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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있는 역사

서울 중구에 숨어있는 조선 최고의 영웅

서울 중구에 숨어있는 조선 최고의 영웅
이순신 동상
이순신 생가터 찾아가는 길 ,1. 세종문화회관 앞 버스 정류장에서 7212번 버스 승차!, 2.종로3가역 15번 출구 정류장에서 하차한다. 3.을지로3가역 방향으로 800m직진. 명보아트홀 앞 생가터 표지석 도착!
딸:영화 명량을 보고 광화문 광장의 이순신 장군 동상을 보니 또 한번 뭉클하네요~, 아빠:이곳 말고도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장소가 서울 시내 한복판에 또 있단다.
지난 주말에 아빠랑 함께 봤던 영화 《명량》에서 이순신 장군의 카리스마는 정말 눈물이 쏟아질 만큼 감동이었어요! 영화 《명량》을 보고 이렇게 광화문 광장의 이순신 장군 동상을 보니 또 한번 뭉클하네요.
아빠 그냥 지나칠 때는 몰랐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그렇지? 이곳 말고도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장소가 서울 시내 한복판에 또 있단다. 바로, 이순신 장군이 태어난 집터야! 한번 가볼까?
보통 충무공 이순신과 관련된 장소로 충청남도 아산(牙山)을 떠올린다. 그의 묘소와 그를 모신 대표적인 사당인 현충사(顯忠祠)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이순신(李舜臣, 1545년 ~ 1598년) 장군의 고향은 서울이다. ‘한성부 건천동’에서 이정(李貞)의 네 아들중 셋째로 태어나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건천동에서 지냈던 것이다. 하지만 청소년기 이후에는 아산에 있는 외가에서 성장을 했고, 임진왜란 시에는 남해에서 활약을 했기 때문에, 서울에서는 이순신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이순신의 출생지인 건천동에는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숨어 있다. 건천동 출신인 허균이 쓴 문집 『성소부부고』를 보면 이순신, 유성룡, 원균이 ‘건천동’에서 살았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이순신의 삶을 다룬 한 TV 사극에서는 이순신, 유성룡, 원균이 어린 시절 모두 친하게 지냈던 것으로 그리기도 했다. 유성룡과 이순신이 어릴 때부터 서로 친분이 있다는 것은 《선조실록》이나 유성룡의 저서 《징비록》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유성룡은 경상북도 의성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서울에 올라와 지냈는데, 이때 이순신의 형 이요신과 친구로 지내면서 이순신을 만났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순신과 원균이 어린 시절 알고 지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우선 원균과 이순신 사이의 갈등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많이 남아 있지만, 그 둘이 어릴 때부터 서로 알고 지낸 사이라는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또한 원균은 이순신보다 다섯 살이나 많고 병마절도사인 아버지 원준량을 따라 일찍부터 군관으로 따라다녔기에 어린 시절 이순신과 만나 가깝게 지냈을 가능성이 적다. 어쨌든 임진왜란 당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순신, 유성룡, 원균이 모두 같은 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것은 무척 흥미로운 사실이다.
딸:에이, 이 작은 표석이 전부예요?, 아빠:기대를 많이 했구나? 그런데 지금 이 이ㅟ치도 정확하지 않다고 하는 구나.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 표지석은 중구청에 의해서 명보 아트홀 근처에 세워졌는데 서울 중구청 홈페이지에 적힌 주소는 ‘중구 마른내로 47(초동 18-5)’이다. 하지만 그 표지석의 위치(중구 초동 18-5)는 이순신이 태어났다고 알려진 ‘한성부 건천동’이 아니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한글학회와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인 조사자료를 종합해보면, 생가터는 ‘인현동 1가 31-2’로 볼 수 있다. 이 위치는 현재의 표지석으로부터 약 250미터 정도 떨어진 곳으로, 좀 더 자세한 고증과 함께 제 위치로 옮겨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 표지석 위치와 실제 생가터 위치 - 이순신 탄생터는 중구 마른내로 47 (초동 18-5)에서 205m 떨어진 인현동 1가 31-2
[여기서 잠깐]이순신 장군이 아산으로 이사를 간 이유는?

