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역사

북한산에 숨어있는 기생의 애달픈 사랑

북한산에 숨어있는 기생의 애달픈 사랑
여기소터
여기소터 찾아가는 길
1. 구파발역 2번출구에서 가까운 버스정류장에서 704번 승차!, 2. 관세농원 정류장에서 하차해서 진입로로 들어간다., 3. 내시묘역길 푯말이 나오고 길을 따라 쭉 걸어간다., 4. 여기소 경로당(여기소터) 도착!
아빠, 표지판에는 여기가 내시묘역길이라고 되어 있지만, 여기까지 한 시간 넘게 걸어오는 동안 내시들의 무덤을 단 하나도 본 적이 없어요. 언제쯤 내시들의 무덤을 볼 수 있나요?
아빠 이 북한산둘레길 제10구간의 이름에 내시묘역길이라는 별칭이 붙은 것은, 2003년 11월에 바로 인근 백화사의 담장 뒤쪽에 있는 군부대 훈련장에서 이사문공파 내시묘역(李似文公派 內侍墓域)이 발견되었기 때문이야.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되었고, 규모도 컸고, 보존상태가 양호한 45기의 봉분이 몰려있는 조선시대 내시(內侍)의 집단묘역이었지. 그런데 말이야. 그 내시묘역이 2012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이! 묘가 한두 기도 아니라 45기나 된다면서요?
딸:여기 내시들의 무덤이 하나도 없는데 언제쯤 내시들의 무덤을 볼 수 있어요?
아빠:원래는 45기의 봉분이 몰려있는 조선시대 내시(內侍)의 집단묘역이었지, 그런데 그 내시묘역이 2012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아니 무덤이 다 사라졌다고요?
신문기사에 따르면 2003년 북한산 백화사 인근에서 국내 최초로 집단적인 내시묘역이 발견되었지만, 당국의 미온적인 대처 때문에 즉시 문화재로는 지정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북한산둘레길이 뚫리고, 땅값이 오르자 서울에 살고 있던 후손들이 내시묘역을 소리소문 없이 처분해 버렸고, 유골은 모두 화장 해 버렸다고 한다. 만약 발견 즉시 문화재로 지정이 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금할 길이 없다. 왜냐하면 문화재는 아무리 개인소유라 하더라도 문화재당국의 관리감독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후손들의 입장에서는 내시라는 조상의 신분이 부끄러웠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떳떳한 조상이라면 세상에 드러내 놓고 자랑을 했을 텐데, 신분이 내시였기 때문에라도 숨기고 싶었을 것 같아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뭔가 이상하네요? 내시가 후손이 있다고요? 그게 어떻게 가능하죠?
아빠 가능하지! 사실 조선시대 내시들은 결혼도 하고 가정도 꾸렸거든.
내시는 신체구조상 결혼을 해도 자손을 낳을 수는 없었지만 실제로는 양자를 입양하는 방식으로 대를 이어갔고 심지어 족보도 있다. 또한 조선의 내시는 중국과는 달리 음경까지 절단하는 게 아니라 고환을 제거해서 생식능력만 없애는 것이었기 때문에 성생활 자체는 가능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연산군 때 내시들 중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례가 많았고 그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연산 53권, 10년(1504 갑자년) 5월 3일(임진)
환관들이 진짜 고자인지를 검사케 하다
전교하기를, "지금 풍속이 거짓이 많아, 고자들도 진짜가 아닐 수 있으니, 승지 강징이 의원 김흥수(金興壽), 고세보(高世輔)와 함께 협양문(協陽門)밖에서 음신(陰腎) 이 있는지 없는지 상고하여 아뢰라." 하였다.
고자 검사에서 걸린 내관 김세필을 처벌하다
전교하기를, “내관 김세필(金世弼)은 음신이 아직 남은 것이 있는데도 속이고 환관(宦官) 중에 끼었으니 칼씌워 가두고, 그 수양 동생 이세륜(李世倫) 및 수양 사촌, 수양 아비 최결(崔潔), 결의 수양 동생 김만수(金萬壽) 등은 모두 잡아다 빈청에서 국문하되, 그 사실을 아는지 여부를 형신(刑訊)하라.” 하였다.
