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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있는 역사

압구정에 숨어있는 권신 한명회의 부귀영화

압구정에 숨어있는 권신 한명회의 부귀영화
압구정터
압구정터 찾아가는 길 , 1. 압구정역 1번 출구에서 출발!, 2.73,74동 아파트 단지로 들어간다. 3. 조금 내려가 압구정터 도착!
딸:압구정에도 숨어있는 역사가 있나요? 여기가 압구정이구나~ 어디 지나가는 연예인 없나?, 아빠:그럼, 강남에도 숨어있는 것들이 많이 있지. 아빠와 함께 바로 옆에 있는 아파트 단지안으로 가볼까?
어, 여기 큰 바위가 있네요? 뭐라고 써 있는 거에요?
아빠 압구정터(狎鷗亭址)라고 쓰여져 있는 거야. 압구정(狎鷗亭)의 뜻이 뭔지 아니? 한자의 뜻을 풀어보면 압(狎)은 스스럼없이 가깝게 지내는 것을 뜻하고, 구(鷗)는 갈매기, 정(亭)은 정자를 뜻해. 옛날에는 이 곳에 압구정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지.
갈매기와 스스럼없이 벗하는 정자? 오, 한 폭의 멋진 그림 같은데요! 그런데 이런 멋진 이름을 붙인 사람은 누구에요?
아빠 압구정은 정자를 위해서 새롭게 만들어 붙인 이름이 아니고, 이 정자를 만든 사람의 《호》였어
아빠:압구정이란 '갈매기와 스스럼 없이 벗하는 정자'라는 뜻이야.
아빠:옛날 이 곳에 압구정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지., 딸:갈매기와 스스럼없이 벗하는 정자? 오, 한 폭의 멋진 그림 같은데요! 그런데 이런 멋진 이름을 붙인 사람은 누구에요?
[여기서 잠깐]왜 ‘본명’ 대신 ‘호’를 부르는 걸까?

일반적으로 호(號)라고 하면 별호(別號)를 가리키는데, 별호는 사람의 본명(本名)이나 성인이 되었을 때 붙이는 이름인 자(字) 외에 별도로 허물없이 부를 수 있도록 지은 이름을 뜻한다. 호는 유교문화권에서 본명을 부르는 것을 피하는 풍속(實名敬避俗)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그래서 본명을 꺼릴 휘(諱)자를 써서 휘명(諱名)이라고도 하고, 특히 돌아가신 분의 본명을 가리킬 때는 반드시 휘(諱)라고 해야 한다. 따라서 무덤의 비석에 쓰인 휘(諱)자 바로 다음에 나오는 것이 돌아가신 분의 본명이다. 반면 살아있는 사람의 이름을 높여 부를 때는 함(銜) 이라고 한다. 그래서 “너희 할아버지의 함자(銜字)는 어떻게 되느냐?”하는 식으로 묻는다. 한편, 그 밖의 호에는 택호, 아호, 당호 등이 있는데 이중에서 택호(宅號)는 여성에게 붙이며, <안성댁>처럼 그 사람의 출신지 이름에 ‘댁’을 얹어 부르는 호칭이다. 아호(兒號)는 아명이라고도 하며, 주로 어릴 때 집안에서 부모가 자식에게 사용하는 친근한 이름이다. 옛날에는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역설적으로 개똥이, 도야지 등과 같은 천한 의미의 이름으로 아명을 지었다. 한편 당호(堂號)는 성명 대신에 그 사람이 머무는 거처의 이름으로써 인명을 대신하여 부르는 호칭인데, 신사임당의 “사임당”이나 정약용의 “여유당”은 당호이다.
압구정은 세조 때의 권신이었던 한명회(韓明澮)의 호였다. 그런데 압구정이 한명회의 호가 된 것에는 사연이 있다. 한명회는 자신이 수양대군(세조)을 도와 왕위에 오르도록 했다는 사실을 중국 송(宋)나라의 승상(丞相) 한충헌(韓忠獻)이 새로 황제를 옹립하는 큰 공을 세운 것에 비교해서 자신을 한충헌과 동일시했다. 그래서 한충헌의 호가 압구정(狎鷗亭)이었던 것까지 모방을 했던 것이다.
한명회는 많이 알려진 대로,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소위 《계유정난》때 수양대군의 왕위등극에 지대한 공을 세웠으며 이후 사육신의 단종 복위운동을 좌절시키는 등의 공으로 벼슬이 영의정까지 올랐다. 당시 한명회의 권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알려주는 사례가 있다.
왕조국가인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절대 지존인 국왕이다. 또한 그 국왕의 자리를 계승할 왕세자는 국가의 근본이라는 뜻으로 국본(國本)이라고 불렀다. 이들이 조선의 넘버1, 넘버2에 해당한다. 그런데 성리학적 세계관에서 왕위계승의 절대원칙은 적장자(嫡長子) 계승으로 후궁이 아닌 왕비가 낳은 아들(嫡子) 중에서도 첫째 아들(長子)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부득이하게 장자(長子)가 없으면 차자(次子)중에서, 그리고 적자(嫡子)가 없으면 후궁 소생의 서자(庶子) 중에서도 왕위를 계승할 수는 있다.