이순신 장군이 언제 그리고 무슨 이유로 서울에서 아산으로 옮겼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 당시까지만 해도 널리 시행되던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남귀여가혼이란 남자가 신부가 될 여자의 집으로 가서 혼례를 치른 뒤, 그대로 처가에서 살다가 자녀를 낳아 자녀가 성장하면 본가로 돌아오는 혼인 풍속인데, 이로 인해 부인과 처가의 위상은 높을 수 밖에 없었다. ‘장가를 든다’는 표현도 알고보면 ‘장인의 집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니 남귀여가혼의 흔적을 현재 우리가 쓰는 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율곡 이이가 어머니 신사임당의 친정인 강릉의 오죽헌에서 태어나서 자라다가, 6세 때 아버지를 따라 본가인 파주로 온 것이 남귀여가혼의 대표적인 사례다. 결혼에 대해 한가지만 더 이야기를 하자면 결혼, 또는 혼인이란 말에서 공통으로 쓰이는 글자인 혼인할 혼(婚)은 글자모양에서도 보듯이 여자를 뜻하는 계집녀(女)) 에 음을 나타내는 저녁혼(昏)이 합쳐진 글자이다. 따라서 옛날의 결혼은 여자의 집에서 예식을 올리는 것 이외에도 예식의 시작시기가 저녁때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따라서 예식이 끝나면 곧바로 초야(初夜,첫날밤)로 이어지는 것이 상례였다.
이순신은 어려서부터 무관 자질이 뛰어났던 모양이다. 유성룡은 그의 저서 『징비록』에서 어린 시절의 이순신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순신은 어린 시절 영특하고 활달했다.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 때면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어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했다. 마음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해 어른들도 그를 꺼려 감히 군문(軍門) 앞을 지나려고 하지 않았다.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가려고 했다.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했으며 글씨를 잘 썼다.”
이순신은 타고난 무관이었지만, 의외로 그의 집안은 문관 가문이었다. 이순신의 4형제 이름인 희신(羲臣), 요신(堯臣), 순신(舜臣), 우신(禹臣)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중국을 건설한 전설 속의 제왕인 삼황오제 중에서도 덕으로써 세상을 잘 다스린 문치주의의 제왕들인 복희씨, 요임금, 순임금과 우임금의 이름을 딴 것이다.
한편 이순신과 임진왜란을 함께 겪은 권율 장군 역시 1582년(선조 15년)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를 한 문관 출신이다. 문치주의를 표방했던 조선은 문관이라 하더라도 품계가 높으면 당연직으로 무관직을 겸직할 수 있도록 제도화하고 있었다. 유학의 시조인 공자는 ‘춘추시대에 유학자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기본 소양으로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의 6종류의 기술 ‘육예(六藝)’를 강조했는데, 이 중에서 사(射)는 궁술(弓術), 어(御)는 마술(馬術)로써 유학자라면 무릇 문무를 고루 겸비해야 함을 뜻한다. 이런 이유로 조선의 지방관은 행정, 사법 뿐만 아니라 군사권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잠깐]이순신 장군의 초상화는 문관의 옷을 입고 있다?

이순신 장군의 모습은 우리의 지갑 속에서 쉽게 꺼내볼 수 있다. 오늘날 사용하는 100원짜리 동전에 이순신 장군이 새겨져 있는데, 과거에 사용된 500원짜리 구 지폐에도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이 있다. 그런데 화폐의 도안을 비롯해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는 무관을 상징하는 갑옷이나 전립차림이 아닌 문관의 관복 차림을 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이 사후 여러 차례의 추증을 거쳐 정조 때에 이르러 정1품 영의정에 오르면서, 그 이후의 초상화는 영의정의 예우를 갖춰 그려졌기 때문이다.
아빠, 영화《명량》의 내용에도 역사적 사실과 차이가 있나요?
아빠 내가 보기에는 그 영화는 역사적인 내용에 고증을 한 노력과 흔적이 많이 엿보여.
