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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있는 역사

화석정에 숨어있는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

화석정에 숨어있는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
화석정
화석정 찾아가는 길, 1. 문산역 경의선 1번 출구 앞에서 댁시를 탄다.(버스의 배차시간이 긴편이라 택시이용을 추천!), 2. 택시를 타고 약 10분후 화석정에 도착!
아빠:여기는 화석정이라는 정자야. 경치가 참 좋지?, 딸:정자 이름이 아주 쉽네요! 저도 읽을 수 있는 한자예요. 꽃러럼 예쁜 돌이 많은 정자라는 뜻인가요?
아빠 여기는 화석정이라는 정자야. 임진강변의 벼랑 위에 있으니 경치가 참 좋지?
정자의 이름이 아주 쉽네요. 다른 정자들과는 달리 아주 쉬운 한자인 꽃 화(花)자에 돌 석(石)자라서 누구나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꽃처럼 예쁜 돌이 많은 정자라는 뜻인가요?
화석정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1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건축양식을 따른 건물이다. 원래 정자 건물은 1443년에 율곡 이이의 5대조 ‘이명신’이 처음 세웠고, 1478년에 율곡의 증조부 ‘이의석’이 보수하면서 화석정이란 이름이 붙었다. 그런데 실제 화석정의 이름은 지은 사람은 ‘이의석’이 아니라 그의 스승이었던 ‘이숙함’이다. 이숙함은 제자 이의석의 부탁을 받고 정자의 이름을 붙일 때 주변에 감상용으로 심어진 기이하면서도 진귀한 화초와 소나무 그리고 괴석(기화이초奇花異草 진송괴석珍松怪石)이 많았다는 사실을 고려했다. 그리고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했던 중국 당나라 때의 재상(宰相) ‘이덕유’의 별장인 평천장(平泉莊)의 기문(記文) 중에 나오는 화석(花石)을 인용해 《화석정》이라 이름을 붙였다.
[여기서 잠깐]재상(宰相)의 어원

재상은 임금을 돕고 모든 관원을 지휘하고 감독하는 일을 맡아보던 최고의 벼슬이나 그 벼슬에 있던 벼슬아치를 가리킨다. 특히 조선에서는 정1품의 삼정승(영의정(영상), 좌의정(좌상), 우의정(우상))을 지칭했다. 이런 중요한 자리에 요구되는 자격조건은 뛰어난 능력은 물론이거니와 무엇보다도 《임금이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인물》어야 했다.

한자는 뜻글자이므로 글자를 하나하나 분석해 보면 글자가 만들어질 때의 원리를 알 수가 있는데 재상도 마찬가지다. 우선 재(宰)는 《임금의 전속요리사》를 뜻하는 말이었다. 예로부터 음식을 통해 임금을 독살하려는 시도는 시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따라서 임금은 자신을 독살로부터 지켜줄 수 있는 믿음직한 사람을 전속요리사로 지명했던 것에서 재(宰)라는 말이 생겨났다. 재(宰)라는 글자를 자세히 보라. 위쪽에는 집(家)을 뜻하는 《갓머리(면)部》가 있고,, 그 아래쪽에는 라면이름으로 유명한 《매울 신(辛)》자가 있다. 집안에서 매운 것을 다루는 사람은 바로 《요리사》다.

춘추시대 역아(易牙)는 최초의 패자(覇者)였던 제나라 환공(齊 桓公)의 신하로서 당대 제일가는 요리사였고, 특히 환공을 기쁘게 하기 위해 자기 자식을 삶아서 바쳤다는 일로 유명하다. 역아는 환공의 총애를 받는 상황에서 환공의 한없는 욕심을 역이용하여 결국은 환공을 굶겨 죽이고 말았고, 제나라를 패자의 위치에 올려놓았던 명재상 관중(管仲)이 죽은 뒤에는 수조(竪조) 등과 함께 권력을 전횡하여 제나라의 패권을 진나라 문공(晉 文公)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한편 상(相)의 뜻은 임금이 잠을 자는 동안 불침번을 서는 것이다. 글자를 풀이해보면 나무(木)로 만든 침대 옆에서 눈(目)을 부릅뜨고 지키고 있는 형태다. 결론적으로 재상은 모두 임금의 생명을 지킬 수 있는 믿음직한 사람을 임명하던 것에서 유래하여 최고의 벼슬자리를 뜻하는 말로 뜻이 바뀌게 된 것을 알 수가 있다. 세간의 자자한 명성과는 달리 율곡 이이는 살아생전에는 정2품인 대제학과 이조 및 병조판서에 머물렀으니 정1품인 재상의 반열에는 오르지 못했고 사후 추증을 받아서야 재상이 될 수 있었다.
