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여기에는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잘생긴 고인돌이 있단다. 기대되지 않니?
딸 아빠,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무덤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청동기 시대라면 글자도 없어서 역사기록도 남아있지 않을텐데 어떻게 청동기 시대의 무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나요?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다양한 형태와 크기를 보이고 있지만 대체로 큰 돌이라는 재료와 일정하게 쌓는 방식에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또한 고인돌은 일반적으로 소수의 사람들이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이 동원되어 조직적인 공동작업을 해야만 만들 수 있는 구조다. 따라서 선사시대 중에서도 대규모의 사람을 조직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정치사회구조를 가진 청동기 시대가 고인돌이 만들어 질 수 있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뒷받침 하는 것이 일부 고인돌에서 출토된 껴묻거리(부장품)인데, 그 중 간돌칼(마제석검)은 대표적인 청동기시대의 유물로 꼽힌다.
[여기서 잠깐]'고인돌'은 순 우리말?
고인돌이 선사시대의 유물이어서 그런지 그 용어가 ‘고대인(古代人)’을 뜻하는 한자에서 유래된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고인돌은 커다랗고 평평한 덩이돌(덮개돌) 밑에 굄돌(받침돌)을 고여서 땅 위에 드러나 있는 '고여 있는 돌’이라는 순수한 우리말 표현이다. 한자로는 지지할 지支, 돌 석石 자를 써서 ‘지석묘支石墓’라고 쓴다. 하지만 지석묘 보다는 고인돌이 훨씬 더 정확한 이름이라고 볼 수 있는데, 지석묘는 무덤을 전제로 하는 명칭이지만 고인돌은 반드시 무덤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고인돌이 무덤으로 사용된 것은 분명하지만, 일부 고인돌은 제사를 지내거나 의식을 거행하는 `제단` 으로 쓰였거나, 아니면 공동 무덤을 표시하는 `묘표석`으로 사용되었다는 학술적 견해가 있다. 그 이유로는 첫째, 일부 고인돌은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높은 곳에 만들어져 있고, 둘째, 외형적으로 주변의 다른 고인돌보다는 훨씬 웅장하게 만들었고, 셋째, 탁자식이 아님에도 시신을 안치하는 무덤방이 없거나, 넷째 주변의 고인돌과는 받침돌이나 무덤방의 방향이 전혀 다른 경우를 꼽을 수 있다.
딸 참, 우리나라의 고인돌이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 이라면서요?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모든 고인돌이 세계문화유산인가요?
2000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전남 화순과 전북 고창, 그리고 강화 이렇게 3개 지역에 나뉘어 위치해 있는 총 820여기의 고인돌군(群)이다. 이중에서도 강화 고인돌 유적은 고려산 기슭을 따라 부근리, 삼거리, 오상리 등의 지역에 70 기의 고인돌들이 분포해 있는데, 표고 280m의 높은 곳까지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며 탁자식 고인돌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특히 7만기 정도로 추정되는 전세계 각지의 고인돌 중에서도 우리나라의 고인돌 만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데, 그 숫자도 남북한을 합치면 약 3만기 이상이 되기 때문에 전세계 고인돌의 절반 정도가 우리나라에 몰려 있는 셈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렇게 많은 고인돌을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없을까?
그 이유는 일반인들이 고인돌과 자연적인 바위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예전에는 고인돌을 분류할 때 탁자처럼 생긴 것을 ‘북방식’, 바둑판처럼 생긴 것을 ‘남방식’ 이렇게 두 가지로 크게 분류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고인돌 하면 떠올리는 그런 형태가 이 두 가지에 속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 종류가 하나 더 추가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고인돌 중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하는 ‘개석식(蓋石式)’ 고인돌이다.
개석식 고인돌은 구조상 상부의 커다란 덮개돌을 지탱하는 굄돌(받침돌)이 없다. 이런 외형적인 특징 때문에 기존 탁자식과 바둑판식 고인돌과는 달리 자연적인 바위와 구별하기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개석식 고인돌과 자연적인 바위를 구별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하고도 쉬운 방법이 있다. 땅 위로 드러난 돌 주변의 밑 부분을 쇠꼬챙이로 찔러 보는 것이다. 만약 쑥 하고 들어가는 느낌이 난다면 아래에 무덤방이 있는 고인돌 일 수 있고, 반대로 꽉 막혀 있다면 그냥 바위일 가능성이 높다.
