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역사

선릉에 숨어있는 ‘조선왕릉 도굴사건‘

선릉에 숨어있는 조선왕릉 도굴사건
선정릉 전경
선정릉 찾아가는 길 , 1. 선릉역 8번 출구에서 출발!, 2. 선정릉 입구 도착해서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입장한다. 3. 성릉 성종왕릉을 둘러본다. 4. 성종왕릉과 가까운 성종왕비정현왕후릉을 둘러본다. 5. 정릉 중종왕릉까지 관람한다.
와, 강남 한 가운데 이런 산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근데 아빠, 조선왕릉과 관련된 숨은 역사라면 전에 가봤던 동구릉이나 서오릉 같이 왕릉들이 떼로 몰려있는 곳이 훨씬 더 많은 이야기가 있을 것 같은데요. 굳이 여기 오자고 하신 이유가 뭐에요?
아빠 그건 선릉(제9대 성종과 성종비의 왕릉)과 정릉(제11대 중종의 왕릉)이 조선왕릉 중에서 유일하게 도굴된 왕릉이기 때문이야. 조선왕실로서는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참담한 일이 벌어진 거지.
아니, 누가 감히 왕릉을 도굴을 해요? 도굴하다 걸리면 능지처참을 당할 텐데…
딸:아빠, 많은 왕릉 중에 굳이 여기에 온 이유가 뭐에요?, 아빠:그건 선릉과 정릉이 조선왕릉 중에서 유일하게 도굴된 왕릉이기 때문이야. 와, 강남 한 가운데 이런 산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여기서 잠깐]우리는 ‘능지처참(陵遲處斬)’을 잘 못 알고 있었다?

능지처참(陵遲處斬)은 형벌중에서도 가장 가혹한 형벌의 대명사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 능지처참이란 말을 많이 들어봤지만 실제 어떤 형벌인지는 잘 모른다. 인터넷 사전에도 “죄인의 사지를 잘라내고 마지막에 심장을 찌르고 목을 베어 죽였다” 정도로 설명하고 있고, TV사극에서 통해서 본 정도로는 나라의 대역죄인들을 수레에 양팔과 양다리를 묶어놓고 찢어 죽이는 정도로 알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런 형벌은 능지처참이 아닌 거열형(車裂刑) 이다. 수레 거, 찢을 열, 형벌 형! 능지형은 너무 가혹하기 때문에 차마 방송에서는 보여줄 수가 없다.‘능지처참`은 `능지`형을 집행한 후에 머리를 잘라내는 참형에 처한다는 말이다. 능지형은 고대 중국에서 만들어진 형벌인데, 많은 사람이 모인 장소에서 죄인을 기둥에 묶어 놓고 살점을 포를 뜨듯 베어내되, 한꺼번에 많이 베어내서 죽지 않도록 조금씩 베어내어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이는 형벌이다. 이때 살을 베어내는 망나니가 실수로 죄인을 빨리 죽게 만들면 오히려 망나니가 처벌을 받기 때문에 망나니도 아주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고 한다.우리나라에도 능지처참을 시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조 때 사육신이 능지처참을 당했다고 나오고, 또한 광해군 때도 허균이 모반죄로 능지처참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허균이라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쓴 바로 그 사람이다. 허균의 홍길동전은 당시 조선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성리학적 기치관인 적자와 서자간의 차별을 부정하고 새로운 이상국인 율도국을 건설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집권계층에게는 나라의 근본질서를 무너뜨리는 역모죄에 해당된다고 봤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만 1년째인 1593년(선조 26년) 4월13일, 선조실록에는 <경기 좌도 관찰사 성영(成泳)이 “왜적이 선릉과 정릉을 파헤쳤다”고 치계하다>라고 하는 청천벽력과 같은 기사가 등장한다. 아무리 절대지존인 왕의 무덤이라도 전쟁이라는 난리통에는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다. 조선왕실에서는 즉시 영의정 최흥원 등을 보내 선릉과 정릉을 살펴보게 했는데 다음과 같은 보고가 계속 올라왔다.
