찰사 하윤(河崙)만이 홀로 아뢰기를, “무악(毋岳)의 명당(明堂)이 비록 협착(狹窄)한 듯하지마는, 송도(松都)의 강안전(康安殿)과 평양(平壤)의 장락궁(長樂宮)으로써 이를 관찰한다면 조금 넓은 편이 될 것입니다. 또한 고려 왕조의 비록(秘錄)과 중국에서 통행(通行)하는 지리(地理)의 법에도 모두 부합(符合)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친히 보고 정하고자 한다.”
결국 연세대학교 터에 정식 궁궐은 들어서지는 못했지만 명당기운을 그냥 버리기가 아까웠던지 세종 2년인 1420년에 세종이 부왕인 태종을 위해 서쪽에 궁을 짓고 이름을 연희궁(衍禧宮 또는 延禧宮)이라 하였다. 그 후 연희궁은 연산군 때 폐쇄되었는데, 영조 때에 이르러 영빈 이씨(暎嬪 李氏)의 묘, 수경원(綏慶園)이 그 곳에 조성되었다. 현재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동은 연희궁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딸:근데 사도세자 어머니인 영빈 이씨는 어떤 사람이었어요?, 딸:놀랍게도 영빈 이씨는 사도세자를 죽이라고 발벗고 나선 사람 중에 하나라고 해.
영빈 이씨는 어떤 사람이었어요? 사도세자의 생모라면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을 때 무척 반대를 심하게 했을 것 같은데…
아빠 아니, 놀랍게도 그와 정반대였어. 영빈 이씨는 사도세자를 죽이라고 발벗고 나선 사람 중 하나였다고 해.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아무리 정신병에 걸렸어도 자기가 낳은 친자식인데…
사도세자가 정신병에 걸린 이유로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한 것은 세간에 매우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단순히 정신병 때문이라면 세자에서 쫓아내는 것(이를 폐서인이라고 하는데 왕비나 세자 등이 죄를 지어 그 신분과 지위를 잃고 서인(庶人)으로 강등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세자를 죽이기까지 해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단서는 조선왕조 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선 영조실록 38년 윤5월13일 기사 원문 중 핵심 부분을 살펴보자.
一自 景彦告變之後 (한번 나경언(羅景彦)이 고변(告變)한 이후로부터)
上決意欲廢 (임금(上)이 세자를 폐(廢)하고자하는  뜻을 결정하였으나)
而未忍發矣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였는데)
忽有飛語 從中而起 (갑자기 유언비어가 생겨나, 내부(中)에서부터 일어나니)
上意驚動 (임금의 마음이 놀랐다)
실록의 내용을 살펴보면 나경언이라는 사람이 사도세자의 난행과 비행에 대해 고변을 하는 일이 있고나서부터 영조는 세자를 폐할 뜻을 굳혔다. 고변의 내용은 세자가 궁녀를 함부로 죽이고, 여승을 궁중에 끌어들이고, 왕의 허락 없이 평양지방을 미행하고, 북성에 멋대로 나가 돌아다녔다는 등의 10여가지 비행이다. 하지만 이 정도 일로 일국의 세자를 죽음으로 몰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가 조금 어렵다.
그런데 뒤따르는 문장 ‘갑자기 유언비어가 생겨났다’는 부분에서 그 출처가 중(中)이라고 표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중(中)이라 함은 곧 궁중을 뜻하는데, 영조실록 38년 윤5월13일 기사의 다른 부분과 더불어 종합적으로 행간을 자세히 읽어보면 출처가 다름 아닌 ‘영빈 이씨’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임금의 전교는 더욱 엄해지고 영빈(映嬪)이 고한 바를 대략 진술하였는데, 영빈은 바로 세자의 탄생모(誕生母) 이씨(李氏)로서 임금에게 밀고(密告)한 자였다. 도승지 이이장(李彛章)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깊은 궁궐에 있는 한 여자(영빈 이씨)의 말로 인해서 국본(國本)을 흔들려 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진노하여 빨리 방형(邦刑)을 바루라고 명하였다가 곧 그 명을 중지하였다.
그렇다면 영빈 이씨는 왜 자신의 친자식인 사도세자를 죽이기 위해 결정적인 밀고까지 했을까? 그것은 바로 사도세자의 당시 행동으로 판단해 보건데, 조만간 부인인 혜경궁 홍씨와 세손(훗날 정조)의 목숨까지도 위험하게 될 것으로 여겼던 듯 하다. 결국 종묘사직을 보존하기 위해 자신의 친아들을 희생하는 안타까운 결정을 내린 것이다.
영빈이씨:나랑은 상관없는 일처럼 진행하시오., 사도세자:진정 어머니께서 저를 이렇게 만드신 겁니까~, 영빈이씨:이러다가 아들은 물론 손자까지 잃겠구나 싶어서 내린 결정입니다!...