우선 여기서 용어정리를 먼저 하자. 우리가 알고 있는 "궁궐에서 일하는 거세된 남자"에 대한 정확한 용어는 "환관"이다. 그렇다면 내시가 환관이라는 뜻으로 바뀐 것은 어떤 이유에서 일까? 내시(內侍)는 원래 고려시대에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던 근시(近侍) 및 숙위(宿衛)의 일을 맡아보던 벼슬아치를 이르던 말이었다. 왕을 가까이서 모셔야 했기에 재예(才藝)와 용모가 뛰어난 세족 자제(世族子弟) 또는 시문(詩文), 경문(經文)에 능통한 문신(文臣) 출신으로 임명을 하였다. 하지만 원나라(몽고)의 간섭기 이후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환관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내시라는 용어가 내시부에 속하여 임금의 시중을 들거나 숙직 따위의 일을 맡아보던 거세된 남자들을 뜻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조선이 중국과는 달리 환관들이 결혼을 하고 입양을 통해 아이를 두는 등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허가했던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유비, 관우, 장비가 주인공인 소설 삼국지의 첫 장면은 십상시(十常侍)라고 알려진 10명의 내시(환관)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부정부패로 한(漢)나라를 망쳐가고 있는 대목이다. 그만큼 중국의 환관은 자신들의 욕구를 부와 권력에 대한 집착으로 풀었지만, 조선의 내시들은 부와 권력 대신에 가정에 몰두할 수 있게 해서 환관이 권력화되는 폐단을 어느 정도 줄일 수 있었고, 또 환관들도 지킬 가정이 있으니 스스로 행동을 조심하게 되었다.
여기소터에 다 왔다. 《여기소터 표지판》을 한번 천천히 읽어보렴.
아빠 네, "조선 숙종 때 북한산성 축성에 동원된 관리를 만나러 먼 시골에서 온 기생이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이 못에 몸을 던졌다는 전설에서 너(汝)의 그 사랑(其)이 잠긴 못(沼), 곧 여기소라 하였다고 전해온다" 음... 그런데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아요.
아빠:여기소터에 다 왔다. 《여기소터 표지판》을 한번 천천히 읽어보렴.
딸:너(汝)의 그 사랑(其)이 잠긴 못(沼). 음... 그런데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아요. '여기 소'가 있다고 그런 줄 알았더니ㅋ, 이렇게 짠한 이야기에 그런 썰렁한 개그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 여자가 연못에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는 우리 주변에서 약간씩 변형된 전설의 형태로 많이 회자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류의 전설이 생긴 곳은 대부분 국가차원의 큰 공사가 있었던 곳 근처라는 공통점이 있다. 예를 들면 경주 불국사의 무영탑(無影塔) 전설이다. 무영탑은 그림자가 없는 탑이라는 뜻으로 석가탑의 별칭이다. 탑을 쌓는 노역으로 강제 동원된 남편을 찾으러 간 아내가, 부처를 모실 신성한 장소에 여자는 발을 들일 수 없다는 감독관들의 제지로 남편을 만나지 못하고, 탑이 완성되어 근처 신령스런 연못 물에 탑의 모습이 비치면 그때는 남편을 만날 수 있다는 말에 오랜 기간 기다렸지만, 연못 물에는 탑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아, 기다림에 지친 끝에 그 연못 속에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가 바로 무영탑과 영지(影池)전설이다.
그런데 아빠, 표지석에는 기생이 관리를 만나러 왔다고 하는데, 관리는 양반일 것이고 기생은 천한 신분일 텐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요? 혹시 춘향과 이도령 이야기의 변종인가?
아빠 기생은 천민에 속하지만 시와 글에 능한 교양인, 지식인으로서 대접받는 특이한 존재였거든.
기생은 옛날 잔치나 술자리에서 노래, 춤 그리고 풍류로 참석자들의 흥을 돋우는 일을 직업으로 삼았던 여자다.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는 기생은 노비와 마찬가지로 한번 기적(妓籍)에 올려지면 죽을 때까지 천민이라는 신분적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심지어 기생과 양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더라도  천한 계급은 모계를 따른다는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에 따라서 아들은 노비, 딸은 기생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기생은 사회계급으로는 천민에 속하지만 시와 글에 능한 교양인, 지식인으로서 대접받는 특이한 존재였다.
