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역사

반구정에 숨어있는 황희 정승의 두 얼굴

반구정에 숨어있는 황희 정승의 두 얼굴
반구정
반구정 가는 길 - 1.문산역 1번 출구에서 바로 앞 횡단보도를 건넌다., 2.문산역 정류장에서 053번 버스에 승차!, 3.반구정 정류장에서 하차한다., 4.길 건너 황희선생 유적지 도착!
아빠:황희 정승은 임진강이 한 눈에 굽어 보이는 이 곳에 정자를 지어놓고, 갈매기가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며 시문을 즐겼단다.
아빠:그래서 이정자 이름이 '갈매기와 벗한다'는 뜻의 반구정이야., 딸:그 뜻은 어디서 들어본 거 같은데... 아! 저번에 갔던 '압구정'이랑 뜻이 같아요!! 다들 갈매기를 좋아하나 봐요.
아빠 이 정자는 일반적으로 ‘청렴결백한 관리’를 뜻하는 청백리(淸白吏)의 대표로 잘 알려져 있는 황희 정승과 관련있는 곳이란다. 그는 노년에 관직에서 물러난 뒤, 임진강이 한 눈에 굽어보이는 이곳 강변 솔밭 동산에 정자를 지어놓고 갈매기가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시문을 즐겼지. 갈매기와 벗한다는 뜻으로 짝 반(伴), 갈매기 구(鷗)자를 써서 반구정(伴鷗亭)이라고 이름 붙였단다.
예전에 아빠가 설명해 주신 한명회의 압구정(狎鷗亭)과 글자는 다른 것 같은데, 뜻이 같네요?
그렇다. 압구정과 반구정은 글자는 다르지만, 둘 다 《갈매기와 더불어 벗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압구정은 권신(權臣)의 대명사인 한명회의 이미지에 걸맞게 서울 강남의 불야성 속에 들어가 있는 반면, 반구정은 청백리(淸白吏)의 대명사인 황희의 이미지를 충실히 반영한 듯 인적이 드문 임진강 가에 자리를 잡고 있어 묘한 대조를 이룬다.
황희 정승과 관련된 일화들은 꽤 많은 것 같아요. 교과서에도 나오는 《누런 소와 검은 소》 이야기도 있고, 서로를 헐뜯는 두 여종에게 네 말도 옳고, 네 말도 옳다 하는 《여종들의 싸움》 이야기도 알고 있어요.
그렇다. 황희 정승의 일화는 일반에 많이 알려져 있다. 《누런 소와 검은 소》 이야기는 비록 짐승 앞에서라도 듣기 싫은 소리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으로 ‘신중한 언행’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고, 《여종들의 싸움》 이야기는 ‘남의 말을 경청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 습관’ 의 중요성을 당부하고 있다. 이 외에도 정승 자리에 있으면서도 가난한 살림으로 관복을 하나만 두고 입어 어전회의에서 무안함을 당한 일 등, 그가 우리 나라 ‘청백리의 대표’라 불릴 만한 이야기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여기서 잠깐]계란유골 (鷄卵有骨)