그렇다면 영빈 이씨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아무리 종묘사직을 위한 일이었다 해도 친자식의 죽음을 쉽게 견뎌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때문인지 그녀는 사도세자가 사망한 지 2년이 되는 해에 세상을 떠났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후손(1남 6녀)들은 외아들인 사도세자 계열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당대에 불우한 말로를 맞았다. 6녀 중 3명은 채 다섯 살이 되기도 전에 사망했고, 그나마 10살을 넘긴 화평옹주, 화협옹주도 20세를 전후로 사망을 했다. 막내딸인 화완옹주만이 71세까지 살아남았지만 그녀의 남편인 정치달이 일찍 사망했고, 시댁 일가의 아들인 정후겸을 데려다가 양자로 삼았지만 정조 즉위 후 역모죄의 죄인으로 취급되어 정후겸은 사사당하고 그녀 자신은 옹주의 호를 삭탈당해 그저 ‘정치달의 처(정처)’라고 불리게 되었다.
순조실록에는 1808년 5월 17일 삼사에서 올린 글에서 "정치달의 처가 죽어 더 이상 죄를 묻지 않는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그 외 화완옹주의 사망과 관련된 정확한 자료는 찾아볼 수가 없다. 따라서 왕가의 전통상 마땅히 있어야 할 졸기(卒記, 인물이 사망한 후 실록을 편찬하는 사관들의 판단에 의해 그에 대한 평가를 적은 기록)가 없고, 무덤이 경기도 파주 유배지 인근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 죽을 당시까지도 죄를 완전히 벗지는 못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세상에!! 그깟 종묘사직이 뭐라고 친자식을 죽이라고까지 했을까…
아빠 영빈 이씨가 아들의 죽음에 관여한 부분도 있겠지만,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결국 아버지 영조였어.
여러가지로 판단해 보면 정작 사도세자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숨은 주체는 영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영조는 부모가 자식을 죽였다는 도덕적 지탄이 두려워서인지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필요한 대의명분을 주변으로부터 쌓아온 것으로 보인다. 그 근거로는 여러 개가 있는데, 그 중 하나로 영빈 이씨가 죽었을 때 영조가 내린 시호가 의열(義烈)이었으며, 그 시호를 내리는 의식을 영조가 친히 집행하였다는 것이다. 의열이란 올바름(의로움)의 열사라는 뜻인데, 영조 자신이 차마 하지 못한 역할을 영빈 이씨가 대신 해 주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친자식의 죽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아버지 영조의 심리 상태는 어땠을까?
우선 그는 비천한 신분으로 알려진 어머니의 출신성분 때문에 자신의 출생과 즉위 과정에 대해 주변으로부터 의구심을 받았는데, 이것은 심각한 열등감으로 변질되었을 것이다. 서자 출신의 사도세자를 끊임없이 닦달했던 것도 그 열등감을 만회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좋은 집안 출신인 첫 번째 아내 ‘정성왕후’를 전혀 사랑하지 않았던 것도 이러한 그의 출생과 관련된 열등감 때문으로 보인다. 궁중의 구전 이야기에 따르면 정성왕후와의 혼례 첫날밤, 영조가 신부의 손을 잡고 "손이 참 곱소" 라고 했더니 정성왕후가 귀하게 자라서 그렇다고 답했다고 한다. 그 말은 곧 무수리의 아들로 소문난 영조의 열등감을 부추겨 이후로는 정성왕후를 멀리 했다고 한다.
게다가 자신을 여러 차례 비호해 준 이복 형 경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파다하여 그것을 명분으로 삼는 이인좌의 난과 같은 반란도 끊이지 않아 영조의 의심증은 매우 깊었을 것이다. 야사에 따르면 경종을 독살할 때 이용한 것은 바로 상극으로 여겨지는 "감" 과 "간장게장" 이었는데, 그것 때문에 남인 일파에서는 영조를 "게장대왕"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고 전해진다. 영조 31년에 윤지, 심정연, 신치운 등이 일으킨 나주 괘서 사건 당시 체포된 주모자들을 영조가 친국할 때 영조에게 "신은 갑진년(영조 즉위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습니다!"라고 외쳤을 정도인데 이 부분은 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영조실록》 제84권, 31년(1755) 5월 20일(계사) 2번째 기사

신치운(申致雲)을 신문하였다. (중략) 신치운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이미 이처럼 의심하시니, 신은 자복을 청합니다. 신은 갑진년(1724, 영조의 즉위년) 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신의 역심(逆心)이며, 심정연의 흉서 역시 신이 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분통하여 눈물을 흘리고, 시위(侍衛)하는 장사(將士)들도 모두 마음이 떨리고 통분해서 곧바로 손으로 그의 살을 짓이기고자 하였다. (후략)
또한 듣기 싫은 말을 들으면 즉시 물을 가져오게 하여 귀를 씻고 그 물을 사도세자와 화협옹주의 거처 쪽에 버리게 하는 등 자식들에 대해서도 편애가 매우 심하였다고 한중록 등 여러 기록은 전하고 있다.