그 후 율곡이 다시 화석정을 중수해서 여가가 날 때마다 이곳을 찾았고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이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정자는 임진왜란 때 불타고 마는데, 당시 불에 탄 건물이야 셀 수도 없이 많겠지만 유독 이 화석정 만큼은 불에 탄 사연이 남다르게 널리 알려져 있다.
일제 강점기 때 일제가 그들의 만주침략 목적에 맞도록 도로와 철도를 새롭게 건설하면서 지금의 《의주로》와 《경의선》이 주된 교통로가 되었다. 하지만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한양에서 평양으로 가는 주요 교통로는 벽제와 파주를 거친 후 이 화석정의 아래쪽에 있던 《임진나루》를 건너 장단과 평산을 통과해 평양으로 가는 길이었다. 따라서 화석정은 옛날에는 한양-평양의 가장 번화한 길목에 있었으며, 임진왜란 때 선조가 피난을 갈 때도 바로 이 화석정 아래의 임진나루를 거쳐야만 했다.
율곡은 자신이 병조판서로 있을 때 왜적의 침공에 대비해 십만양병설 등을 주장했지만 당쟁이 치열하던 당시 집권당이던 동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럼에도 율곡은 전란이 발생하게 되면 반드시 선조가 임진나루를 이용할 것이라 예견하여 평소에 화석정에 단단히 기름칠을 해 두었는데, 율곡이 세상을 떠난 8년 뒤 실제로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이 길을 지나게 되었다. 급히 한양을 빠져나와 임진나루에 도착한 선조 일행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도무지 뱃길을 잡을 수 없었는데, 피난길을 인도하던 백사 이항복이 화석정에 불을 질러 밝힌 빛으로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찾아보면 이 이야기는 꾸며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실록의 내용에는 화석정을 언급한 부분이 전혀 없을 뿐더러 불빛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선조 26권, 25년(1592년) 4월 30일(기미)
* 새벽에 서울을 떠나다 & 저녁에 임진강 나루에 닿아 배에 오르다
새벽에 상(上,임금)이 인정전에 나오니 백관들과 인마(人馬) 등이 대궐 뜰을 가득 메웠다. 이날 온종일 비가 쏟아졌다. 상과 동궁은 말을 타고 중전 등은 뚜껑있는 교자를 탔었는데 홍제원(洪濟院)에 이르러 비가 심해지자 숙의(淑儀) 이하는 교자를 버리고 말을 탔다. 궁인(宮人)들은 모두 통곡하면서 걸어서 따라갔으며 종친과 호종하는 문무관은 그 수가 1백 명도 되지 않았다. 점심을 벽제관(碧蹄館)에서 먹는데 왕과 왕비의 반찬은 겨우 준비되었으나 동궁은 반찬도 없었다. 병조 판서 김응남이 흙탕물 속을 분주히 뛰어다녔으나 여전히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었고, 경기 관찰사 권징은 무릎을 끼고 앉아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저녁에 임진나루에 닿아 배에 올랐다. 상이 시신(侍臣)들을 보고 엎드려 통곡하니 좌우가 눈물을 흘리면서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 밤은 칠흙같이 어두운데 한 개의 등촉(燈燭)도 없었다. 밤이 깊은 후에 겨우 동파(東坡)까지 닿았다. 상(上)이 배를 가라앉히고 나루를 끊고 가까운 곳의 인가(人家)도 철거시키도록 명했다. 이는 적병이 그것을 뗏목으로 이용할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백관들은 굶주리고 지쳐 촌가(村家)에 흩어져 잤는데 강을 건너지 못한 사람이 반이 넘었다.
한편, 건물의 정면에는 한자로 화석정(花石亭) 현판이 걸려있는데 《병오년 사월 박정희》 라고 글을 쓴 시기와 사람을 밝히고 있다. 병오년이면 1966년으로 파주의 유림들이 성금을 모아 한국 전쟁때 소실된 화석정을 다시 복원한 시기와 맞아 떨어지며 이 때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친필글씨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 글씨보다도 더 주목할 만한 현판이 내부에 걸려있다. 바로 화석정 내부에 이이가 8세 때 화석정에서 지었다고 알려진 팔세부시(八歲賦詩)가 그 주인공이다.
딸:율곡 이이가 8살때 이 글을 지었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죠?, 아빠:여기 조그맣게 '율곡선생 팔세'라고 적혀 있단다.
이이가 8살 때 이 글을 지었다구요? 지금으로치면 겨우 초등학교 1학년인데… 모두 알아 볼 수 없는 꼬부랑 글씨의 한자네요!! 그런데 8살 때 지은 글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아빠 저런 글씨체는 꼬부랑 글씨라고 하지 않고 초서체라고 하는 거야. 현판의 가장 우측 구석을 잘 보렴. 하얀 바탕에 조그맣고 검은 글씨로 《율곡선생팔세 栗谷先生 八歲》라는 글씨가 보일 거야.
