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역사

북한산에 숨어있는 순국선열들의 애국심

북한산에 숨어있는 순국선열들의 애국심
순국선열묘역
순국선열묘역 찾아 가는 길
1. 수유역 3번 출구에서 120번, 153번 버스를 탄다., 2.덕성여대입구 정류장에서 하차한다., 솔받근린공원에서 1구간과 2구간 중 어디로 갈지 선택한다., [1구간] 4. 봉황각 좌측 돌길을 올라가면 손병희 선생 묘소 도착!, [2구간] 4. 둘레길에서 4.19민주 묘지가 보인다., 5. 둘레길을 따라 쭉 걷다보면 광복군 합동묘지를 볼수있다.
아빠 이 안내지도를 볼래? 이 곳이 일제강점기를 전후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순국하신 애국선열들의 묘역이 있는 곳이야. 가운데 국립 4.19 민주묘지를 중심으로 해서 손병희 선생, 여운형 선생, 이용문 장군, 신숙 선생, 김도연 선생, 서상일 선생, 김창숙 선생, 양일동 선생, 유림 선생, 광복군 합동묘, 이시영 선생, 이준 열사, 신익희 선생, 이명룡 선생, 조병옥 박사 등의 묘가 이 곳에 몰려 있어.
와, 이 곳을 모두 돌아보려면 하루가 모자라겠어요!
아빠:둘레길 1,2구간에는 조국의 독릭을 위해 순국하신 애국선열들의 묘역이 많단다./ 딸:와, 이 곳을 모두 돌아보려면 하루가 모자라겠어요!
[여기서 잠깐]순국선열들의 자취를 찾아서

북한산 둘레길에서 순국선열묘역은 제1구간(소나무숲길 구간), 제2구간(순례길 구간)을 거쳐, 제3구간(흰구름길 구간)의 초입까지 약 6km 구간에 걸쳐 조성되어 있다. 특히 제2구간에 전체의 70% 이상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그래서 제2구간의 별칭이 순례길이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우이령길 입구’에서 출발하는 제1구간부터 둘러볼 것을 권장하고, 여유가 많지 않다면 덕성여대 인근의 ‘솔밭근린공원’에서 출발하는 제2구간에서 출발하여 살펴볼 것을 추천한다.
먼저, 둘레길 제1구간의 천도교 의창수도원(봉황각) 내에 있는 손병희 선생의 묘소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손병희?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아, 생각났다. 3.1 독립운동!!!
아빠 맞아. 뿐만 아니라 천도교와도 깊은 연관이 있는 분이시지.
천도교(天道敎)는 제1대 교조이자 순교자인 최제우(崔濟愚)가 1860년에 서양에서 들어온 서학, 즉 천주교에 반대해서 창시한 민족 종교인 `동학` 이 바뀐 이름이다. 동학이 천도교로 이름이 바꾸는 데는 정치적, 종교적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을 했는데, 이 때 제3대 교조인 손병희 선생의 역할이 컸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동학혁명)이 실패한 후, 제2대 교조 최시형(崔時亨) 마저 체포되어 순교함으로써 동학은 일대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대부분의 지도자급 인물들이 탄압을 받고 순교하는 일이 잇달았고, 당시 국내에 남아있던 동학 지도자 이용구는 노골적으로 친일행각을 벌이고 있었다.
이에 해외에 머무르고 있던 손병희 선생은 1905년에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이듬해 귀국한 뒤 조직을 재정비하면서 이용구를 포함한 친일교도들을 쫓아냈다. 또한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사상을 주장하고, 천도교 초기의 교리에서 추구하던 정교일치론 대신 정교분리의 새 원칙을 내세우는 등 커다란 변화를 이끌었다.
[여기서 잠깐]‘하느님’과 ‘하나님’의 차이점

손병희 선생이 주장한 천도교의 핵심사상인 인내천(人乃天) 은 `사람이 곧 하늘 또는 하느님` 이라는 인간 존중의 뜻을 포함하고 있다. 인간성 속에 영원한 존귀성이 있음과 사람의 마음 속에 하늘과 같은 보편성이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과 하나님을 혼동하는 사람이 있다. ‘하느님’이란 단어의 기원은 ‘하늘에 있는 분’이라는 뜻의 ‘하늘님(한울님)으로, 우리나라를 비롯한 중국, 일본 등의 동아시아권에서 ‘하늘(天)’을 절대지존으로 인식하는 사상에서 비롯되었다. 중국과 일본에서 최고 정치지배자를 하늘을 대신하는 천자(天子), 천황(天皇) 이라고 지칭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반면에 하나님은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에서 나온 말이다. 결국, 하느님은 어느 종교에서나 다 쓸 수 있는 보편적인 용어이지만, 하나님은 기독교에서 자신들의 하느님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우리나라 애국가에도 `하느님이 보우하사` 라는 가사가 있다. `하나님이 보우하사` 가 아니다.
아빠 네 말처럼 손병희 선생은 3.1 독립운동에서도 중추적인 역할을 하신 분이야. 저쪽에 있는 독립선언서 비석에 당시의 선언서 원문이 새겨져 있으니 가서 한번 읽어 보렴.
어... 분명 우리말인 것 같은데 도저히 못 읽겠어요.
아빠:독립선언서 비석에 당시의 선언서 원문이 새겨져 있으니 가서 한번 읽어 보렴/ 딸:한자가 너무 많아서 이해가 안되요~

