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역사

남한산성에 숨어있는 반성과 경고의 메시지

남한산성에 숨어있는 반성과 경고의 메시지
수어장대
수어대장 찾아가는 길, 1. 산성역 1번 출구 근처 폴리텍 대학 버스 정류장에서 9번 혹은52번 버스 탑승!, 2. 남한산성 로터리(종착역)에서 하차!, 3. 남한산성 지화문에서 서문방향으로 산을 오른다. 4.수어장대 도착
와! 여기서 내려다보는 한강과 서울이 참 멋있네요. 게다가 멋진 2층 건물도 있어요.
아빠 이 건물의 이름은 《수어장대(守禦將臺)》라고 해.
수어장대? 무슨 뜻이에요?
아빠 한자 뜻을 풀이하자면 임금(禦)을 수호(守)하는 장대라는 뜻이야.
딸:헥헥~ 오랜만에 산에 올라오린까 힘드네요~;; 아빠:네가 요즘 운동이 부족해서 그래~, 딸:이 건물의 이름이 <수어장대>라구요? 무슨 뜻이에요?, 아빠:한자 뜻을 풀이 하자면 임금(禦)을 수호(守)하는 장대라는 뜻이야.
<장대>는 필수 성곽구조물 중의 하나로 장수가 올라서서 군사를 지휘하도록 높은 곳에 쌓은 대(臺)를 말한다. 현대의 전쟁은 장군이 후방의 사령부에서 지휘하는 반면, 옛날에는 장수가 직접 전장을 관찰하며 지휘했기 때문에 지휘소의 역할을 하는 장대는 성내에서 가장 높거나, 지휘와 관측이 용이한 곳에 설치하는 것이 상례였다.
남한산성의 장대에 《수어장대》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바로 아래쪽에 있는 《남한산성 행궁》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남한산성은 백제시대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지만, 지금과 같은 형태의 산성이 만들어 진 것은 조선후기 광해군과 인조를 거치면서부터다.
조선은 외적의 침입 시 임금이 임시로 대피할 곳을 크게 세 곳에 만들어 두었는데, 강화도와 북한산성, 그리고 남한산성이다. 강화도야 섬이라는 천혜의 요새조건을 갖추고 있지만 북한산성과 남한산성은 강화도에 비해 군사상 방어하기가 불리했다. 따라서 조선의 5개 중앙군영 중에서 《총융청(摠戎廳)》은 북한산성을 중심으로 수도 한양을 방어했고, 《수어청(守禦廳)》은 남한산성에 본청을 두고 한양의 동남쪽에 방어선을 쳤다. 따라서 남한산성의 《수어장대》는 수어청의 총사령관인 수어사(守禦使)가 지휘하는 장대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옆에 조그만 건물은 뭐에요? 안에 뭐가 있는 것 같은데요?
아빠 그렇지 않아도 지금 아빠가 설명해 주려고 했지. 이 안에 《무망루》라는 편액이 걸려있단다.
딸:안에 뭐가 있는 것 같은데요?, 아빠:이 안에 《무망루》라는 편액이 걸려있단다.
《수어장대》 바로 옆에 작은 건물이 하나 있다. 그 건물 안에는 《무망루(無忘樓)》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루(樓) 라는 말은 누각, 즉 다락을 뜻하고 누각이 되려면 최소한 2층 이상의 건물이어야 한다. 하지만 《무망루》 편액이 걸려있는 건물은 아무리 봐도 누각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 편액의 원래 위치가 지금 그 자리가 아님을 금방 눈치챌 수 있다. 그렇다면 원래 위치는 어디였을까? 바로 옆에 있는 《수어장대》 건물 2층 안쪽이었다. 그렇다면 왜 《무망루》 편액을 별도의 건물로 이동을 시켰을까? 그것은 《무망루》 편액의 글자 뜻과 깊은 관련이 있다.
《무망루》를 해석하면 `절대로 잊지 말자`라는 뜻이다. 무엇을 잊지 말자는 것일까? 바로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치욕과 북벌을 계획했다가 그 꿈을 채 이루지 못하고 죽은 효종의 비통함을 잊지 말자고 영조가 이름 지은 것이다. 원래의 위치인 《수어장대》 2층 안쪽에 있었더라면 일반인들은 《무망루》 편액을 전혀 볼 수 없기 때문에 1989년에 별도의 전각을 만들어서 이동시켰다. 역사는 계속 반복되기 때문에 우리들은 《무망루》 편액을 보면서 지난날을 반성하고, 동시에 보다 나은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아, 그래서 《무망루》를 볼 수 있게 이렇게 따로 건물을 만들어 놓았구나. 그런데 아빠 궁금한 게 있는데요. 아까 강화도가 천혜의 요새라고 했는데, 인조는 왜 거기로 안가고 여기 남한산성으로 온 거에요?
