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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있는 역사

오두산성에 숨어있는 광개토대왕의 흔적

오두산성에 숨어있는 광개토대왕의 흔적
오두산성
오두산성 찾아가는 길, 1. 합정역 2번 출구 쪽 정류장에서 2200번 버스에 승차. 2. 성동리사거리에서 하차!길 건너 정류장에서 077번 버스를 탄다. 3. 파주트레이닝센터 정류장에서 하차! 전망대입구로 진입한다. 4.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오두산 통일전망대에 도착한다!
딸:여기는 오두산 통일전망대?! 오늘은 6.25 전쟁 이야기를 해주시는 거예요?, 아빠:그보다 더 오래된 이야기를 하려고 해. 고구려와 백제가 한강 주도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던 시대의 이야기지!
여기는 오두산 통일전망대잖아요? 혹시 6.25 전쟁 이야기를 해주시는 거예요?
아빠 아니, 훨씬 더 오래된 이야기를 하려고 해. 지금으로부터 무려 1,6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고구려와 백제가 한강의 주도권을 놓고 서로 치열하게 다투던 시대의 이야기지.
오두산성은 오두산에 있는 산성이다. 그런데 과거 기록을 살펴보면 오두산 또는 오두산성은 한자로 조금씩 다른 표기를 하고 있다. 우선 고려시대의 기록에는 《까마귀 섬》을 뜻하는 오도성산성(烏島城山城)이라는 표기가 나온다. 이것이 조선으로 넘어가면서 《까마귀 머리》를 뜻하는 오두산성(烏頭山城)으로 변하고, 이후 조선중기를 거치면서 《자라 머리》를 뜻하는 오두산성(鰲頭山城)이 되었다. 일부 학계에서는 이러한 지명의 변천 과정이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으면서 한쪽 방향으로 돌출한 형태를 가진 산성의 독특한 입지 조건을 책에 기록하는 과정에서 음의 변화에 따른 한자의 오기(誤記)로 여겨진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약간 다르다.
오두산성의 지명 변천은 한자의 오기(誤記) 때문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실제로 지형의 변화가 일어남에 따라 변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 근거는 최초의 지명 속에서 지형의 특징을 《섬》이라고 표기했다는 점이다. 아마도 까마귀가 많아서 오도(烏島)라고 불렸을 것이다. 어떤 기록에는 조도(鳥島)라고도 되어 있는데, 까마귀(烏)든 새(鳥)든 공교롭게도 글자 모양과 뜻이 모두 비슷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편 섬이라는 명칭은 사방이 물로 둘러싸인 경우에만 붙인다. 그런데 지금의 오두산은 결코 섬이 아니다. 그럼 왜 그런 표기를 했던 것일까? 그것은 부산의 해운대 해수욕장 한쪽 끝부분에 있는 동백섬과 같은 이치로 설명이 가능하다. 동백섬은 예전에는 독립된 섬이었으나 한쪽 면이 육지와 매우 가까워서 밀물일 때는 완전한 섬이 되지만, 썰물일 때는 수심이 앝아져 걸어서도 왕래가 가능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오랜 세월에 걸친 퇴적 작용으로 현재는 완전히 육지화 되었는데, 이런 섬을 육계도(陸繫島)라고 부른다.
또한 오두산성을 둘러싸고 고구려와 백제가 치열하게 전쟁을 벌인 4세기 후반의 기록을 살펴보면,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이끄는 1만의 수군은 무려 7개 방면으로 20여 일을 공략한 끝에 난공불락의 《관미성》을 함락시켰다고 한다.
[여기서 잠깐]관미성이 오두산성이다?

관미성이 오두산성이라는 학설이 지배적이다. 김정호의 대동지지 교하편에는 “오두산성은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곳이며, 본래 백제의 관미성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臨津漢水交合處 本百濟關彌城)
광개토대왕비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은 AD 400년에도 신라에 침입한 왜군을 격퇴시키기 위해 5만의 군사를 보냈는데, 이때의 군사는 수군이었다. 관미성, 즉 오두산성을 빼앗기 위해 육군이 아닌 수군을 보냈다는 것은 결국 오두산성이 당시에는 섬이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게다가 모든 방향을 뜻하는 8개 방면(사방팔방)이 아니라 7개 방면으로 공격을 했다는 것은 나머지 한 쪽 방면이 배를 제대로 댈 수 없는 지형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오두산성의 초기 지형은 부산의 동백섬과 같이 한쪽이 육지에 매우 가까운 지형이었던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오두산성은 오랜 시간에 걸쳐 퇴적작용으로 완전한 육지가 되었고, 따라서 지명도 오도성산성(烏島城山城)에서 섬(島)이라는 글자가 빠지고 그 글자와 비슷한 이름을 가진 오두산성(烏頭山城)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광개토대왕:5만 수군을 관미성(오두산성)으로 보내도록 하라!], ‘오도성산성’이라는 오두산성의 옛 지명에서 살펴보면 이곳은 원래 섬이었다가 육지가 되었다고 해.
