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역사

북한산에 숨어있는 폭군 연산군의 최후

북한산에 숨어있는 폭군 연산군의 최후
연산군묘
연산군묘 찾아 가는 길 , 1. 쌍문역 2번 출구 근처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 2.버스정류장에서 130번 버스를 탄다., 3.연산군 정의공주묘 정류장 하차한다., 4.길 건너 연산군묘 도착!
아빠 여기가 그 유명한 폭군의 대명사, 연산군의 묘야. 조선 제10대 국왕인 연산군(1476~1506)은 즉위 초기에는 비록 짧은 기간 동안이라도 꽤 정치를 잘 했는데,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키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폭정을 일삼는 등 악행을 저질러서 결국 중종반정으로 쫓겨난 왕이야.
비록 쫓겨난 왕이라도 무덤만큼은 이렇듯 제대로 만들어 줬나 보네요.
아빠:여기가 그 유명한 폭군의 대명사, 연산군의 묘야.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폭정을 일삼는 등 악행을 저질러서 결국 중종반정으로 쫓겨난 왕이야., 딸:비록 쫓겨난 왕이라도 무덤만큼은 이렇듯 제대로 만들어 줬나 보네요.
연산군의 무덤이 처음부터 지금의 도봉구 방학동 연산군묘 자리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연산군은 중종반정으로 쫓겨난 뒤, 1506년에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를 가서 겨우 두 달 만에 그곳에서 병사를 했기 때문에 당연히 그 곳 강화도에 첫 무덤이 만들어졌다. 현재의 방학동 연산군묘 자리로 무덤이 옮겨온 것은 한 때 연산군의 왕비였던 폐비(거창군부인) 신씨가 강화도의 첫 연산군 묘를 한양으로 이장해 줄 것을 조정에 요청해서 1513년에 원래 이 곳에 있었던 의정궁주(義貞宮主) 조씨(趙氏) 무덤 위쪽에 묘를 쓰게 된 것이다.
중종 1권, 1년(1506 병인) 11월 8일(계미)
연산군이 사망하니 대신들과 상사 문제를 논의하다
(강화도) 교동 수직장 김양필, 군관 구세장이 와서 아뢰기를, “초6일에 연산군이 역질로 인하여 죽었습니다. 죽을 때 다른 말은 없었고 다만 신씨(폐비)를 보고 싶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上)이 애도하고 중사(中使) 박종생을 보내, 수의를 내리고 그대로 머물러 장례를 감독하도록 하고, “연산군을 후한 예로 장사 지내라.” 전교하였다.
중종 17권, 7년(1512 임신) 12월 12일(임자)
신씨가 연산군을 양주 해촌으로 이장할 것을 상언하다
신씨(愼氏)가 상언(上言)하여, 연산군을 양주(楊州) 해촌(海村)으로 이장(移葬)하기를 청하니, (승)정원(政院)에 전교하기를, “소원대로 들어 주고, 왕자군(王子君)의 예로 개장(改葬)하도록 하라.” 하였다.
의정궁주요? 궁주는 또 뭐죠? 공주를 잘못 쓴 것이 아닌가요?
아빠 아니, 당시에는 후궁을 궁주로도 불렀거든.
궁주(宮主)는 고려시대 후궁이나 공주를 일컫던 칭호의 하나였다. 조선 초기에도 이런 관행이 잠시 남아 있다가 왕의 딸은 곧 공주나 옹주로 명칭이 바뀌었는데, 그때까지도 아직 왕의 후궁은 궁주로도 불렸다. 그런데 의정궁주 조씨는 태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자마자 곧 태종이 사망하는 바람에 `숙원`이니 `숙용`과 같은 내명부 첩지를 정식으로 받지 못하고 단지 궁주의 작호만 받았다. 따라서 승은도 입지 못했고 후사도 없었다. 원래 방학동 연산군묘 자리의 땅은 세종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의 땅이었는데 후사가 없는 의정궁주의 제사를 임영대군이 맡으라는 어명이 있어서 1454년에 이 자리에 의정궁주의 묘를 쓰게 된 것이다. 의정궁주는 태종의 후궁이었으니 임영대군에게는 촌수로 따져서 할머니뻘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연산군 묘를 하필이면 왜 이 곳 임영대군의 땅으로 이장해 왔을까? 이는 한 때 연산군의 왕비였던 폐비(거창군부인) 신씨는 오빠가 신수근이고, 아버지는 신승선이었는데, 신승선은 임영대군의 딸과 결혼했다. 따라서 폐비 신씨는 임영대군의 외손녀가 되기 때문에 연산군 묘도 같이 이곳에 쓰게 된 것이다.
