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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있는 역사

최영 장군묘에 숨어있는 노블리스 오블리쥬

최영 장군묘에 숨어있는 노블리스 오블리쥬
최영 장군묘
최영 장군묘 가는 길 , 1. 삼송역 8번 출구 앞 버스정류장에서 37번 버스를 단다!, 필리핀참전비 정류장에서 하차한다., 3. 시골길을 따라 쭉 걸어간다., 4. 최영장군묘 도착!
딸:최영 장군 하면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 라는 명언이떠오르죠!, 아빠:그래. 그런데 사실 그 명언은 최영의 아버지가 어린 최영에게 남긴 말이었단다.
아빠 여길 따라 올라가면 고려 말의 충신 최영 장군의 묘야. 최영 장군 하면 가장 먼저 뭐가 떠오르지?
그야 당연히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 라는 유명한 명언이죠.
사실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 라는 명언은 최영 장군의 말이 아니라 사헌규정(司憲糾正) 벼슬을 지낸 최영의 아버지 최원직(崔元直)이 임종시에 어린 최영에게 남긴 말이다. 《고려사》 열전의 최영(崔瑩)편 말미 부분에 그 내용이 나와있다.
《 고려사 열전,  최영 편의 일부 》
初瑩年十六, 父臨終戒之曰, “汝當見金如石.”
최영의 나이 열여섯 때 부친이 죽었는데 임종 때에,
“너는 황금 보기를 돌과 같이 해야 한다.”고 훈계했다.
瑩佩服, 不事産業, 居第甚隘陋, 處之怡然.
최영이 그 유훈을 마음 속 깊이 새겨 재산을 늘리려 하지 않았고
거처하는 집이 아무리 누추해도 편안한 마음으로 살았다.
服食儉素, 屢至空�, 見乘肥衣輕者, 不�如犬豕.
의복과 음식이 검소했으며 쌀궤가 늘 비었지만
살진 말을 타고 화려한 옷을 입는 자들을 보면 개나 돼지만도 여기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최영 장군의 묘를 둘러보기 전에, 백과사전을 참고하여 최영의 일생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자.
최영(崔瑩, 1316년 ~ 1388년)은 고려 말기의 장군이자 정치인으로, 본관은 동주(철원), 시호는 무민(武愍), 최원직(崔元直)의 아들이다. 군관으로 출사하여 관직은 육도 도순찰사 등을 거쳐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1374년에는 제주도에서 일어난 목호(牧胡)의 난을 진압했고, 1376년(우왕 2)에는 왜구의 침략 때, 육군을 이끌고 논산군 연산의 개태사(開泰寺)로 올라오는 왜구를 홍산(鴻山)에서 크게 무찔러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에 봉작되었으며, 여러 번 왜구와 홍건적을 격퇴하고 안사공신(安社功臣)에 책록되었다.
최영의 서녀(첩의 딸)가 우왕의 후궁이 된 후 우왕의 정치적 후견인이 되었지만, 평소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아버지 최원직의 유언을 받들어 평생 여색과 재물을 멀리하였다. 조선 초기에 좌의정을 역임한 재상 맹사성은 그의 손녀 사위이기도 하다.
유교 사대부와 동맹을 맺은 이성계와 대립하다가, 명나라가 서북면을 요구하자 이의 정벌을 주장하여 요동정벌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의 반군에 의해 살해되며 최후를 맞이한다.
와, 왕의 장인까지 되었다면, 얼마든지 떵떵거리고 살 수 있었을 덴데, 참 훌륭하신 분이군요!
그렇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최영의 ‘사람됨’이다. 역사를 통틀어 정치적으로 최고 지위에 올라간 사람은 무수히 많다. 하지만 최영과 같은 평가를 받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고려사에 언급된 최영에 대한 평가를 좀 더 살펴보면 그런 사실을 알 수 있다.
