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역사

숭의전에 숨어있는 고려왕조의 한(恨)

숭의전에 숨어있는 고려왕조의 한(恨)
숭의전
숭의전 찾아가는 길, 1. 전곡역에서 도보로 버스터미널로 이동하여 58-5번 버스에 승차. 2. 약 1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숭의전 버스 정류장에서 하자!
아빠:여길 올라가면 고령의 종묘인 숭의전이 있던 터가 나온단다. 딸:고려의 종묘가 수도였던 개성이 아니라 왜 이런 외진 곳에 있어요?
아빠 이 곳은 고려의 종묘인 숭의전이 있던 터인데 지금은 일부가 복원되었어.
네? 고려의 종묘가 수도였던 개성이 아니라 이런 외진 곳에 있다구요? 무슨 숨은 사연이 있을 것 같아요.
숭의전에 관한 자료를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 찾아보면 아래와 같이 설명되어 있다.
연천 숭의전지 (漣川 崇義殿址) 사적 제223호
조선시대에 고려 태조를 비롯한 7왕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던 숭의전이 있던 자리이다.
이런 설명을 들으면 상식적으로 몇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첫째, 왜 고려의 종묘가 개성(개경)이 아닌 연천에 있을까?
둘째, 왜 망한 나라인 고려의 종묘를 조선왕조가 만들고 제사까지 지냈을까? 고려시대에는 자신들의 종묘가 없었을까?
셋째, 숭의전을 고려왕조의 종묘라고 하면서도 왜 고려의 왕들을 모두 다 모시지 않고 일부만 모셨을까?
이런 의문점에 대한 해답을 하나씩 찾아보자.
우선 고려의 종묘가 연천에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오백 년에 가깝도록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던 고려왕조에 종묘가 없을 리가 없다. 있다면 당연히 당시 수도였던 개경(개성)에 자리했을 것이다.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1392년, 역성혁명에 성공한 이성계가 조선의 왕으로 즉위했다. 당시 조선의 수도는 한양이 아닌 고려의 왕도였던 개경이었고, 즉위식이 열린 곳 역시 한양의 경복궁이 아닌 개경의 수창궁이었다. 이와 관련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살펴보자.
* 태조 1년(1392년) 7월 17일 : 태조가 백관의 추대를 받아 수창궁에서 왕위에 오르다
태조가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위에 올랐다. ... (중략) ... 마침내 왕대비의 교지를 받들어 공양왕을 폐하기로 일이 이미 결정되었는데, ... (중략) ... 교지를 선포하니, 공양왕이 부복(俯伏)하고 명령을 듣고 말하기를, "내가 본디 임금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나를 강제로 왕으로 세웠습니다. 내가 성품이 불민(不敏)하여 사기(事機)를 알지 못하니 어찌 신하의 심정을 거스린 일이 없겠습니까?" 하면서, 이내 울어 눈물이 두서너 줄기 흘러내리었다. 마침내 왕위를 물려주고 원주(原州)로 가니, 백관(百官)이 국새(國璽)를 받들어 왕대비전(王大妃殿)에 두고 모든 정무(政務)를 나아가 품명(稟命)하여 재결(裁決)하였다. ... (후략)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1392년 7월 17일 즉위 당일, 이성계는 '조선의 왕'이 아닌, 아직은 '고려의 왕'이었다. 1392년 11월에 자신이 세운 새로운 나라의 국호를 '조선(朝鮮)'과 '화령(和寧)' 중에서 어느 것으로 할 것인지 중국 명나라 황제에게 물어보는 국서를 예문관에서 작성하게 했고, 중국을 다녀온 사신에 의해 이듬해인 1393년 2월 15일에 가서야 '조선'으로 하라는 중국의 재가를 확인하였다. (2014년 이 부분을 소재로 하여 만든 코믹 영화가 바로 `해적` 이다) 따라서 즉위 후 약 7개월 동안 이성계는 아직 '고려'라는 국호를 계속 쓸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즉위한 날로부터 9일 후에 반포된 즉위교서에서는 "나라 이름은 그전대로 고려(高麗)라 하고, 의장(儀章)과 법제(法制)는 한결같이 고려의 고사(故事)에 의거하게 한다." 라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 태조 2년(1393년) 2월 15일 :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는 예부의 자문    
주문사(奏聞使) 한상질(韓尙質)이 와서 명나라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전하니, 임금이 황제의 궁궐을 향하여 은혜를 사례하는 예(禮)를 행하였다. ... (후략)
한편, 원래 유교권 국가에서 새로운 왕조가 세워지면 종묘와 사직을 가장 먼저 세운다. 따라서 《왕》씨에서 《이》씨로의 역성혁명에 성공한 이성계도 자신의 조상들을 위한 종묘를 새로이 세우려 했고, 위치는 당연히 수도였던 개경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개경에는 이미 고려왕조의 종묘가 있었다. 이 부분에서 다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살펴보자.