“선릉과 정릉을 봉심(奉審:임금의 명(命)으로 능이나 묘를 보살피던 일)하니 선릉은 광중(壙中:시체가 놓이는 무덤의 구덩이 부분)이 이미 비어 있고, 정릉은 염습한 옷은 없어지고 옥체(玉體)는 광중에 가로 놓여져 있었습니다.” - 4월 24일
이미 선릉은 완전히 털려서 빈 구덩이만 남았고, 정릉은 왕의 시신만 남아있었다는 이야기다.
“이홍국(李弘國) 과 서개똥(徐介叱同)의 말을 참고해 보건대, 정릉의 옥체는 이미 양주의 송산(松山)에 있는 인가(人家)에 옮겨 모셨고, 선릉은 두 능을 판 구덩이가 현궁(玄宮)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에 대한 명확한 보고는 반드시 그 곳에 있는 재신(宰臣)이 몸소 살펴보고 보고하기를 기다린 뒤에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 온 보고에 의거하건대, 이는 실로 불행중 다행이니 조금이나마 성상의 망극한 마음에 위로가 될 것입니다.” - 4월 26일
두 번째 보고내용을 보면 두 가지 사실이 들어있다. 먼저, 정릉의 경우, 중종의 시신을 가장 먼저 발견한 이홍국과 서개똥이라는 두 사람이 시신을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는 뜻이다. 그리고 두 번째 사실은 선릉의 경우, 도굴한 구덩이가 현궁, 즉 관까지는 이르지 않았다고 하는데 광중이 비었다고 했던 첫 번째 보고내용과는 상당히 다른 내용이다. 하지만 직접 본 것이 아니라는 단서를 달았기 때문에 약간의 허위보고를 해서 왕을 약간 안심시키려는 의도가 의심되는 대목이다.
5월 4일 다시 자세한 보고가 올라오는데…
“선릉의 광중(壙中)에는 재만 남아 있으므로 재를 종이에 싸서 다른 곳에 봉안(奉安)하였고 왕후의 능에도 재만 있었습니다. 정릉도 안팎 재궁(梓宮:관)이 모두 불타버렸고 역시 재가 세 곳에 있었는데, 한 곳은 분명히 밥을 해먹은 흔적이었고 한 곳은 옷을 태운 흔적 같은 것이 있을 뿐 광중(壙中)에 이것 외에 다른 물건은 없었습니다.”
라고 해서 선릉은 역시 완전히 털렸음을 알 수 있다.
그나마 중종의 시신을 지켜낸 것은 다행이군요. 이홍국과 서개똥이라는 사람은 당연히 큰 상을 받았겠죠?
아빠 사실 그게 간단히 정리될 일이 아니었어. 이홍국과 서개똥은 중종의 시신이라고 주장했지만 보상을 노리고 거짓으로 다른 시신을 중종의 시신으로 위장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거든. 그래서 조정에서는 이홍국이 보관했던 시신이 중종의 시신이냐 아니냐에 대한 논란에 휩싸였어.
만약 문제의 시신이 중종이 맞는다면 당연히 왕릉에 다시 묻어야 했기 때문에, 정릉의 옥체를 제대로 된 국상절차에 준해 염습(시체를 씻긴 다음 옷을 입히고 묶는 일)을 해야 했다. 이때 중종의 시신을 둘러싼 진위여부 논란이 선조실록 에 다음과 같이 나와있다.
대신이 아뢰기를, “정릉(靖陵)의 유의(遺衣)가 산실(散失)되어서 옥체가 드러나기까지 하였으니 염습할 때에 십분 상세히 삼가서 해야 할 것입니다. 구신(舊臣), 고로(故老), 노환(老宦), 궁인(宮人) 중에 살아 있는 자가 있으면 봉심(奉審)하게 해서 후일에 후회가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5월 1일
1593년은 중종이 사망한지 49년이 되던 해라서 시신이 완전히 썩어 없어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신하들과 궁녀들 중에서 중종을 모셔본 경험이 있는 나이가 아주 많은 사람들을 데려다가 진짜 중종의 시신인지를 확인해 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근 50년 전의 시신을 누가 어떻게 알아보겠는가?