비록 장군과 재상을 겸직하고 오래 동안 병권을 장악했으나 뇌물과 청탁을 받지 않으니, 세상 사람들이 그의 청렴함에 탄복하였다. 항상 큰일에만 신경을 써 사소한 일에 구애 받지 않았으며, 종신토록 군사들을 지휘했으나 휘하의 사졸 가운데 그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수십 명에 지나지 않았다. - 《고려사》
조선 왕조가 자신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과는 달리, 《고려사》는 고려 왕조를 무너뜨린 조선의 건국주도 세력인 신진사대부들이 자신의 역사관을 가지고 만든 고려 왕조에 대한 역사서다. 따라서 철저히 고려를 부정하는 조선의 관점에서 만들어 졌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때 국부(國父) 이성계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최영에 대한 평가가 위와 같다는 것은 최영의 사람됨이 정말 대단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아빠:고려사에서 뛰어난 평가를 받았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할 수 있지!, 딸:와, 그만큼 흥미로운 이야기도 많을 것 같아요. 빨리 들려 주세요!.
[여기서 잠깐]《용재총화》에 실린 최영 장군의 이야기

고려의 권세 있는 자들은 자신의 저택에 손님들을 초대해 성대한 잔치를 열고 진기한 음식을 대접하며 사치를 부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최영도 언젠가 재상들을 자신의 집에 초대했는데, 한낮이 지나도록 아무 음식도 내놓지 않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쌀밥도 아닌 기장쌀을 섞어 지은 밥에다 잡다한 나물만을 차려서 가져왔다. 오래 기다리다 지쳐 배가 고팠던 재상들은 그것도 마다하지 않고 남김없이 먹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최영의 집에서 먹은 음식이 여태껏 먹었던 어떤 산해진미보다 가장 맛있습니다' 그러자 최영은 웃으며 '이것도 병사들을 부리는 한 방법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아빠 그럼 이제 최영 장군의 비석내용을 읽어 볼까?
네? 이렇게 한자 투성이인 비석을 어떻게 읽어요?
한자로 된 옛날 사람의 비석을 읽을 때 약간의 요령만 있으면 최소한 묻힌 사람의 이름 정도는 찾아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비석의 제일 마지막 부분은 대체로 OO지묘(之墓)로 끝난다. 누구 누구의 무덤이라는 뜻이다. 바로 그 앞의 글자가 무덤의 주인공 이름이다.
그렇다고 이름을 홍길동(洪吉童)처럼 쓰지는 않는다. 성과 이름을 분리하되 성 다음에는 공(公)자를 쓰고, 이름 앞에는 휘(諱)자를 쓴다. 홍길동을 예를 들어보면, 홍공 휘길동(洪公諱吉童)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휘(諱)는 피한다는 뜻으로, 돌아가신 분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관습에서 비롯됐다. 반대로, 살아있는 분의 이름을 말할 때는 절대 휘(諱)자를 쓰면 안 된다. 대신 함(銜)자를 써 "할아버지의 함자가 어떻게 되십니까? 존함을 여쭤봐도 되나요?" 하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바른 표현이다.
이름 앞의 모든 내용은 그 사람이 평생 동안 거쳤던 관직이 대부분이다. 이 부분은 띄어쓰기만 잘 하면 그 내용을 쉽게 알 수 있다. 최영 장군의 비석내용을 살펴보면 철원부원군까지는 모두 관직 이름이고 시호가 무민(武愍)이며 본관이 동주(철원)라는 뜻이다. 그 다음은 부인이 왼쪽에 묻혀 있다는 뜻이다.
최공휘영지묘
아빠:비석에는 이름을 그냥 쓰지 않고 성 뒤에는 공(公), 이름 앞에는휘(諱)자를 붙인단다. 그러니까 ‘최공’, ‘휘영’에 ‘지묘(~의 묘)’가 되는거지., 딸:아, 앞부분은 그럼 모두 최영이 몸담았던 관직의 이름인 거네요.
高麗 盡忠奮佐命安社功臣 判密直事 大將軍 門下侍中
고려 진충분좌명안사공신 판밀직사 대장군 문하시중
贊成事 六道都巡察使 鐵元府院君 謚武愍 東州崔公 諱瑩之墓
찬성사 육도도순찰사 철원부원군 시무민 동주최공 휘영지묘
三韓 國大夫人 文化柳氏 俯左
삼한 국대부인 문화유씨 부좌
아빠, 최영 장군에 얽힌 재미있는 전설 같은 것은 없나요?
아빠 왜 없겠니. 들어보면 아마 깜짝 놀랄 거야~.
