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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있는 역사

경복궁에 숨어있는 정도전의 야심

경복궁에 숨어있는 정도전의 야심
경복궁
경복궁 가는 길 , 1.경복궁역 5번출구에서 바로 연결되어 있는 경복궁 도착!, 1.광화문역 2번 출구에서 광화문 방향으로 직진한다., 2.횡단보도를 건너 경복궁 도착!
딸:경복궁은 널리 알려진 곳인데 여기에도 우리가 잘 모르는 숨은 역사가 있나요?, 아빠:당연하지. 우선 경복궁은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의 야심이 그대로 녹아있는 곳이야.
이곳 경복궁처럼 널리 알려진 곳에도 우리가 잘 모르는 숨어있는 역사가 있나요?
아빠 당연하지. 특히 경복궁은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도전의 야심이 그대로 녹아있는 곳이야.
정도전은 조선 개국에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으로, 태조 이성계의 정신적인 멘토였으며 실제 조선건국의 틀을 다졌다. 그는 조선의 건국 시점에서 고려의 잔존세력이 남아있는 개경이 새로운 왕조 정착에 걸림돌이 될 것으로 판단하여 새로운 도읍지로 한양을 정하고, 구체적인 한양의 도시 설계까지 직접 담당했다. 좌묘우사 원칙에 따라 궁궐의 좌측(동쪽)에 종묘를, 우측(서쪽)에 사직단을 설치했고, 궁궐의 위치를 잡을 때도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여 궁궐을 동향시켜야 한다는 무학대사와의 논쟁에서 이긴 뒤 지금처럼 백악산(북악산)을 주산으로 하여 경복궁을 남향시켰다. 뿐만 아니라 한성부 내의 각 궁궐과 그 안의 주요 전각, 문의 이름까지도 직접 지었기 때문에 한양이 정도전의 작품이라는 의견이 과언이 아니다.
*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에게 새 궁궐 전각의 이름을 짓게 하다
판삼사사 정도전에게 분부하여 새 궁궐의 여러 전각의 이름을 짓게 하니, 정도전이 이름을 짓고 아울러 이름 지은 의의를 써서 올렸다. 새 궁궐을 경복궁(景福宮)이라 하고, 연침(燕寢)을 강녕전(康寧殿)이라 하고, 동쪽에 있는 소침(小寢)을 연생전(延生殿)이라 하고, 서쪽에 있는 소침(小寢)을 경성전(慶成殿)이라 하고, 연침(燕寢)의 남쪽을 사정전(思政殿)이라 하고, 또 그 남쪽을 근정전(勤政殿)이라 하고, 동루(東樓)를 융문루(隆文樓)라 하고, 서루(西樓)를 융무루(隆武樓)라 하고, 전문(殿門)을 근정문(勤政門)이라 하며, 남쪽에 있는 문[午門]을 정문(正門)이라 하였다. (후략)
- 태조 8권, 4년(1395년) 10월 7일(정유) 2번째 기사
아빠 경복궁이라는 궁궐의 이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우리 앞에 있는 이 근정문의 이름까지도 정도전이 지었단다. 우리는 이 근정문이라는 이름에서 정도전이 품고 있던 숨은 생각을 읽어낼 수 있어.
정도전의 숨은 생각이라뇨?
정도전이 꿈꾼 조선은 한마디로 ‘재상의 나라’였다. 왕조국가에서 임금이 세습되는 직책인 이상 아무리 세자를 잘 교육시켜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훌륭한 재상을 필요하다는 것이다. 재상에게 정치 실권을 부여하면 위로는 임금을 받들어 올바르게 인도하고, 아래로는 신하들을 통괄하고 백성들을 잘 다스려 튼튼한 국가를 경영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정치 체제는 임금은 상징적인 존재가 되고 사실상 나라의 모든 일은 재상이 이끄는 신하들이 결정하는, 오늘날의 정치 체제에서 ‘대통령제’가 아닌 ‘의원내각제’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정도전의 생각을 우리가 엿볼 수 있는 것이 바로 경복궁 전각의 이름이다. 정도전은 법궁(法宮)인 경복궁의 정전(正殿)이름을 근정전(勤政殿), 편전(便殿)이름을 사정전(思政殿)으로 지었다. 이는 이궁(離宮)인 창덕궁의 정전(正殿)이름이 인정전(仁政殿), 편전(便殿)이름이 선정전(宣政殿)인 것과 비교해 보면 그 숨은 의미를 알 수 있다.