6월28일 드디어 영의정 최흥원이 다음과 같은 최종 보고를 올렸다.
“전략… 이른바 옥체는 면상의 모발이 모두 빠졌고, 가슴과 등은 높고 커서 육기(肉氣)가 많았으나 세월이 오래 지난 시체라 변별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덕양군 부인과 서릉군 어머니, 상궁 박씨, 부안 도정 석수, 영원수 덕수 등이 봉심하기 전에 어용(御容)의 모습을 그려낸 것도 지금 여러 신하들이 본 바와 같지 않아 의심하는 사람이 많으나 달리 확인할 방도가 없습니다.”
2달 반 동안 조정의 원로대신들과 종친, 환관, 궁녀들이 모두 모여 50년 된 시신을 검토한 결과 진위여부가 매우 의심은 되지만, 달리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기에 그냥 중종의 시신으로 인정했던 것이다.
원로대신:중종의 옥체가 맞는지 곁에서 모셧던 그대들이 직접 확인해 보시오.
환관과 궁녀:어제 일도 깜박깜박하는데 50년 전에 돌아가진 분을 어떻게 확인한단 말인가..., 원로대신:2달 반 동안 철저하게 확인해 보았으나 안타깝게도 세월이 오래되어 변별하기 매우 어려웠사옵니다., 임금:그리하다면 달리 방도가 없지 않겠소 진짜라고 믿을 수 밖에...
선정릉 주변을 지나는 지하철역이 하나는 <선릉역>이고 또 하나는 <선정릉역>인데, 왜 이름에 통일성이 없죠?
아빠 그것은 조선왕릉에 대해 제대로 이해를 못해서야. 지금은 이 곳의 공식명칭이 <서울 선릉과 정릉> 줄여서 <선정릉>으로 불리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는 이 곳을 <삼릉공원> 이라고 불렀고, 아직도 인터넷에는 삼릉공원이라는 명칭이 많이 검색되고 있어.
삼릉공원? 선릉과 정릉 밖에 없는데 왜 삼릉공원이라고 불렀죠? 숨어있는 왕릉이 또 하나 더 있나요?
선정릉을 얼마 전까지 삼릉공원이라고 부른 이유는 왕릉의 봉분이 3개가 보여서 왕릉이 세 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정릉은 봉분이 중종왕릉 하나뿐인 <단릉(單陵)>이지만, 선릉의 경우에는 성종왕릉과 성종왕비릉이 각각 다른 언덕 위에 올라가 있는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어서 조선왕릉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이 보기에는 두 개의 왕릉으로 오해하기 쉽다.
[여기서 잠깐]조선왕릉의 종류

조선왕릉의 종류를 구분할 때, 가장 쉬운 방법이 봉분의 숫자로 구분하는 것이다. 동구릉의 태조왕릉인 <건원릉> 처럼 하나의 언덕(강:岡)위에 봉분이 하나인 것도 있고, 태종왕릉인 <헌릉>처럼 왕과 왕비의 봉분이 나란히 두 개인 것도 있고, 심지어 동구릉의 헌종왕릉인 <경릉>처럼 봉분이 세 개인 것도 있다. 봉분이 하나면 단릉(單陵), 둘이면 쌍릉(雙陵), 셋이면 삼연릉(三連陵) 이라고 한다. 여기에 예외적으로 봉분은 하나이지만 부부가 같이 묻힌 합장릉(合葬陵) 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여주에 있는 세종왕릉인 <영릉>이다.