'달걀에도 뼈가 있다’는 속담으로, 복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기회를 만나도 덕을 못 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속담도 황희와 관련이 있는데, 재상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가난하게 살았던 황희를 위해 세종은 날을 정해 하루 동안 남대문으로 들어오는 상품을 몽땅 국비로 사들여 모두 황희의 집으로 보내라는 어명을 내렸다. 그런데 그날은 공교롭게도 종일 폭풍우가 몰아쳐 아무 것도 들어오는 물건이 없었다. 저녁 때가 되어서야 겨우 누군가가 들고 온 달걀 한 꾸러미가 있어 황희의 집으로 보냈는데, 달걀을 삶아놓고 보니 그나마도 속이 모두 곯아서 먹을 수가 없는 상태였다. 곯았다는 것은 상하였다는 말인데, 이것을 한문으로 옮기면서 마땅한 표현이 없어 곯았다는 '곪’음과 비슷한 뼈 골(骨)의 음을 써서 '유골(有骨)', 즉 '골이 있다'로 쓴 것으로 보인다.
황희의 강직한 성품을 알 수 있는 일화도 있다. 김종서 장군이 북방 6진을 개척한 공로를 인정받아 병조판서가 된 후 회의석상에서 거드름을 피우며 삐딱하게 앉자, 황희는 “병조판서의 의자다리가 짧은 것 같으니 당장 수리를 하라”고 호통을 쳐 그의 무례함을 바로잡았다고 한다.
《어우야담》에 등장하는 이야기도 하나 더하자면, 황희의 아들 황수신(黃守身)이 기방출입이 매우 잦아 여러 차례 엄하게 꾸짖었으나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아들 수신 앞에 황희가 관복 차림으로 문까지 나와 큰 손님을 대하듯이 맞이했다. 수신이 깜짝 놀라 엎드리며 그 까닭을 묻자, 황희는 “그동안 나는 너를 아들로 대했는데, 도대체 내 말을 듣지 않으니 네가 나를 아비로 여기지 않는 것이 아니냐. 그래서 너를 손님을 맞이하는 예로 대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크게 뉘우친 수신은 기방 출입을 끊기로 맹세했다고 한다.
와, 청렴결백에 강직한 성품까지! 정말 대단하신 분이네요!!
아빠 그렇지? 하지만 지금까지의 황희에 대한 이야기는 대부분이 민간전승이거나 야사의 기록이야.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정반대의 면모도 많이 볼 수 있단다.
아빠:이제부터 지금껏 우리가 잘 알던 황희 정승과는 다른 모습을 들려주마!, 딸:오! 궁금해요~~
조선왕조실록에 남아있는 황희에 관한 기록은 일반인들에게 청백리의 표상으로 알려진 바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 많이 실려있다.
황희는 너그러운 성품 탓에 주위의 청탁을 쉽게 거절하지 못해 매관매직 혐의로 수차례 탄핵을 받았다. 또한 무고한 사람을 죽인 자신의 사위를 보호하기 위해 맹사성까지 끌어들여 사건을 축소, 은폐하려 했고, 심지어 직권을 남용해 사건을 조작하다가 사헌부의 조사로 들통나기도 했다. 그러나 세종은 이런 사건이 있을 때마다 황희를 강력하게 처벌하라는 상소를 무시하거나, 황희를 파직하는 흉내만 냈다가 1년도 안되어 다시 정승으로 기용하는 등 무한한 신뢰를 보여주었다. 황희의 뛰어난 정치 실력을 높이 평가하여 그의 허물을 눈감아 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황희의 허물은 본인에서 그치지 않았다. 황희에게는 황치신, 황수신, 황보신이라는 세 명의 적자와 황중생이라는 서얼 자식이 있었다. 그 중 황중생은 황희가 조선시대 2품 이상 고위관료들에게 음식과 술을 대접하는 관청인 내섬시(內贍寺) 소속의 여종을 첩으로 삼아 낳은 자식이었는데, 황희의 도움으로 동궁(東宮)의 소친시(小親寺)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여기서 잠깐]서얼이란?