최영 장군에 얽힌 설화는 꽤 많다. 그 중 하나는 충북 보은에 전해 내려오는 말무덤과 말채나무 이야기다. 최영 장군에게는 무예를 배울 때 항상 타고 다니면서 애지중지 하던 말이 있었다. 하루는 큰 뜻을 품고 수도인 개성으로 떠나기 전, 말의 주력을 시험하기 위해 화살을 쏜 뒤 채찍질을 하며 전속력으로 말을 몰았다. 목적지에 도착해보니 이미 화살이 꽂혀 있는 것을 보고 최영 장군은 “너 같은 느린 말로는 도저히 큰 뜻을 펼칠 수 없다” 하며 단 칼에 말의 목을 쳤는데, 그 때 화살이 하나 날아왔다. 알고보니 꽂혀 있던 것은 전날 연습할 때 쏘았던 화살이었던 것이다. 최영 장군은 크게 후회하며 말을 묻어주고 그 옆에 채찍을 묻어주었는데, 후에 말무덤 옆 채찍에서 잎이 나와 나무(말채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설화는 최영 장군이 사윗감을 고르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 최영 장군은 훌륭한 사윗감을 골라 내기 위해 자기가 먼저 재주를 보여주면서 그만한 능력이 있는지를 시험하고자 했는데, 그 재주는 놀랍게도 ‘스스로 자기 목을 자르고 나서 떨어진 목을 다시 붙여서 소생하는 것’이었다. 혼인 승낙을 받기 위해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찾아온 딸은 아버지가 재주를 부려 다시 살아나면 자신의 혼인이 성사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떨어진 아버지의 목에 매운 재를 뿌려 다시 붙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이 전설은 최영 장군의 신비스런 능력을 강조하면서도 억울하게 죽은 최영 장군의 최후를 암시하고 있다.
[여기서 잠깐]최영의 시호 속에 억울한 죽음이 있다?

시호 중에서 근심할 민(愍) 자가 들어간 사람은 대체로 억울하게 죽은 사람에게 많이 쓰인다. 이성계에게 죽임을 당한 최영 장군의 시호는 무민(武愍)이며, 간신 김자점에게 죽은 임경업 장군의 경우도 충민(忠愍)이다. 어이없게 암살당한 고려 제31대 공민왕(恭愍王)의 이름에도 들어가 있고, 민충단(愍忠壇)은 임진왜란 때에 명나라 군사들이 우리나라에서 죽은 것을 가엾이 여겨 그들의 혼을 제사 지내던 곳으로 홍제원 근처에 있었다.
전국 곳곳에서 왜구와 홍건적을 맞아 싸워서 항상 이겼던 최영 장군에 대한 백성들의 지지는 대단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이 최영과 관련된 일부 지명과 최영 장군을 신으로 모시는 민간신앙이다.
앞서 말한 충북 보은의 말무덤 말채나무 이외에도 부산에는 감만동이라는 동네가 있다. 18세기의 기록물에는 감만동을 `감만이(勘彎夷)`로 표기하고 있는데 여기서 감(戡)은 ‘물리치다’라는 뜻이고, 만이(彎夷)는 동쪽과 남쪽의 오랑캐(동이,서융,남만,북적) 즉 왜구란 뜻이다. 따라서 감만동은 왜구를 물리친 곳을 의미한다. 감만동에는 무민사(武愍祠)라는 최영 장군을 모신 사당이 있는데, 최영 장군의 시호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그 밖에도 수영성 동문 밖에는 무민사, 자성대 공원에는 최영 장군의 사당을 두어 왜구를 섬멸한 최영 장군을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고 있다. 굳이 최영 장군을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는 이유 중의 하나를 《동국여지비고》라는 책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고려의 문하시중 최영이 관직에 있을 때 깨끗하고 (세금)징수를 하지 않아 이름을 떨쳤으므로 아전과 백성들이 사모하여 그 신을 모셔 숭배한다"고 하였다.
딸:최영 장군은 그 전설도 예사롭지 않고! 정말로 그에게 영험한 기운이 있는 게 아닐까요? 무덤에 소원이라도 빌어볼까..., 아빠:글쎄... 하하하. 얘기를 좀 더 들어봐~
제주도에도 최영 장군과 관련된 전설을 간직한 곳이 있는데, 바로 외돌개다. 고려 때 제주도에서 말을 기르던 몽고인(蒙古人)인 목호(牧胡)들 3000명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범섬으로 도망쳐 들어갔는데 최영 장군은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외돌개를 장군의 형상으로 치장시켜 놓고 최후의 격전을 벌였고, 목호들은 외돌개를 대장군으로 알고 놀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목호의 난은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인 사실이다.