그런데 세조 이후의 왕위계승도(제7대 세조, 제8대 예종, 제9대 성종)를 들여다보면 이상한 점이 보인다. 우선 세조에게는 적자(嫡子)가 두 명 있었으니 장자(長子)가 《의경세자》였고, 차자(次子)가 《해양대군》이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의경세자》는 병약하여 아버지인 《세조》보다도 먼저 세상을 뜬다. 그 때 《의경세자》는 두 아들을 남겼는데, 세조의 첫째 손자인 《월산대군》과 둘째 손자인 《자을산군》이다. 정상적으로 왕위계승서열을 따지자면 《의경세자》의 적장자(嫡長子)인 《월산대군》이 제1순위다. 하지만 세조 이후 왕권은 뜻밖에도 《해양대군》으로 넘어갔으니 그 사람이 바로 《예종》이다. 왕위계승권이 《큰 집》에서 《작은 집》으로 넘어간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것은 예종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장순왕후》가 바로 한명회의 셋째 딸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예종》 역시 병약하여 재위 14개월 만에 승하하였는데, 예종은 슬하에 《제안대군》을 남겼다. 《제안대군》은 예종 승하 당시 비록 어린아이였지만 어린 새 왕이 즉위하더라도 성인이 될 때까지는 대비가 수렴청정을 하는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제안대군》이 왕위를 이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왕위계승은 다시 큰 집인 《의경세자》 집안으로 넘어왔다.
좋다. 여기까지도 그럭저럭 이해할 수는 있겠다. 그렇지만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두 가지가 한꺼번에 벌어졌는데 먼저 첫째 아들인 《월산대군》을 제치고,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이 왕위를 물려받은 것이다. 적장자(嫡長子) 계승원칙을 완전히 무시한 처사였다. 게다가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보면 예종1년(1469년) 11월28일 날 예종이 승하하고, 바로 그날 《자을산군》이 조선 제9대 《성종》으로 등극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새 왕의 즉위는 돌아가신 선왕의 국장 제5일째 되는 날 성복(成服)을 마치고 하는 것이 조선의 예법으로 정해져 있는데, 이것마저도 무시한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자을산군》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공혜왕후》가 바로 한명회의 넷째 딸이었기 때문이었다.
세조 이후의 와위계승과 한명회의 관계도
세조 아래 1순위 장자(의경세자) 사망, 왕권 차자(해양대군) 예종이있다. 장자 의경세자는 장자 (월산대군)과 왕권 차자(자을산군) 성종을 뒀으며 성종은 첫번째 부인(공혜왕후) 한명회 넷째 딸과 혼인했다. 세조의 차자인 예종은 첫 번째 부인(장순왕후) 한명회 셋째 딸과 혼인하였다,
[여기서 잠깐]한명회의 셋째 딸과 넷째 딸이 묻혀 있는 파주삼릉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에 위치하고 있으며, 왕릉들의 앞 글자를 따서 공순영릉(恭順永陵)으로도 불린다. 이중 공릉(恭陵)은 조선 제8대 왕 예종의 정비 장순왕후(章順王后) 한씨의 능이고, 순릉(順陵)은 조선 제9대 왕 성종의 정비 공혜왕후(恭惠王后) 한씨의 능이다. 공릉의 주인공인 장순왕후는 한명회의 셋째 딸로 1445년에 태어나 16세인 1460년에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당시 세자였던 예종과 가례를 올렸다. 그러나 이듬해 인성대군을 낳은 후, 산후병으로 인해 17세의 꽃다운 나이로 요절하였다. 한편, 순릉의 주인공인 공혜왕후는 한명회의 넷째 딸로 1456년에 태어나 1467년 자을산군과 혼인한 뒤 자을산군이 예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1474년 역시 19세의 꽃다운 나이로 요절하였다.
한편, 이들과 함께 묻혀있는 영릉(永陵)의 주인공은 10살의 나이로 요절한 영조의 큰 아들 효장세자와 효순왕후의 추존왕릉이다. 따라서 파주삼릉은 모두 십대에 요절한 <젊은 영혼들의 왕릉>인 셈이다.
네? 한명회의 셋째 딸과 넷째 딸은 분명 자매지간인데, 언니가 《예종》의 부인이고, 동생이 《성종》의 부인이면… 서로 촌수가 어떻게 되요? 머리가 막 복잡해지려고 해요.
아빠 동생이 언니에게 《작은 어머니》라고 불러야 하는 기막힌 상황이 된 거야.
한명회와 압구정에 얽힌 직접적인 사연은 없나요?
아빠 없을 리가 있겠니? 한명회는 말년에 이 압구정 때문에 곤혹을 치렀어.
