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역사

명륜동 골목에 숨어있는 우암 송시열의 확고한 신념

명륜동 골목에 숨어있는 우암 송시열의 확고한 신념
증주벽립
《우암 송시열 집터》와 같이 목적지가 주택가 속에 들어가 있는 경우, 초행자가 찾아가기는 쉽지 않다. 그럴 때는 스마트폰의 《네이버 지도》 또는 《다음 지도》와 같은 앱을 이용하면 마치 네비게이션으로 찾아가는 것과 같이 아주 쉽게 찾을 수 있다. 서울 종로구 명륜1가 우암빌라 맞은 편에 있으며, 주소는 서울 종로구 명륜1가 5-99(성균관로 17길 37)이다.
우암 송시열 집터 찾아가는 길, 1.헤화역 4번 출구에서 출발 2.혜화동 로터리를 건너서 우체국을 지난다. 3.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을 지나 윗쪽길로 간다. 4.우암 송시열 집터 도착!
  • 아빠, 대체 어디까지 가야 되는 거에요? 여긴 그냥 주택가 같은데...
  • 드디어 찾았다! 바로 여기가 조선후기 최고의 유학자로 인정받는 우암 송시열 선생의 서울집이 있던 자리야. 우암구기(尤菴舊基)라고 쓰여진 이 비석 보이지? 《우암 송시열 선생의 옛집터》라는 뜻이야. 그리고 바로 저기 위쪽 골목 안쪽에 우암 선생의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있어. 만약 이 스마트폰 지도가 없었더라면 여기를 찾느라고 주변을 한참동안 헤맸을 거야. 자, 조금만 더 올라가서 《증주벽립》 바위글씨를 살펴보자.
딸:아빠, 대체 어디까지 가야 되는 거에요? 아빠:드디어 찾았다! 바로 여기가 우암 송시열 선생의 서울집이 있던 자리야. 에고, 힘들어~ 여긴 그냥 주택가 같은데?
  • 겨우 이거 보려고 여기까지 온 거에요? 어려운 한자가 새겨진 바위 벽만 있고, 게다가 주변에는 쓰레기만 쌓여있잖아요. 뭔가 대단한 것을 기대했었는데, 조금 실망이에요. 그런데 좀 이상한 것이 있어요. 이 바위벽에 대한 설명문에는 이 곳이 송시열의 집터라고 되어 있고, 조금 전에 봤던 우암구기(尤菴舊基) 라는 비석과는 거리가 꽤 떨어져 있는데, 어디가 진짜 송시열의 집터에요?
  • 하하, 우리 딸은 옛날 양반 사대부들의 집을 요즘과 같은 작은 집으로 생각하는 모양이구나. 조선시대에 우암 선생과 같은 고관대작이 살던 집은 행랑채, 사랑채, 안채, 후원 등을 모두 갖춘 99칸짜리 으리으리한 집이었어. 창덕궁 안의 《연경당》이나 흥선대원군의 집이었던 《운현궁》과 비슷한 규모라고 생각하면 돼. 따라서 우암구기라는 비석이 있던 곳에서부터 이곳까지가 모두 우암 선생의 집터라고 볼 수 있지.
딸:겨우 이거 보려고 여기까지 온 거에요? 그런데 어디가 진짜 송시열의 집터에요? 힘들게 왔는데 이게 뭐람~;; 아빠:아까 비석이 있던 곳에서부터 이곳까지 모두 우암 선생의 집터란다.
