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역사

광성보에 숨어있는 순국선열들의 애국심

광성보에 숨어있는 순국선열들의 애국심
광성보
광성보 찾아 가는 길, 1.강화시외버스터미널 안에서 해안순환 2번 버스 탑승! 2.광성보 정류장에 하차한다. 3. 광성보 매표소방향으로 걸어 가면 광성보 도착!
딸:성벽이 줄지어 있네요. 강화성인가요?, 아빠:여기는 강화도를 수비하기 위해 만든 성곽으로, 병자호란때 파괴되고 지금은 일부만 남은 상태야.
와, 성문과 성벽이 줄지어 있네요. 강화성인가요?
아빠 이 곳은 조선시대 강화도의 성곽시설 중의 하나인 광성보야. 원래 강화도에는 수비하기 위한 성곽시설로 내성과 외성, 그리고 5진, 7보, 53돈이 있었는데, 그 중 외성은 병자호란때 청군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되고, 내성과 진, 보, 돈대는 일부만 복원된 상태야.
내성, 외성은 대강 알겠는데 진, 보, 돈대는 뭐에요?
진, 보, 돈대는 다 같은 성곽시설이지만 주둔하던 군사 조직의 규모에 따라 달리 불렸다. 현대적인 군사 용어로 바꾼다면 대대, 중대, 소대 규모의 군대가 머물던 성곽시설로 이해할 수 있다. 광성보에는 3개의 돈대가 소속되어 있는데 광성돈대, 손돌목돈대, 용두돈대가 그것이다.
광성보는 1871년 미국이 통상조약 체결을 목적으로 소위 포함외교를 펼쳤던 신미양요 당시, 조선군과 미군 사이에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었던 장소다. 신미양요의 직접적인 원인은 1866년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던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를 평양 군민들이 응징하여 불에 태워버린 사건이다. 이미 일본을 포함외교로 굴복시켰던 미국은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삼아 1871년 동일한 전략으로 조선을 개항시키기 위한 원정을 결정하고, 군함 5척에 800명의 병력을 출동시켰다.
이들은 먼저 함상에서 집중적인 함포사격으로 초지진을 완전 초토화시킨 후 점거하였다. 초지진에 상륙한 미군은 북상하여 덕진진을 무혈 점거하고 마지막으로 광성보 작전을 수행하였는데, 이때 광성보에는 진무중군(鎭撫中軍) 어재연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 600여 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여기서 잠깐]신미양요 당시 미군과 조선군의 화력 비교

미군은 8인치, 9인치, 10인치 함포를 비롯해 박격포 등 최신무기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대응할 수 있는 조선군의 대포는 병자호란 이후 청에서 수입하거나 모방제작한 홍이포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나마 있던 홍이포의 포탄은 목표물에 날아가서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돌이나 철환을 날려보내 배에 구멍을 내는 것으로, 쉽게 말해 돌팔매질을 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이미 병력과 무기의 수준에서 엄청난 차이가 났지만 조선군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맞서 싸웠다. 미군은 수륙양면에서 포격을 실시했는데, 이 과정에서 광성보의 화약고가 폭파되고 그 때문에 조선군은 개인지참 분량의 총탄만으로 전투에 임해야 했다. 이날 전투 끝에 조선군은 어재연 장군 이하 350명이 장렬하게 전사했지만 미군은 단 3명만이 전사했을 뿐이었다.
딸:무기도 열악하니 싸움도 지고.. 조선군은 귀중한 목숨만 잃었네요. 아빠:전투 결과만 놓고 보면 그렇지만, 순국하신 분들의 희생이 결코 헛된 건 아니었어.
조선군의 일방적인 패배였네요? 돌아가신 분들의 귀중한 목숨만 헛되이 버렸군요!
아빠 단순히 광성보 전투의 결과만 본다면 일방적인 패배가 분명 맞지만, 그렇다고 순국하신 분들의 희생이 전혀 헛된 건 아니었어.
광성보 전투에 대해 미군측이 남간 두 가지 기록은 다음과 같다.
* 조선군은 비상한 용기를 가지고 응전하면서 성벽에 올라 미군에게 돌을 던졌다. 그들은 창과 칼로 미군을 상대했는데 그나마도 없는 병사들은 맨손으로 흙을 쥐어 미군의 눈에 뿌렸다. 모든 것을 각오한 채 그들은 한걸음씩 포위하며 다가오는 미군과 오직 죽기로 싸웠고 그리하여 결국 사살당하거나 물 속에 떨어져 죽기도 하였다. 부상당한 자는 투신자살을 감행했는데 그 중에는 스스로 목을 찌른 다음 물 속으로 뛰어들기도 하였다. 성내에서의 전투는 더욱 처참하여 1백 명에 가까운 조선군이 백병전에서 쓰러졌다. 부상당하여 포로가 된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 그것은 승리였다.  그러나 어느 누구에게도 자랑스러운 것은 아니었으며 어느 누구도 기억에 남기려고 하지 않았다.
미군은 광성보 전투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뒤 일단 함대를 물치도로 귀환시켰다. 그들의 목표는 조선의 개항이었지 조선 정복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국에 굴복하여 개항을 했던 일본과는 달리, 조선은 전국의 주요 도시에 척화비를 건립하는 등 더욱더 강경한 자세를 유지했다. 미군은 조선 측의 의외의 반응에 놀라 일단 후퇴를 한 뒤 본국의 명령을 다시 받기로 하고 퇴각했다.
[여기서 잠깐]척화비