TV사극이 되었건, 영화가 되었건 역사물의 경우에는 세밀한 고증 부분이 항상 입방아에 오르내린다. 대체적으로 영화 《명량》에 나오는 장면들은 그 이전의 이순신 장군 관련 역사물 보다는 훨씬 고증이 잘 된 편이다. 그 중 주목할 만한 점을 몇 가지 살펴보면, 우선 영화 《명량》 속에 나오는 무기 ‘대포’에 관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대포는 포탄이 날아가서 폭발하는 근대 서양방식이 아니라, 돌이나 쇠로 된 큰 포환을 날려보내 배에 구멍을 내서 침몰시키는 ‘돌팔매질’ 방식이었다. 영화 《명량》은 이전의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폭발하는 화면의 화려함을 포기하고 역사적인 사실에 가깝게 잘 표현했다. 그리고 하나의 큰 포환 대신 산탄총이나 크레모어 폭탄의 원리처럼 수많은 작은 돌이나 쇠 조각 등의 파편을 한꺼번에 발사하는 응용발포 장면도 조선 수군이 가진 대포를 사실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영화 《명량》에서는 장수가 아닌 일반 병사들도 모두 갑옷을 입고 나온다. 보통의 작품들에는 장수들만 갑옷을 착용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옛 기록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았다. 세종 15년 야인정벌 시 동원된 3천 명의 군사에게 당시 조정에서 갑옷 1천여 벌을 추가로 지급했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후기 국왕의 정무에 참고가 되는 각종 자료를 수록한 책인 『만기요람』에도 당시 중앙군의 대부분이 찰갑이나 목면갑을 착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인이 임진왜란 때의 전투장면을 그린 《조선전역해전도》에서도 모든 조선 수군이 갑옷을 착용하고 있다.
물론 영화 《명량》에도 눈에 띄는 고증 실수 부분이 하나 있다. 이순신 장군이 부하장수들과 치열한 회의 끝에 죽음을 각오한 출전을 결정하는데, 겨우 12척의 배로 수백 척의 일본 수군 선단을 향해 출전해야 하는 상황에서 조선의 장수 한 명이 깊은 시름과 함께 곰방대로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 그려진다. 우리나라에 담배가 들어온 시기가 임진왜란 때 일본군들에 의해 들어온 것은 맞지만, 실제로 우리가 직접 담배를 재배한 것은 광해군 때에 가서야 가능했다. 문헌자료 상에도 1608년이 가장 빠른 것으로 나와 있다. 따라서 그 장면은 시기적으로 모순된다고 볼 수 있다. 혹시 일본군으로부터 빼앗은 전리품이라고 생각하면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겠다.
아빠:명량 전투에서 돌이나 쇠로 된 포환이 사용된 것이나, 일반 병사들도 갑옷을 입은 것은 역사적 사실 고증이 잘 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단다. 딸:그래서 화려하게 불꽃이 튀면서 배가 폭발하고 침몰하는 장면이 없었던 거군요.
‘이순신 장군’ 하면 ‘백의종군’ 네 글자가 자연스럽게 떠올라요. 그 부분에도 잘 알려지지 않는 사실이 있나요?
아빠 그럼~ 이순신은 두 번이나 백의종군 했단다.
백의종군은 벼슬이나 직위가 없이 가장 낮은 병사가 입는 흰 옷을 입고 군대를 따라 싸움터로 나가는 것을 뜻한다. 이순신 장군은 두 번이나 백의종군 했는데, 그 중 한 번이 영화 《명량》의 도입 부분에 해당하는 시기 바로 직전이다.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조선 수군 최고의 지위에 있던 이순신은 원균의 모함으로 인해 백의종군 당하고 원균이 그 자리를 꿰어 차는데, 이 때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명나라의 참전으로 임진왜란이 지리한 교착상태에 빠지자 조선 수군도 전쟁 초기에 이어졌던 화끈한 승전보를 더 이상 전해주질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선조를 비롯한 조선 조정은 이순신에게 왜군에 대한 적극적인 공격을 강요했는데, 이순신은 우리 수군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무리한 요구라고 판단해 응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순신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신을 천거한 유성룡 등에 의해 동인(정확히는 남인) 계열에 속해 있었다. 이에 반대 세력인 서인 계열에 있던 원균의 모함으로 이순신은 백의종군 당하고, 당파 이해관계와도 맞물리는 공작 정치의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다.
조선 조정:이제 겁을 먹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조선조정: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저렇게 소극적이어서야 어찌 왜군의 공격을 막겠습니까. 이순신을 파직시킵시다!., 딸:다들 전장의 상황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순신 장군을 내몰기만 했군요!!, 아빠:탁상행정의 전형적인 사례라고도 할 수 있지.
