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역사

경희궁에 숨어있는 정조 암살 계획

경희궁에 숨어있는 정조 암살 계획
경희궁
경희궁 찾아 가는 길, 1. 광화문역 7번 출구에서 서울역사 박물관 방향으로 직진한다., 2. 서울역사 박물관을 지나 뒷 쪽 경희궁으로 걸어간다., 3. 흥화문이 보이면 경희궁 도착
딸:영화 [역린]에 나온 것처럼 실제 정조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거예요?, 아빠:물론 실제 있었던 일이야! 하지만 영화에서는 암살 시도라는 소재만 살리고, 작가가 많은 부분을 지어냈지. 다믿으면 안돼~
지난번에 아빠랑 함께 본 역린(逆鱗)이라는 영화 있잖아요? 영화에 나왔던 것처럼 정조 임금을 암살하려던 시도가 실제 있었던 이야기인가요?
아빠 그럼, 정조임금 암살시도는 실제 있었던 일이야. 하지만 그 영화는 암살시도라는 소재만을 살렸을 뿐이고 영화 속의 많은 부분은 시나리오 작가의 창작물이야.
영화 《역린》에서는 1777년 7월 28일 경희궁 존현각 주변에서 암살범들과 궁궐의 금군들이 일대 격전을 벌인다. 그리고 절정으로 치닫는 장면에서는 정조와 암살범이 직접 대결을 펼친다. 결국 암살범은 죽고, 모든 사건은 바로 그 당일 마무리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하지만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정조실록에 실려있는 기사를 토대로 역사적인 사실을 요약하자면, 1777년 7월 28일 정조가 거처하던 경희궁 존현각 지붕 위에서 누군가가 발각됐다. 하지만 도주하여 한동안 범인을 잡지 못했고, 그로부터 12일 후인 8월 11일에 다시 침범한 범인을 잡게 되면서 암살 계획과 관련된 모든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럼 다시, 7월28일 당시의 정조실록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자.
* 궁궐내에 도둑이 들어 사방을 수색하게 하다
대내(大內)에 도둑이 들었다. 임금이 어느 날이나 파조(罷朝)하고 나면 밤중이 되도록 글을 보는 것이 상례이었는데, 이날 밤에도 존현각(尊賢閣)에 나아가 촛불을 켜고서 책을 펼쳐 놓았고, 곁에 내시 한 사람이 있다가 명을 받고 호위하는 군사들이 직숙(直宿)하는 것을 보러 가서 좌우가 텅비어 아무도 없었는데, 갑자기 들리는 발자국 소리가 보장문(寶章門) 동북쪽에서 회랑 위를 따라 은은하게 울려왔고, 어좌의 중류(집의 가운데)쯤에 와서는 기와 조각을 던지고 모래를 던지어 쟁그랑거리는 소리를 어떻게 형용할 수 없었다. 임금이 한참 동안 고요히 들어보며 도둑이 들어 시험해 보고 있는가를 살피고서, 친히 환시(宦侍)와 액례(掖隷)들을 불러 횃불을 들고 중류 위를 수색하도록 했었는데, 기와 쪽과 자갈, 모래와 흙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고 마치 사람이 차다가 밟다가 한 것처럼 되어 있었으니 도둑질하려 한 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 (중략) ...  이때에 홍국영이 금위 대장을 맡고 있었고 사세가 또한 다급하므로, 신전(信箭,신호용 화살)을 쏘도록 하여 연화문에서 숙위하는 군사를 거느리고서, 삼영(三營)의 천경군(踐更軍)으로는 담장 안팎을 수비하게 하고 무예 별감(武藝別監)을 합문(閤門)의 파수(把守)로 세우고 금중(禁中)을 두루 수색하였으나, 시간이 밤이라 어둡고 풀이 무성하여 사방으로 수색해 보았지만 마침내 있지 않았다.
