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이 곳은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1831~1864, 재위: 1849~1864)이 왕위에 오르기 전, 열아홉살 때까지 살았던 집이란다. 조금 어려운 말로는 잠저(潛邸)라고 부르는데, 잠저란 선왕의 후사가 없어 왕위계승서열에 가까운 왕족들 중의 누군가가 새로운 임금이 될 경우, 그 사람이 임금이 되기 전까지 살던 집을 가리키는 말이야. 이 집의 대문 현판에 적힌 ‘용흥궁(龍興宮)’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용, 즉 임금이 일어난 집이란 뜻을 담고 있지.
딸 아! 강화도령으로 유명한 철종! 무지렁이 나무꾼이 갑자기 왕이 되었다죠?
아빠 누가 철종임금더러 무지렁이 나무꾼이라고 그래? 그건 완전히 잘못된 이야기야.
흔히들 철종을 강화도에서 농사짓고 나무하던 무지렁이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TV 사극이나 영화 등을 통해 그런 장면이 많이 알려지긴 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의 철종대왕 행장(行狀, 죽은 사람이 평생 살아온 일을 적은 글)을 참고해 봐도 이미 네 살 때 천자문을 배웠던 것으로 나와있고, 현재 남아있는 철종의 어필을 봐도 어려서 글공부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그런 오해가 널리 퍼지게 된걸까? 우리는 철종대왕 행장 속의 한 구절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
14세 때 집안에 어려운 일을 당하여 전가족이 교동(喬桐,교동도)으로 이사하였고, 즉시 또 강화(江華,강화도)로 이사했는데...
우선 철종이 어려운 일을 당했다고 언급되는 14세였을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자. 영조의 아들이었던 사도세자는 적자인 세손(정조) 이외에도 은언군(恩彦君,1754~1801), 은신군(恩信君,1755~1771), 은전군(恩全君,1759~1777) 이렇게 서자인 세 아들을 더 두고 있었다. 모두 정조의 이복동생들인 셈이다.
사도세자의 사후, 세손(정조)은 사도세자의 이복형인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하는 편법으로 살아남아 왕통을 계승했지만 나머지 세 아들들은 모두 출궁조치되어 궁핍한 생활을 했다. 그 중 은언군과 은신군은 시전 상인들로부터 수백 냥의 빚까지 지게 되었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영조는 두 사람을 제주도로 귀양을 보냈다. 은신군은 그 곳에서 풍토병을 앓다가 열여섯 살의 어린 나이에 사망하고, 은언군만 살아남았다.
한편 가장 어린 은전군은 정조 즉위년(1777)에 발생한 경희궁 존현각 정조살해미수사건에 휘말려 만 열여덟 살의 나이에 사사되었다. 정조 즉위 후 홍인한, 정후겸 등 사도세자를 제거하는 데 앞장섰던 노론세력이 왕을 암살하고 은전군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시도를 했던 것이다. 정조는 노론세력의 일방적인 계획에 이용 당한 은전군을 보호하려 했지만, ‘국왕암살미수’라는 전대미문의 사태에 대한 삼사와 대신, 종친들의 압박에 결국 사약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살아남은 은언군은 제주도에서의 유배가 풀린 후 한양으로 돌아와 여러 관직에 기용되었다. 하지만 또 한번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데, 그 사건인즉슨 당시 정조의 오른팔이었던 홍국영이 자신의 누이(원빈 홍씨)를 정조의 후궁으로 들였으나 원빈이 1년 만에 죽자, 은언군의 장남인 완풍군 (후에 상계군(常溪君)으로 개칭)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 세자로 책봉하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홍국영이 죽고 나서도 그의 잔당들은 그 계획을 역모 수준으로 추진했는데, 이 과정이 밝혀지며 은언군 역시 죽을 누명을 뒤집어 쓰게 되었다. 이 때 정조는 은언군을 아끼는 마음에 대신들의 요구를 뿌리치고 강화도에 유배시키는 선에서 마무리를 지었다.