[여기서 잠깐]말을 알아 듣는 꽃

해어화(解語花)는 '말을 알아 듣는 꽃'이라는 뜻으로 미인을 뜻하거나 화류계의 여인, 기생을 말할 때도 쓰인다. 이와 관련된 고사를 살펴보면 중국 당나라의 현종(玄宗)이 비빈(妃嬪)과 궁녀들을 거느리고 연꽃을 구경하다가 양귀비(楊貴妃)를 가리켜 '연꽃의 아름다움도 [말을 이해하는 이 꽃]에는 미치지 못하리라'고 말했다는 것에서 유래하고 있고, 해어지화(解語之花)라고도 한다.
그럼 춘향이도 어미가 기생이니 기생이 될 수 밖에 없는 신분이었을까? 원칙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기생도 양민이 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속신(贖身)이라고 해서, 양반의 첩이 되는 경우에는 천민의 신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이 경우의 대표적인 사례가 기생 `일타홍`이다.
일타홍(一朶紅)은 조선중기 때 미색이 빼어난 기생으로 그의 남자는 심희수였다. 선조 때 좌의정까지 지낸 심희수(沈喜壽 1548~1622)는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약간 버릇없이 성장을 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십대의 젊은 나이에 어느 양반집 연회에 놀러 갔다가 일타홍을 보고 완전히 반해 버렸다. 일타홍도 심희수를 보아하니 비록 현재는 조금 모자란 점이 있어도 장래성이 있어 보였기에 둘은 정식으로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함께 살게 되었다. 아무리 정식 혼례를 올리지 않은 첩이라고는 하지만 심희수의 집안에서 기생과 함께 살도록 허락해 준 것은 아마도 심희수가 아버지가 없이 성장한 관계로 평소 버릇없었기 때문에 막무가내로 우긴 것이 아닐까 짐작한다.
심희수의 첩이 된 일타홍은 좀 남달랐다. 자신의 신분이 면천(免賤)된 것에 만족하지 않고 심희수를 큰 인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즉, 심희수가 자신에게 너무나 빠져서 공부를 등한시 하자 `과거에 급제한 뒤에 나를 찾으라`는 편지를 남겨두고 집을 나와 버렸다. 그 이후 심희수는 일타홍을 다시 만나기 위한 일념으로 공부에 더욱 정진해서 드디어 과거에 급제를 했고 약속대로 일타홍과 다시 만났다.
하지만 아무리 일타홍을 좋아해도 현실의 벽은 높아서 양반이 기생과 정식결혼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심희수는 양반집 규수와 정식 결혼을 했는데 들리는 말로는 그 결혼도 일타홍이 추천했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일타홍은 자신 보다는 정실부인에게 심희수가 더 잘하라고 충고를 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일타홍이 병이 들어서 죽고 말았는데 일설에는 심희수가 너무 자신만을 찾고 정실부인에게 소홀하자 가문을 위해 자결을 했다는 말도 있다. 아무튼 일타홍 때문에 분발해서 과거에 급제를 했고, 출세가도를 달렸던 심희수는 사랑하던 일타홍이 죽자, 일타홍이 기생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고양시에 있는 자신의 선산에 장사를 지냈다.
심희수:오! 이쁘다! 엄청 이쁘다!, 일타홍:음... 지금은 별 볼일 없지만 장래성은 있어 보이네.
일타홍:저 때문에 공부를 등한시 하시니 저는 이제 떠납니다. 과거에 급제한 뒤에 저를 찾으세요. - 일타홍 - 심희수:아흑~ 안돼!, 일타홍:서방님, 저보다는 부인에게 더 잘해주셔야 제 마음도 편합니다., 심희수:알았소, 알았소~ 또 편지 쓰고 가면 아니 되오!, 심희수:그대 덕분에 이렇게 잘 살아올 수 있었소. 정말 고맙소. 잘 가시오...
