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역사

성균관대학교에 숨어있는 조선시대 당쟁(黨爭)의 진실

성균관대학교에 숨어있는 조선시대 당쟁(黨爭)의 진실
탕평비
탕평비 찾아가는 길, 1.혜화역 4번 출구에서 출발!, 2.성균관대입구 사거리에서 횡단보도를 건넌다. 3. 성균관대학교 정문으로 들어와 바로옆 탕평비 도착!
여기는 성균관대학교 정문이잖아요! 여기에도 숨겨진 문화재와 역사가 있어요?
아빠 그럼, 바로 이 탕평비(蕩平碑)가 오늘의 주인공이야. 이 탕평비는 1742년 영조임금이 당쟁의 폐단을 없애려는 노력의 하나로 정사(政事)의 시비를 논하는 상소를 금지하고, 당시 주요 정치세력이었던 노론과 소론을 고루 등용하는 탕평책을 알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야.
딸:여기는 성균관대학교 정문이잖아요! 여기에도 숨겨진 문화재와 역사가 있어요?, 아빠:안으로 들어가자, 누굴 닮아 성격이 저리 급할까? 바로 이 탕평비(蕩平碑)가 오늘의 주인공이야. 딸:오! 성균관대안은 처음 와봐요!
[여기서 잠깐]‘탕평’의 유래

‘탕평’이란 말은 서경(書經)의 ‘無偏無黨王道蕩蕩 無黨無偏王道平平’(무편무당왕도탕탕 무당무편왕도평평)이라는 글에서 유래했다. 정조임금은 자신의 침실에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편액을 걸기도 했다.
아빠, 조선은 당쟁 때문에 망했다는 말이 사실인가요? 정치는 않고 맨날 당파싸움만 했다면 나라가 망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것 같아요.
아빠 아니, 그건 결코 사실이 아니야.
당쟁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는 것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은 너무나도 쉽다. 역사책을 펴놓고 당쟁이 가장 심했던 시기를 따져보면 된다. 조선에서 가장 당쟁이 심했던 때는 <숙종, 경종, 영조, 정조> 임금 때다. 당쟁으로 정권이 뒤바뀌고, 피의 숙청이 이어졌다. 그런데 의외로 역사책은 그 시대가 조선후기에서 가장 상업이 발달했고, 특히 영정조 때를 가리켜 <조선의 르네상스>라고까지 부르고 있다. 이상하지 않은가? 당쟁이 가장 심했던 때가 `르네상스`라니?
그럼 조선에서 당쟁이 갑자기 사라진 것은 언제일까? 그것은 정조의 아들인 <순조>가 11살이란 어린 나이에 등극하고 나서다. 그렇다면 순조가 등극하고 나서, 조선의 조정에서는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그것은 바로 <김조순>이 순조의 장인이 되면서 어린 순조를 대신해서 안동 김씨 일족에 의한 `세도정치(勢道政治)`를 시작한 것이다. 아무리 막 나가는 정치권력이라도 견제하는 세력이 존재하면 절대부패 상태로까지 가지는 않는다. 당쟁의 구도하에서는 집권당은 상대당에게 조금이라도 정치적 약점을 잡히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도정치는 견제세력이 전무한 형태로 진행되었고, 이후 조선은 도저히 회생 불가능한 상태까지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왜 당쟁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는 이야기가 설득력이 있는 것처럼 들리는 것일까? 그것은 일제강점기 때의 조선총독부를 포함하여 역대 독재정권들이 자신들의 독재를 합리화시키는 도구로 오랫동안 당쟁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적인 견제세력의 존재를 싫어하는 무리들은 항상 주장한다. 조선은 당쟁 때문에 망했다고...
아빠:조선이 당쟁때문에 망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란다!, 하지만 조선의 당쟁이 너무 쓸데없는 것을 가지고 다투었다는 증거도 많잖아요?, 딸:아빤 그런말 들을때 마다 속이 부글부글..
하지만 조선의 당쟁이 너무 쓸데없는 것을 가지고 다투었다는 증거도 많잖아요?
아빠 예를 들면 뭐가 있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상복을 몇 년 입느냐를 가지고 엄청 싸웠다고 들었어요. 대체 그게 뭐라고. 전 도저히 이해가 안가요!
현종 때, 현종의 선왕이었던 <효종과 효종비>의 국상기간 중 대왕대비였던 <자의대비>의 복상(服喪)기간을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간에 벌어진 두 차례 정쟁을 예송(禮訟)논쟁이라 하고, 이를 당쟁의 대표적인 폐해의 사례로 꼽는 사람이 많다. 그렇지만 예송논쟁을 단지 <자의대비>의 상복 입는 기간에 대한 싸움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건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송논쟁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왕위계승에서의 정통성 시비다. <자의대비>는 인조가 43세 때 불과 14살의 어린 나이로 인조의 계비(두 번째 왕비)에 책봉되었다. 그러다 보니 계모가 아들인 효종보다는 5살, 며느리인 효종비보다는 6살이 어렸고, 그 때문에 계모보다 아들과 며느리가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는 보기 드문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효종가계도 - 인조는 인렬왕후와 자의대비(장렬왕후)와 혼인하였고 인종 와 인렬왕후 사이에 첫? 아들 소현세자와 둘째 아들 봉림대군(효종)이 있다. 봉림대군(효종)은 인성왕후와 혼인 하였다.
한편 조선 제16대왕 인조는 첫째 아들이 소현세자였고, 둘째 아들이 봉림대군(제17대 효종)이었는데, 병자호란을 통해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는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고, 두 아들을 모두 청나라의 볼모로 보내는 참담함을 겪었다. 시간이 흘러 볼모에서 풀려나 고국으로 돌아온 소현세자는 주변 국제정세에 눈을 떠서 청나라에 호의적인 태도를 취했는데, 그것에 대해 극도의 불만과 분노를 느낀 인조는 결국 소현세자를 독살시키고,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이때 소현세자의 세 아들이 아직 살아 있었으니 왕위계승을 둘러싼 정통성 시비거리가 남아 있는 셈이었다. 왜냐하면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였기 때문에 적장자(嫡長子) 계승이라는 원칙을 중요시 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잠깐]조선의 중요한 원칙, ‘적장자 계승’