정성왕후:저는 귀하게 자라서.... 영조:쳇, 그래, 너 잘났다!, 상궁:오늘 메인 요리는 꽃게찜..., 임금:게로 만든 요리는 올리지 말라고!!! 날 놀리는 거야?, 간장게장 트라우마 있다고!!
그런데 여기 있던 영빈 이씨의 묘는 어디로 갔어요? 무덤을 없애고 그 자리에 루스채플을 지은 거예요?
아빠 그럴리가. 영빈 이씨의 혼을 모신 사당이 따로 있단다..
사당? 그게 묘와 같은 거예요?
음양론에 따르면 살아있을 때 몸 속에서 조화롭던 양의 기운과 음의 기운은 사람이 죽게 되면 각각 따로 분리된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죽으면 두 가지 공통적인 현상이 벌어지는데 눈의 동공이 풀리고, 항문의 괄약근이 열린다. 그래서 가벼운 성질의 양의 기운은 풀어진 동공을 통해 빠져 나와서 하늘로 올라가려하고 무거운 성질의 음의 기운은 항문을 통해 땅으로 스며들려고 한다. 이때 양의 기운을 《혼(魂)》이라고 하고 음의 기운을 《백(魄)》이라고 하는데, 혼을 모신 곳을 《사당(廟)》, 백을 모신 곳을 《무덤(墓)》이라고 한다.
영빈 이씨의 혼(魂)을 모신 사당은 처음에는 시호를 따라 의열묘(義烈廟)라 불리다가 정조 12년인 1788년 선희궁(宣禧宮)으로 격상되었다. (옛 선희궁터는 현재 종로구 신교동 산1-1번지 서울농학교 구내에 있다.) 그러다가 고종 7년인 1870년, 영빈 이씨의 위패를 영조의 친모, 즉 숙빈 최씨의 사당인 육상궁(毓祥宮)안으로 옮겼다가 다시 선희궁으로 되돌리는 등 잦은 변동이 있었다. 현재는 조선 왕의 7명의 사친(私親: 후궁에게서 난 임금의 친어머니)들의 위패는 모두 종로구 궁정동의 육상궁에 모시고 있으며, 이를 칠궁(七宮)이라고도 부른다.
[여기서 잠깐]왕을 낳은 후궁들을 모신 칠궁

칠궁(七宮)은 서울시 종로구 궁정동(현재 청와대 구역내)에 위치한, 조선의 왕들을 낳은 친모이지만 왕비자리에는 오르지 못한 후궁 7인의 신위를 모신 곳인데, 최초에는 영조가 후궁 출신인 모친 숙빈 최씨의 신주를 모신 사당 '육상궁(毓祥宮)'을 건립한 이후 역대 왕 또는 추존왕들의 생모인 후궁들의 사당을 옮겨와서 합사하게 된 것이다.  칠궁의 구성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저경궁 (儲慶宮) : 선조의 후궁이자 추존왕 원종의 생모인 인빈 김씨
대빈궁 (大嬪宮) : 숙종의 후궁이자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
육상궁 (毓祥宮) :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
연호궁 (延祜宮) : 영조의 후궁이자 추존왕 진종(효장세자)의 생모인 정빈 이씨
선희궁 (宣禧宮) : 영조의 후궁이자 추존왕 장조(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
경우궁 (景祐宮) :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
덕안궁 (德安宮) : 고종의 후궁이자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황귀비.

칠궁은 비록 규모는 작지만 종묘와 더불어 조선시대 사묘(祠廟)건축의 중요한 일면을 보여주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그러나 그 위치가 청와대 경내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보안상 일반인들의 개별 출입은 불가능하며 청와대 견학과 함께 단체 관람만 가능하다.
한편 영빈 이씨의 백(魄)을 모신 무덤은 원래 연세대학교 구내의 옛 수경원(綏慶園) 자리에 조성된 뒤 수경원의 원호를 받았고, 후일 시호 소유(昭裕)가 더해졌다가 1968년 고양시 용두동의 서오릉에 옮겨졌다. 현재 숙종왕릉(명릉)과 숙종의 원비인 인경왕후릉(익릉) 사이에 수경원이 자리하고 있다.
아빠 자, 다음엔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사도세자의 숨은 역사를 찾아볼까 해.
그 어머니에 이어 이제 사도세자… 뭔가 슬픈 역사가 있을 것 같아요…
연희궁에서 아빠와 딸
최동군(글로벌사이버대학교 문화콘텐츠학부 외래교수)
사진/그림
박동현(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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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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