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역사

서오릉에 잠들어 있는 숙종의 네 부인들

서오릉에 잠들어 있는 숙종의 네 부인들
서오릉
서오릉 가는 길 , 1.응암역 1번 출구에서 나와 뒤쪽 횡단보도를 건넌다., 2.응암역 신사오거리 정류장에서 702A번 버스에 승차!, 3.서오릉앞 정류장에서 하차한다., 4.길 건너 서오릉 매표소 도착!
아빠:서오릉에는 산책하기 좋은 숲길이 잘 만들어져 있단다. 천천히 둘러ㅂ면서 걸어볼까?, 딸:아빠랑 함께라면 어디든지 좋아요!!
아빠 오늘 우리가 이 곳 서오릉에서 집중적으로 살펴볼 것은 조선 제19대 임금인 숙종과 그의 부인이었던 여러 왕비들의 능이야. 숙종의 왕비들과 관련된 이야기라면 TV 사극을 통해서 많이 알려진 ‘장희빈과 인현왕후’ 이야기를 대표로 꼽을 수 있지.
숙종의 왕비들? 조선의 임금은 후궁이 아닌 정식 부인도 여러 명을 둘 수 있었나요?
조선시대에 임금이든 일반 양반 사대부든 간에 돌아가신 조상을 대할 때, 만약 남편 한 명에 부인이 여러 명이라면, 흔히들 남편이 일부다처제로 부인을 여러 명 둔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정식부인이 여러 명이라는 말의 뜻은 첫 번째 부인이 남편보다 먼저 사망했을 경우 남편이 재혼한 것이고, 두 번째 부인마저 남편보다 먼저 사망했을 경우, 남편은 세 번째 부인을 맞아들인 것이다. 즉, 특정 어느 한 시점에서 정식 부인이 항상 한 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숙종의 경우 제1왕비가 인경왕후(재위기간 1674~1680)였고, 제2왕비가 인현왕후(재위기간 1681~1701), 제3왕비가 인원왕후(재위기간 1702~1720)였다. 왕비의 숫자만 단순비교 한다면 단경왕후, 장경왕후, 문정왕후 이렇게 세 명의 왕비를 둔 중종과 똑같지만, 한때 중전자리에 올랐다가 후궁으로 강등된 장희빈(재위기간 1689~1694)까지 고려한다면 사실상 조선에서 가장 많은 왕비를 둔 임금이 바로 숙종이다.
공교롭게도 서오릉에는 경내에 숙종과 그의 네 부인들이 모두 잠들어 있다. 제1왕비인 인경왕후는 익릉(翼陵)이라는 이름(능호)으로 단릉으로 조성되어 있고, 제2왕비인 인현왕후는 명릉(明陵)이라는 이름으로 숙종과 함께 나란히 쌍릉으로 조성되어 있다. 능호가 다르다는 뜻은 완전히 별개의 왕릉으로 조성되었다는 뜻이다.
서오릉 전체 지도
[여기서 잠깐]능호는 어떻게 붙여지는 걸까?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은 남긴다고 한다. 일반적인 사람은 생전에 `호`, `자` 따위의 별칭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죽어서는 대부분 자신의 이름(본명)만을 남긴다. 하지만 임금의 경우에는 사후에 자신의 본명 이외에도 두 개의 이름이 더 생긴다. 하나는 종묘(宗廟)에 신위(神位)를 모실 때 붙이는 이름인 묘호(廟號)이고, 나머지 하나는 왕릉에 붙이는 이름인 능호(陵號)이다. 그런데 이렇게 묘호와 능호를 별도로 붙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몸 속에 있던 생명의 기운(생기)이 빠져나간다고 생각했는데, 이 중 양의 기운을 혼(魂), 음의 기운을 백(魄)이라고 불렀다. 또한 혼을 모신 곳을 사당이라고 불렀고, 백을 모신 곳을 무덤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혼과 백을 구분하는 의미에서 별도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태정태세문단세`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 왕들의 이름은 모두 `묘호` 이다. TV 드라마를 통해 많이 알려진 조선의 제22대 왕인 정조는 본명이 《이산》이고, 능호는 `건릉(健陵)`이다. 태조 이성계는 본명이 《이단》, 능호는 `건원릉(健元陵)`이며, 숙종은 본명이 《이순》, 능호는 `명릉(明陵)`이다. 이렇게 묘호도 헷갈리는데 일반인들이 능호까지 알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능호를 대신해서 묘호 뒤에 《왕릉》 또는 《왕후릉》을 붙이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태조왕릉(건원릉), 정조왕릉(건릉), 숙종왕릉/인현왕후릉(명릉) 하는 식이다.