성균관대학교 인근의 명륜동 1가 5번지에는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 1607-1689)의 경저(京邸, 서울에 있는 집)가 있던 집터가 있고, 그 곳의 큰 암벽에는 증주벽립(曾朱壁立) 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런데 한자를 제법 많이 아는 사람이라도 증주벽립(曾朱壁立)을 해석하기란 쉽지 않다. 글자 그대로의 뜻은 《일찍 증, 붉은 주, 담벼락 벽, 설 립》 자인데 이 글자에 담긴 사연을 모른채 단순한 직역만으로는 도저히 그 뜻을 알 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여기서 증(曾), 주(朱)는 공자의 제자인 증자(曾子 BC 505~BC 436) 와 송대(宋代)의 대표적 유학자이자 성리학의 완성자인 주자(朱子 1130~1200)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증주벽립》의 뜻은 《옛날 증자, 주자가 그랬던 것 처럼, 흔들리지 않는 벽과 같이 서 있겠다》로 해석할 수 있고, 이는 곧 증자와 주자의 사상을 계승하고 실천하려한 우암 송시열의 확고한 신념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증주벽립
그럼 우암이 계승하려고 했던 증자와 주자의 공통점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신념` 이다. 우선 증자는 《큰 용기》를 정의함에 있어《내가 스스로 올바르다면 두려움 없이 나의 길을 갈것이다》라고 했다. 한편 주자도 당시의 정치권력으로부터 심각한 정치적, 학문적 탄압을 받는 상황에서 주변사람들로부터 `활동을 중지하고 화를 피하라` 는 충고를 받았을 때, 만 길,(萬壑) 높이의 절벽(壁)이 온갖 풍상에도 변함없이 우뚝 서(立) 있는 의연한 모습에 비유하여, 벽립만인이라는 말을 남겼다.
[여기서 잠깐]송시열의 후손들의 엇갈린 운명

구한말 송시열의 제9대손 중에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유명한 사람이 두 사람 있다. 일제의 강제에 의한 을사늑약의 파기와 을사오적의 처단을 주장하면서 스스로 음독자결해서, 순국하신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 선생이 그 첫 번째이고, 정미칠적 중 한 사람이면서 창씨개명의 제1호이고, 일진회를 통해 한일 합방에 적극 가담해서 이완용과 함께 매국노의 대명사가 된 송병준(宋秉畯 1857~1925)이 바로 두번째이다. 그럼 송병준은 왜 친일매국노가 되었을까? 우선 송병준은 어머니가 기생출신이라 적자가 아닌 서얼이었다. 따라서 서얼출신에 대한 조선사회의 차별에 반감이 깔려 있었고, 자신이 추종하던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이 암살되자 암살범 홍종우를 보낸 고종황제와 조선조정에 완전히 등을 돌리고 일본으로 은신한 뒤 숨어 지내다가 러일전쟁 이후 일본군 통역관으로 조선으로 돌아와서 완전한 친일파로 활동하였다.
그렇다면 송시열의 확고한 신념은 어느 정도였을까? 송시열은 죽음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송시열과 같은 시기에 《허목》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당시 송시열이 사색당파중 《서인》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다면 허목은 서인의 정적인 《남인》의 대표주자였다. 그런데 허목은 유학자인 동시에 의술에도 정통하여 명성이 높았다. 어느 날 송시열은 백약이 소용없는 중병에 걸렸는데 아들을 허목에게 보내 약을 지어오게 했다. 그런데 그 약의 처방전에는 독약으로 유명한 《비상》이 들어있었다. 이를 본 송시열의 아들은 허목을 맹비난했지만 송시열은 그 처방전대로 약을 지어오게 해서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약을 달여먹고 완쾌하였다. 송시열은 비록 정적이기는 하지만 허목이 진정한 조선의 선비라면 비겁한 방법을 쓰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송시열:허목이 의술에 정통하니 약을 지어오도록 해라!, 아들:허목이 비상을 처방하였습니다. 아버님을 해하고자 함이 틀림없습니다. 송시열:허목이 조선의 선비라면 비겁한 방법을 쓸리 없다. 그의 말대로 약을 달여오거라!
  • 아빠, 제 스마트폰으로 《증주벽립》을 검색해 봤는데요. 제주도에도 똑 같은 글씨가 있다고 나오네요?
  • 맞아. 우암 선생은 제주도에도 인연이 있거든.