제2의 궁궐인 창덕궁 주요전각의 뜻은 ‘임금이 어진 정치를 해라(인정전)’, ‘(어진) 정치를 베풀어라(선정전)’와 같이 임금이 주도하는 정치의 뜻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조선 제1의 궁궐인 경복궁 주요전각의 뜻은 ‘임금이 정치를 부지런히 해라(근정전)’, ‘백성을 생각하며 정치를 해라(사정전)’ 즉, 임금이 신하들로부터 정치를 제대로 배워가면서 정치를 하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심지어 정도전이 태조실록에서 밝힌 바로는 "근정전(勤政殿)과 근정문(勤政門)에 대하여 말하오면,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못하면 폐하게 됨은 필연한 이치입니다." 라든가 "임금의 부지런하지 않을 수 없음이 이러하니, 편안히 쉬기를 오래 하면 교만하고 안일한 마음이 쉽게 생기게 됩니다." 하며 임금이 나태함을 삼가하도록 가르치려는 의도를 직접 드러내고 있다.
정도전:왕이 이곳에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고,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로 근정전, 근정문이라 이름을 지었다네.
[여기서 잠깐]정도전의 성격을 알 수 있는 아내의 편지

급진적이면서도 모난 성격의 소유자인 정도전은 정적들이 많아 유배시절에는 온갖 비방에 시달렸다. 특히 아내가 쓴 원망의 편지에 대한 정도전의 답장을 보면 그 성격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아내의 편지
당신은 평소 부지런히 독서에만 몰두하여 아침에 밥이 끓든 죽이 끓든 간섭하지 않아 집안에는 한 섬의 쌀도 없었습니다. 방에 가득한 아이들은 끼니 때마다 배고프다고 울고 날이 찰 때는 춥다고 울부짖었습니다. 제가 살림을 맡아 그때그때 수단을 내어 꾸려가면서도 당신이 열심히 공부하시니 언젠가는 입신양명하여 집안의 영광을 가져오리라고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영광은 커녕 국법에 저촉되어 이름을 더럽히고 몸은 남쪽 변방에 귀양 가서 가문이 망하였습니다. 이에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현인, 군자의 삶이란 진실로 이런 것입니까?

정도전의 답장
당신의 말이 모두 맞소. 예전의 내 친구들은 형제들보다 정이 더 깊었는데 내가 이 지경이 되자 뜬구름처럼 흩어졌소. 이는 그들이 원래 세(勢)로써 맺어졌지 은(恩)으로 맺어지지 않은 까닭이기에 나는 원망하지도 않소. 하지만 부부는 한번 맺어지면 죽을 때까지 고칠 수 없는 것이니 당신이 나를 질책하는 것은 나를 사랑해서이지 미워해서는 아닐 것으로 나는 믿소. 또 아내가 남편을 섬기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과 같으니 당신이 집을 근심하고 내가 나라를 걱정하는 것이 무엇이 다르겠소? 나는 오직 나의 뜻에 충실할 뿐이오. 성패와 영욕과 득실은 하늘이 정하는 것이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오. 내가 무엇을 근심하겠소?
그렇다면 정도전이 꿈꾸던 나라는 실현되었나요?
아빠 그는 자신이 꿈꾸던 나라를 끝내 생전에 보지 못했다고나 할까?
신권의 우위를 내세우던 정도전은 왕권의 우위를 내세우던 이방원과 정면충돌했다. 이 사건이 바로 ‘제 1차 왕자의 난’이다.  비록 이 사건으로 정도전은 죽임을 당하고, 정권을 잡은 이방원이 결국 제3대 태종에 즉위하게 됨으로써 정도전이 꿈꾸던 ‘재상의 나라’는 완전히 잊혀지는 듯 했다.
하지만 세종의 뛰어난 영도력으로 세종과 문종시대를 거치면서 ‘왕권’과 ‘신권’은 균형잡힌 조화를 이루었다가 어린 단종이 즉위하면서 김종서, 황보인 등에 의해 ‘의정부서사제(최고관부인 의정부가 3정승의 합의에 의해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라는 형태로 신권 우위의 정치형태가 다시 부활한다. 그 후 왕권의 우위를 다시 내세웠던 수양대군에 의해 단종이 폐위되는 계유정란이 일어나고, 그렇게 역사의 흐름 속에서 왕권과 신권의 힘이 돌고 도는 순환구조를 보인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조선은 왕권보다는 신권이 약간 더 우세한 국가로 평가되고 있다. 따라서 정도전의 꿈은 미약하나마 그 명맥을 유지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잠깐]정도전의 명예 회복

정도전의 죽음 이후, 그의 업적은 의도적으로 폄하되었다. 특히 태종 이방원은 그를 폄하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정도전의 라이벌이었던 정몽주를 충절의 상징으로 성역화한 반면, 정도전은 오히려 두 왕조를 섬긴 변절자 또는 단지 처세에 능한 모사가로 치부하였다. 이런 경향은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지속되었는데, 고종 2년인 1865년에 와서야 다시 개국공신 칭호를 돌려받을 수 있었다. 그해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조선 개국 당시 경복궁 및 한양 전반의 실질적인 설계자인 정도전의 공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딸:국가의 가장 경사스런 의식 중에 하나니까, 당연히 가장 큰 전각인 ‘근정전’ 에서 했겠죠?, 아빠:글쎄, 왕의 즉위식이 과연 경사로 볼 수 있을까?