[여기서 잠깐]누이가 중요한가? 딸이 중요한가?

중종반정 전날 밤, 전 중추부사 박원종이 신수근의 집에 당도했다. 그는 신수근에게 반정의 당위성을 알리고 협조를 구하려고 했다. 도대체 신수근이 누구길래, 반정군이 그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일까? 신수근의 여동생은 연산군의 왕비였고, 동시에 신수근의 딸은 당시 진성대군(훗날 중종)의 부인 이었다. 따라서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이자 중종의 장인이 된다. 연산군의 폭정에 동조하여 권세를 누린 임사홍 등의 간신배들에 비해, 신수근은 중복된 왕실과의 혼인관계로 인해 부귀영화를 누릴 아주 좋은 조건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벼슬을 거부해서 조야에서 명망 있던 인물 중에 한 명이었다. 더구나 신수근은 연산군의 깊은 총애를 받고 있었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가 협조할 시, 반정군이 궁궐에 무혈입성하는 건 기정사실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박원종은 신수근이 누구 편에 설지 확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반정사실을 대놓고 이야기 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박원종이 교묘하게 한 마디를 물었다. '그대는 누이가 중요한가? 딸이 중요한가?' 신수근은 그 뜻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비록 지금 임금이 포악하다고 하나, 세자가 총명하니, 걱정할 수 없다.' 신수근의 선택에 따라서 어떻게 보면 조선의 역사가 뒤바뀔 수도 있었던 사건이었다. 그의 말을 들은 박원종은 기밀이 새어나갈 것을 우려한 나머지 그를 죽이게 되었다.
그런데 의정궁주의 무덤은 둘레가 사각형인데, 다른 무덤들은 모두 원형이에요. 왜 그렇죠?
아빠 응, 그건 왕조가 바뀌면서 장묘법에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야.
딸:의정궁주의 무덤은 둘레가 사각형인데, 다른 무덤들은 모두 원형이에요.
우리나라의 전통장묘법은 시대에 따라서 약간씩 다른 점이 있다. 특히 불교가 성행하던 고려시대와 유교가 국시였던 조선시대 장묘법의 큰 차이점 중의 하나가 바로 무덤의 외형이다. 왕릉을 제외하면 고려시대의 무덤은 사각형이 많은 반면에, 조선시대로 들어오면서 사각형 무덤이 점점 원형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렇지만 조선 초기에는 아직 고려의 관습이 많이 남아 있어 사각형 무덤이 많은데, 의정궁주도 조선초기의 사람이라 무덤이 사각형인 것으로 추측된다.