그 후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원균은 이순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 역시 부임 이후 왜군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를 요구하는 조정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오히려 30만 육군이 지원해야 수군을 움직일 수 있다는 비현실적인 수륙병진을 주장했다. 도원수였던 권율은 원균을 곤장으로 다스렸는데, 그 사유는 조정의 출전 명령을 어겨서가 아니었다. 이순신의 주장을 반박하며 몰아낸 원균 역시 별 수를 내지 못하자 삼도수군통제사라는 관직에만 욕심을 내어 조정과 임금을 기망하고 속였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부하들 앞에서 곤장까지 맞은 원균은 어쩔 수 없이 전 병력을 이끌고 출전하여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 대부분이 궤멸 당하는 참패를 당하고 그 전투에서 전사하는데, 그 이후의 이야기가 바로 영화 《명량》의 도입 부분이다.
그렇다면 또 한 번의 백의종군은 언제였을까? 임진왜란 발발 5년 전인 1587년에 이순신은 수군이 아닌 육군이었다. 근무지는 여진족과 맞서는 북쪽 경계인 함경도 지방으로, `조산만호(造山萬戶)`라는 종4품 무관 직책을 수행 중이었다. 이때 이순신은 여진족의 침략을 예상하고 상관인 북병마절도사 `이일` 에게 추가 병력을 수 차례 요청했다. 그러나 거절 당하고, 실제 여진족의 침입으로 조선군 11명이 죽고 160여명이 잡혀가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이에 상관이었던 이일은 이순신에게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 씌우고 백의종군 시켰다. 하지만 이순신은 백의종군 하는 상황에서도 여진족 장수 ‘우을기내(于乙其乃)’를 꾀어내어 잡고, 그 공으로 사면을 받아 복직했다.
아빠 너 혹시 이순신 장군의 부하장수 중에 또 다른 이순신이 있다는 말 들어봤니?
이름이 흔한 것도 아닌데, 이름이 똑같은 부하가 있었다니! 뭔가 운명적인 것 같아요!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부관 중에는 한자표기만 다른 동명이인의 이순신(李純信)이 또 한 명 있었다.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웠거나 후방에서 지원한 이들 중에 한양에서부터 의주(義州)까지 시종 어가(御駕)를 모신 사람을 ‘호성공신(扈聖功臣)’, 왜적을 정벌한 제장(諸將)들과 군량을 주청하러 간 사신들을 ‘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삼았는데, 아래 기록을 보면 충무공 이순신은 선무공신 1등, 동명이인인 이순신은 선무공신 3등에 올라있음을 알 수 있다.
1등 공신 : 이순신(李舜臣) 권율(權慄) 원균(元均)
2등 공신 : 신점(申點) 권응수(權應銖) 김시민(金時敏) 이정암(李廷?) 이억기(李億祺)
3등 공신 : 권준(權俊) 권협(權鋏) 고언백(高彦伯) 기효근(寄孝謹) 류사원(柳思瑗) 이광악(李光岳) 이순신(李純信) 이운룡(李雲龍)
정기원(鄭期遠) 조경(趙儆)
동명이인의 이순신(李純信)은 충무공보다 8살 연하로, 무의(武毅)라는 시호를 받아 ‘무의공 이순신’으로 불린다. 무의공은 심지어 노량해전에서 충무공 이순신의 전사 이후 충무공의 전사 사실을 숨기기 위해 이름이 같다는 것을 이용하여 충무공의 임무를 대행하기도 했다.
무의공은 충무공의 깊은 신임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난중일기에 무의공의 공적이 조정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충무공이 고심하는 내용이 들어있기도 하다. 1593년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고 접전이 뜸한 동안에 충무공이 조정에 올린 장계에는 “이순신(李純信)은 호남 영남 개전 이래 10회에 걸쳐 1회는 중군(中軍)을, 9회는 선봉을 맡아서 오직 적의 기세를 꺾는데 전념하느라고 적의 수급을 모아 공적을 자랑할 겨를이 없기에 특별히 앞세워 상계(上啓)했건만 논공(論功)이 홀로 순신(純信)에게 미치지 못하와 유전지공(有戰之功) 무전지상(無戰之賞)이라는 군심(軍心)의 원망이 있습니다.”고 적고 있다.