<선릉>의 양식은 단릉, 합장릉, 쌍릉, 삼연릉 중 그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는 독특한 양식의 왕릉이다. 선릉은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라고 하는데 한자 뜻을 살펴보면 <같을 동同, 벌판 원原, 다를 이異, 언덕 강岡, 무덤 릉陵>으로 같은 벌판에 있지만, 서로 다른 언덕 위에 올라간 무덤이라는 뜻이다. 그럼 2개의 독립적인 왕릉인지, 아니면 동원이강릉 형식으로 된 1개의 왕릉인지를 어떻게 구별할까? 그건 매우 쉽다. 왕릉 앞에 있는 정자각의 숫자만 세어보면 된다. 정자각은 왕릉 1개당 반드시 1개씩만 있기 때문이다.
선정릉의 전경, 선릉, 정릉
그럼 <동원이강릉>이라는 독특한 형태의 왕릉이 탄생한 이유도 있나요?
아빠 물론 거기에도 숨은 이야기가 있지.
동원이강릉을 만든 이유는 풍수지리와 깊은 연관이 있다. 조선에서 동원이강릉을 제일 먼저 만들도록 한 사람이 바로 세조다. 그리고 조선 최초로 만들어진 동원이강릉이 세조왕릉인 <광릉>이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다 잘 아는 것처럼 세조는 어린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사람이다. 그래서 비록 무력으로 왕위에는 올랐지만, 세조는 평생 심적 부담감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고 한다. 게다가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맏아들이던 의경세자가 왕위에 오르지도 못하고 만 19세로 요절을 했고 그리고 둘째 아들인 해양대군(훗날 예종)의 첫 번째 부인이던 장순왕후 한씨(한명회의 셋째 딸)도 만 16세로 요절을 했다. 시아버지 입장에서 맏아들과 둘째 며느리가 자기보다 먼저 죽은 것이다. 또한 세조 자신도 피부병으로 아주 고생을 많이 했는데, 민간에서는 문둥병이라고도 했다. 당시 민간에서는 세조에게 일어난 이런 모든 나쁜 일들이 어린 조카를 죽인 죄값이라고 수군거렸다. 정치적으로도 신하들의 도전이 계속 이어졌고 민심도 흉흉했기 때문에 풍수의 전문가였던 세조는 이런 상황을 극복하려고 풍수 필살기를 동원하기로 했다.
세조가 생각하기에 자신의 왕위가 신하들로부터 계속 도전 받는 것은 풍수적으로 자신에게 왕의 기운인 왕기(王氣)가 부족했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래서 왕의 기운을 집안 혈통으로 봤을 때, `큰 집`인 문종의 가문으로 더 이상 넘어가지 못하게 하고, 작은 집`인 자신의 가문 쪽으로만 왕기를 돌려서 자신의 후손들에서만 후대의 왕들이 나오도록 조치를 취했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왕기를 어떻게 조절했을까?
세조가 살아있을 당시만 해도 지금의 동구릉은 9개의 왕릉이 아니라, 태조왕릉인 <건원릉>과 자신의 친형이 묻힌 문종왕릉(현릉) 이렇게 두 개의 왕릉만이 있었다. 이것을 족보로 따진다면 자신보다 큰 집 혈통의 가족무덤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동구릉에 왕기가 계속 서려있다면 계속해서 사육신이나 생육신과 같은 신하들의 도전이 계속될 것이라고 세조는 믿었다. 따라서 세조는 왕기의 흐름을 동구릉의 반대편인 한양의 서쪽 편으로 돌려서 자신의 혈통이 왕기를 독점하고자 그 곳에 자신의 가족무덤을 만들기로 했다. 그것이 바로 <서오릉>의 시작이다.