- 정조 4권, 1년(1777) 7월 28일(신묘) 1번째기사
존현각 지붕에까지 숨어든 범인을 잡지 못하자 안위를 걱정한 정조는 8월 6일 경희궁에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다. 그리고 그로부터 5일 후인 8월 11일, 범인은 다시 창덕궁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때의 상황을 정조실록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 이찬(은전군)을 추대하여 반정을 꾀하려던 일당을 복주시키다
제적(諸賊)들이 복주(伏誅:베어 죽임)되었다.  지난달에 존현각(尊賢閣)에서 적변이 생긴 이후에 여러 차례 신칙하여 기찰(譏察)하도록 했었으나 오래도록 잡아내지 못했다. 이날 밤에 경추문(景秋門, 창덕궁 서문) 수포군(守鋪軍) 김춘득, 김세징 등이 서로 어울리어 몸을 포개고 누웠는데, 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2, 3차례 수포군을 부르자 김세징이 응하려고 했다. 김춘득은 이때에 나이가 17세 였는데, 시급히 제지하기를, “부르는 음성이 이상스러우니 아직은 응하지 말고 다만 동정(動靜)을 살펴보자.” 하였다. 조금 있다가 어느 사람이 곧장 경추문 북쪽 담장을 향해 가며 장차 몰래 넘어 가려고 하므로, 김춘득 등이 이웃의 수포군 김춘삼, 이복재 두 사람을 툭툭 차서 일으키어 함께 추격하여 잡았는데, 병조를 경유하여 포도청으로 보냈고, 포도청에서 그 정절을 힐문해 보니 원동(院洞) 임장(任掌)인 전유기(田有起)로 이름을 흥문(興文)이라고 고쳐버린 자였다. 대개 전흥문은 강용휘와 함께 존현각 중류 위에 몰래 들어가 칭란(稱亂)하려고 도모하다가 실현하지 못했었는데, 이번에 또 재차 거사하려다가 마침내 수포군(守鋪軍)에게 잡히게 된 것이다. (후략)…
- 정조 4권, 1년(1777) 8월 11일(갑진) 1번째 기사
[경희궁 존현각]거기 누구냐?!, 에잇, 실패다!, [창덕궁] 임금이 창덕궁에 있단 말이지? 이번엔 기필코 성공할테다!
그런데 왜 정조임금을 암살하려고 했죠?
아빠 영화에도 나왔지만 그게 모두 다 사도세자 때문에 일어난 일이야.
영조는 자신의 출생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영조의 아버지인 숙종은 적자는 없고 서자만 둘이 있었는데 경종이 첫째였고, 연잉군(훗날 영조)이 둘째였다. 경종은 비록 서자출신이지만 친모가 한때는 중전자리에도 앉았던 장희빈이어서 출신성분에 대한 열등감이 비교적 덜했다. 하지만 연잉군(영조)은 같은 서자출신이면서도 친모인 숙빈 최씨가 천한 출신(속설에는 궁중에서 일하는 여자종인 무수리였다고 한다)이었기에 콤플렉스가 대단했다. 궁중구전 이야기에 따르면, 영조가 첫 번째 부인이었던 정성왕후와 혼인하던 날, 신방에서 정성왕후의 손을 잡고 "손이 참 곱소" 라고 말했다고 한다. 정성왕후는 "귀하게 자라서 그렇다"고 답했고, 영조는 그 말에 자신의 친모인 숙빈 최씨의 천한 신분이 떠올라 자격지심 때문에 정성왕후에 대한 애정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정성왕후와의 사이에서는 적자인 왕자가 태어나지 못했고, 후궁 사이에서만 서자 출신인 ‘효장세자’와 ‘사도세자’를 얻었다. 원래 세자에는 효장세자가 먼저 책봉되었으나 10살의 나이로 요절하는 바람에 사도세자가 왕세자의 지위를 계승했다.
영조는 적자 출신 신하들에 대한 자신의 신분 콤플렉스를 만회하고자 했다. 조선의 국왕 중 경연(經筵, 임금이 신하들과 더불어 학문을 강론, 연마하면서 국정을 협의하던 일)을 가장 많이 한 왕으로 조선 전기에는 세종, 조선 후기에는 영조를 대표적으로 꼽을 만큼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아들 사도세자 역시 엄격하게 훈육했다. 세자가 조금만 허점을 보여도 적자 출신의 신하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자의 출신 성분을 들먹거릴 것이라는 일종의 강박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영특했던 영조와 달리 사도세자는 그 엄격한 훈육 과정을 감당해 내지 못했고, 그 때마다 영조의 불호령에 어찌할 줄 몰랐다.