이렇듯 왕조가 바뀌면서 장묘법에도 변화가 생겨났는데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조선 초기에는 과도기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초기 조선왕릉 중 일부에서는 이런 과도기를 알아낼 수 있는 단서가 있다. 바로 조선왕릉의 정자각 주변에 있는 석물들 가운데 "소전대"와 "예감"이 그것이다. "예감(臺坎)"의 한자는 묻을 예臺, 구덩이 감坎 자를 쓰고, "소전대(燒錢臺)"는 불사를 소燒, 돈 전錢, 받침 대臺 자를 쓰는 데 사전을 찾아보면 둘 다 "왕릉제례의 마지막 절차인 지방과 축문을 불사르는 시설"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소전대는 조선초기 왕릉인 건원릉(태조왕릉), 정릉(태조왕비 신덕왕후릉), 헌릉(태종왕릉)에만 있고 그 이후의 왕릉에서는 자취를 감춘다. 왜 그럴까? 고려의 것을 이어받은 조선 건국초기의 왕릉 제례법에서는 고려의 관습대로 소전대에서 축문을 불사르고, 예감에는 그 재를 묻었다. 그런데 조선이 제대로 체계가 잡히자 불교를 국교로 했던 고려의 예법을 하나씩 걷어내고 그 대신 조선의 건국이념인 성리학적 유교예제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잘 알다시피 불교의 장례문화는 화장문화이고, 유교의 장례문화는 매장문화이다. 소전대는 말 그대로 태우는 곳이니깐 결국 화장문화의 상징으로 이해되었고, 불교문화를 없애는 차원에서 왕릉석물제도를 바꿔 버렸다. 그래서 소전대를 없앤 이후에는 예감에서 축문을 불사르고 재까지 묻어 버리게끔 예법도 수정을 했다.
왕릉석모양
[여기서 잠깐]소전대에서 무엇을 태웠을까?

소전대에 돈 전(錢)자가 들어가는 것으로 봐서는 조선초기에는 축문과 함께 다른 무엇인가도 함께 태운 것으로 추측된다. 소전대는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돈을 태우는 돈대`라는 뜻이다. 하지만 지방이나 축문은 결코 돈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돈을 태운다는 뜻의 이름이 붙어 있을까? 이런 추론이 가능하다. 원래 소전대에서는 돈, 특히 종이로 만든 지전(紙錢)을 태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도 우리의 장례문화 속에는 노잣돈(죽은 사람이 저승길에 편히 가라고 상여 등에 꽂아 주는 돈)이라는 민간풍습이 남아있고, 서양도 마찬가지인데 그리스로마 신화를 읽어 보면 죽은 사람들의 눈 위에 금화와 은화를 올려놓은 다음 화장을 하는 대목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결정적인 단서 하나! 조선초기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지은 고대소설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에서 소전대의 역할을 추정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부분을 찾을 수 있다. '이튿날 양생은 주육(酒肉)을 갖추어 개녕동 옛자취를 찾으니, 과연 새 무덤이 하나 있었다. 양생은 제전(祭奠)을 차려 슬피 울면서 지전(紙錢)을 불사르고 정식으로 장례를 치른 뒤, 조문을 지어 읽었다.'
연산군은 즉위하고 난 뒤 잠시 동안은 정치를 잘 하다가 갑자기 폭군이 되었다고 했는데 그게 정말인가요?
아빠 글쎄, 갑자기 그랬다기 보다는 왕권과 신권의 다툼 속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봐야 하겠지.
연산군이 갑자기 폭군으로 바뀐 것은 생모였던 폐비 윤씨의 사건(투기심 때문에 성종의 얼굴에 손톱으로 상처를 낸 것으로 인해 결국 사약을 받고 죽은 일)을 알고나서부터 생긴 복수심 때문이라고 흔히들 많이 알고 있고, 또한 TV 사극에서도 그런 식으로 많이 묘사가 되고 있다. 하지만 각종 사료를 분석하면 연산군은 이미 갑자사화(폐비 윤씨의 사건과 연루되어 일어난 사화) 훨씬 이전부터 폐비 사건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연산군이 폭군이 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왕의 권력인 왕권과 신하들의 권력인 신권의 부조화 때문이다. 조선은 전통적으로 신권이 강한 나라이기 때문에 역대 왕들은 신하들의 벽에 부딪혀서 자신의 뜻을 관철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영화 "광해"에서도 신하들이 임금 노릇을 하는 광대 "이병헌"의 뜻을 꺾기 위해서 차라리 자신들의 등을 밟고 가라고 요구하는 장면이 나오고, 각종 TV사극을 봐도 신하들이 모두 모여서 "아니 되옵니다. 