심희수가 일타홍의 장례 때 상여수레(壽車)와 함께 금강나루에 다다랐을 때 마침 봄비가 내렸다고 한다. 봄비가 부슬부슬 내려 일타홍의 관을 덮은 붉은 명정이 젖는 모습을 보면서 심희수는 시 한 수를 읊는다. 그 시가 유명한 ‘이별눈물(有倬)’이다.  (출처: 《고양들메길》, 최경순)
有倬 (유탁, 이별눈물) - 沈喜壽 (심희수)
一朶芙蓉載柳車 (일타부용재유거) 한 떨기 연꽃은 버들상여에 실려 있는데
香魂何處去躊躇 (향혼하처거주저) 향기로운 영혼(香魂)은 어딜 가려 머뭇거리나.
錦江春雨丹旌濕 (금강춘우단정습) 비단강(錦江) 봄비에 붉은 명정(銘旌) 젖어 드니
應是佳人別淚餘 (응시가인별루여) 아마도 고운 우리 님 이별 눈물인가 보다.
와, 멋지다! 문제아를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다니! 그런데 일타홍(一朶紅)은 무슨 뜻이죠?
아빠 한자로 한 일, 늘어질 타, 붉은 홍 인데, 나뭇가지에서 휘늘어진 `한 떨기 붉은 꽃` 이라고 해석할 수 있지.
한편, 여기소터의 사연과 거의 비슷한 실제 사례도 있다. 기생 홍랑(洪娘)과 고죽(孤竹) 최경창의 이야기인데, 심희수보다 9살 연상이었던 최경창(崔慶昌, 1539~1583)은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알려질 만큼 다방면에 문학적 능력을 가진 인재였다. 그러다가 함경도 변방으로 부임을 하게 되었고, 거기서 관기였던 홍랑을 만났다.
홍랑은 일타홍처럼 뛰어난 미색은 아니었지만 글과 가무는 천하일품이었다고 한다. 최경창과 홍랑은 시를 주고 받으면서 서로의 진가를 알아봤고, 사랑에 빠져서 아들까지 낳았다. 그렇지만 기생과는 정식결혼이 될 수 없었고, 게다가 임기가 끝난 최경창은 한양으로 돌아왔지만 홍랑은 한양으로 같이 올 수가 없었다. 당시 법으로는 함경도와 평안도는 변방의 군사요충지였기 때문에 그 지역 주민들은 도성출입을 못하게끔 되어 있었고, 게다가 홍랑은 관청에 소속된 관기였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잠깐]홍랑의 글재주

홍랑의 글재주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단서가 있다. 최경창과 헤어질 때 홍랑은 국어교과서에도 나오는 아래와 같은 유명한 시조를 불렀다.

# 홍랑의 시조

묏버들 갈해 것거 보내노라 님의손에(산 버드나무 가지 꺾어 보내드리옵니다, 임에게)
자시난 창(窓) 밧긔 심거 두고 보쇼셔.((임께서)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 두고 보옵소서.)
밤비에 새닙곳 나거든 날인가도 너기쇼셔.(밤비에 새잎 돋아나거든 나를 본 것처럼 여겨 주소서.)
그러다가 한양의 최경창이 병이 났다. 아마도 홍랑을 못 봐서일까? 아무튼 최경창이 몸 져 누웠다는 소식을 들은 홍랑은 국법을 어기고 수 천리 길을 걸어서 한양까지 왔다. 그 사실이 알려지자 최경창은 사헌부에서 탄핵을 받아서 파직되고 두 사람은 또다시 강제로 이별을 해야 했다. 그리고는 최경창은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말았다. 최경창이 죽자 홍랑은 최경창의 무덤 옆에서 3년 간의 시묘살이를 했다고 한다. 그런 절절한 사랑을 알고 있는 최경창의 후손들은 최경창과 정실부인의 합장묘 밑에 홍랑의 무덤을 만들어서 지금까지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 파주시 교하의 홍랑과 최경창의 묘
그래도 홍랑은 최경창을 만나기라도 했지만, 여기소에 빠져 죽은 기생은 결국 사랑하던 관리를 못 만났군요! 불쌍해라. 아빠, 이제 우리 어디로 가나요?
아빠 내시이야기를 하면서 《연산군》 이야기가 나왔으니 연산군묘로 가 볼까? 연산군묘는 북한산둘레길 제20구간(왕실묘역길 구간)에 있어.
연산군묘로 향하는 아빠와 딸
최동군(글로벌사이버대학교 문화콘텐츠학부 외래교수)
사진/그림
박동현(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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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04-04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