이런 상황에서 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의 미움을 살 만한 일들도 했을 것이다. 사도세자를 모시던 내관들은 거의 모두 영조(노론의 지지를 받음)의 선왕이었던 경종(남인과 소론의 지지를 받음)을 모시던 내관들이었는데, 그들에게 ‘경종의 독살설’에 대해 듣고 영조에게 부지불식간 그 일을 언급했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 잠깐]경종 독살설

1724년 경종이 갑자기 사망했다. 특별한 병세가 없다가 왕세제인 연잉군이 보낸 게장과 생감을 먹고는 고통을 호소하면서 죽어갔는데, 소론 일부는 영조가 경종을 독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청주성을 중심으로 벌어진 이인좌의 난 당시에 반란군은 경종의 위패를 진중에 모시고 매일 곡을 하면서 영조의 경종독살설을 보다 구체화시켰다. 또한 소론강경파 김일경도 영조로부터 친국을 받을 때에 “시원하게 나를 죽이라”고 맞섰고, <영조실록>의 사관이 “김일경은 공초(供招)를 바칠 때 말마다 반드시 선왕의 충신이라 하고 반드시 ‘나’(吾)라고 했으며 ‘저’(矣身)라고 하지 않았다”(<영조실록> 즉위년 12월8일)라고 부기할 정도로 영조를 부인했다. 그만큼 경종 독살설은 널리 퍼졌고 당시 백성들에게도 통용될 정도로 설득력을 얻었는데, 신치운(申致雲)은 영조가 자신을 친국할 때 '신은 갑진년(경종이 사망하고 영조가 즉위한 1724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습니다'라며 경종 독살설을 비꼬아서 대답했고 이 이야기를 들은 영조가 분통하여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고 한다.
아울러 사도세자는 제왕수업을 받던 대리청정 기간 동안 세금을 감면하는 등 가난한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많이 베풀었다. 가난한 백성들이야 좋아할 일이었지만, 권력층인 양반들 특히 집권층인 노론에게는 자신의 돈줄을 잘라버리는 일이었다. 그래서 당시 노론 측 신하들은 사도세자를 정적으로 몰아 집중 공격했고, 사도세자는 조울증 등에 시달리다 결국 심한 정신병에 빠져들었다. 결국 주변의 사람들을 함부로 죽이는 등 비정상적인 행위를 보이다가 영조까지도 죽이겠다는 뜻을 내비쳐 역적의 혐의를 받고 뒤주에 갇혀 죽는 비운을 맞았다.
불쌍한 사도세자... 엄격한 제왕수업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또 백성들을 위하려다 양반들로부터 공격받고… 그런데 역린 영화의 첫 장면에서도 나왔지만,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본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라고 하잖아요. 누구나 다 아는 그 사실을 굳이 왜 말한 걸까요?
정조:본인은 사도세장의 아들이다., 딸:영화에서도 나왔지만, 실제 즉위식에서도 저말을 했다던데, 무슨 의미가 숨어있는 거예요?
원래 유교국가의 국법에는 죄인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 사도세자가 역적의 혐의로 죽었기 때문에 사도세자의 아들인 이산(어린 정조) 역시 원칙적으로는 죄인의 아들이라 왕이 될 수 없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왕위계승의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조선왕실은 세손을 사도세자의 이복형이었으나 어린 나이에 요절한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키는 편법을 썼다. 결국 정조는 효장세자의 아들로 즉위한 것이지 사도세자의 아들로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위 후 정조의 첫 외침은 "나는 효장세자의 계승이 아니라 세도세자의 계승이다"라는 말이었다. 아마 그 말을 들은 노론 신하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정조의 그 외침이 "내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게 한 자들을 응징하리라"라는 의미로 들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노론 중에서도 사도세자의 죽음에 깊이 관여한 인물들은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 그 전에 자신들이 먼저 정조를 제거하려 했다. 이것이 정조 암살 미수사건의 배경인 것이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원래 암살계획은 정조의 외할아버지의 이복동생인 홍인한과 함께 노론 벽파의 대표격이었던 홍계희의 집안에서 추진했다. 홍계희는 사도세자의 행적을 영조에게 과장되게 고하여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갔던 인물이었다. 정조가 즉위할 때 홍계희는 이미 죽었지만 그 가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 즉위한 것을 불안하게 여길 수 밖에 없었고, 홍계희의 아들 홍지해도 홍인한, 정의겸 등과 함께 정조의 등극을 반대하다가 유배되었다. 이에 홍계희의 손자 홍상범은 궁중에 암살단을 난입시켜 정조를 살해하려다 발각된 것이다.
그런데 경희궁에는 건물이 몇 개 없어요. 암살 시도를 했던 그 존현각은 어디예요?
아빠 그게… 현재 이 경희궁에서는 볼 수 없단다.