아빠 내가 간단한 퀴즈를 하나 낼게. 경복궁에서 임금이 즉위식을 한다면 어디서 했을까?
그건 너무 쉬운 문제 아닌가요? 국가의 가장 경사스런 의식 중에 하나니까, 당연히 가장 큰 전각인 ‘근정전’ 에서 했겠죠?
아빠 글쎄, 왕의 즉위식이 과연 경사로 볼 수 있을까?
조선시대 왕의 즉위식을 원칙에 의거하여 당시 국법대로 한다면, 근정전이 아닌 근정문에서 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우선, 건국 초기의 각 부문별 예법을 집대성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흥미롭게도 왕의 즉위식은 경사스런 예식인 ‘가례’편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국장을 다루는 ‘흉례’편에 속해있다.
오례(五禮) 란 유교의 예법 가운데서도 왕실을 중심으로 한 조선의 다섯 가지 기본 예법을 말하며, 그 내용을 기록한 국조오례의의 세부적인 구성을 살펴보면 예종별(禮種別) 로 다음과 같다.
(1) 길례(吉禮)는 사직, 종묘 등 국가에서 제사 드리는 의식을
(2) 가례(嘉禮)는 중국에 대한 사대례(事大禮)와 더불어 명절, 조하(朝賀), 납비(納妃), 책비(冊妃), 세자, 왕녀, 종친, 혼례 등에 관한 의식 등 궁중의 가례절차와 의식을
(3) 빈례(賓禮)는 중국을 포함하여 일본, 유구 등의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의식을
(4) 군례(軍禮)는 친사(親射), 열병(閱兵), 강무(講武), 출정식 에 관한 군사의식 절차를
(5) 그리고 흉례(凶禮)는 국장의식의 모든 절차를 중심으로 기재되어 있다.
일반적이면서도 정상적인 상황에서 ‘왕의 즉위식’이 이루어지려면 몇 가지 조건이 성립해야 한다. 먼저 선왕이 승하해야 한다. 국장기간 동안 승하하신 선왕을 가리킬 때는 ‘대행왕(大行王)’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대행왕의 뒤를 이을 새 왕이 즉위하기 전까지는 왕세자를 ‘사왕(嗣王)’이라 하여 ‘후사를 잇는 왕’으로 칭한다.
흉례(凶禮)에 따르면 대행왕이 승하하신 후 5일째 되는 날, 사왕은 국상이 발생한 후 처음으로 상복을 입는 ‘성복(成服)례’가 끝나자마자 왕위를 계승하는 ‘사위(嗣位)’의식을 치르고 즉위사실을 교서를 통해 반포한다. 이때 사위(嗣位) 의식을 치르는 장소가 바로 근정문(경복궁이 소실된 임진왜란 이후에는 인정문)이다.
그런데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근정전에서 즉위식을 치른 왕도 있고, 근정문에서 즉위한 왕도 있다. 그 이유는 정상적으로 선왕이 승하하면서 즉위한 왕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즉위한 왕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태-정-태-세-문-단-세’로 이어지는 조선 전기에 근정문에서 즉위한 왕은 단종 단 한 명 뿐이다. 왜 그럴까?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한 왕이므로 즉위 당시에는 경복궁이 아직 건립되지 않았다. 따라서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의 ‘수창궁’에서 즉위를 했고, 정종이나 태종은 태조가 상왕으로 물러나 있던 상황에서 즉위를 했기 때문에 굳이 흉례를 따르지 않았다. 세종 역시 선왕이었던 태종이 상왕으로 있으면서 즉위했기 때문에 굳이 흉례를 따르지 않고 근정전에서 즉위를 했다. 결국 세종 때까지는 모두 선왕이 살아있는 특수한 상황에서 즉위를 했던 것이다.
한편 문종은 선왕이었던 세종이 승하한 뒤 즉위를 했기 때문에 흉례에 따라 근정문에서 즉위를 했을 것으로 짐작하기 쉽지만, 의외로 문종은 궁궐이 아닌 자신의 막내 동생인 영응대군의 집에서 즉위식을 했다. 왕세자가 궁궐이 아닌 곳에서 즉위를 하다니,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영응대군은 세종이 거의 마흔에 가까운 나이에 얻은 늦둥이였다. 느즈막이 얻은 여덟 번째 막내 아들에 대한 세종의 사랑은 끔찍하였는데, 말년에는 영응대군의 집에서 함께 지내다 그곳에서 지병으로 승하하게 되었다. 그래서 문종은 빈전(빈소)이 차려진 영응대군의 집에서 국상을 치르면서 즉위식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후 문종이 불과 재위 2년 3개월 만에 승하하고, 왕위를 이은 단종은 예법에 따라 궐내에서 사위(嗣位) 의식을 치렀다. 조선 개국 후 최초로 흉례에 의해 근정문에서 즉위한 국왕이 된 것이다. 하지만 단종의 뒤를 이은 세조 역시 왕위를 찬탈했기 때문에 흉례를 따르지 않고 근정전에서 즉위를 했다.
