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역사

방산시장에 숨어있는 상인의 수호신(財神) 관우

방산시장에 숨어있는 상인의 수호신(財神) 관우
성제묘
《성제묘》는 《종로5가》역에서 매우 가깝다. 청계천 《마전교》에서 불과 50미터 거리에 있고, 그것도 왕복 8차선의 대로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초행자가 한번에 성제묘를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성제묘의 입구가 겨우 폭 1미터 남짓한 《방산시장》의 골목 속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성제묘는 《마전교》에서 을지로5가 방향으로 약 50미터 정도에 있는 골목속에 있는데, Monami Station 이라고 된 간판을 찾으면 바로 그 건물의 옆골목이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어 있다.
성제묘 찾아가는 길, 1.종로5가역 7번 출구에서 직진! 2.마전교를 지나 횡단보도를 건넌다. 3. 골목사이에 성제묘 도착!
딸:아빠, 이곳이 성제묘라고 하셨는데, 누구의 무덤인가요? 아빠:성제묘의 묘는 무덤이 아니라 사당을 뜻해 종묘처럼 말이야.
  • 세상에, 이런 곳에 문화재가 숨어있다니… 아빠, 이 곳이 《성제묘》 라고 하셨는데, 누구의 무덤인가요?
  • 성제묘(聖帝廟)의 묘는 무덤(墓)이 아니라, 사당(廟)을 뜻해. 종묘처럼 말이야. 따라서 성제묘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성스러운 황제의 사당이라는 뜻이지.
  • 어, 이상하다? 우리나라의 황제나 왕은 모두 종묘에 모셨을텐데, 왜 이런 곳에 또 사당이 있나요?
  • 《성제묘》는 우리나라의 황제를 모신 사당이 아니야. 3세기 무렵 중국이 위, 촉, 오 이렇게 세 나라로 갈라져서 서로 싸우던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삼국지》라는 소설 속의 관우(關羽) 장군을 모신 사당이야.
[여기서 잠깐]소설 <삼국지>란?

우리가 알고 있는 소설 《삼국지》는 정식명칭이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로 14세기에 나관중이 진나라 진수(陣壽)가 쓴 정사(正史) 삼국지(三國志)를 토대로 하고 얼마간의 가공적인 인물을 가미하여 만든 역사소설이다. 따라서 유비, 관우, 장비, 동탁, 조조, 제갈공명 등 소설 삼국지 속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거의 실존인물들이고 삼국지에 나오는 이야기들도 70% 정도는 역사적인 사실이며, 나머지 30% 정도만이 창작한 이야기라고 한다.
관우를 모시는 사당은 《성제묘聖帝廟》 이외에도 《현성묘顯聖廟》, 《관묘關廟》, 《관왕묘關王廟》, 《관성묘關聖廟》, 《관제묘關帝廟》 등으로도 불린다. 특히 도교에서는 관우를 신격화해서 전쟁의 신인 관성제군(關聖帝君)이라 부르는데 공자의 사당을 문묘(文廟)라고 하듯이, 관우의 사당을 무묘(武廟)라 해서 관우를 무(武)의 화신으로 떠 받든다. 서울 종로구 숭인동의 동묘(東廟) 역시 동관왕묘(東關王廟)를 줄여서 부르는 이름이다.
관우신앙은 원래 우리의 토속신앙이 아니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가 조선에 주둔하면서 들어온 외래신앙이다. 그렇다면 중국에서는 왜 관우신앙이 생겨났을까?
서기 219년, 형주를 지키고 있던 촉나라의 장수 관우는 오나라의 공격을 받았을 때, 같은 촉나라의 제갈량에게 도움을 받지 못해 결국은 죽게 된다. 제갈량은 문무를 겸비한 관우를 자신의 최대 라이벌로 간주했고, 그 때문에 어려움에 처한 관우를 돕지 않아 제 손에 피한방울 묻히지 않고 적의 힘으로 라이벌을 제거하면서, 촉나라의 명실상부한 제2인자가 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따라서 일반 민중들은 관우의 죽음을 매우 억울한 죽음으로 받아들였다.
동양의 무속신앙에서는 억울하게 죽은 원혼은 기가 세기 때문에 숭배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전통무속신앙에서도 《남이 장군》이나 《최영 장군》을 많이 모시는데, 두 사람 모두 억울하게 죽은 경우에 속한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실제 관우의 죽음 뒤에 이상한 일들이 연속해서 벌어졌다. 우선 전쟁에서 관우를 죽음으로 몰고 간 오나라의 장수들(여몽, 장흠, 감녕 등)이 이유없이 차례로 죽어나갔다. 또한 때마침 전염병이 창궐하여 형주의 백성들이 무수히 죽어나가자, 형주의 백성들은 이런 현상을 억울하게 죽은 관우의 원혼에 의한 것으로 인식했다. 이 때문에 집집마다 관우의 영전을 차려놓고 관우의 원혼을 달래고 비는 풍속이 급속도로 확산되었고, 그것이 관우신앙의 시작이었다.