답사tip. 손병희 묘는 둘레길로 진입해서 들어가는 길이 닫혀있고, 탐방안내소 옆에 있는 봉황각 안으로 들어가서 좌측 오르막 돌길을 오르면 들어가서 가까이 볼 수 있습니다.
[독립선언서]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 임을 宣言(선언)하노라. 此(차)로써 世界萬邦(세계만방)에 告(고)하야 人類平等(인류 평등)의 大義(대의)를 克明(극명)하며, 此(차)로써 子孫萬代(자손만대)에 誥(고)하야 民族自存(민족자존)의 正權(정권)을 永有(영유)케 하노라.
독립선언서의 첫 문장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오늘 우리 조선이 독립국이며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다. 이를 세계만방에 알려 인류 평등의 큰 진리를 환하게 밝히며, 이를 자손만대에 알려 민족의 자립과 생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독립선언서는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명이 한국의 독립을 선언한 글이다. 독립선언식 은 원래 학생들과 일반 민중들이 많이 모인 탑골공원에서 거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민족 대표 33인은 계획을 변경하여 ‘태화관’이라는 음식점에 따로 모여 손병희 선생의 주도로 선언식을 거행했다. 이렇게 선언식을 따로 진행한 이유는, 탑골공원에 모인 많은 인파들 사이에서 독립 선언을 진행하면 자칫 폭력 사태가 벌어질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비폭력, 평화를 표방한 3.1운동이 변질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이 날의 독립 선언을 시작으로 민족의 독립을 위한 활동은 국내는 물론 세계 전역으로 번져나갔는데, 둘레길 곳곳에는 펼쳐져 있는 순국 선열의 묘소가 바로 그 당시 조국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았던 이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오늘 그 많은 순국선열들의 묘소를 다 돌아보는 거예요?
아빠 몇 군데만 더 살펴볼까? 저 앞에 단주(旦洲) 유림(柳林) 선생 묘소의 입구가 보이는구나! 그 바로 앞쪽에는 섶다리가 있지.
[여기서 잠깐]‘섶다리’란?

섶다리는 통나무, 소나무 가지, 진흙으로 얼기설기 얹어 만든 임시다리를 말한다. 못 하나 쓰지 않고 오직 나뭇가지끼리 서로 지탱하게 만든 친환경적인 다리이다. 매년 물이 줄어든 가을 초입에 만들어 놓았다가, 눈과 얼음이 녹는 봄이나 여름 장마철 폭우에 떠내려갈 때까지 사용한다. 역사 기록에 남은 최초의 섶다리는 1428년(세종 10) 경북 청송군에 위치한 청송 심씨 시조묘에 만든 것으로, 한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가 1996년에 청송군이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도록 복원하였다. 이후 정선, 영월, 봉평, 횡성, 홍천 등 주로 강원도를 중심으로 전국의 곳곳에 섶다리가 만들어졌다.
딸:빨리 섶다리를 건너볼래요!!, 아빠:잠깐, 그전에 옆에 있는 유림선생의 묘소에 들려볼까?
유림 선생은 1894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17살이던 1910년 8월, 조선이 일제에 병합되자 선생은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충군애국(忠君愛國)`이라는 혈서를 쓰고 항일 독립운동에 몸바칠 것을 맹세하셨다. 그에게 조국의 독립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그런 그의 강직한 심성을 알 수 있는 일화를 하나 살펴보자.
유림 선생이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있던 중에 외아들인 유원식이 폐병으로 위독해졌다는 전갈을 받았다. 교도소 측은 더 이상 독립운동을 하지 않겠다고 서약하면 가석방을 시켜 아들을 볼 수 있게 해주겠다고 회유했다. 하지만 유림 선생은 `내 자식이 죽더라도 독립전선에서 죽는 것이니 내 아들도 바라던 바일 것이다, 나는 나가면 또 반드시 그 운동을 계속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 외아들 유원식은 나중에 일본군 장교가 되었는데, 그 후로 유림 선생은 아들을 단 한번도 만나주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군:독립운동을 하지 않겠다고 하면 가석방 시켜주겠소., 유림선생:필요없다. 나에겐 오직 조국 독립의 길 뿐이다., 이답답한 사람아. 유림 아들 유원식(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유림선생:이제 너는 더이상 내 아들이 아니다!
이와 비슷한 사연 중에는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인 조마리아에 관한 것이 있다. 조마리아 여사는 안중근 의사가 처형된 뒤에도 상해임시정부 인사들에게 여러 도움을 주는 등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이에 한국 정부는 2008년 조마리아 여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훗날 조마리아 여사가 안중근 의사에게 보냈다는 편지 하나가 공개 되었는데, 여순감옥의 헌병이었던 지바 도시치가 편지내용에 감동하여 자신의 일기장에 기록해 두었던 것이라고 한다.
[조마리아 여사가 아들 안중근에게 보낸 편지]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 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公憤)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맘 먹지 말고 죽으라. 대의를 위해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아마도 이 편지는 어미가 쓴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네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잘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재회하길 기대하지 않으니 다음 세상에서 선량의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거라."
우와, 감동적이네요!! 근데 아빠, 우리 너무 많이 걸어온 것 같아요. 아이고 다리야…
아빠 이번에는 한 분의 묘역이 아니라 여러 분을 함께 모신 광복군 합동묘역이야. 여기만 더 살펴보고 가자.
광복군은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重慶)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규군대다. 1919년에 설립된 임시정부는 내부의 혼란과 분열로 인해 규모는 축소되고, 재정상 어려움 때문에 운영도 부실해졌다. 그런 와중에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중국 각지에 흩어져서 개별적으로 독립운동을 하던 애국단체들이 통일된 군사활동과 외교활동을 하기 위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광복군을 만들었다. 광복군의 정식 명칭은 한국광복군이다.
중국 정부는 자기 영토 안에서 다른 나라의 독자적인 군대가 만들어 지는 것을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이에 광복군을 인정하는 대신 중국 국민당군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것은 곧 광복군이 중국군의 보조군대 역할을 하게 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군수물자와 재정지원을 받기로 하고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 이것은 당시 광복군 활동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때까지 정규군 없이 의병이나 비정규군만으로 항일무장투쟁을 펼치던 독립운동 세력에 광복군이라는 정규중앙군이라는 구심점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빠:여기선 젊은 나이로 광복군 활동을 하다가 순국한 17명의 넋을 기리고 있어. 우리 잠시 묵념하고 갈까?
[여기서 잠깐]광복군의 공식 전투기록