딸:그런데 암살 시도를 했던 존현각은 어디에요?, 아빠:이 경희궁에서는 볼 수 없단다. 일제 강점기에 헐어버렸는데 아직 복원이 안됐어
일제 강점기에 완전히 훼철된 경희궁은 현재 복원된 부분이 10%도 채 되지 않는다. 남아있는 건물이라야 한 손에 꼽을 정도인데, 원래 제 위치도 아닌 곳에 있는 정문인 ‘흥화문’과 그 뒤쪽에 ‘숭정문’, ‘숭정전’이 있고, 다시 뒤쪽으로 편전인 ‘자정전’이 있어서 숭정전과 함께 정치하는 공간인 치조영역을 이루고 있다. 존현각도 복원되지 않아 실물로는 확인할 수 없지만 경희궁의 옛모습을 그린 서궐도안(보물 제1534호, 모사본을 국립고궁박물관과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중)에서 찾아보면 숭정문의 동쪽에 있는 보조편전인 흥정당의 앞쪽 2중 건물의 가장 끝 출입문 옆에 존현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경희궁의 각 건물의 위치도
그런데 존현각은 방의 앞쪽으로는 문이나 행각 또는 담장이 없어서 외부에 쉽게 노출된 구조다.  왜 이렇게 방비가 허술한 곳을 정조는 숙소로 사용했을까?
지금은 입장권만 있으면 누구나 궁궐에 들어갈 수 있고 궁궐 내부의 자세한 배치도를 볼 수 있었지만, 조선시대의 궁궐은 글자 그대로 ‘구중궁궐’이었다. 궁궐 속 관청(궐내각사)에 소속된 관리라하더라도 ’부신(符信)’이라는 통행증이 허락하는 범위까지만 출입할 수 있었고, 궁궐의 배치도 또한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동궐도(국보 제249호)나 서궐도안(보물 제1534호)는 당시로서는 그 존재 자체가 극비사항이었다. 궁궐의 배치도가 외부로 새어나가면 국왕의 안위가 직접적으로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동궐도나 서궐도안의 존재는 조선왕조실록을 포함하여 모든 조선의 기록물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극비사항이었다.
그래서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의 승지들은 자신이 승지로 임명되던 날로부터 약 보름 동안은 퇴궐하지 못하고 궁궐 내에서 생활하며 궐내의 모든 전각의 위치를 파악해야 했다. 그래야만 어명을 제대로 처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국왕의 침전(대전) 건물이 있었지만, 실제 국왕이 잠을 자는 곳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수시로 바뀌었고 그 사실은 가장 측근의 내관들 정도만이 알 수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정조의 암살범들은 어떻게 정조가 존현각에 있는 것을 알았으며 부신(출입증)없이 존현각까지 접근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이미 노론이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고 내시부 등으로부터 암묵적인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길 안내는 ‘월혜’라는 나인이 맡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궁중 나인들은 궐내에서 생활하며 비상통로나 샛길 등을 잘 알았다.
임금이라도 생명의 위협을 받을 정도니, 참으로 정치란 무서운 것이군요!
아빠 그래서 공자님이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도 무섭다(苛政猛於虎)》 라는 유명한 말씀을 남겼지.
[여기서 잠깐]가정맹어호 (苛政猛於虎)

가정맹우호(苛政猛于虎) 라고도 하는데 《예기(禮記)》의 《단궁하편(檀弓下篇)》에 나오는 “가정맹어호야(苛政猛於虎也)”에서 유래되었다. 여기서 가정이란 가혹한 정치를 말하고, 이로 인하여 백성들에게 미치는 해는 호랑이의 해(害)보다 더 크다는 것이다. 공자가 노나라의 정치적 혼란 상태에 환멸을 느끼고 제나라로 가던 중, 허술한 세 개의 무덤 앞에서 슬피 우는 여인을 만났다. 제자들을 보내 사연을 물은 즉, 시아버지, 남편, 아들을 모두 호랑이가 잡아먹었다는 것이었다. 이에 공자가 '그렇다면 이 곳을 떠나서 사는 것이 어떠냐'고 묻자 그 여인은 '그렇지만 이곳에는 가렴주구(苛斂誅求,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고 백성을 들볶는 정치 또는 관리) 는 없습니다. 그래서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경희궁 흥화문
최동군(글로벌사이버대학교 문화콘텐츠학부 외래교수)
사진/그림
박동현(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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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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