[여기서 잠깐]<삼국지> 등장인물에 대한 인기투표

삼국지의 등장인물중 인기투표를 하면 누가 1위일까? 중국에서 실제 인기투표가 있었고 1, 2, 3위에 관우, 제갈량(제갈공명), 유비의 순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중국에서는 관우에 대한 숭배사상이 대단하다.
다시 우리나라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조선 땅에 관우의 사당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임진왜란 때인 선조 31년(1598년)의 일이다. 명나라 장수 진인(陳寅)이 울산 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후에 서울 남대문 밖에 거처를 정하고 요양을 하면서 자신들의 관우숭배신앙에 따라 그곳 후원에 사당을 설치한 것이 바로 남관왕묘(南關王廟)이고, 줄여서 `남묘(南廟)`라고 불렀다.
그리고 나서 곧이어 동대문 밖에도 관우의 사당이 들어섰는데, 이것이 바로 동관왕묘(東關王廟) 즉 지금의 동묘(東廟)이다. 이렇게 해서 임진왜란의 전후복구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을 당시에는 조선에는 두 개의 관왕묘, 즉 《동묘》와 《남묘》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누가 강제로 시킨 것도 아닌데 외래신앙이었던 관우숭배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이 땅의 백성들에게 확산되었고, 기존에 《남이 장군》과 《최영 장군》을 모시던 우리 전통무속신앙의 주류 속으로 관우신앙이 급속도로 파고들었다. 아무래도 전후복구의 참담한 현실속에서 관우숭배가 일반 백성들의 정신적인 안식처 역할을 한 것 같다.
명나라 장수 진인:전투에서 당한 부상을 치료하는 동안, 후원에 '남관왕묘'를 설치하도록 하라!, 백성들:요즘은 남이 장군보다 관우가 대세라네! 같이 남묘에 가지 않겠나? 오~ 그래? 어디 그럼 같이 가보세!
그런 관우숭배신앙은 조선말기 고종임금 때가 되면서 최고조에 달한다. 기존의 《남묘》와 《동묘》 이외에도 혜화동에 《북묘》, 천연동에 《서묘》가 들어섰으며, 보신각의 바로 옆에도 《중묘》까지 들어서서 서울에만 동, 서, 남, 북, 중앙, 이렇게 도합 5개의 공식적인 관왕묘가 들어섰다. 한편, 나라에서 관리하는 5개의 관왕묘 이외에 민간에서도 자체적으로 만든 관왕묘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났는데 현존하는 것으로는 명륜동의 《관성묘》, 장충동의 《관성묘》, 방산동의 《성제묘》가 그것이며, 서울 뿐만 아니라 강화, 안동, 전주, 남원 등 지방 곳곳에도 퍼져나갔다.
하지만 구한말에 국력이 바닥나자 나라에서는 서울에만 5개나 되는 관우의 사당에 때마다 제사를 지내는 것이 불가능해 졌다. 그래서 민간단체에 불하된 《남묘》를 제외하고는 모두 《동묘》로 합사되었다.
동묘
△ 동묘
동묘
  • 그런데 관우는 언제부터 황제가 되었어요?
  • 관우는 원래 장수도 아닌 마궁수(馬弓手)라는 미관말직이었어. 그랬던 그가 관왕(關王)이라고 불리는 왕이 되더니 급기야 관제(關帝)라는 황제의 지위까지 오른거지.
원래 무덤의 등급에는 《능, 원, 묘》라는 서열이 있다. 왕(왕비)의 무덤만 능(陵)이라고 하고, 세자(세자빈)와 왕의 사친(私親)의 무덤은 원(園)이라고 불리며, 나머지 사람들은 무조건 묘(墓)다. 예를 들어 월산대군과 같은 왕의 친형제들도 모두 묘라고 불린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림(林) 이라고 불리는 단 두개의 무덤이 있고, 이는 성인의 반열에 드는 경우에만 붙인다고 하는데, 그 중 하나는 공자의 무덤인 공림(孔林)이고, 나머지 하나는 바로 관우의 무덤인 관림(關林)이라고 한다. 공자의 사당을 문묘(文廟)라고 하고, 관우의 사당을 무묘(武廟)라고 해서 나란히 문과 무의 최고 성인으로 떠 받드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관우》라는 캐릭터를 단 한마디로 요약해서 말하라고 한다면 아마도 대부분은 《의리》라고 답할 것이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사례를 꼽는다면, 유비가 조조와의 전투에서 패하자 혼자 도망가고, 관우는 유비의 남겨진 두 부인과 함께 조조에게 사로잡혔을 때이다. 이때 관우의 사람됨을 한눈에 알아본 조조로부터 적토마를 비롯해 극진한 예우를 받으며 귀순을 종용 받았지만, 관우는 유비와의 《의리》를 내세우며 기어코 유비에게로 돌아간다. 이 과정에서 조조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조조와 전쟁중인 《원소》군의 적장 안량과 문추의 목을 단칼에 베고, 특히 단기필마로 오관을 돌파하며 장수 여섯의 목을 벤 《오관육참》의 고사는 비록 허구가 일부 섞이기도 했지만 너무나도 유명하다.