아빠 인조도 당연히 강화도로 가려고 했었지.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던 거야.
인조가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가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9년 전, 조선과 후금(後金, 훗날 청淸) 간에 겪었던 정묘호란 때문이었다. 정묘호란을 통해 청나라는 조선침략에 대한 유용한 정보를 얻은 반면, 조선은 정묘호란이란 예방주사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그럼 청나라가 정묘호란을 통해 얻은 유용한 정보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조선 왕이 강화도로 대피하면 수군이 없는 청나라로서는 닭 쫓던 개처럼 되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자신들의 보급로와 후방이 크게 위협받는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청나라로서는 가장 급선무가 조선 왕이 강화도로 대피하는 것을 사전에 미리 막고, 전국적으로 의병들이 조직되기 전에 빨리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정묘호란 때 청나라는 여느 다른 전쟁처럼 적군인 조선군과 싸워가면서 남하를 했다. 조선의 군사전략은 기본적으로 농성전이다. 즉 모든 군사들이 읍성, 산성 등에 들어가서 방어전을 하면서 필요 시 성을 빠져 나와 적을 공략하는 전략이다. 특히 산이 많은 우리나라는 대대로 이런 전략이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병자호란 때 청나라는 조선군과 전혀 싸우지 않고 곧바로 한양을 향해 진격해 들어갔다. 청군(淸軍)이 침입했다는 소식을 들은 조선군들은 여느 때처럼 모두 산성 등에 들어가서 싸울 채비를 하고 있었지만 정작 적군은 그냥 자기 앞을 지나쳐 가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청군은 선두의 주력부대를 모두 기병으로 편성했다. 따라서 보병 위주의 조선군들은 성에서 나와도 적군을 따라갈 수도 없었다.
결국 병자호란이 발발했다는 사실이 한양에 알려졌을 때, 청군은 이미 개성 근처까지 진군해 있었다. 국가의 비상사태를 알리는 봉화는 일찌감치 끊어져 버렸고, 파발(전령)이 죽어라고 달려봐야 기병인 청나라 주력보다 약간 빨랐을 뿐이었다. 게다가 청군은 일부를 선발대로 보내서 한양에서 강화로 가는 길목을 먼저 차단해 버렸다. 따라서 청군의 남하 소식에 접한 인조와 조선 조정은 처음에는 강화도로 도망치려고 했으나 길이 청군에 의해 이미 막혔다는 소식을 접하고 남한산성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군:모두 성 안에 들어가 전투에 대비하라! 엇! 저놈들이 왜 그냥 가지?
청군:자! 우리는 무조건 한양으로! Go Go Go!, 조선 조정:전하! 청나라가 또 쳐들어 왔습니다!, 전하! 청나라가 지금 개성까지 와 있다고 합니다!, 전하! 강화도로 가는 길은 이미 막혔다고 합니다!
아, 그래서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할 시간도 없었군요. 그래도 의병들이나 지방에 흩어져 있던 관군들이 모여들어서 청군과 전투를 벌이지는 않았나요?
아빠 물론 지방에서 지원군이 올라왔지. 하지만 조선군은 전투준비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어.
병자호란 당시 청군은 오로지 한양과 인조만을 노려서 곧장 남하해 왔기 때문에 지방에는 피해가 거의 없었다. 특히 충청, 전라, 경상지방이 건재했기 때문에 남한산성을 포위한 청군을 바깥쪽에서 역포위하면 전세를 뒤집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각 도에서 올라오던 근왕군은 제대로 합류하지 못한 채 청군의 별동대에게 각개격파 당했다. 심지어 경상감사가 이끄는 경상도의 근왕군은 포수 8천을 포함, 총 규모 약 4만에 이르는 대규모 병력이었지만 겨우 기병 300명이 포함된 1,300명의 청나라 군대에 궤멸 당했다.
청나라보다 수십 배의 병력을 가지고도 조선군이 패배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임진왜란을 겪은 후 조선군은 조총의 위력을 실감해서 상당수가 조총으로 무장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중앙군에 비해 지방군은 조총 훈련도가 매우 낮았다. 청군의 정예기병 300명이 조선군을 향해 돌격하자마자 조선군은 지레 겁을 먹고 사정거리도 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마구 사격한 끝에 화약과 화살을 모조리 소모해 버렸다. 그 와중에 보급 중이던 화약마저 폭발하여 군사 수십이 죽자, 조선군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했다. 이 전투가 바로 한국사 최악의 패전 중 하나인 쌍령전투이다.