* 태조 1년(1392년) 9월 30일 : 서운관 관원들과 종묘를 지을 자리를 논의하다
임금이 서운관(書雲觀)의 관원을 불러 종묘(宗廟)를 지을 땅을 물으니, 서운관 관원이 아뢰었다. "성(城) 안에는 좋은 땅이 없고, 고려 왕조의 종묘(宗廟)가 있던 옛터가 가장 좋습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망한 나라의 옛터를 어찌 다시 쓰겠는가."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남은이 아뢰었다. "그 옛 궁궐을 헐어버리고 그 옛 땅을 파내고 새 종묘를 고쳐 짓는다면 어찌 불가함이 있겠습니까?" ... (후략)
* 태조 1년(1392년) 10월 13일 : 고려 왕조의 종묘를 헐고, 그 자리에 새 종묘를 짓도록 하다
고려 왕조의 종묘(宗廟)를 헐어버리고 그 땅 위에 새 종묘를 짓도록 명하였다.
그런데 조선 개국 후 2년 후인 1394년 8월, 이성계는 조선의 수도를 고려의 왕도였던 《개경》에서 한때 남경으로 불렸던 《한양》으로 천도할 것을 결정했다.
* 태조 3년(1394년) 8월 13일 : 여러 신하들의 의견을 들어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다.
임금이 《남경》의 옛 궁궐터에 집터를 살피었는데, ... (중략) ... 임금이 여러 사람의 말로써 한양(漢陽)을 도읍으로 결정하였다. ... (중략) ... 임금은 그만 연(輦)을 타고 종묘 지을 터를 보고서 노원역 들판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신하:고려의 종묘가 있는 그 자리가 제일 명당이옵니다~
임금:싹 다 밀어버려~, 좋다! 새로운 나라의 종묘를 그곳에 세우도록 하라!, 2년후, 임금:뭐? 남경(한양)이 터가 좋다고? 그럼 천도한다! 종묘도 옮길 준비를 하거라. 다시 짐싸!, 신하:이제 막 제사 준비 다했는데...
위와 같은 자료를 종합해보면, 원래 개성에 있었던 고려왕조의 종묘는 조선 태조 때 완전히 헐리고 그 자리에 새로 건국한 조선왕조의 종묘가 잠시 들어섰다가, 2년 후 천도를 하면서 새 도읍지인 한양에 조선의 종묘가 다시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잠깐]중국 청나라의 종묘

이전 왕조의 종묘를 허물고 새왕조의 종묘를 세우는 일은 중국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그런 까닭에 현재 중국에는 마지막 왕조인 청나라의 종묘(중국에서는 종묘라 하지 않고 태묘(太廟)라고 한다)만이 남아있는데, 그나마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태묘는 공원으로 조성되어 지금은 노동인민문화궁(勞動人民文化宮)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아빠:조선이 한양으로 천도하는 바람에 개성에 있던 고려 종묘만 애꿎게 사라지게 된거지. 딸:그런데 사라진 고려의 종묘가 왜 여기에 있는 거에요?