서자(庶子)와 얼자(孼子)를 합쳐 부르는 말로, 서자는 첩의 신분이 평민인 경우, 얼자는 첩의 신분이 천민인 경우를 말한다. 황중생은 관청 소속의 천민인 여종의 자식이므로 서자가 아닌 얼자이다.
문제는 황중생이 궁으로 들어오고 얼마 뒤에 일어났는데, 그것은 바로 궁궐 내 절도 사건이었다. 대대적인 수색에도 범인은 나타나지 않았던 이 사건의 범인이 바로 황중생이었던 것이다. 그는 서얼 출신이지만 황희 정승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처음부터 용의선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 후 세종 18년에 또다시 궁궐 내 절도 사건이 일어났다. 임금의 재산을 보관하는 내탕고의 물건이 도난 당한 큰 사건이었는데, 이번에도 범인은 또 황중생이었다. 훔친 물건이 일반인이 소장하거나 팔아 넘길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 덜미를 잡히고 자백하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그의 자백에 또 다른 이름이 거론되었다. 장물과 관련하여 그의 이복 형인 황보신(黃保身)의 이름이 나온 것이다. 황중생은 서얼 출신이었지만 황보신의 경우 본처 소생의 적자였기 때문에 가문에 큰 누를 끼치는 일이었다.
늘 황희를 감싸주었던 세종은 차마 이 일까지 덮을 수 없어 황보신에게 처벌을 내리고자 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또 다른 황희의 아들인 장남 황치신(黃致身)이 엮이게 된다. 원래 황보신이 받은 처벌의 내용 중에는 녹봉으로 주어졌던 과전(科田)을 몰수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서 당시 호조참판(지금의 재경부 차관)으로 재직중이던 황보신의 맏형, 황치신은 몰수 대상인 비옥한 황보신의 과전을 차지하고, 그 대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척박한 땅을 대신 벌금으로 내놓은 것이었다.
서얼 황중생:아부지가 임금한테 가서 말 좀 잘 해줘요~
셋째 황보신:재물에 눈이 멀어 그만..., 황희:못난 놈들! 임금도 더 이상은 안 봐주실 게다., 첫째 황치신:이번엔 제가 땅을 바꿔 치기 했습니다요..., 황희:장남 너 마저? 아이고~ 내 팔자야~
어머! 그런 사건이 있었는데도 어떻게 황희가 청백리라고 소문이 났어요?
사실 《황희의 청백리 신화》를 만든 것은 황희 개인이 아니라 기득권을 지키려는 조선의 양반 계층이었다. 조선과 비슷한 시기에 왕조가 출범한 중국 대륙의 명나라에서는 기존의 ‘재상제’를 폐지하고 ‘황제독재체제’로 정부조직을 변화시켰다. 대대로 왕권보다는 신권이 강했던 조선에서는 명나라의 재상제 폐지가 충격이었다. 만일 조선이 명나라의 체제를 따라간다면 그것은 곧 양반 집단의 기득권 축소를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양반 관료집단은 재상제를 사수하기 위해 기득권 안에서 상대적으로 청렴하면서도 또한 자기 세력이 별로 없어 자신들에게 큰 위협이 되지 않는 사람을 대외 홍보용 재상으로 내세울 필요가 있었다. 여기서 모든 조건을 갖춘 사람이 황희였다. 황희 입장에서는 양반 관료집단의 기대에 부응하며 동시에 자신도 재상직을 오래 지킬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이런 이유로 황희는 사후에도 기득권을 지키려는 양반 계측에 의해 확대 재생산 되는 ‘청백리 신화’ 속에 싸이고, 그 과정에서 과거 그의 부패와 물의가 가려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황희는 실제로 전혀 존경할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뜻인가요?
비록 황희가 개인적으로는 논란의 여지가 많은 것이 분명하지만 우리가 한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황희는 도덕군자가 아닌 현실 정치인이었으며, 누가 뭐래도 조선조 최장수 임명직 재상이라는 사실이다. 그것도 태종과 세종시대를 거치면서 세자가 양녕대군에서 충녕대군으로 바뀌는 등의 정치적인 격랑 속에서도 무려 20여 년을 재상직에 머물렀고, 세종 연간의 태평세월이라는 성과를 이뤄냈다. 이는 조선왕조를 통털어 전무후무하며, 독재가 아닌 한 있을 수 없는 기록이다. 그렇다면 그 비결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황희는 정치 일선에서 강직한 성품으로 원칙과 소신을 지키면서도 때로는 관용의 리더십을 베풀어 조선 왕조의 조기안정화에 기여했다. 현실 정치란 결코 원칙과 소신만이 능사가 아니다. 때로는 반대파를 적절히 포용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황희는 그런 강약 조절을 매우 잘 한 인물이었다.
또한 황희에게는 맹사성이라는 훌륭한 정치적 파트너가 있었다. 두 사람은 같은 정치적 견해를 가지면서도 서로 다른 성품을 지녔는데, 황희가 학자적인 인물로서 분명하고 강직함을 추구했다면, 맹사성은 예술가적 기질을 가지고 정치 일선에서 어질고 부드럽고 섬세함을 보여주었다. 이런 성품과 기질을 바탕으로 황희는 주로 이조, 병조 등 정확성과 과단성이 필요한 관서에서 인사, 행정, 군사의 업무를 맡고, 맹사성은 주로 예조나 공조 등 유연성이 요구되는 업무를 맡으며 정치적 조화를 이룰 수 있었다.
[여기서 잠깐]청백리 맹사성

황희 못지 않게 청백리로 유명했던 맹사성은 공무가 아닌 일에는 결코 역마를 이용하지 않고, 시종 없이 소를 타고 다니거나 걸어 다녔다고 한다. 이와 관련한 일화가 하나 있는데, 좌의정이던 맹사성이 고향인 충남 온양에 어른들을 뵈러 들를 때의 일이다. 소식을 접한 안성 현감과 진위 현감은 이참에 좌의정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가 지나갈 길을 잘 닦아 놓고 일반인들의 통행을 금지시켰다. 그런데 하루 종일 기다려도 좌의정 일행은 전혀 보이지 않고, 해질 무렵 한 노인이 혼자서 소를 타고 그 길을 지나가는 것이었다.