척화비(斥和碑)는 1871년 신미양요를 겪은 후 흥선대원군이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며 쇄국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면서 세운 비석으로, 서울 종로 네거리, 경기도 강화, 경상도 동래, 함양, 경주, 부산진 등을 포함 전국 각지에 세워졌다. 이 비석에는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주문(主文) 12글자를 큰 글자로 새기고, 그 옆에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계아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 (우리들의 만대자손에게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라는 작은 글자를 새겼다. 그 뒤 1882년 임오군란 때 흥선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자, 이 틈을 탄 일본공사의 요구로 척화비는 모두 철거되었다. 그 가운데 서울 종로 네거리에 세워졌던 척화비는 1882년 8월 종로 보신각 부근에 묻혔다가, 1915년 6월 보신각을 옮길 때 발굴되어 경복궁내에 보관되었다.
아빠 이제 손돌목돈대로 넘어가볼까? 아직 여기서 볼 돈대가 두 곳이나 더 있단다.
근데 저기 있는 비각은 뭐예요? 무덤도 여러 개가 있어요!!
아빠:쌍충비는 신미양요 때 순국한 어재연 장군과 그의 동생 어재순을 기리기 위해 세웠지, 신미순의총은 신미양요 때 전사했지만,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분들을 합장해 모신 곳이란다.
광성돈대에서 손돌목돈대로 가는 길 한쪽에는 비각이 하나 있는데 그 속에는 신미양요때 순국한 어재연 장군과 더불어, 함께 전사한 그의 동생 어재순을 기리기 위한 ‘쌍충비’가 서있다. 한편 맞은편 길 아래쪽에는 ‘신미순의총’이라는  7기의 분묘가 나란히 있다. 치열했던 신미양요의 백병전 직후 어재연 장군 휘하의 조선군 전사자 51명의 시신이 남아 있었는데 누가 누군지 신원 확인이 되지 않아 7기의 분묘에 합장을 한 것이다.
아빠 자, 여기가 손돌목돈대란다. 아까 본 광성돈대랑 조금 다른 것 같지 않아?
광성돈대는 다리미처럼 생겼었는데, 손돌목돈대는 동그랗게 생겼어요! 게다가 제일 높은 곳에 있어서 멀리까지 잘 보여요!
아빠 그래. 멀리까지도 잘 보이니까 이 곳이 중요한 역할을 했지.
딸:아까 본 광성돈대는 다리미처럼 생겼는데 손돌목돈대는 동그랗게 생겼어요!
손돌목돈대는 가장 고지대에 있어서 주변을 관측하기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신미양요 당시에도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손돌목이라는 이름은 광성보에서 바라보이는 덕진진 앞쪽에 있는 좁은 해협의 이름인 ‘손돌목’에서 따온 것으로, 여기서 ‘목’이란 손목, 발목, 병목 처럼 ‘갑자기 좁아지는 지점’을 의미한다. 손돌목 역시 해협이 S자 형태로 굽어지면서 폭이 좁아지고 있는데, 이곳은 유속의 흐름이 특히 빨라 선박도 조심스럽게 항해한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을 거둔 곳도 바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물살이 센 울돌목이었다.
손돌목, 광성보 위치도
[여기서 잠깐]손돌목의 유래