영조가 비록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였지만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다음 왕위를 이었다는 점이 적장자 계승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2010년 도망간 노비를 잡아온다는 뜻의 [추노(推奴)]라는 사극드라마를 방영했었는데, 송태하(오지호)가 꿈 속에서까지 지켜낸 아이가 바로 소현세자의 마지막 셋째 아들이었던 [석견]이었고, 석견의 존재는 언제든지 왕위계승의 정통성 시비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것이었다.
당시 <서인>세력은 순수한 학문과 사상적인 관점에서 왕의 정통성인 왕통(王統)은 효종(봉림대군)에게 있지만, 가통(家統)은 소현세자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 <남인>세력은 왕통과 가통이 모두 효종에게 넘어갔다고 생각을 했다. 이 때문에 효종과 효종비의 국상 때 계모인 자의대비가 효종을 왕실의 장남으로 인정하느냐, 차남으로 인정하느냐에 따라 상복을 입는 기간이 달려졌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결국 효종의 왕위계승에 대한 정통성의 문제로 확대해석이 되었고, 만약 이를 의도적으로 왜곡하면 효종의 왕위계승을 부정하는, 쉽게 말하자면 역모의 누명을 쓸 수도 있는 중차대한 문제였다.
남인과 서인 그리고 자의대비의 대화
남인: 효종께서 왕위를 계승하였기에 장자나 다름없으므로 3년을 치르는 것이 당연하오! 서인: 효종께서 왕위를 계승하였지만 둘째 아들이므로 당연히 1년 상을 치러야 하오! 자의대비: 아니 대체 난 그럼 어쩌라는 겐가?
상복 입는 기간 때문에 싸운 것이 아니라 왕위계승의 정통성 시비로 싸운 것이군요! 이제야 이해가 좀 되네요. 그런데 조선의 당쟁은 너무 복잡한 것 같아요. 동인, 서인, 남인, 북인, 노론, 소론 등 너무 당파가 많아서 헷갈려요.
아빠 조선의 당쟁이 복잡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표 하나로 간단히 정리하면 의외로 쉬워. 딱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사색당파(四色黨派)`인데, 주요 당파는 단 네 개뿐이라는 거지.
조선의 당파도
조선전기 훈구파 사림파
사색당파
선조 X 동인 서인
광해군 남인 북인
인조 X
숙종 노론 소론
조선 전기가 거의 끝나갈 때, 많은 시련과 좌절을 겪었던 <사림파>는 최종적으로 개국공신세력과 세조의 정난공신세력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를 누르고 정권을 잡았다. 하지만 <사림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선조 때에 최초로 <동인>과 <서인>으로 분리된다.
[여기서 잠깐]붕당정치의 시작