이때 현감 일행 중 한 하인이 나서서 “좌의정이 지나갈 길에 웬 무지렁이 노인네가 지나가냐”며 시비를 걸었다. 그러자 그 노인은 만들어 놓은 길을 못 갈 이유가 뭐냐고 되물었다. 결국 하인은 노인을 소에서 끌어내려 현감 앞에 내동댕이 쳤는데, 현감들이 “웬 정신 나간 노인네냐”고 하면서 고개를 들어보라고 한 순간 깜짝 놀라 모두 도망을 칠 수 밖에 없었다. 그 노인네가 바로 맹사성이었던 것이다.
아빠:자, 여기서 퀴즈!, 황희 정승의 초상이라고 전해지는 것이 두 개가 있는데, 어떤 것이 제대로 된 걸까?, 딸:턱 선이 좀 다른 것 같기도 한데...
아빠 현재 황희 정승의 초상이라고 전하는 것이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잘못된 거야. 어느 것인지 한번 맞춰볼래?
으~ 학교에서도 시험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데 저한테 너무 하시는 거 아니예요? @.@
두 그림의 가장 큰 차이점은 관복의 가슴부분에 있는 흉배(胸背)의 유무이다. 흉배(胸背)란 조선시대 왕과 왕세자, 그리고 문무백관이 입는 관복의 가슴과 등에 장식한 표장(表章)이다. 조선시대 왕과 왕세자의 평상복인 곤룡포(袞龍袍)에는 용무늬(龍文)을 수놓은 흉배를 가슴과 등 그리고 양어깨에 장식하였다. 한편 문무백관의 평상복인 단령포(團領袍)에는 네모진 흉배를 가슴과 등에 붙였는데, 관리의 품계에 따라 무늬의 구별이 있었고, 시기별로 여러 차례 변경이 되었다.
조선 왕조에서 처음 문무백관의 흉배 제정이 논의된 것은 세종 때로, 하연, 정인지 등이 건의하였으나 당시 영의정이었던 황희가 검소한 기풍에 위배된다 하며 반대하여 무산되었고, 그 후 1454년(단종2년)에 양성지가 제의하여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그런데 황희는 문종2년인 1452년에 생을 마쳤기 때문에 살아생전에는 흉배가 있는 관복을 입을 수 없었다. 따라서 현재 전해지는 황희의 초상 중 흉배가 있는 초상이 시기적으로 모순이 있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딸:저기 반구정 위에 정자가 하나 더 있어요!!
아빠, 반구정 위에 정자가 또 하나 있는데 저건 뭐에요?
아빠 응, 원래 저 자리에 반구정이 있었는데, 반구정을 아래 쪽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그 자리에 대신 세운 앙지대란다. 글자를 풀어보면 우러를 앙(仰), 그칠 지(止), 돈대 대(臺) 자를 쓰는데, 평소 강직하면서도 오랜 기간 백성들을 위해 정치를 잘 하신 황희 정승의 높은 뜻을 우러러 보라는 뜻이지.
하지만 중간에 그칠 지(止)가 있잖아요? 우러러 보는 것을 그만 두라는 뜻 아닌가요? 이름을 잘 못 지은 것 같은데~
앙지(仰止)는 원래 `시경詩經` 에 있는 `고산앙지 경행행지(高山仰止 景行行止)`라는 문구에서 발췌한 것인데, 원래 뜻은 `산이 높으면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고, 큰 행실은 그칠 수 없다` 라는 뜻이다. 여기서 그칠 지止를 단독으로 쓰면 ‘그치다, 그만 두다’라는 말이 되지만, 다른 동사와 함께 쓰면 ‘~에 이르다. 또는 반드시 ~하게 하다’라는 뜻이 된다. 예를 들면 폐지(廢止)는 `없애는 것을 그친다` 는 것이 아니라 `없애는 상태에 이르다. 반드시 없도록 하다’ 라는 뜻이 된다. 똑같은 원리로 정지(停止)는 `멈추는 것을 그친다` 가 아니라, 멈추는 상태에 이르다. 반드시 멈추게 하다’ 라는 뜻이다. 따라서 앙지(仰止)는 ‘우러러 보는 지경에 이르다. 반드시 우러러 보게 하다. 또는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다’ 로 해석해야 한다.
[여기서 잠깐]고산앙지를 찾아서

충청북도 옥천에는 이지당(二止堂) 이라는 서당이 있다. 이 이름은 우암 송시열이 지었는데, `고산앙지 경행행지’의 끝 글자`지(止)’자 두개를 따서 이지당(二止堂)이라고 지은 것이다. 또한 서울 도봉산 도봉서원 앞 계곡에도 고산앙지高山仰止)라는 바위 글씨가 있다.
와, 반구정에서는 정말 반전있는 이야기들이 많았어요! 다음 행선지도 궁금해져요.
아빠 글쎄, 다음은 어디로 갈까... 래, 서오릉으로 가서 숙종과 한때 그의 왕비였던 4명의 여인들 이야기를 들려 줄께.
하지만 중간에 그칠 지(止)가 있잖아요? 우러러 보는 것을 그만 두라는 뜻 아닌가요? 이름을 잘 못 지은 것 같은데~
반구정에서 아빠와 딸
최동군(글로벌사이버대학교 문화콘텐츠학부 외래교수)
사진/그림
박동현(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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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06-13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