인원왕후릉, 숙종릉, 인현왕후릉, 아빠:이곳 명릉에는 숙종과 두 명의 부인이 함께 잠들어 있단다., 딸:어? 그런데 부인 한 명은 저 멀리 따로 묘가 있네요?
제3왕비인 인원왕후는 남편인 숙종과 함께 같은 능역(陵域)에 있기 때문에 명릉(明陵)이라는 능호를 받았다. 하지만 숙종과 인현왕후가 함께 묻힌 언덕에서 뒤쪽으로 80여 미터 떨어진 언덕 위에 독립적으로 조성되어 있다. 정자각의 위치가 숙종왕릉과 인원왕후릉의 한가운데가 아니라 숙종왕릉의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보자면 숙종왕릉에 인원왕후릉이 마치 셋방 더부살이하는 듯한 옹색한 모양을 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는 굳이 따지자면 언덕(岡)이 두개이므로 왕릉의 형태상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한쪽은 쌍릉이며, 다른 한쪽은 단릉의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모두 단릉으로만 구성된 다른 동원이강릉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인원왕후릉이 이처럼 변형된 형태로 조성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을 하기에 앞서, 우선 인원왕후릉을 만든 사람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인원왕후릉은 영조 임금에 의해 조성되었다. 영조에게 인원왕후는 큰 은인이었는데, 영조가 아직 연잉군이었을때 임인옥사(노론이 경종을 암살하거나 폐위시키기 위해 일으킨 역모사건) 관련자들의 고변으로 역모의 주범으로 용의선상에 오르자 인원왕후가 몸소 보호해 준 일이 있었다. 또한 인원왕후는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양자로 입적하기까지 했다. 영조에게 인원왕후는 생명의 은인이자, 자신을 임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게 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능을 만드는 과정에서는 많은 신경을 쓰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서오릉 내의 정성왕후릉(홍릉)과 연관이 있다.
1757년 2월 15일 영조의 첫 번째 부인인 정성왕후가 사망하자 바로 국장이 선포되었다. 조선의 국장은 통상적으로 5개월이 소요되는데, 한참 국장이 진행되던 3월 26일, 대왕대비였던 인원왕후까지 사망하게 된 것이다. 영조로서는 국장을 동시에 두 개를 치러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국장에는 인력과 경비가 엄청나게 많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영조의 입장에서는 조강지처와 계모의 국장 중에서 선택과 집중을 해야만 했다.
전통적인 충효사상의 입장에서 본다면 영조의 선택은 인원왕후릉이 되어야 했지만, 그는 결국 정성왕후릉(홍릉)을 선택했다. 이미 국장을 시작한 정성왕후릉은 40일 이상 먼저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정성왕후릉의 바로 옆 자리는 바로 자신의 신후지지(살아 있을 때에 미리 잡아 두는 묏자리)였기 때문에 그만큼 신경 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저렇게 동떨어져서 홀로 있는 묘를 보니 쓸쓸해지네요. 이번에는 장희빈의 무덤으로 가 봐요. 거기에도 뭔가 쓸쓸한 이야기 거리가 많을 것 같아요.