딸 근데 보면 볼수록 강화 고인돌이 무덤이라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아요. 저기 땅속에 무덤방이 정말 있나요?
탁자식 고인돌은 무덤방을 땅 속에 만들지 않고 땅 위에 부장품과 시신을 둔 경우에 만들어진다. 굄돌을 높이 만들고 덮개돌과 막음돌을 세워 올려 사각형 공간을 만들어 무덤방으로 이용한 것이다. 이런 탁자식 고인돌이 주로 한반도의 북쪽 지방에 많이 분포되어 있는 이유는, 날씨가 추워 겨울철에 꽁꽁 언 땅을 파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상대적으로 기후가 따뜻한 한반도의 남쪽 지방에는 바둑판식 고인돌이 많다. 이런 형태는 무덤방이 지하에 만들어져 있어 덮개돌을 지탱하는 굄돌을 짧은 기둥형태로 만들거나, 여러 개의 자연석으로 거대한 덮개돌을 받치는 식으로 하여 무덤방에 아무나 접근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탁자식 고인돌은 구조상 2차장(二次葬)이 가능했거나 가족장(家族葬)이 가능했다. 바둑판식 고인돌은 한번 설치한 뒤 무거운 덮개돌을 다시 옮기기가 매우 어렵지만, 탁자식 고인돌은 굄돌의 앞뒤로 막아둔 가벼운 막음돌만 치우면 얼마든지 무덤방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탁자식 고인돌은 부장품과 유물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데, 현재의 강화고인돌이 바로 이런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옛날의 강화고인돌은 앞뒤 막음돌이 있고, 그 안에 시신과 부장품이 있었을 것이다.
고인돌의 지역적 특색은 후대까지 계속 이어져, 한반도 북쪽 및 만주, 요동지방에 위치한 고구려 고분은 시신을 매장하는 부분이 지상에 있는 적석총(돌무지무덤) 계열이 주류를 이루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광개토대왕비 인근의 장군총과 태왕릉을 들 수 있다. 그리고 한반도의 남쪽지방에 위치한 백제의 고분은 매장하는 부분이 지하에 만들어지는 봉토분(흙무덤)으로, 공주 송산리와 부여 능산리의 백제고분군이 모두 그런 형태를 갖추고 있다.
한편 백제의 초기 고분은 피라미드 형태로, 석촌동고분군을 참고해서 보면 고구려계의 적석총 영향을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초기고분 역시 북쪽지방의 적석총 문화와 남쪽지방의 흙무덤 문화가 섞인 적석목곽분(돌무지덧널무덤)의 형태인데, 이는 백제와 신라의 시조인 온조와 박혁거세가 모두 북쪽 지방인 고구려 및 부여와 연관된 사람이라는 점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온조의 아버지는 고구려를 건국한 고주몽이며, 신라의 시조 혁거세의 어머니인 파소공주는 동부여의 건국시조 해루부왕의 딸이라는 학설이 있다.) 신라의 혁거세가 고구려의 주몽과 마찬가지로 알에서 태어났다는 난생신화(卵生神話)를 가지고 있다는 점도 신라의 지배계급이 북방계라는 또 다른 증거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잠깐]적석목곽분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돌무지덧널무덤) 은 지하에 무덤광을 파고 상자형 나무덧널을 넣은 뒤, 그 주위와 위쪽을 사람 머리만한 둥근 강돌로 두껍게 덮고 그 바깥을 봉토로 씌운 신라 지배층의 특수무덤이다. 적석목곽분은 구조상 아래쪽의 돌을 하나 빼면 위쪽의 돌이 굴러 내려오기 때문에 도굴이 매우 어렵다. 신라금관을 비롯하여 국보급 부장품들이 쏟아져 나온 신라시대의 고분이 거의 대부분이 적석목곽분이었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딸 오, 놀라워라!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이 고구려, 백제, 신라의 고분들에까지 영향을 줬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데 아빠의 설명을 들으니 이제 이해가 되요. 그런데 삼국시대를 비롯한 철기시대에는 왜 고인돌이 만들어지지 않았나요?
고인돌이 만들어진 시대는 부족장 중심의 부족연맹 체제였다. 하지만 철기시대로 들어서며 부족 면맹 간의 정복전쟁을 통해 통폐합 되고, 그 결과 과거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큰 규모의 고대국가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 때 등장한 막강한 힘을 가진 정치 지도자는 고대국가의 왕으로서 자신의 신분에 걸맞은 새로운 전시용 매장문화를 필요로 했다. 그래서 다른 일반인들의 무덤과는 차별화를 두기 위하여 완전히 독립적으로 구분되는 위치에 전혀 다른 형식으로 무덤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고분’의 형태이다.