그럼 쌍령전투에서 지는 바람에 청나라에 항복을 한 건가요?
아빠 그렇진 않아. 쌍령전투 패배보다 더 절망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거든.
남한산성은 안쪽에서 보기에는 성벽이 그다지 높지 않지만 밖에서 보면 비탈진 산 경사면과 함께 상승작용을 일으켜서 매우 높게 보이고, 이는 공격하는 쪽에서는 매우 부담으로 작용한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청군이 병기의 날도 대어 보지 못한 성’이라고 할 정도였다. 그리고 청군의 장수들도 “이 성의 험함은 참으로 천연적인 것입니다. 만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자 한다면 반드시 죽고 상하는 자가 많게 될 것이니, 송성(松城)을 굳게 지켜 성이 스스로 마르기를 기다리는 것이 낫습니다.”라고 할 정도였다. 그런데 왜 항복을 했을까?
△ 안에서 본 남한산성 성벽
△ 밖에서 본 남한산성 성벽
우선 식량과 추위가 문제였다. 조선은 전쟁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급작스레 남한산성으로 도망쳤기 때문에 성 내부의 군사 1만 2천과 백성들을 먹일 비축식량과 물자가 턱없이 모자랐다. 쌍령전투 이후 완벽히 고립된 상태에서 조선군의 사기는 완전히 떨어졌고 때마침 한 겨울의 추위 탓에 수많은 사람이 얼어 죽었다. 결국 임금조차도 죽 한 그릇으로 하루 끼니를 이어가는 상황에 이르렀고 굶어 죽는 사람이 결국 속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원인은 강화도 마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이는 조선군의 항전 의지를 완전히 꺾어 놓았다.
아까 강화도는 천혜의 요새라고 했잖아요. 게다가 청나라 군사는 수군도 없었을 텐데 어쩌다 함락된 거에요?
아빠 거기에 또 한심한 사연이 있단다.
강화도는 왜 청나라에게 함락당했을까? 앞서도 언급했듯이 청나라는 정묘호란의 경험을 헛되이 버리지 않고 철저히 준비를 했다. 우선 인조가 강화도로 가는 길은 최대한 빨리 차단했고, 명나라 군대와의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명의 수군들을 청군에 합류시켰다. 반면 조선은 어땠을까?
인조는 당시 영의정이던 김류와 상의해서 그의 아들인 김경징(金慶徵)를 강화수비를 총책임지는 강도검찰사(江都檢察使)로 삼았다. 그러나 김경징은 자신의 직분을 이용하여 강화피난길에 자기집안사람의 편리만을 봐 주었다. 게다가 강화에 들어와서는 매일 술만 먹고 큰 소리만 쳤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김경징은 교만하고 어리석었으며 날마다 장기나 두고 엉망진창으로 술에 취할 뿐이었다. 대군과 대신이 갑곶에 군사를 보내 지키도록 권하였으나 김경징은 되놈 군사가 날아 건널 것인가 하고 큰 소리만 쳤다. (중략) 청군 장수 용골대는 일대의 군사를 거느리고 통진 문수산 위에 이르러 강화를 굽어보니 강화섬은 손바닥만 하고 갑곶에도 지키는 군사가 없었다. 그래서 민가를 헐어 그 재목으로 뗏목을 만들고 건너가 섬을 함락시켰다."
청군이 강을 건너오자 김경징은 그제서야 부랴부랴 군사들에게 조총과 화약을 나누어주었다. 하지만 화약이 몽땅 젖어있어 조총은 그냥 막대기에 불과했다. 천혜의 요새라고 불리는 강화도는 그렇게 어이없이 청나라에 함락당했다.
병자호란 이야기를 들으니 속이 참 답답하네요. 제대로 준비를 했으면 그렇게 까지 치욕을 겪지는 않았을 텐데…
아빠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를 이제 알겠니? 무망루 현판이 우리에게 묵묵히 가르쳐주듯이 역사란 과거의 경험에서 배우는 거란다.
이렇게 가볍게 산길을 걸으면서 숨은 역사 이야기 하는 것도 재미있네요.
아빠 그래? 그럼 다음에는 북한산 둘레길을 걸으면서 숨어있는 역사를 찾아볼까?
남한산성 앞의 아빠와 딸
최동군(글로벌사이버대학교 문화콘텐츠학부 외래교수)
사진/그림
박동현(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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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03-18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