아빠 개성에서 고려 종묘를 헐고 그 자리에 조선의 종묘를 세웠는데, 조선이 한양으로 천도하는 바람에 결국 개성에 있던 고려 종묘만 애꿎게 사라지게 된거지.
그 때 사라진 고려의 종묘가 왜 여기 있는 거예요? 조선왕조가 새로 만들어줬어요? 다시 만들었다고 해도 개성이 아니라 이 곳 연천에 있다는 게 이해가 안되요.
이성계가 즉위 후 2년이 지나서 굳이 도읍을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한 목적은, 결국 개성에 모든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근거를 둔 기득권 고려 유민 세력을 뿌리째 흔들어 조선의 왕권을 강화하고자 함이었다. 또한 왕조가 교체되자마자 고려의 왕족들을 완전히 박멸시킨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까지는 고려에 익숙한 민심의 동요였다. 요즘 표현을 빌리자면, 조선은 연착륙을 통해 민심의 동요를 최대한 잠재워야 했는데, 그런 차원에서 국호와 국가의 모든 제도를 즉위 후 최소 7개월 동안은 고려의 것을 계속 사용했던 것이다. 고려의 태조 왕건이 건국 후 즉시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라고 하며 내치에 전념한 것에 비하면, 이성계는 동요하는 백성들의 눈치를 살폈다. 한편 명나라 황제의 재가를 얻어 역성혁명의 정통성을 조금이라도 강화시키고자 했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다.
민심의 동요를 막기 위해 상대국의 종묘를 존속시키는 사례는 중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것을 하나 꼽으면 다음과 같다. 춘추시대 때 오자서(伍子胥)는 《손자병법》의 저자인 손무(孫武)와 더불어 오(吳)나라왕 합려(闔閭)를 보좌해 합려를 춘추오패의 한 사람으로 만든 인물이다. 원래 오자서는 오나라 사람이 초(楚)나라 사람이었는데, 한때 태자의 스승이었던 오자서의 아버지가 모함에 빠져 당시 초나라 평왕(楚平王)에게서 멸문지화를 당하고 자신만 살아남아 오나라로 도망쳐온 것이다. 그 후 오자서는 평생 초 평왕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웠는데, 실제 오나라를 강국으로 만든 뒤 BC 506년 초나라로 쳐들어가 수도를 함락시켰다. 그때 오자서가 초나라의 종묘까지 불태우려 하자 병법의 달인이었던 손무는 민심의 동요를 우려해 적극 만류했다.
하지만 결국 오자서를 막지 못해 초나라의 종묘는 잿더미로 변했다. 이때 초나라의 대부(大夫)벼슬을 하던 오자서의 어릴 적 친구 신포서(申包胥)는 종묘까지 불태운 만행에 분개하여 이웃 진(秦)나라에 찾아가 7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울면서 구원병을 청했고, 이에 감동한 진나라의 애공이 구원병을 보내 초나라를 망국의 위기에서 구한 사실이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의 경우에는 정권이 안정된 후 승자의 여유를 부리며 이전 왕조인 고려에 대한 너그러운 조치를 취했다. 그 중 하나로 고려왕조의 종묘를 세우고 제사를 지냄으로써 흩어진 민심을 얻고자 했고, 종묘 건물의 관리도 고려왕조의 후손에게 맡겨 고려 유민의 불평을 없애는 방법으로 이용했다.