은언군은 정조가 살아있는 동안 보살핌을 받으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조가 죽자 상황은 전혀 달라지게 된다. 순조 1년 신유박해 때 은언군의 부인과 며느리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순교하고, 이를 이유로 은언군 역시 노론으로부터 집중적인 탄핵을 받고 사사되었다. 이때 은언군에게는 상계군(常溪君) 이외에도 풍계군(豊계君)과 전계군(全溪君)을 남겼는데 전계군의 3남중 막내가 바로 훗날 철종이 되는 원범이다.
딸:그럼 은언군의 강화도 유배시절부터 그 자손들이 강화도에 살았던 것 아닌가요? 14세에 철종이 강화도로 왔다는 건 무슨 말이죠?, 아빠:철종의 고향은 강화도가 아닌 한양이었단다.
딸 은언군의 강화도 유배시절부터 그 자손들이 강화도에 살았던 것 아닌가요? 아까 14세에 철종이 강화도로 이사 왔다고 했는데, 그건 무슨 말이죠?
아빠 철종의 고향은 한양이란다. 순조가 은언군의 자녀들을 위해 특별히 신경을 썼거든.
정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순조는 생전에 이복동생인 은언군을 살리려고 노력했던 아버지 정조의 유지를 받들어 은언군의 자녀들을 석방시키려고 무척 노력했다. 1817년에는 강화도에 은언군 아들들인 풍계군과 전계군의 집을 지어주고, 1822년에는 유배형의 등급을 조정해 원래 집 주위에 가시울타리를 치는 ‘위리안치형’에서 감형해 울타리를 거두고 혼인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노론 대신들이 반발했지만 순조는 유배를 풀어준 것은 아니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다며 묵살했다. 이어 1830년에는 은언군의 자손들을 강화도에서 방면했는데, 철종이 1831년 한양에서 출생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철종이 다시 강화도로 돌아가게 된 계기는 ‘민진용의 옥’이었다. 철종의 아버지 전계군은 장남 원경, 차남 경응, 삼남 원범(철종) 이렇게 세 아들을 두고 있었는데, 1841년 전계군의 사망 이후 탈상하는 과정에서 안동 김씨의 최고권력자들이 잇달아 사망하며 권력의 누수 현상이 생기자, 민진용이 전계군의 장남인 이원경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모반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이에 연루된 원경은 사사되었고, 이 일로 전계군 일가는 1844년 교동도(喬桐)로 유배되었다가 곧 강화도로 옮겨가게 되었다. 당시 철종의 나이 열 네살, 그 전까지 그는 한양에서 왕족의 일원으로 기본적인 교육을 받았는데, 이것이 철종이 처음부터 농사꾼이나 나무꾼 무지렁이였다는 주장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는 근거이다.
딸 그렇다면 강화도령이라는 말이 생겨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아빠 그를 비하하려고 붙인 별명이었던 거지!
철종은 1844년부터 왕위에 오르기 전 1849년까지 유배지인 강화도에서 생계를 위해 농사를 짓고 나무를 하는 빈궁한 생활을 해야만 했다. 게다가 서자 출신이었던 탓에 사대부들은 그를 강화도령이라 부르며 조롱을 했는데, 그것이 별명으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사대부 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까지도 서자, 서출, 강화도령이라며 그를 비하하는 발언을 일삼았는데, 이는 안동김씨 일족에 의한 세도정치의 여파로 국왕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지금 남아있는 용흥궁은 원래의 모습이 아니다. 철종이 살았을 때는 일반적인 작은 초가집이었다. 하지만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임금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강화유수 정기세가 건물을 새로 짓고 용흥궁이라 부른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용흥궁은 실제 사람이 살았던 살림집이 아니라 전시용 모델하우스로 보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 살림집이 아니라는 증거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우선 이 집의 배치를 보면, 집의 대문을 들어섰을 때 안채가 먼저 나오고 뒤에 사랑채가 나오는 구조를 보이고 있다. 기본적인 집 구조는 사랑채를 거쳐 안채로 들어가는 것이 정상이다. 한옥에서 외부인들이 안채를 먼저 들르도록 하는 곳은 없다.