아빠 영화 《명량》에는 이순신 장군이 뛰어난 전술이 그려지고 있는데, 기억 나니?
그럼요! 그런데 이순신 장군의 전술 중에는 `학익진` 이 제일 유명하지 않나요?
이순신 장군이 실제 전투상황에서 펼쳤던 전술은 매우 다양하다. 명량해전에서는 좁은 울돌목을 겨우 12척의 배들이 일렬횡대로 막아서는 ‘일자진(一字陣)’을 펼쳐 기적같은 대승을 이끌었고, 부산해전에서는 마치 긴 뱀이 기어가는 듯한 ‘장사진(長蛇陣)’을 펼쳐 100여 척의 적선을 쳐부수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가장 유명한 전술은 역시 ‘학익진(鶴翼陣)’이다.
학익진은 마치 학(鶴)이 날개(翼)를 펼친 듯한 형태를 취한 진법(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특징은 반원형으로 늘어선 함선들로부터 포격이 집중될 경우 원의 중심부에 있는 적은 그야말로 벌집이 되어 버린다. 일본 수군의 경우 함선은 크기 별로 세 종류가 있는데, 가장 크고 가운데 있는 대장선 ‘아타케부네(安宅船)’, 아타케부네의 주변을 둘러싸는 주력 중형함선 ‘세키부네(?船)’, 소형함선 ‘고하야(小早)’가 있다. 이 중 대장선만 부수면 일본 수군은 지휘관을 잃은 오합지졸이 되는데 이순신 장군은 이런 적들의 진용 특징을 잘 파악해 학익진으로 한산대첩을 이끌었던 것이다.
물론 일본 수군도 이런 자신들의 약점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대장선이 직접 피해를 입지 않도록 주변을 중형, 소형함선들로 겹겹이 에워싸고, 만약 조선 수군이 학익진을 펼치려는 시도를 하면 즉시 진용을 새롭게 바꾸었다. 그럼에도 한산해전에서 일본군은 조선 수군의 학익진에 속수무책 당했는데, 그 이유는 조선 수군이 순식간에 학익진을 펼쳤기 때문이다.
한산대첩의 대강을 살펴보면, 초반에 조선 수군은 일부러 달아나 일본 수군이 쫓아오도록 만들었다. 그 때 일자진으로 달아나던 조선 수군이 갑자기 180도 방향을 바꾸고 학익진 대형을 갖추었다. 이런 진법의 변형은 일본수군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는데, 일본 배로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수군:조선 수군이 후퇴한다! 더밀어부쳐라!!, 앗, 속았구나!!!
일본 배의 특징은 한마디로 첨저선(尖底船)이다. 첨저선은 배의 밑바닥이 뾰족하고 유선형으로 되어 있어 배의 속도가 빠른 반면, 방향 전환을 하려면 크게 원을 그리면서 배를 돌려야 하는 단점이 있다. 대대로 왜구들은 노략질을 일삼으며 빨리 도망가는 것이 중요하여 이런 형태의 배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조선 배의 특징은 평저선(平底船), 즉 배의 밑바닥이 평평한 형태를 띄고 있어 속도가 빠르지 않았다. 침략 전쟁을 하지 않는 조선으로서는 첨저선처럼 속도가 빠른 배가 필요 없었던 것이다. 대신 그 자리에서 곧바로 방향 전환이 가능하고 내구성이 뛰어난 판옥선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런 조선 배의 특성을 알리 없는 일본 수군은 그 자리에서 180도로 회전하는 조선 수군이 불가사의 그 자체였을 것이다.
아빠의 설명을 들었더니 충무공의 위대함이 한층 더 부각되는 것 같아요.
아빠 나라는 이순신 장군을 버렸지만 이순신 장군은 나라를 구했어. 바로 그 점이 충무공을 더욱 위대하게 해 주는 거야. 나중에 시간 나면 아산 현충사와 진도 울돌목에 한번 다녀오자꾸나.
서울 중구에서 아빠와 딸
최동군(글로벌사이버대학교 문화콘텐츠학부 외래교수)
사진/그림
박동현(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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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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