고려 말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혔던 왜구들은 최영 장군을 가장 두려운 존재로 여겼다고 한다. 한번은 최영 장군이 왜구들과 대치하고 있을 때 어떤 어린아이가 적진에서 도망쳐 오자, 장수들이 아이를 불러서 적의 동태를 물었다. 그러자 아이는 "왜적들은 오직 머리가 하얗게 센 백수 최만호(白首 崔萬戶) 즉 최영 장군 만을 몹시 두려워하고 있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렇게 훌륭했던 최영 장군이 왜 이성계에게 죽임을 당했나요?
아빠 안타깝게도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했기 때문이지.
최영 장군에 대한 평가는 크게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 두 가지 정도로 나뉜다. 우선 긍정적인 것은 정몽주와 더불어 고려의 충신 중의 충신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부정적인 것은 그가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고집스런 사람이라는 점이다. 즉 고단한 이 땅의 백성들을 위해 망해가는 고려를 대신할 새로운 세상을 꿈꾸지 못했고, 또한 중국 대륙의 왕조가 원에서 명으로 교체되는 것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위화도 회군을 감행한 이성계 일파에게 불운하게 죽임을 당했다.
[여기서 잠깐]고집 센 최씨의 등장

최영은 이성계 일파에게 죽임을 당할 때, 자신에게 탐욕이 있었다면 무덤에 풀이 자랄 것이고, 결백하다면 무덤에 풀이 자라지 않을 것이라 유언하고 최후를 맞이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 실제로 무덤에는 풀이 자라지 않아서 세간에서는 그의 무덤을 적분(赤墳)이라 하였다. 이 이야기에서 파생되어 나온 말이 고집센 최씨를 가리켜 '최씨가 앉은 자리에는 풀도 나지 않는다' 라는 말이다.
《고려사》에는 최영 장군이 처형을 당하면서도 의연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처형을 받으면서도 말씨나 얼굴빛이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죽는 날에 개경 사람들이 모두 철시했으며, 멀고 가까운 지역의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듣고는 길거리의 아이들과 시골의 여인네까지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시신이 길가에 버려지자, 길가는 사람들이 말에서 내렸으며, 도당(都堂)에서는 쌀, 콩, 베, 종이를 부의로 보냈다. 《고려사》
최영 장군이 죽자 개성의 백성들은 이성계에 대한 원한으로 몇 날 몇 일을 통곡했다고 한다. 그들에게 최영은 곧 고려였던 것이다. 그후 전국 각지에서 최영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를 위한 사당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잠깐]개성 조랭이떡국

예로부터 정월 초하루에는 흰 떡으로 떡국을 끓여 먹었는데, 개성 지방에서는 조랭이떡으로 떡국을 만들었다. 조랭이떡은 일반적인 가래떡을 2cm 정도로 자른 뒤 가운데를 눌러서 누에고치 모양으로 만든 것인데, 속설에 의하면 대나무칼로 이성계의 목을 조르듯이 비벼서 떡을 썰어 만드는 풍습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이는 당시 최영 장군을 죽인 이성계에 대한 고려 백성들의 마음을 반영한 이야기이다.
최영 장군의 죽음으로 인해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했지만 개성의 민심은 이성계에 등을 돌렸다. 그 때문에 이성계는 개성에서 내몰려 새로운 수도인 한양으로 천도를 해야만 했다.
최영 장군은 사후(死後)에 한반도 무속인들 사이에서 최고의 숭배대상(장군신)이 되었다. 그의 삶이 청렴하고 군율이 엄정하였다는 점에서 영험함을 엿볼 수 있고, 또 그가 이성계에게 죽임을 당한 사연이 너무도 억울해 원혼이 되어 무속신앙의 숭배대상이 되기에 적합했던 것이다.
불쌍한 최영 장군... 이 곳의 숨은 사연은 참 우울하네요. 기분 전환을 겸해서 좀 색다른 사연이 있는 곳은 없을까요?
아빠 음... 좀 색다른 사연이라... 아! 반전 드라마 같은 사연이 있는 곳이 한 군데 있어. 다음 번 코스는 반구정이야!
최영장군묘 앞에서 아빠와 딸
최동군(글로벌사이버대학교 문화콘텐츠학부 외래교수)
사진/그림
박동현(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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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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