일본측 자료에는 한국 광복군과 일본군 사이의 공식전투 기록이 없다. 당시 광복군은 국내 진입을 위한 정탐과 파괴 공작 훈련 등을 계속 했는데, 본국으로 파견되기도 전에 일본이 항복을 선언해버렸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문서에 따르면 광복군의 총 병력 수는 1945년 4월에는 339명, 8월에는 700 명으로 그 규모가 커졌다. 한 때 김구 선생은 독자적으로라도 한국 광복군의 한반도 진주를 추진하고자 했는데, 군사지휘권이 중국에 있어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그렇게 광복군이 제대로 활약다운 활약을 펼쳐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일본이 항복을 선언했는데, 김구 선생은 이 소식을 듣고, `내게는 이것이 기쁜 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라며 개탄을 했다고 한다. 그토록 기다리던 조국의 광복 앞에서 김구 선생은 왜 개탄할 수 밖에 없었을까?
김구 선생은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이다. 가장 걱정되는 일은 우리가 이번 전쟁에 공식적으로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장차 국제간의 발언권이 박약하다는 것이다” 라고 우려하였다. 그리고 그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광복군의 국내진공작전이 실현되지 못했기 때문에 전후 한국의 독립 문제에 대해 임시정부가 가진 발언권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일본의 항복 이후, 광복군은 일본군으로 끌려갔던 한국 청년들을 다시 광복군에 편입시키면서 확군(擴軍) 작업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미군정 당국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광복군에 대해서도 무장 해제를 요구했다.
현재 우리나라는 명목상으로는 임시정부를 계승한다고 헌법에 밝히고는 있다. 하지만 사실은 미군정에 인정받지 못한 채로 정부 수립이 되었기 때문에 온전히 계승했다고 말하기가 어려운 측면도 있다. 마찬가지로 임시정부의 정규군이던 광복군 역시 국군으로 사실상 계승되지 못하고 미군정 산하의 국방사령부가 이를 대신했다. 그런 연유로 현재 국군은 창군연도를 1948년으로 잡고 있다. 만약 우리가 광복군의 정통성을 제대로 인정한다면, 국군의 창군시점을 광복군 창군일인 1940년 9월 17일로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북한산 둘레길에 이처럼 숨은 역사가 많은 줄 미처 몰랐어요. 그런데, 아빠! 우리집 근처인 고양과 파주에는 그런 것들이 없을까요?
아빠 없을 리가 없지. 다음 번에는 집 근처에서 숨은 문화재와 숨은 역사를 찾아볼까?
순국선열묘역에서 아빠와 딸
최동군(글로벌사이버대학교 문화콘텐츠학부 외래교수)
사진/그림
박동현(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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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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