그런데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지명은 풍수지리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현재 오두산성은 육지화 되면서 뒤쪽 내륙 쪽의 작은 산줄기와 연결되어 있는데, 이는 풍수적으로 볼 때 마치 자라가 몸통에서 머리를 앞으로 쭉 내밀고 있는 형상이다. 물론 오두산이 자라의 머리에 해당하고 연결된 뒤쪽의 산줄기는 자라의 몸통에 해당한다. 따라서 최초 《까마귀》와 관련된 오두산성(烏頭山城)이라는 지명이 훗날 지형의 변화와 더불어 《자라》 형상의 오두산성(鰲頭山城)으로 변하게 되었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여기서 잠깐]오두산성

김시습이 지은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는 경주 남산, 즉 금오산(金鰲山)의 용장사에서 쓰여졌다. 여기서 오(鰲)는 ‘자라’를 뜻하는 글자이다. 경주 남산은 동서 너비가 약 4km, 남북 길이가 약 8km의 타원형이고, 북쪽의 최고봉인 금오봉이 468m, 남쪽의 최고봉인 고위봉이 494m 인데, 한 마리의 자라가 서라벌 깊숙이 들어와서 엎드린 형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곳을 빼앗기 위해 광개토대왕이 직접 수군을 이끌고 참전했다구요? 여기가 그렇게나 중요한 곳이었나요?
아빠 엄청나게 중요한 곳이었지. 특히 광개토대왕에게는 더욱 그랬어!
앞서 학계에서는 오두산성을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관미성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라고 했다. 그럼 관미성은 어떤 성이었을까? 일단 백과사전에서 관미성을 찾아보자.
《관미성(關彌城)》
광개토왕릉비문에 나오는 각미성(閣彌城)과 동일한 성으로 본다. 백제의 수도 한성(漢城)을 지키는 최고의 전략적 요충지로서, 당시 남하정책을 추구하던 고구려는 390년(광개토왕 1년) 7월에는 석현 등 10성을 빼앗고 이어 10월에는 광개토왕이 친히 군사를 7개 방면으로 나누어 관미성을 공격하여 28일만에 함락시켰다. 이에 대해 방어망에 위협을 느낀 백제도 곧 반격을 시도하여 393년(아신왕 2년) 8월에 백제장군 진무(眞武)가 1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관미성의 탈환 작전을 시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후 광개토대왕은 백제를 공격하여 58성(城)을 취한다. 《삼국사기》에서는 관미성이 '백제 북쪽 변경지대의 요새로서 사면이 깍아지른 듯이 가파르고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요새'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관미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경기도 파주시 오두산성(鰲頭山城)을 비정하는 설이 지배적이다.
관미성, 즉 오두산성을 빼앗긴 백제는 그 후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백제는 수도가 한강을 끼고 있는 지금의 서울시 송파구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주변에 있었고, 이 시대를  《한성백제시대》라고 부른다. 그런데 관미성은 바로 이 한강의 출입구에 해당하는 최고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관미성이 위치한 곳인 파주시의 옛지명은 교하(交河)였다. 교하는 곧 강이 만난다는 뜻이다. 여기서 만나는 강이란 임진강과 한강이다. 따라서 교하 지역을 손에 넣었다는 것은 임진강과 한강의 주도권을 잡았다는 뜻이며 한반도 중부지방의 교두보를 확보했음을 뜻한다.
수도로 연결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을 빼앗긴 백제는 결국 85년 뒤인 475년, 장수왕이 이끄는 고구려군 3만 명의 침입을 받았고, 불과 7일 만에 방어전선이 무너진 채 도성을 함락 당했으며 국왕인 개로왕은 탈출하는 도중 고구려군에 붙잡혀 참수되고 말았다. 이후 백제는 개로왕의 아들인 문주왕이 수도를 웅진(현재의 공주)으로 옮겨 《웅진백제시대》를 열어야만 했다.
《교하천도론(交河遷都論)》
1612년 9월, 수도 한양을 교하로 옮기자는 ‘풍수가 이의신’의 상소가 제기되어 광해군이 깊은 관심을 표했던 사안이다. 천도의 이유는 서울의 지기(地氣)가 다했다는 것인데, 그 증거로 임진왜란, 누차의 모반사건, 격화된 당쟁, 그리고 서울근처 산림의 황폐 등을 들었다. 그 대신 교하는 풍수지리적으로도 길지일 뿐더러 강화도와 인접해서 전략상 유리하다는 점도 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계획은 모든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를 받아 결국 이루어지지는 못하였다. 비록 교하천도론이 발의단계에서 저지되기는 하였지만 조선 후기 사회불안에 따른 풍수도참설의 유행과 서울의 지기 쇠약의식이 보편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딸:오두산성이 도대체 어디 있다는 거예요?, 아빠:여기선 잘 안보일거야. 일단 저 아래로 내려가볼까?
그런데 오두산성은 도대체 어디에 있나요? 안 보이는데…
아빠 수많은 시간이 흐르면서 성벽은 대부분 유실되었고 특히 6.25 전란을 통해 치명상을 입었어. 하지만 최근 복원작업을 통해 오두산성의 일부 성벽을 복원한 곳이 있단다. 나를 따라오렴.