매장문화는 역사적으로 쉽게 변하지 않는 요소 중 하나인데, 새로운 종교가 도입되거나 외부 민족의 침입으로 사회 구성원이 교체되는 것 등의 큰 변화가 있었다는 반증으로 볼 수 있다. 철기 시대의 경우에는 강력한 정치지도자의 등장이 바로 그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철기시대의 매장문화의 변화에는 정치적 요인 외에도 경제적 요인을 꼽을 수 있다. 청동기 시대와는 달리 철기시대는 철제 도구의 제조가 일반화되면서 일반 사회 구성원들도 손쉽게 도구를 구할 수 있었다. 특히 철제 농기구 사용에 따라 농업 생산량이 증가하고 농경지가 확대되었는데, 이렇게 노동력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점에 많은 인원이 동원되는 고인돌 축조는 점차 배제될 수 밖에 없었다.
딸 그런데 이렇게 큰 고인돌 말고도 어린아이를 묻은 작은 고인돌도 있어요?
고인돌 중에는 크기가 아주 작은 고인돌도 많이 있다. 실제 그곳에서 발굴된 뼈를 분석한 결과, 어린아이가 묻힌 곳도 간혹 있었지만, 대부분은 성인을 묻은 고인돌로 밝혀졌다. 그렇다면 크기가 아주 작은 고인돌에 큰 성인을 어떻게 묻었을까??학계에서의 추정으로는 풍장(風葬), 이차장(二次葬) 또는 세골장(洗骨葬)을 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시신을 1차로 가매장 하거나, 시신을 있는 그대로 또는 짚 등으로 둘둘 말아서 야산 또는 동굴이나 낭떠러지 등에 방치한 뒤에, 동물에게 먹이거나 사체가 자연스럽게 분해되도록 하는 자연의 풍화 작용을 기대하는 장례 방식이다.?살을 모두 썩혀 없애 버리고 난 뒤 남은 뼈만 추려서 깨끗하게 물로 씻은 후 다시 묻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우리나라 전라도의 남해안 및 서해안 일대 섬 지방에서 최근까지도 남아있었다고 한다. `풀 초(草)` 자를 쓰는 초장(草葬)이라고 부르는데, 1차적으로 섶으로 초분(草墳) 을 설치하였다가 육탈(肉脫)이 된 이후 다시 매장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복잡한 방식의 장례 방식을 선택하는 경우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우선 겨울철에 땅이 얼어 무덤을 깊게 파지 못하는 경우다. 그리고 전염병 등으로 죽었을 때에도 시신의 병균을 격리하는 차원에서 일단 초분이나 간단한 돌무덤으로 가묘를 만들고 난 뒤, 정상적인 장례가 가능해 졌을 때 이차장을 지냈다.
[여기서 잠깐]티베트의 조장(鳥葬)
티베트에도 풍장과 비슷한 장례법이 있다. 육신을 토막 내서 특히 독수리들에게 준다고 하여 ‘조장(鳥葬)’이라고 하는데, 라마불교도인 티베트인들이 죽어서 자신의 육신을 짐승에게 `보시`한다는 종교적인 뜻을 포함하고 있다. 티베트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영혼도 새를 따라 하늘로 올라간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조장을 ‘천장(天葬)’이라고도 한다. 조장에는 종교 외에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티베트에서 화장(火葬)을 하기에는 자연조건상 나무의 양이 충분하지 않고, 또한 땅에 묻는 매장(埋葬)은 고산 지대인 티베트의 지형적인 특성상 기온이 낮고 건조해서 시신이 잘 썩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택한 조장이라는 장례법에 종교적인 의미를 추가로 부여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딸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의 유적까지 모두 돌아볼 수 있는 강화도는 참 멋진 곳이네요. 아빠, 다음에는 어디로 갈까요?
아빠 이번에는 서울의 중심, 광화문으로 다시 가볼까. 그 근처에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숨은 역사가 있단다!
- 글
- 최동군(글로벌사이버대학교 문화콘텐츠학부 외래교수)
- 사진/그림
- 박동현(만화가)
- 본 콘텐츠는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받는 저작물입니다.
- 본 콘텐츠는 사전 동의 없이 상업적 무단복제와 수정, 캡처 후 배포 도용을 절대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