원래 장희빈의 무덤은 양주 인장리(지금의 경기도 구리시 일대)에 있었다가 묏자리가 풍수적으로 불길하다고 하여 1718년 광주 진해촌(지금의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돌보는 사람이 없어 한동안 폐허로 방치되다가 1969년 묘소를 통과하는 도로가 생기는 바람에 지금의 서오릉(西五陵) 경내로 이전하게 되었다. 가까운 고양시 일산의 고봉산에 장희빈의 친청묘역(인동 장씨)이 조성되어 있었고, 게다가 서오릉 안에 숙종과 그의 세 왕비가 모두 모여있었기 때문에 묘지 이전의 근거는 충분했다.
딸:장희빈의 무덤인데 왜 《희빈묘》가 아니라 《대빈묘》죠?, 아빠: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즉위 후에 어머니를 옥산부대빈으로 높였단다. 그래서 그 이름을 줄여 대빈묘라고 붙인거지.
어? 그런데 장희빈의 무덤인데 왜 《희빈묘》가 아니라 《대빈묘》죠?
장희빈의 본래 묘 이름은 《희빈장씨묘》였으나, 경종이 즉위하고 나서 어머니 장씨를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존하였기 때문에 《옥산부대빈묘》로 교체하여 이를 줄여 《대빈묘》라 부른다. 그런데 경종과 같이 서자 출신으로 왕이 된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의 무덤은 경기도 파주 광탄면의 《소령원》이다. 무덤의 등급은 능,원,묘 로 서열이 정해지는데, 어떻게 경종의 사친인 희빈 장씨는 ‘묘’에 묻혀있고, 영조의 사친인 숙빈 최씨는 《원》에 묻혀 있는 것일까?
[여기서 잠깐]무덤의 서열

본래 중국의 예법에 의하면 무덤은 《능, 원, 묘》로 격을 달리한다. 여기서 《능》은 황제와 황후의 무덤이고, 《원》은 제후의 무덤이고, 《묘》는 그 이하 모든 사람들의 무덤이다. 황제국이 아닌 제후국인 조선에서는 가운데 등급인 《원》을 쓰지 않고, 대신 《능》을 왕과 왕후의 무덤에 사용했고, 그 이하는 모두 《묘》를 썼다.
원래 영조는 자신의 생모인 숙빈 최씨를 왕후로 추존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지만 조정 신료들의 강한 반대로 관철되지 못했다. 그래서 숙빈 최씨의 무덤을 원(園)으로 봉하여 희빈 장씨의 무덤보다는 격을 높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는 《묘》가 《원》으로 승격한 두 번째 사례였다.
[여기서 잠깐]《묘》를 《원》으로 승격한 첫 번째 사례

조선에서 최초로 《묘》를 《원》으로 승격시킨 이는 인조다. 선조와 광해군의 뒤를 이은 인조 역시 서자 출신이었고,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그의 생부와 생모의 무덤은 당연히 《묘》에 해당했다. 하지만 인조는 끊임없이 자신의 부모를 왕과 왕후로 추존하고자 노력했고, 이에 반대했던 조정 신료들이 중재안으로 내세운 것이 중국 전한시대 선제(宣帝)의 사례였다. 민간에서 자라 황제가 된 선제가 기원전 91년 무고의 옥에 의해 처형된 죄인 신분의 생부를 황제로 추존할 수 없게 되자, 생부의 무덤을 《원》으로라도 삼아 마음을 위로했는데, 이 고사를 빌어 인조 역시 부모의 무덤을 모두 《원》으로 봉하자는 신료들의 중재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인조는 끝내 그의 생부와 생모를 왕과 왕후로 추존하는데 성공했고, 그 결과 《원》은 다시 《왕릉》이 되었다. 그래서 실질적인 최초의 《원》 승격의 예는 《소령원》이 최초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라고 본다.