화석정 《팔세부시》의 해석

林亭秋已晩 (임정추이만) 숲 속의 정자에 가을이 벌써 깊어가니,
騷客意無窮 (소객의무궁) 나그네 생각이 무궁무진 끝없이 일어나네.
遠水連天碧 (원수연천벽) 멀리 보이는 저 물빛은 푸른하늘에 연이어 이어지고
霜楓向日紅 (상풍향일홍) 서리맞은 단풍은 태양을 향해 더욱 붉구나.
山吐孤輪月 (산토고륜월) 산은 외롭고 둥근 달을 토해 내고,
江含萬里風 (강함만리풍) 강은 만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머금었네.
塞鴻何處去 (새홍하처거) 변방에서 날아오는 기러기는 머물 곳이 어디인가,
聲斷暮雲中 (성단모운중) 울음소리 저무는 구름 속으로 사라지네.
이이는 조선 최고의 천재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고 이 《팔세부시》는 《구도장원공》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그의 천재성을 증명하는 하나의 사례로 꼽힌다.
한편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은 글자 뜻 그대로 과거에서 아홉번이나 장원을 했다는 말이다. 과거에서 아홉 번 씩이나 장원을 했다면 과거를 최소한 아홉 번은 봤다는 뜻인데, 한 사람이 과거시험을 왜 그렇게 많이 봤을까? 일반인들은 아마도 이 부분이 쉽게 납득이 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의 과거제도를 요약한 아래의 표를 한번 살펴보자. 시대에 따라 과거제도가 약간씩 달라지긴 하지만, 당시 조선의 과거제도는 단 한번의 시험으로 합격자를 뽑는 것이 아니었다.
과거 종류 상세
과거종류 한성 8도 합계 비고
소과 초시(생원시) 200 500 700
초시(진사시) 200 500 700
복시(생원시) 100 100 합격자 성균관 입학자격 부여/ 무과는 190명
복시(진사시) 100 100 생원/ 진사 각 1등(5), 2등(5), 3등(70)
대과 초시 40 200 240
복시(회시) 33 33 갑과 3, 을과 7, 병과 23/ 무과 28명
전시 33 33 순위 장원(종6) / 갑(정7) / 을(정8) / 병(정9)
잡과 역과(사역원) 19 한어(13), 몽골(3), 여진(3), 왜(3)
의관(전의감) 9
음양과(관상감) 9 천문(5), 지리(2), 음양(2)
율과(형조) 9
무과나 잡과를 제외하고 문과만 놓고 본다면, 위의 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최종과거급제를 위해서는 최소한 5번의 시험을 치러야 한다. 1차 시험인 소과에서는 시험과목을 《유교경전》으로 선택할 경우 《생원시》에, 작문인 《시부(詩賦)》로 선택할 경우 《진사시》에 응시하는데, 마치 현재의 고등학교에서 《문과》와 《이과》로 나눠서 대입을 치르는 것과 유사하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소과에서도 《초시》와 《복시》라는 2번의 시험을 치르는데, 여기서 합격하여 최종적으로 추려진 ‘생원’과 ‘진사’ 각 100명에게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재미있는 것은 성균관의 학점제도이다. 성균관 유생들은 공부나 시험성적이 아니라 성균관 식당에서 하루 두 끼의 식사를 하고 식당에 비치된 출석부를 찍어야 원점(圓點) 1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원점이 300점 이상이 되어야 대과에 응시를 할 수 있었다. 성균관에서의 학점은 출석 성적이 기준이었던 셈이다. 여기서 또 하나 더 재미있는 것은 중세 유럽의 대학에서도 학점운영을 우리의 성균관과 마찬가지로 식사를 기준으로 했다는 것이다.
소과와 성균관을 거친 사람들을 대상으로 2차 시험인 대과에서는 초시와 복시를 통해 최종 33인을 선발했다. 하지만 합격과 불합격만 가릴 뿐 공개적인 세부우열은 가리지는 않았고, 이미 합격된 33인을 대상으로 최종 순위만을 정하는 순위고사를 바로 임금 앞에서 보는 마지막 시험인 전시(殿試)로 치뤘다.
여담으로 춘향전의 이도령이 한양으로 가서 과거 급제한 뒤 남원에 암행어사로 내려오는 이야기는 조선의 과거제도를 적용해 본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과거 급제는 시험 한방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성균관에서의 수학기간 및 3년마다의 과거시험(식년시) 주기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시험에서도 장원을 해도 5번 밖에 못하는데, 이이는 어떻게 9번이나 장원을 했나요?, 관리가 된 후에도 시험을 보면 벼슬이 높아질 수 있었거든. 이이는 9번의 시험에서 장원을 해서 '구도장원공'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됐지!