손돌목에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전설이 하나 있다. 몽골군이 고려로 쳐들어 왔을 때 고려의 제23대왕 고종은 개경을 떠나 강화로 급히 피신했다. 이때 손돌이라는 뱃사공이 뱃길을 안내하게 되었는데, 임금 일행을 실은 배가 광성보를 지나자 갑자기 뱃길이 막혔다. 적군에 쫓겨 피난길에 올랐던 임금은 불안한 나머지 그만 뱃사공인 손돌이 무슨 계략을 품은 줄로 오인하고 즉각 처형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손돌은 이 곳의 지형이 원래 그러하며 자신은 절대 흉계 같은 걸 꾸밀 사람이 아니라고 읍소했다. 하지만 왕과 대신들은 손돌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결국 손돌은 처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처형당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겠노라’면서 뱃길 앞에 바가지를 띄운 뒤 그 바가지만 따라 가면 저절로 뱃길이 트일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임금 일행은 그 뒤 손돌이 가르쳐 준 대로 바가지를 따라갔고, 무사히 강화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제서야 임금은 비로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크게 뉘우쳤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 후 손돌의 안타까운 죽음을 기리며 덕진진 앞 좁은 물길을 가리켜 ‘손돌목’이라 불렀다고 한다.
딸:여기 용두돈대는 방파제처럼 튀어나와있네요! 아빠:용머리처럼 튀어나온 자연암반위에 지어서 그렇단다. 광성보에서 손꼽히는 절경이지.
저기가 마지막 용두돈대인가요? 방파제처럼 앞으로 튀어나와있네요?
아빠 용머리처럼 튀어나온 자연암반 위에 지어졌단다. 광성보에서도 가장 손꼽히는 절경이지. 어서 가볼까?.
용두돈대는 병인양요, 신미양요 같은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진 곳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만큼 좋은 풍경을 자랑한다. 하지만 가만히 보고 있으면 용두돈대 앞의 바닷물 흐름이 소용돌이 치며 시시각각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거친 물살은 강화를 천혜의 요새로 만들어 주었다.
한편 조선 건국 직후 이 거친 물살 속에 수많은 고려의 왕족들이 수장되는 일이 일어난다. 개국공신들은 고려의 왕족이던 개성 왕씨들이 체제의 위협요소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성계는 왕씨 일족을 제거해야 한다는 그 주장을 처음에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태조 5권, 3년(1394 갑술) 4월 10일(기묘) 1번째 기사》
* 삼성에서 남은 왕씨 일족을 제거하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리니 윤허치 않다
대간과 형조에서 상소하였다. "신 등이 요사이 왕씨를 제거하자는 일로써 여러 번 총청(聰聽)을 번거롭게 하였사오나, 윤허를 얻지 못하였으므로, 각기 스스로 낭패를 당했사옵니다. … 중략 …  그러하온데 왕씨는 이를 돌아보지 않고 도리어 흔단을 일으켰습니다. 지난번에 장소(章疏)에 연명(連名)하여 죄주기를 청하여, 지당(支黨)은 참형을 당했사오나, 남은 무리들은 각처에 모여 있으니, 만약에 위급한 일이 있으면 불측(不測)한 환(患)이 발생할까 두렵습니다. … 중략 …"
"세 관청에서 소장(疏狀)을 같이 올리는 것은 내가 이미 금지시켰는데, 어찌 다시 그렇게 하는가?" 임금이 말하고는 상소문을 돌려보내지 않고 대궐 안에 그대로 두었다.
하지만 왕씨들이 연루된 모반사건이 연이어 터져 나오고 신하들의 주장이 갈수록 거세지자, 태조 3년 4월 14일 이성계는 왕씨 일족의 제거를 결정한다. 4월 14일자 실록은 《왕씨 일족을 제거하기 위해 관원들을 삼척, 강화, 거제도에 보내다》 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그 다음날인 4월 15일자 실록에는 《윤방경 등이 강화에 있던 왕씨 일족을 강화 나루에 빠뜨려 죽이다》 라는 짧은 기사만을 담고 있다. 실록에는 빠져 있지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자료를 참고하여 상세한 이야기를 모아보면 아래와 같다.
담당 관리들은 배를 마련하고 왕씨들을 불러 모았다.  "지금 임금이 글을 내려 여러분을 섬 속에 두어 일반 백성으로 만들라고 분부했으니 따라들 오시오."  왕씨들은 목숨을 살려준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기며 다투어 배에 올랐다. 미리 짜놓은 각본대로 배가 연안을 떠나 깊은 곳에 이르자 잠수부가 배 밑창을 뚫었다. 배에 탔던 사람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이보다 닷새 후인 4월20일 실록 첫번째 기사는 《손흥종 등이 거제도에 있던 왕씨 일족을 바다에 빠뜨려 죽이다》이고,  두번째 기사는 《중앙과 지방에 왕씨의 남은 일족을 찾아 모두 죽이다》여서 4월20일까지 거의 모든 왕씨는 박멸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딸:이 아름다운 곳에 그토록 무서운 이야기가 숨어 있을 줄이야..., 아빠:그래. 이렇게 한 지역에도 여러 시대의 역사적 사실이 얽혀있단다. 흥미롭지?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그토록 무서운 이야기가 숨어 있을 줄이야...
아빠 그래. 이렇게 한 지역에도 여러 시대의 역사적 사실이 얽혀있단다. 자, 다음 번에는 역사가 기록되기 이전의 아주 먼 옛날로 돌아가서 선사시대의 숨은 역사를 알아볼까?
광성보에서 아빠와 딸
최동군(글로벌사이버대학교 문화콘텐츠학부 외래교수)
사진/그림
박동현(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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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08-14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