지도로 파주 삼릉 아래 서오릉과 정릉이 도봉산과 북한산 국립공원 사이에 위치한다. 그리고 내려와 아차산 위에 건원릉(王氣)이 있다
한양의 서쪽 편 서오릉에 조성된 세조의 가족무덤을 찾아보면, 우선 맏아들인 의경세자(덕종으로 추존)와 세자빈이었던 소혜왕후(후일 인수대비)의 능인 <경릉>이 있고, 둘째 아들 예종 및 둘째 부인 이었던 안순왕후 한씨의 능인 <창릉>이 있다. 게다가 예종의 첫째 부인 이였던 장순왕후(한명회의 셋째 딸) 한씨는 좀 더 서쪽인 파주삼릉에 <공릉>이라는 이름으로 묻혔고, 손주 며느리였던 성종의 첫 번째 부인 공혜왕후(한명회의 넷째 딸) 한씨도 파주삼릉에 <순릉>이라는 이름으로 묻혔다. 한마디로 왕기를 한양의 <동쪽>인 동구릉에서 반대편인 <서쪽>으로 돌린 것이다. 그런데 정작 세조 자신은 왜 서쪽에 묻히지 않고 동구릉보다도 더 동쪽인 <광릉>에 묻혔을까?
축구에서 스트라이커가 골을 넣으려면 그 전에 미드필더가 센터링을 해 줘야 한다. 한양의 서쪽에서 아무리 왕기를 기다려봐도 그쪽으로 왕기를 넘겨주기 전에 한양의 동쪽에서 왕기를 먼저 차지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따라서 세조는 자신이 왕기를 드리블해서 서오릉 쪽으로 센터링을 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즉, 세조는 백두산에서 발원해서 백두대간과 한북정맥을 타고 흘러 들어와 남양주를 거쳐 동구릉으로 들어가는 왕기를 사전에 먼저 차단하려고 자신의 무덤을 동구릉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광릉> 에다 만들었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왕기를 중간에서 <인터셉트>한 셈이다.
세조: 나의 후손들이여~ 왕기(王氣)를 받거라! 광릉(세조왕릉) 왕기를 시작으로 서오릉과 건원릉에 왕기를 보내고 있다.
왕기를 중간에서 인터셉트 한 것 까지는 이해를 하겠는데, 그것이 동원이강릉과 무슨 상관일까?
평지나 구릉지에 떼로 몰려있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고분(왕릉)들과는 달리 모든 조선왕릉은 강(岡)이라고 부르는 커다란 언덕 위에 올라가 있다. 그리고 강(岡)은 풍수의 생기, 즉 왕기가 모여 있는 생기탱크라고 한다. 만약 자동차에 연료탱크가 1개가 아닌 2개라면 어떨까? 훨씬 더 오래 달릴 수 있을 것이다. 세조는 생기탱크 통을 1개가 아닌 2개로 만들면 왕기를 인터셉트하는 태클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나 할 수 있다 라는 계산으로 사초지인 강(岡)을 2개로 만들었다. 그래서 조선 최초로 왕릉은 하나인데 그 안에 서로 다른 언덕(岡)과 봉분이 2개인 동원이강릉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아빠:바로 저 언덕에 황기가 모여 있다고 생각한 거란다. 그래서 강(岡)을 2개로 만들었던 거야., 딸:오,저기에 그런 깊은 뜻이...
이렇게 해서 역사에 새롭게 등장한 동원이강릉은 세조의 <광릉>을 시작으로 해서, 세조의 두 아들의 왕릉인 <경릉>과 <창릉>, 손자의 왕릉인 <선릉>까지 집중적으로 나타났으나, 이후에는 선조왕릉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동원이강릉은 역사에서 자취를 감춘다.
선정릉에 도굴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이 숨어있는 줄은 정말 몰랐어요. 아빠가 해주는 이야기 완전 중독성 있어요! 다음 코스는 어디에요?
아빠 여기서 가까운 곳에 피라미드가 있는데 그 곳에 숨겨진 역사와 문화재를 알아볼까?
예? 이집트가 아닌 우리나라에도 피라미드가 있다고요?
아빠 그럼, 송파구 석촌동에 가면 2천 년 전 피라미드가 우리를 반길 거야.
선정릉에서 아빠와 딸
최동군(글로벌사이버대학교 문화콘텐츠학부 외래교수)
사진/그림
박동현(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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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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