딸:조선 왕의 즉위 의식은 어떻게 진행됐어요?, 반정이나 찬탈 등이 아닌 정상적인 경우, 아빠:조선 왕의 즉위 의식은 국상 기간 중에 치러지기 때문에 축제가 아니었지. 오히려 통곡의 즉위식이었단다.
조선 왕의 즉위 의식은 어떻게 진행됐어요?
아빠 반정이나 찬탈 등이 아닌 정상적인 경우, 조선 왕의 즉위 의식은 국상 기간 중에 치러지기 때문에 축제가 아니었지. 오히려 통곡의 즉위식이었단다.
조선후기 제18대 현종의 즉위식을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을 참고해서 즉위식의 내용을 살펴보자.
* 왕세자의 즉위 의식을 거행하다
(전략) .. 사왕이 인정문(仁政門)[임진왜란때 경복궁이 소실되어 이후에는 즉위식이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에서 거행되었다.] 의 어좌(御座)에 이르러 동쪽을 향하여 한참 서 있었는데, 도승지가 꿇어앉아 어좌로 오를 것을 청하였으나 응하지 않았고, 김수항이 종종걸음으로 나아가 꿇어앉아 청하였으나 사왕이 역시 따르지 않았다. 이은상이 총총히 나와 급히 예조 판서 윤강을 불러들여 그로 하여금 앞으로 나아가 꿇어앉아서 청하게 하였으나, 그때까지도 사왕이 따르지 않다가 영의정 정태화가 종종걸음으로 나와 두세 번 어좌로 오를 것을 청하자, 사왕이 그제서야 비로소 어좌에 올라 남쪽을 향하여 섰다. 태화가 다시 어상(御床)으로 올라가 앉을 것을 청하니, 사왕이 이르기를, “이미 자리에 올랐으면 앉은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하고, 이어 흐느끼기 시작했고 좌우도 모두 울며 차마 쳐다보지 못하였다. 태화가 의식대로 할 것을 굳이 청하자, 사왕이 비로소 앉아서 백관의 하례를 받고 예를 마치었다.
- 현종 1권, 즉위년(1659년) 5월 9일(기사) 2번째 기사
즉위식의 하이라이트는 인정문(임란 이전에는 근정문)에 설치된 어좌(御座)에 올라 백관의 하례를 받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내용을 보면, 현종은 즉위할 때 어좌에 이르러 곧바로 남쪽으로 향하지 않고 동쪽을 향하여 한참 서 있다. 왕위에 올라갈 의사가 없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는 선왕이 돌아가신 와중에 국왕의 자리나 탐하는 그런 존재는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는 의례적인 행위였다. 그렇다고 국왕의 자리를 계속 비워둘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을 알기에 신하들의 간곡한 요청에 의해 마지못해 추대되는 형식으로 왕위에 오르는 것이 조선 왕의 즉위식 모습이었다.
즉위할 때 몇 차례 사양을 하는 것이 관례이지만, 끝까지 사양을 고집하면 안 된다. 적당한 타이밍을 봐서 못 이기는 체 신하들의 의견을 따라야 한다. 현종의 경우를 보면 왕명을 출납하는 도승지 등이 1차 권유를 했으나 사양을 했다. 그래서 조선에서 예법을 관장하는 최고책임자인 예조판서가 나서서 2차 권유를 했으나 이 또한 사양을 했고, 마지막에 영의정이 3차 권유를 하자 그제서야 어좌에 올랐다. 만약 영의정의 권유마저 사양했다면, 사태는 매우 난감해졌을 것이다. 더 이상 높은 지위의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왕세자:난 아직 왕이 될 마음의 준비가..., 정태화: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신하:왜 저렇게 주저하는 거야? 진짜로 왕이 되기 싫은 거 아냐?, 쉿, 원래 그게 관례라구~
경복궁의 근정문에 이렇게 다양하고도 재미난 숨은 역사가 있는 줄 전혀 몰랐어요. 다른 궁궐에도 이만큼 재미있으면서도 알려지지 않은 역사가 있을까요?
아빠 그럼. 영화 《역린》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정조 암살미수사건에 얽힌 역사 이야기는 어때? 그걸 알아보려면 경희궁으로 가야 하니까, 자! 일단 경희궁으로 출발!
경복궁
최동군(글로벌사이버대학교 문화콘텐츠학부 외래교수)
사진/그림
박동현(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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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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