제주시 이도1동에는 조선시대에 제주에 유배되었거나 방어사로 부임해서 제주의 발전에 공헌한 김정, 송인수, 김상헌, 정온, 송시열 등 다섯 분을 배향했던 옛 터인 오현단(五賢壇)이 있는데, 여기에도 종로구 명륜동에 있는 《증주벽립》과 똑 같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송시열과 제주도와의 인연은 대체로 이렇다. 남인 계열의 지원을 받던 후궁 장희빈이 아들(경종)을 낳자 아들을 학수고대하던 숙종은 1689년 1월 원자로 정하려 했다. 그러나 서인 정권의 우암 송시열은 서인 계열의 지원을 받던 중전(인현왕후)이 아직 젊다는 것을 이유로 그것에 반대하였고, 왕세자 책봉까지 시기상조라는 반대상소를 올리자 숙종은 크게 노하여 모든 관직을 박탈하고 제주도로 귀양을 보냈다.
원자를 정할 때, 숙종은 원자 정호에 대한 불만이 있으면 관직을 내놓고 떠나라고 공개적인 선언을 하였다. 그리고 바로 원자 정호 사실을 종묘에 고했다. 조선이라는 왕조국가에서 이미 종묘 사직에 고한 일을 무르라고 하는 것은 선대 왕들을 한꺼번에 능멸하는 행위이자 신권이 왕권 위에 있음을 입증하는 행위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역모죄 이상 가는 행위로 간주된다. 그럼에도 송시열은 목숨을 걸고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남인들은 숙종을 설득해 제주도로 귀양간 우암을 다시 한양으로 불러들여 국문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관철시켰고, 한양으로 압송하던 중, 그를 국문시켰을 때의 정치적 파장을 우려한 숙종이 사약을 내려 결국 우암은 전라도 정읍에서 사사된다.
[여기서 잠깐]숙종은 과연 줏대 없는 왕이었을까?

TV 사극을 통해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것이 숙종과 장희빈 이야기다. 후궁신분에서 중전의 자리까지 올랐다가 다시 내쳐지고, 심지어 사약까지 받는 장희빈의 이야기는 정말 드라마의 소재로는 최고의 소재이다. 그리고 드라마 속에서 숙종은 장희빈과 인현왕후 사이를 오락가락 하는 줏대 없는 왕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것은 TV 드라마에 재미를 보태기 위한 픽션에 불과하다. 숙종은 13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지만 20세 전까지는 대비의 수렴청정을 거치는 관례를 따르지 않고 바로 친정(親政)에 들어갈 정도로 영민한 왕이었다. 또한 숙종 때는 제2차 예송논쟁 등 조선이 개국된 이래 당파 싸움이 가장 심했던 때였다. 그런 상황에서 숙종은 환국정치를 통해 정치의 주도권을 신하들로부터 뺏어왔고, 중전자리에 장희빈과 인현왕후를 번갈아 앉힌 것은 그 두 사람으로 대표되는 <남인>과 <서인>세력 길들이기로 봐야 한다. 따라서 숙종은 왕권강화를 위해 중전자리까지도 활용한 주도면밀한 왕이었고, 숙종만큼 강력한 왕권을 행사한 왕은 다시는 역사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제주 출신의 변성우(邊聖遇 1721~1787)는 그가 성균관 직강으로 있을 때 송시열의 글씨를 모사, 보관하고 있었고 1856년에 제주목사 채동건과 제주판관 홍경섭은 송시열을 기리는 뜻에서 그 글씨를 바탕으로 《증주벽립》을 오현단 서쪽 병풍바위에 새겨 넣었다. 송시열이 죽을 때까지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점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 송시열은 결국 당쟁에 의해서 죽었군요! 아빠, 조선시대의 당쟁을 알려주는 문화재도 있나요?
  • 그럼, 바로 이 근처 성균관의 입구에 있는 《탕평비》를 보면 알 수 있지. 자, 이번에는 《탕평비》를 보러갈까?
탕평비로 발길을 돌리는 아빠와 딸
최동군(글로벌사이버대학교 문화콘텐츠학부 외래교수)
사진/그림
박동현(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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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3-12-10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