역대 중국왕조에서는 이런 관우의 캐릭터를 정치적으로 적극 활용하였는데 그 이유는 관우의 캐릭터인 “의리” 는 곧 국가의 관점에서 본다면 국가에 대한 “충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송나라 때에는 왕의 지위에 오르더니, 급기야 명나라 때에는 황제의 지위까지 오른 것이다.
  • 아하! 이제 관우가 황제가 된 사연은 충분히 알겠어요. 그런데 장군이었던 관우의 사당이 이렇듯이 시장 한복판에 있는 이유는 뭐죠?
  • 중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생각에는 “의리를 지키면 돈은 따라온다” 라는 것이 있어. 또한 관우의 고향인 산시(山西)성은 유명한 내륙의 소금산지였는데 전국을 누비던 소금상인들은 자기고향 출신인 관우상을 수호신으로 삼고 들고 다니면서 자신들의 안녕과 재운을 빌었다고 해. 지금이야 소금이 흔하지만 옛날에는 정말 소금이 귀했어. 오죽했으면 《작은 금》 이라는 이름이 붙었겠니?
딸:그런데 관우는 언제부터 황제가 되었어요?, 아빠:관우는 원래 장수도 아닌 마궁수라는 미관 말직이었어.
지금도 각국의 차이나타운에는 상점마다 관우의 상이나 그림을 모셔놓거나 관우를 모신 사당을 갖고 있다. 인천의 차이나타운에서도 관우를 모신 중국식 사당인 《의선당》과 함께 삼국지벽화거리 등 곳곳에서 관우를 만날 수 있고, 심지어 일반 화교가정에도 관우를 모시는 전통이 있어서 관우의 상 뿐만 아니라 조그만 사당까지 있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한편 《성제묘》에서는 지금도 관우에 대한 제사를 지낸다. 예전에는 매년 관우의 생일과 죽은 날에 제사를 지냈지만 최근에는 죽은 날에만 제사를 지낸다. 제사는 성제묘가 위치한 《방산시장》의 상인들로 구성된 상조회가 주관을 한다. 제사의 목적은 방산시장의 번영과 발전을 기원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제사의 참가자들은 이 제사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장사도 잘되고 부도도 나지 않는다고 여긴다. 심지어 상조회에 속하지도 않거나 기독교를 믿는 상인들까지도 제사경비를 보조한다고 하니 관우신앙이 상업신으로 완전히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성제묘》의 건립을 순수한 민간으로 보기 보다는 조선후기 중앙군영인 훈련도감 소속으로 화약을 만드는 일을 담당하던 관아인 《염초청》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는 관우가 군신(軍神)이기도 할 뿐더러 《성제묘》에 모신 관우의 위패에는 현한 수정후 관우 부군(顯漢壽亭候關羽府君)이라고 되어 있는데 한(漢)나라의 수정후에 봉해진 관우부군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부군(府君)이란 부군신의 줄임말로 과거 서울이나 지방 관청의 부속건물중 부군당에 모셔진 무속이나 마을의 수호신인 주신(主神)을 뜻한다. 게다가 성제묘의 길 건너편에 《염초청터(중구 방산동 4-24 청계천 마전교 건너편 횡단보도 옆)》와 《훈련원공원》이 있어 그런 견해를 뒷받침 하고 있다.
  • 청계천에 이토록 재미난 사연들이 숨어 있는 줄 미처 몰랐어요. 청계천 이외에도 서울 도심 속에는 숨어있는 사연과 역사가 많을 것 같은데, 이제 어디로 가나요?
  • 우선 바로 옆의 《광장시장》에서 맛있는 것을 좀 먹고, 혜화동 쪽으로 가 볼까? 거기에도 볼 것이 많은데, 음… 그렇지! `증주벽립(曾朱壁立)` 이 좋겠구나!
광장시장으로 발길을 돌리는 아빠와 딸
최동군(글로벌사이버대학교 문화콘텐츠학부 외래교수)
사진/그림
박동현(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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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3-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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