아빠의 설명을 들어봐도 율곡 이이가 최종 장원급제를 위해 모든 시험에서 장원을 했다 하더라도 5번이 가장 많은 횟수일텐데 어떻게 9번씩이나 장원을 했죠? 소과에서만 장원한 뒤에 대과에서 자꾸 낙방을 해서 4수, 5수를 했나요? 그렇다면 이이는 재수생 출신인가요?
과거시험 중 마지막 전시에서는 33인을 대상으로 성적순으로 `갑과` 3명, `을과` 7명, `병과` 23명으로 나뉘는데, 가장 낮은 `병과` 23명에게는 정9품, 그 위의 `을과` 7명에게는 정8품을 배정한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갑과` 3인 중에서 장원 1인에게만 종6품을, 그리고 나머지 2인에게는 정7품을 배정한다. 즉 시험성적이 벼슬의 높고 낮음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거시험은 3년마다 정기적으로 치르는 《식년시》 이외에서 가끔씩 특별과거인 《별시》가 치러지기도 했으며, 과거시험에 일반 유생뿐만 아니라 기존에 벼슬을 하고 있던 관리도 응시할 수 있었다. 벼슬아치인 관리가 과거에 또다시 응시하는 이유는 성적이 매우 좋을 경우 특별히 그의 벼슬이 더 높아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율곡도 이와 같은 경우로 총 9번의 시험에서 장원을 하여 ‘구도장원공’이라는 전무후무한 영광의 타이틀을 거머쥔 것이다.
유생들:밥먹으러 가자! 출석 점수 받아야지~ 독한놈... 율곡:시험 공부도 미리미리 해야지, 몇년후 자네, 관리들:아홉번이나 장원을 했다면서? 혀전히 독한 놈.. 율곡:내 인생에서 장원급제가 제일 쉬웠다네
이 곳이 율곡이라면 율곡선생의 묘소도 바로 이 동네에 있나요?
아빠 율곡선생의 묘소는 여기서 약간 떨어진 곳이 있는데 율곡선생을 배향한 서원과 함께 있어.
한편 화석정에서 약 8.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율곡의 사당과 묘소를 함께 모시고 있는 자운서원이 있다. 그런데 서원의 한쪽 편에 있는 율곡 집안의 묘소배치법을 보면 일반인들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두 가지가 있다. 우선 산줄기의 능선을 따라 경사가 올라가면서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1. 율곡의 맏아들 이경림의 묘, 2. 율곡의 부모인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합장묘, 3. 율곡의 맏형 이선 부부의 합장묘 4. 율곡 자신과 부인 노씨의 묘가 순차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를 보면 ‘왜 부모의 무덤보다 자식의 묘가 더 위쪽에 있는가’ 하는 첫 번째 의문이 든다. 또 주변의 다른 무덤들은 부부의 묘가 《합장묘》이거나 아니면 나란히 봉분이 있는 《쌍분》인데 비하여 율곡과 부인의 묘는 앞뒤로 배치되어 있는지도 궁금하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자식의 무덤을 부모의 무덤 위에 쓰지 못한다는 의식(이를 역장(逆葬)이라 한다)은 임진왜란 이후인 조선후기 과도한 예학(禮學, 예의 본질과 의의, 내용의 옳고 그름을 탐구하는 유학의 한 분야)의 열품이 불고 나서부터이다. 그래서 임진왜란 이전의 무덤에서는 자식의 무덤이 부모의 무덤보다 위쪽에 자리잡고 있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율곡 집안은 재산상속에서도 남녀차별을 두지 않았으며(보물 제477호 : 율곡선생 남매분재기) 율곡 자신도 성리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적서차별과 남녀차별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개혁적인 성향의 율곡의 후학들이 조선후기에 들어 조선을 수구반동적인 예학의 나라로 만들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율곡과 부인의 무덤이 보통의 경우처럼 좌우로 나란히 배치된 것이 아니라 앞뒤로 배치된 사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임진왜란 당시 그의 부인 교하 노씨와 하녀 1인이 그의 묘소 주변에서 시묘살이를 하며 묘소를 지켰다고 한다. 그런데 들이닥친 왜군들이 노씨와 하녀를 겁탈하려 하자 이들은 자결로서 항거하였는데, 임진왜란이 종결된 뒤 그들의 시신을 수습할 때 누가 부인이고 누가 하녀인지 도저히 분간할 수 없었으므로 이들의 시신을 율곡 이이의 묘소 앞에 합장하였다고 한다.
임진강변에 숨은 역사이야기가 참 많네요. 다음에 우리가 찾아갈 곳은 어디에요?
아빠 고려의 종묘인 《숭의전》으로 가 보자.
화석정에서 아빠와 딸
최동군(글로벌사이버대학교 문화콘텐츠학부 외래교수)
사진/그림
박동현(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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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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