[여기서 잠깐]숭의전을 관리했던 고려 유민, 왕순례(王循禮)

본명은 왕우지(王牛知). 고려 현종(顯宗)의 먼 후손으로 고려가 멸망한 뒤 조선왕조의 핍박을 피해 공주 왕촌에 숨어 살았다. 이 후 조선왕조에서 유화정책을 펼치며 1397년 고려 태조를 비롯한 7대 왕을 제사 지내는 묘(廟)를 중건하였고 1451년 이를 숭의전(崇義殿)이라 명명하였다. 당시 공주에 머물고 있던 왕우지는 왕순례(王循禮)로 개명하고 1452년 숭의전 부사(副使)가 되었다. 이후 왕순례의 후손들이 대대로 숭의전의 전감(殿監) 또는 참봉(參奉)을 역임하였다.

단종 즉위년(1452년) 5월 19일 : 의정부에서 전조 왕씨의 봉사하는 조건을 아뢰다
의정부에서 예조의 정문에 의거하여 전조(前朝) 왕씨(王氏)의 봉사(奉祀)하는 조건을 아뢰기를, ... (중략) ... 하니, 그대로 따랐다. 왕우지는 뒤에 왕순례(王循禮)라는 이름을 주었다. 대행왕이 왕씨에게 자손이 없는 것을 불쌍히 여겨 교서를 내리어 자손을 찾으니, 왕순례가 공주에 살고 있었다. ... (후략)
다만 고려의 종묘를 개성에 세우게 되면 기존 세력이 부활하게 될까 염려하여 위치를 개성에서 얼마간 떨어진 연천으로 정했는데, 원래 이곳 연천 숭의전 터에는 고려 태조의 원찰(願刹, 망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한 사찰)이었던 앙암사(仰巖寺)가 있었다고 한다.
숭의전의 시초는 이성계가 1397년에 고려 태조 왕건의 전각을 세우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러다 2년 후인 정종 원년(1399년)에는 태조 외에 고려의 혜종, 성종, 현종, 문종, 원종, 충렬왕, 공민왕의 제사를 지냈다. 세종 7년인 1425년에 이르러 당시 조선의 종묘에는 5왕(五王)만을 모시고 있는데, 고려왕조의 숭의전에서 무려 8왕을 모시는 것이 합당치 않다 하여 태조, 현종, 문종, 원종 등의 4왕만을 봉향토록 하였다.
아빠:처음 숭의전에는 8왕이 모셔져 있었어. 하지만 조선 종묘에 있는 5왕보다 적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4왕만 봉향토록 줄인거지. 딸:그럼 4왕을 뽑은 특별한 기준이 있었어요?
아빠 처음 숭의전에는 8왕이 모셔져 있었어. 하지만 조선 종묘에 있는 5왕보다 적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4왕만 봉향토록 줄인거지!
유독 그 4왕만이 선별된 이유가 있나요?
현재 숭의전에 모셔진 4왕은 고려의 모든 왕들 중에서도 문치주의를 앞세운 조선의 정체성과 조선건국의 정당성을 조금이라도 부각시킬 수 있는 소수의 왕들만 선별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태조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왕이기에 처음부터 모셔진 경우이다.
두 번째 현종(顯宗)은 고려의 문치주의를 확립한 왕이다. 당시 3차에 걸친 거란의 침입을 거치면서 무신들이 기득권 유지 및 문신과의 형평성을 거칠게 요구하고 있었다. 이에 현종은 공이 높은 무신들을 위로한다면서 잔치를 열었고, 잔치가 무르익어 무신들이 술에 취하게 되자 그들을 주살했다. 이 사건으로 고려에서의 문치는 확고해졌다. 또한 현종은 고려 최초로 문묘종사(文廟從祀)의 선례를 만들기도 했다.