통촉해주소서"라고 하면 임금도 어쩌질 못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그래서 연산군은 집권 초기에 강력한 왕권을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조선은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으로 이루어진 삼사(三司)라고 특유의 관청이 있었는데, 국왕과 국정에 대한 광범하고 강력한 간쟁과 감찰을 기본 임무로 갖고 있었다. 즉 목숨을 걸고라도 국왕이 잘못하는 일에 대해서는 비판을 했다는 뜻이다. 사실 이런 튼튼한 제도적인 장치 때문에 조선이라는 왕조가 500년 이상을 버텨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삼사의 중요한 직책을 `사림파(士林派)`가 모두 장악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삼사를 장악하고 사사건건 국왕에 대한 견제와 비판을 해온 사림파가 눈에 가시였던 연산군은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문제삼아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켜 사림파를 1차로 제거했다. 사화(士禍)는 말 그대로 사림(士林)들이 화를 입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국왕에 대한 견제세력의 중추역할을 담당했던 사림파가 힘을 잃자, 연산군은 강력해진 왕권을 국정개혁 등 건설적인 부분에 사용한 것이 아니라, 방탕한 생활과 개인적인 욕망을 채우는 데 썼다. 예를 들면 전국에서 미녀들을 선발해서 궁중에서 흥청(흥청망청의 어원)이라는 이름을 붙인 뒤에 각종 연회를 열어서 놀아났고, 사냥에 빠져서 곳곳에 출입을 금하는 금표를 설치하고, 금표 안의 모든 민가를 철거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럼 연산군의 폭정은 모두 사실이었던 거에요?
아빠 음. 아예 없는 일은 지어내지는 않았겠지만 일부 과장된 것도 있다고 봐야 할거야.
여러 가지 기록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볼 때 연산군이 폭정을 일삼은 것은 사실로 봐야 한다.하지만 일정부분은 반정세력이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과장한 측면도 있다. 우리는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고 따라서 연산군에 대한 적절한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최근 힘을 얻고 있다.
예를 들면 중종실록에는 연산군이 사냥과 유흥의 목적으로 민가를 철거하였다는 기록이 있지만, 연산군일기 9년 11월 2일자 등의 기사에서는 연산군이 국법에 따라 궐담 100척 이내에 있는 민가만 철거하라고 명했고, 그것도 소정의 보상금을 지급하고 또한 장차 다시 집을 세울 터까지 제공하라고 했다. 한편 연산군이 사헌부, 홍문관, 성균관 등을 기생들이 있는 집단으로 바꾸었다고 하는 기록도 있는데, 이 기생들은 원래부터 관청 내에 존재하던 가무악단이었다. 또한 큰어머니인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를 겁탈했다는 이야기도 떠돌고 있지만 박씨는 당시로는 노인 대접을 받던 50대였고 연산군은 혈기왕성한 20대의 나이였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 역시 반정세력이 자신들의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해 조작했을 가능성이 높다.
과연 연산군의 진짜 모습은?,
연산군:여봐라! 내 사냥을 해야 하니 거슬리는 민가를 모두 철거하라! 크크크!, 국법에 따라 궐담 100척 이내의 민가를 철거하되 보상금을 지급하도록 하라., 여봐라! 사헌부, 홍문관, 성균관을 기생으로 채워 넣도록 하라! 흐흐흐!, 음 저들은 원래 관청에서 일하는 가무악단 아닌가?
연산군과 관련하여 유명한 여인이 한 명 등장하는데 바로 장녹수이다. 장희빈, 정난정 등과 함께 역사를 좌지우지한 여자로서 TV 사극의 단골메뉴 중 하나로 등장하는 장녹수(張綠水, ? ~ 1506년)는 연산군의 후궁으로, 아버지는 충청도 문의현령을 지낸 장한필이고 어머니는 천민출신 첩이었다. 장녹수는 비록 아버지가 양반이었음에도 모계를 따라 천민의 신분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장녹수가 대단한 미색을 갖춘 것으로 오인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제 장녹수는 그리 뛰어난 미색은 아니었다고 한다. 대신 가무(歌舞)를 비롯한 다방면의 예술분야에 천재적인 재능을 겸비하고 있었고, 교태스럽고 요사스러워서 연산군을 어린애 다루듯 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녀가 행한 나쁜 짓이 보고될 때 마다 연산군은 비록 순간적으로 격노하였으나 그녀를 보면 즉시 희색을 띄었다고 한다. 다음은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장녹수에 대한 기록이다.