또한 대문에서 안채가 바로 들여다 보이는데, 시선을 차단하기 위해서 담을 쌓기는 했지만 턱없이 낮아 안채가 고스란히 노출되고 있다. 우리 선조들은 내외벽을 설치해가면서까지 안채를 노출시키려고 하지 않는데, 용흥궁은 살림집이 아닌 전시용 집이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과감한 구조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안채의 마당이 너무 좁아 살림에 꼭 필요한 장독대가 있을 공간도 없을 정도다. 이동의 편의를 위한 툇마루도 거의 보이지 않고, 안채의 불발기창도 너무 커서 만약 방안에 사람이 살고 있을 경우 외부에 신경이 쓰여 불안감을 느낄 수 있다.
딸 그런데 많고 많은 왕족들 중에서 왜 하필 강화도령 철종이 왕이 되었나요?
철종의 왕위 계승은 왕실의 법도에서 보면 결코 정상적이지 않다. 철종의 선왕이었던 헌종은 정조의 증손자이고 철종은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의 손자이므로 선왕이었던 헌종의 7촌 아저씨 뻘이다. 유교(성리학)를 국시로 하는 조선에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제사(종묘 제례)를 드릴 수는 없다. 조선에서는 손윗사람이 손아랫사람의 왕통을 계승한 사례는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강제로 찬탈한 세조가 유일하다. 이런 원칙은 심지어 중종반정과 인조반정의 경우에서도 지켜졌는데,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철종의 왕위 계승에서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는 안동김씨 일족의 세도정치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는 거침이 없었다. 정권 유지에 걸림돌이 되는 세력은 가차없이 제거했다. 이들이 반대파를 제거하는 대표적인 명분으로는 역적모의를 꼽을 수 있는데, 이 역모에는 반드시 왕족을 포함시켜 그럴듯하게 포장했다. 그러다보니 죄없는 왕족들이 연루되어 죽어나갔는데, 헌종의 사후에는 원범(철종)을 제외하면 제대로 된 왕족이 남아있지 않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권력자들의 감시망을 벗어나기 위해 저잣거리에서 시정잡배들과 어울리고, ‘상가집의 개’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의 행세를 했겠는가.
딸 그렇다면 철종은 왕이 되고 나서도 아무것도 할 수 있는게 없었겠네요?
사실 그랬다. 철종은 무늬만 왕이었고 실권은 모두 안동김씨 일족이 쥐고 있었다. 민간에 전승되는 어느 이야기에 따르면, 안동김씨 세도가에 뇌물을 주고 변방인 북청의 수령직을 얻게 된 바보 북청 물장수가 있었다고 한다. 임명장을 받기 위해 한양에 온 그는 우연히 철종을 만나게 되었는데, 임금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 앞에서 자신이 군수직에 임명되었음을 자랑하였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이 물장수가 철종에게 “임금님 나으리, 내가 바로 북청군수로 부임하는 사람이외다” 라고 말을 놓았다고도 한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철종은 백성들의 어려운 생활을 헤아려 지배계층에 의한 삼정의 문란을 개선하는 개혁 조치를 발표하고,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지적하는 등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펼치려 했다. 하지만 이 역시 안동김씨 일족에 의해 좌절되고, 세도정치 속에서 자신의 뜻을 마음대로 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철종은 이후 주색을 가까이 하다 건강 악화로 서른 셋이라는 젊은 나이에 후사없이 세상을 떠나고 만다.
딸 철종의 숨은 이야기를 들으니 참 우울해지네요.
아빠 그러면 다음 코스로 시원한 풍광을 자랑하는 광성보에 가서 기분전환 좀 할까?
- 글
- 최동군(글로벌사이버대학교 문화콘텐츠학부 외래교수)
- 사진/그림
- 박동현(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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