딸:흠… 이게 오두산성이라구요? 그냥 요즘 만들어놓은 돌담 같은데…, 아빠:이건 최근에 복원을 한 상태란다. 워낙 오래된데다 6.25 전란을 거치면서 많이 훼손됐었거든.
산성은 축조방법에 따라 테뫼식(퇴뫼식), 포곡식, 복합식으로 나뉘는데, 오두산성은 테뫼식 산성이다. 테뫼식 산성은 마치 머리띠를 두른 것처럼 산(뫼)의 정상부분을 테두리처럼 둘러쌓아 성을 축조한 것으로, 산 정상을 중심으로 7~8부 능선부근에 거의 수평으로 위치한다. 산성 가운데서도 상대적으로 규모는 작고 비교적 빠른 시기에 만들어진 산성이 주류를 이룬다. 이에 비해 포곡식 산성은 말 그대로 성곽안에 골짜기(谷)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성 내부에 수원(水原)이 풍부하며 활동 공간이 넓은 것이 특징이다. 복합식은 테뫼식과 포곡식을 합친 것으로 도성(都城)처럼 가장 큰 규모를 갖는다.
[산성종류:퇴뫼식, 포곡식] 아빠:오두산성은 테뫼식 산성이란다. 산 정상 부분에 성을 테두리처럼 둘러쌓은 구조였지.
그렇게 커다랗게 성을 쌓아놓고 어떤 식으로 싸움을 했어요?
아빠 한 단어로 표현하면, 견벽청야(堅壁淸野)라고 할 수 있지!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나라 핵심 군사전략은 견벽청야(堅壁淸野)다. 한자를 직역하면 견고한 성벽과 깨끗한 들판이라는 뜻인데 좀더 풀어서 해석하면 성벽을 견고(堅固)히 지키고, 들의 농작물을 몽땅 거둬들이거나 가옥을 철거하는 등 들판을 깨끗하게 비워서 쳐들어오는 적에게 양식이나 쉴 곳의 편의를 주지 아니한다는 뜻이다. 이는 군사력이 우세한 적에 대해서는 매우 효과적인 전략이었고, 역사적으로도 수많은 사례에서 입증되었다.
당나라 태종이 645년 양만춘이 지킨 고구려의 안시성 공격에 실패하자, 우회하여 평양성을 공략하지 않고 중국으로 되돌아간 이유도 안시성 하나 때문이 아니라, 우회했을 경우 자신들의 배후 보급로 차단을 걱정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청나라도 병자호란 때 임경업이 지킨 백마산성을 의도적으로 피했고, 혹시라도 임경업에게 후방을 차단당하기 전에 최대한 빨리 인조의 항복을 받아내려 전속력으로 말을 몰았던 이유도 모두 견벽청야(堅壁淸野) 전술을 두려워해서였다. 이처럼 견벽청야(堅壁淸野) 전술은 기마술과 칼 솜씨에 능한 중국 및 북방오랑캐들의 침략에 맞설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우리 민족만의 생존전략이었다.
아빠, 고구려가 한성백제를 무너뜨렸다고 하셨는데, 원래 고구려와 백제는 모두 고주몽의 후손들 아닌가요?
아빠 그렇지.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이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성왕의 아들이니까.
고구려와 백제 모두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나라다. 심지어 백제의 왕족은 아예 성씨가 모두 《부여》였다. 백제의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로 옮긴 성왕은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기까지 했다. 백제의 제 21대 국왕인 개로왕이 북위(北魏)에 보낸 국서에도 "신(개로왕)은 고구려와 더불어 근원이 부여(夫餘)에서 나왔습니다. 선세(先世) 때에는 옛 우의를 두텁게 하였는데…."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렇게 뿌리가 같은 고구려와 백제는 언제부터 원수지간이 되었을까? 역사적인 기록을 종합해볼 때 4세기 중반까지는 고구려와 백제간에 별다른 충돌이 없었다. 그러던 중 4세기 중반 백제에서 걸출한 영웅이 한 사람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제 13대 근초고왕이다. 근초고왕은 활발한 정복전쟁을 통해 자신의 영향력을 극대화시켰다. 먼저 남쪽으로 진출해 전라도 전지역을 확보하였고 이후 북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이러한 북진정책은 고구려와의 대립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는데, 371년에 벌어진 평양성 전투에서 고구려의 제16대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혁혁한 전과를 올리며 최대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그 결과 백제는 사상 최대의 영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백제에게 국왕인 고국원왕이 전사 당하는 치욕을 당했다. 이에 고국원왕의 장남인 소수림왕과 차남인 고국양왕까지 절치부심하여 백제와의 복수전을 벌였지만 번번히 패하기만 했다. 하지만 고국양왕의 아들이자 고국원왕의 손자인 ‘담덕’이 왕위에 오르면서 상황은 180도 바뀌게 되는데, 바로 그가 우리가 아는 광개토대왕이다. 이후 전세는 고구려에게 유리하게 돌아갔고, 한성 백제는 관미성을 빼앗긴 뒤로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오두산성에서 아빠와 딸
최동군(글로벌사이버대학교 문화콘텐츠학부 외래교수)
사진/그림
박동현(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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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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