연산 47권, 8년(1502 임술) 11월 25일(갑오)
김효손(金孝孫)을 사정(司正)으로 삼았다.
김효손은 장녹수의 형부이고, 장녹수는 제안 대군(齊安大君)의 가비(家婢)였다. 성품이 영리하여 사람의 뜻을 잘 맞추었는데, 처음에는 집이 매우 가난하여 몸을 팔아서 생활을 했으므로 시집을 여러 번 갔었다. 그러다가 대군(大君)의 가노(家奴)의 아내가 되어서 아들 하나를 낳은 뒤 노래와 춤을 배워서 창기(娼妓)가 되었는데, 노래를 잘해서 입술을 움직이지 않아도 소리가 맑아서 들을 만하였으며, 나이는 30여 세였는데도 얼굴은 16세의 아이와 같았다. 왕이 듣고 기뻐하여 드디어 궁중으로 맞아들였는데, 이로부터 총애(寵愛)함이 날로 융성하여 말하는 것은 모두 좇았고, 숙원(淑媛)으로 봉했다. 얼굴은 중인(中人) 정도를 넘지 못했으나, 남모르는 교사(巧詐)와 요사스러운 아양은 견줄 사람이 없으므로, 왕이 혹하여 상사(賞賜)가 거만(鉅萬)이었다. 부고(府庫)의 재물을 기울여 모두 그 집으로 보내었고, 금은 주옥(金銀珠玉)을 다 주어 그 마음을 기쁘게 해서, 노비, 전답, 가옥도 또한 이루 다 셀 수가 없었다. 왕을 조롱하기를 마치 어린아이 같이 하였고, 왕에게 욕하기를 마치 노예처럼 하였다. 왕이 비록 몹시 노했더라도 녹수만 보면 반드시 기뻐하여 웃었으므로, 상주고 벌주는 일이 모두 그의 입에 달렸으니, 김효손은 그 형부이므로 현달한 관직에 이를 수 있었다.
중종 1권, 1년(1506 병인) 9월 2일(무인)
장녹수 등을 참하고 폐주의 금인, 화압, 승명패를 철패하다.
대신 등이 모두 아뢰기를, “숙용(淑容) 장녹수(張綠水). 숙용(淑容) 전전비(田田非), 숙원(淑媛) 김귀비(金貴非) 등 세 사람은 모두 화근의 장본인이니, 마땅히 속히 제거하여야 합니다.” 하니, 그리하라고 전교하였다. 모두 참형에 처하고, 가산을 적몰하였다. (후략)
하지만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 했던가... 결국 그녀는 1506년 중종반정으로 그 영화의 빛이 바래고 만다. 장녹수의 최후는 비참하였다. 반정이 성공하고 연산군이 폐위된 후, 반정군들에게 붙잡혀 군기시(軍器寺: 병기(兵器)의 제조 등을 관장한 관청) 앞에서 참형(斬刑) 되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참수당한 그녀의 시체에 돌을 던지며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북한산 둘레길은 숨은 이야기들이 넘쳐나는 것 같아요. 다음 번 행선지는 어디죠?
아빠 지금까지 내시묘역도 둘러보고 연산군묘도 둘러봤는데, 모두 조선시대인 옛날 이야기들이지.  이번에는 일제 치하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순국하신 선열들의 묘역을 한번 돌아볼까?
아빠와 딸
최동군(글로벌사이버대학교 문화콘텐츠학부 외래교수)
사진/그림
박동현(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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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04-21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