따지고 보면 장희빈도 경종의 생모니까, 당연히 《원》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원칙적으로 보면 《대빈묘》도 《원》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계속 《묘》에 머물러 있었다. 영조는 개인적으로 희빈 장씨에게 감정이 나빴고, 당시 영조를 후원하고 있던 집권당 노론 또한 남인 계열의 희빈 장씨에 대한 정치적인 배려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장희빈을 차별한 증거는 《대빈묘》의 구조에서도 확인된다. 무덤의 규모는 둘째 치더라도 《명릉》의 석물과 《대빈묘》의 석물의 위치를 비교해 보면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망주석이다.
망주석의 위치
아빠:대빈묘의 망주석은 곡장 밖으로 나와 있단다., 딱봐도 명릉이랑 비교가 되지?
《명릉》의 숙종왕릉, 인원왕후릉의 경우 모두 망주석은 곡장(봉분을 둘러싸고 있는 담)의 안쪽에 있는데 비해 《대빈묘》는 망주석이 곡장의 바깥쪽으로 나와 있다. 망주석은 무덤 앞에 세우는 1쌍의 돌기둥을 말하는데 풍수의 용도로 쓰인다. 망주석에 붙어있는 작은 동물조각인 세호(細虎, 작은 호랑이)가 무덤의 기운을 지켜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빈묘》의 망주석 위치는 왜 다를까? 망주석은 사람으로 치면 항문 주위의 괄약근에 비유할 수 있다. 음양학적 측면에서 괄약근은 사람 몸 속의 기운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항상 바짝 조여주는 기능을 한다. 사람이 죽으면 공통적으로 발생하는 두 가지 신체 현상이 괄약근이 풀어지는 것과 동공이 풀리는 것인데, 항문을 통해서는 사람 몸 속의 기운 중 음의 기운, 즉 백(魄)이 빠져 나가고 풀어진 동공을 통해서는 양의 기운, 즉 혼(魂)이 빠져나간다.
망주석이 이 괄약근의 기능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곡장의 터진 끝부분의 안쪽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대빈묘》는 곡장의 터진 부분의 바깥쪽에 망주석이 두어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만들어 놓았다. 이런 예는 연산군의 묘에서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데, 장희빈이든, 연산군이든 역사에서 쫓겨난 인물들에게는 제대로 된 명당을 만들어 주지 않겠다는 기득권자들의 의지를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딸:근데 저기 대빈묘 뒤로 바위 사이를 뚫고 나무가 자라고 있는게, 예사롭지 않아요. 아빠!!, 아빠:우리딸, 눈썰미가 ?통이 아닌데?
와! 《대빈묘》 의 바로 위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 그 사이를 뚫고 나무가 자라고 있어요!
장희빈 묘의 바로 위쪽에 바위를 쪼개고 나무가 자라는 것을 보고 항간에는 장희빈의 억센 기(氣)가 바위를 뚫었다 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는 않지만 풍수적으로 볼 때 지금의 장희빈 묘는 결코 좋은 자리가 아니다. 그 이유는 무덤 바로 위의 바위 때문이다. 바위의 찬 성질이 공기 중의 수분과 만나면 물방울이 되어 맺히는데, 무덤 위의 바위에 맺힌 물방울이 하나 둘씩 모여 아래로 흘러내리게 되고 그렇게 되면 아래 무덤에 물이 고이게 된다. 이렇게 물에 잠기는 무덤이 흉당인 것은 상식중의 상식이다.
숙종과 왕비들의 이야기에 이렇게 많은 숨은 사연이 있는 줄은 정말 몰랐어요. 다음에는 우리 어디로 갈까요?
아빠 요즘 사극 영화나 드라마가 인기가 많던데, 그 배경지인 서울로 다시 돌아가 볼까?
서오릉에서 아빠와 딸
최동군(글로벌사이버대학교 문화콘텐츠학부 외래교수)
사진/그림
박동현(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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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06-13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