세 번째인 문종(文宗)은 현종의 아들로서, 문치를 의미하는 글월 문(文)자를 묘호에서 사용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재위 37년간 고려의 문물 제도를 크게 정비했다. 그래서 이 시기를 흔히 '고려의 황금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네 번째인 원종(元宗)은 최충헌에서 비롯해 62년간 지속된 고려 무인정권을 무력으로 종식시킨 장본인으로, 조선의 역성혁명에 어느 정도 명분을 보태준 왕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여기서 잠깐]조선의 종묘에 모셔져 있는 고려 공민왕
조선의 종묘에 모셔져 있는 고려 공민왕
초기에는 숭의전에 모셔졌다가 빠진 고려왕들 중에서 공민왕의 경우는 좀 특별한 경우로 꼽힌다. 최종적으로는 숭의전이 아닌 조선의 종묘에 모셔졌기 때문이다. 현재에도 서울 종로에 있는 조선의 종묘에 들어가면 오른쪽에 보이는 망묘루 건물 뒤편에 있는 《공민왕 신당》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공민왕은 어떻게 조선의 종묘에 모셔지게 된걸까?

공민왕은 국운이 쇠하여 망해가던 고려 말, 친원파를 중심으로 한 귀족 중심의 구체제를 부정하고 과감한 개혁정치를 시도한 군주로 유명한 왕이며 조선 왕조를 세운 이성계를 발탁한 인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성계의 입장에서는 개인적으로도 매우 고마운 존재이기도 할뿐더러, 구체제인 고려를 무너뜨리고 역성혁명을 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한층 더 강화시켜준 인물이기도 했기에 조선의 종묘에 모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건물이 여러 채가 있는데, 각각의 용도가 궁금해요.
아빠 응, 종묘니까 제사에 관련된 공간들이 있단다. 살펴볼까?
아빠:여기가 고려 4왕의 위패가 있는 숭의전이란다. 오른쪽 이안청은 위패를 옮길 때 잠시 모셔두는 임시 공간이지. 딸:(배신청)이 건물에는 위패가 16개나 있어요!! 뭐죠?
숭의전 건물 배치도(앙암재, 전사청, 숭의전, 이안청, 배신청)
원래 숭의전은 모든 건물이 6.25 한국전쟁 때 완전히 전소되어 현재 우리가 보는 숭의전은 1970년대에 복구된 것이다. 숭의전의 전체 구조는 돌담으로 둘러싸인 3개의 구역으로 나뉘는데, 가장 출입구 쪽에 가까운 구역 안에는 앙암재(仰巖齋)라는 현판의 재실(齋室)이 있다. 재실이란 제례 때 사용하는 향, 축, 폐등을 보관하고 제사에 참여하는 제관들이 제례준비를 하며 머무는 곳을 뜻하는데 앙암재라는 이름은 원래 고려태조의 원찰이었던 앙암사(仰巖寺)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 다음의 두 번째 구역 안에는 전사청(典祀廳)이 있는데, 전사청은 나라의 제사와 증시(贈諡) 등을 맡아보던 관청으로 전사관(典祀官)이 집무하면서 제수를 준비하는 등 제사준비에 소홀함이 없도록 점검했다.
마지막 세 번째 구역 안에는 숭의전의 핵심건물들이 모두 모여있는데, 가장 중심건물이 고려 4왕의 위패를 모신 숭의전(崇義殿)이다. 그 옆에는 숭의전에 위패를 새롭게 모시거나 뺄 때 위패를 잠시 모셔 두는 이안청(移安廳)이 있다. 한편, 방향을 달리하고 있는 건물은 고려 16공신의 위패를 모신 배신청(陪臣廳)으로 복지겸, 홍유, 신숭겸, 유금필 등 4태사(四太師)로 불리는 고려 개국공신과 함께 배현경, 서희, 강감찬, 윤관, 김부식, 김취려, 조충, 김방경, 안우, 이방실, 김득배, 정몽주 등의 대표적인 고려 충신들을 모셔져 있다.
아빠 오늘 좀 멀리 나와서 피곤하지? 다음엔 서울 내에 있는 대학교에 숨어있는 역사를 알아보자.
와~ 청춘과 낭만의 상징! 대학 캠퍼스 속에 숨은 역사라니! 완전 기대 되요~
숭의전에서 아빠와 딸
최동군(글로벌사이버대학교 문화콘텐츠학부 외래교수)
사진/그림
박동현(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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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10-31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