1484년 한명회가 70세였을 때 그의 정자 압구정이 화려하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명나라와 일본의 사신들이 와서 구경하려고 했다. 압구정이 얼마나 화려했는지를 조선왕조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성종 12년(1481년) 6월24일 : 상당부원군 한명회가 와서 아뢰기를, “중국 사신이 신의 압구정(狎鷗亭)을 구경하려 하는데, 이 정자는 매우 좁으니, 말리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므로, 임금이 우승지 노공필에게 명하여 중국 사신에게 가서 말하게 하기를, “이 정자는 좁아서 유관(遊觀)할 수 없습니다.” 하였으나, 중국 사신이 대답하기를, “좁더라도 가 보겠습니다.” 하였다.
실제 압구정의 모습을 그린 그림도 현재 두 점이나 남아있는데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압구정도(狎鷗亭圖)〉가 바로 그것이다. 《압구정도》를 보면 높은 언덕 위에 정자가 있는데 단순, 소박한 일반적인 정자가 아니라 담장으로 구획되어 있으면서 널찍한 기단을 바탕으로 한 큰 규모의 정자는 마루 둘레에 난간을 돌리고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그 아래쪽에는 부속 건물까지 거느리고 있어서 예사로운 정자가 아님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따라서 압구정은 단순한 정자가 아닌 한명회의 화려한 별장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듯 하다.
△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압구정도(狎鷗亭圖)>
이런 압구정이었건만 한명회는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좀 더 화려하게 꾸미려고 궁중에서만 쓰는 용봉차일(龍鳳遮日: 임금의 행차 때 사용하는 용과 봉의 형상을 아로새겨 만든 장막)을 치려 했지만 그것은 임금만이 쓰는 것이라 성종이 허락하지 않았고, 이에 노골적으로 좋지 않은 낯빛을 보였는데 이 사건이 발단이 되어 대간과 사헌부로부터 무례하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고 유배까지 가게 되었으나 공신임을 감안하여 곧 풀려났다. 하지만 다음해인 1485년 압구정에서 명나라 사신들을 사사로이 불러서 접대한 일로 또다시 탄핵되었는데 이 때는 모든 관직을 삭탈 당했다.
한명회:전하, 압구정에 명나라 사신도 오고하니 용봉차일을 사용했으면 하옵니다. 세조:아무리 그대가 공신이라해도 이는 허락할 수 없소. 한명회:쳇, 다 내덕분에 왕이 된 주제에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저러는가...
아무튼 한명회는 자신의 부귀 영화로운 생활과는 다르게 강가에서 갈매기를 벗하여 지낸다는 뜻으로 압구정을 자신의 호로도 삼고 정자에도 붙였지만 그 곳을 지나가는 문인들은 비웃을 뿐이었다.
특히 한명회가 정자에 써 붙인
청춘부사직(靑春扶社稷) 젊어서는 사직을 붙잡고
백수와강호(白首臥江湖) 늙어서는 강호에 묻힌다
라는 시를 본 매월당 김시습(생육신의 한 사람)은 한 글자씩을 고쳐
청춘망사직(靑春亡社稷) 젊어서는 사직을 망치고
백수오강호(白首汚江湖)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힌다
로 뜯어 고쳤는데 세인들의 공감을 자아냈다.
그럼 이 압구정이 없어진 것은 언제일까? 19세기 말에 압구정은 급진개화파인 박영효의 소유가 되었지만, 갑신정변으로 박영효가 국적(國賊)으로 몰려 일체의 재산이 몰수될 때 이 정자도 함께 헐렸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압구정》에 대한 마지막 기록이 바로 이 사건을 암시하고 있다.
고종 22년(1885년) 12월23일 : 추국청(推鞫廳)에서 아뢰기를, “죄인 윤경순(尹景純)의 결안(結案)에, ‘압구정(狎鷗亭)에 모여 사냥하면서 음모를 꾸미고 몰래 우정국(郵征局)에 가서 흉악하고 간사한 짓을 저질러 그 사특함이 드러났으며 여러 생도(生徒)들이 앞뒤에서 호응하여 화근의 시초를 만들어 다섯 명의 재상들이 차례로 흉악한 그의 손에서 살해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잠깐]같은 듯 다른 정자 : 압구정과 반구정

압구정과 비슷한 뜻을 가지는 이름의 정자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반구정(伴鷗亭)이다. 반구정은 조선 초기 명재상으로 유명한 황희(黃喜)가 87세의 나이로 18년간 재임하던 영의정을 사임하고 관직에서 물러난 후 갈매기를 벗삼아 여생을 보내고자 임진강 변에 세운 정자인데 <갈매기와 짝(동반)을 한다>는 뜻이다. 황희는 청렴하다는 청백리의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반구정은 사람이 거의 찾지 않는 임진강 하구에 조용히 자리를 잡고 있는 반면에, 권신인 한명회가 세운 압구정은 번잡한 강남에 그 터를 잡고 있다.
아빠, 이왕 강남까지 왔는데 이 근처에 또 다른 숨은 역사와 문화재는 없을까요?
아빠 압구정 이야기를 하면서 성종 이야기가 나왔으니 그 성종대왕이 묻힌 <선정릉>으로 가 보자. 그 곳에도 숨겨진 이야깃거리가 많아.
선정릉으로 발길을 돌리는 아빠와 딸
최동군(글로벌사이버대학교 문화콘텐츠학부 외래교수)
사진/그림
박동현(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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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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