조선의 관직 중에는 이조전랑(吏曹銓郞,정5품 정랑+정6품 좌랑)이라고 있는데 이 자리는 높지 않은 직책임에도 불구하고 임금에게 직언을 하는 삼사(三司)의 관료와 자신의 후임을 추천할 권한이 있었기 때문에 신진관료들에게는 늘 선망의 대상이었고, 그 자리를 거치면 대부분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런데 1574년(선조 7년) 이조좌랑 자리를 둘러싸고 김효원과 심의겸이 충돌했고, 이때 관료들뿐만 아니라 사림의 모든 선비들은 두 사람을 지지하는 파로 양분되었다. 그런데 김효원은 한양의 동쪽인 건천동에 집이 있었고 심의겸은 서쪽인 정릉방에 집이 있었기 때문에 김효원 일파를 동인(東人), 심의겸 일파를 서인(西人)으로 부르게 됐다. 이것이 조선의 붕당정치의 시작이다.
그런 다음 시간이 흐르면서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다시 나누어졌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4개의 당파 <남인> <북인> <노론> <소론> 이것이 조선의 사색당파다. 어떤가? 아주 쉽지 않은가? 그런데 왜 사람들은 조선의 당파가 복잡하다고 알고 있을까? 그것은 시차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같은 시기에 한꺼번에 붕당(조선의 정치집단)들이 분리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조 때 사림파가 <동인>과 <서인>으로 처음 나눠진 이후, 그 다음 왕인 광해군 때에 <동인>이 정권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며 정권쟁탈전이 일어났고 여기서 <북인>이 승리하지만, 곧 이은 인조반정으로 <북인>은 완전히 몰락하여 역사에서 거의 자취를 감춘다. 따라서 인조 이후에는 <남인>과 <서인>이 정권을 둘러싸고 경쟁을 했지만, 주도권은 대부분 <서인>이 잡고 있었다. 따라서 숙종 때까지의 당쟁은 주류인 <서인>과 비주류인 <남인>간의 다툼이었다.
TV사극(예를 들어 동이, 장옥정)을 통해 우리가 자주 보게 되는 숙종 때의 당쟁에는 중전인 인현왕후를 지지하는 <서인>과 후궁 장희빈을 지지하는 <남인>이 권력을 다투는 양상으로 진행이 된다. 쉽게 말해 <양당구조>인 셈이다.
그런데 숙종말년에 오랜 기간 동안 하나로 뭉쳐있던 <서인>이 드디어 <노론>과 <소론>으로 분리된다. 이렇게 됨으로써 숙종 때까지는 <서인> vs <남인> 간의 <양당구도>가, 경종 때부터는 <노론> <소론> <남인> 의 <3당구도>로 바뀐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대체로는 <노론>이 주류 다수당을 형성하였고, <소론>과 <남인>은 비주류로서 소수당이었는데 두 당을 합쳐도 <노론>을 상대하기는 벅찰 만큼 <노론>의 당세가 컸다. TV사극의 영정조 시대(예를 들어 이산)를 보면, 이때의 당쟁은 주로 <노론>과 <소론>의 대결양상이 두드러진다.
그런데 탕평비를 하필이면 왜 이곳에 세웠나요?
아빠 영조임금은 자신의 탕평정책을 알리고 열의를 과시하기 위해서 탕평비를 세울 가장 적당한 장소를 물색했어. 그 결과 유학의 총본산이며 관학의 최고학부이자 미래 정치관료가 될 성균관 유생들의 눈앞에 세우게 된 거야.
[여기서 잠깐]성균관에 얽힌 지명 이야기

탕평비는 성균관 반수교(泮水橋) 위에 세워졌는데, 반수교는 성균관 동쪽과 서쪽을 감싸고 흘러 내리는 물줄기를 각각 동반수(東泮水), 서반수(西泮水)라고 했고, 두 물줄기가 만나는 곳이 이 다리여서 반수교라고 했다. 한편 반(泮)자는 성균관을 뜻하는데, 예를 들어 반궁(泮宮)은 성균관과 문묘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고, 반촌(泮村)은 성균관을 중심으로 그 근처에 있는 동네를 일컫던 말이고, 반장(泮長)은 성균관의 으뜸벼슬인 대사성(大司成)을 달리 이르는 말이며, 반관(泮館)은 성균관을 다르게 이르는 말이고, 반와(泮蛙)는 ‘성균관 개구리’ 라는 뜻으로, 자나깨나 책만 읽는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이다."
영조는 탕평비에 친히 <예기> 에 있는 구절 중에서 `주이불비 내군자지공심 비이불주 식소인지사의` (周而不比, 乃君子之公心, 比而不周, 寔小人之私意) 라는 구절을 썼는데 그 뜻은 <남과 두루 친하되 편당을 가르지 않는 것이 군자의 마음이요, 편당만 짓고 남과 두루 친하지 못하는 것은 진실로 소인배의 사사로운 마음이다> 로 해석할 수 있다.
아빠, 지금까지 살펴본 `송시열 집터` 나 `탕평비` 나 모두 어려운 한자가 많아서 머리가 복잡했어요. 이번에는 숨어있는 문화재나 역사 중에서도 좀 쉽고도 재미난 장소로 가요, 네?
아빠 쉽고도 재미난 장소라… 그래, 이번에는 `압구정` 으로 가보자!
압구정으로 향하는 아빠와 딸
최동군(글로벌사이버대학교 문화콘텐츠학부 외래교수)
사진/그림
박동현(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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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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