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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있는 역사

중학천에 숨어있는 『정도전의 안타까운 최후』

교보빌딩 위에 숨어있는 정도전의 안타까운 최후
중학천
《광통교》에서 《정조대왕 능행 반차도》까지 둘러본 다음, 다시 딸과 함께 청계천 광장 방향으로 향했다. 청계천 광장에서 동아일보사 뒤쪽으로 이어지는 작은 실개천을 가리키며 딸에게 말했다.
중학천 찾아가는 길 청계광장에서 공아일보사 뒷편으로 직진! 광화문 우체국 뒷편 열천을 보고 횡단보도를 건너 직진! 조금만 더 걷다보면 드디어 열상진원 도착!
  • 청계천에서 동아일보사 뒤편과 교보빌딩 뒤편으로 쭈욱 이어지는 이 실개천은 이름이 중학천(中學川)이라고 해.
  • 중학천이요? 뭐 이런 조그만 실개천에 이름이 다 있어요?
  • 그럼. 지금은 이렇지만 전에는 꽤 큰 하천이었단다.
아빠:청계천에서 동아일보사 뒤편과 교보빌딩 뒤편으로 쭈욱 이어지는 이 실개천은 이름이 중학천(中學川)이라고 해. 딸:뭐 이런 조그만 실개천에 이름이 다 있어요? 요 구슬은 뭐지?
중학천은 원래 경복궁의 뒤쪽 북악산에서 시작하여 삼청동과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앞을 지나서 동십자각 부근, 그리고 지금의 미국대사관 뒤쪽을 거쳐 청계천으로 합류되는, 청계천의 지류 가운데서는 가장 규모가 큰 하천이었다. 삼청동을 지나기 때문에 삼청동천(三淸洞川)이라고도 불리는데, 1957년 도시정비사업 때 복개가 되었다.
경복궁 건춘문, 동십자각 일대 전경(1929)
청계천이 복원된 뒤, 그 지류인 중학천에 대한 복원사업도 추진되었었다. 하지만 발굴조사 결과 원래 예전 규모 그대로 중학천을 복원할 경우, 좁은 도심 공간 속에 여러 위험요소가 우려되어서 발굴한 중학천을 다시 덮고, 그 자리 바로 위쪽에 인공 실개천을 조성하였다. 이 때문에 엄밀히 말하자면 <중학천의 복원>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KT광화문빌딩 뒤쪽에는 약 10미터에 걸쳐서 조선시대 중학천의 석축유구가 남아있기 때문에 아쉬운 대로 이 곳이 원래 중학천 자리였음을 알 수 있게 하였다.
중학천 석축 유구
  • 그런데 이름이 왜 중학천이에요? 혹시 옛날 이 곳에 중학교가 있어서 그런가?
  • 어느 정도는 그런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구나. 이 부근에 있는 경복궁 《동십자각》과 《일본대사관》 사이의 동네 이름이 종로구 중학동인데, 그 이름은 조선시대의 《4부학당》에서 나온거거든.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을 살펴보면 크게 초등교육기관, 중등교육기관, 고등교육기관으로 나눌 수 있고, 고등교육기관으로는 《성균관》이 유일했다. 한편 《초등교육》은 전국 공통으로 《서당》에서 담당을 했지만, 《중등교육》의 경우에는 서울(한양)과 지방이 달랐다. 즉, 《지방》에는 《향교》라는 국립교육기관과 《서원》이라는 사립교육기관이 있었지만, 서울에는 《4부학당》이 있었다.
《4부학당》은 줄여서 사학(四學)이라고도 했는데 서울의 중앙(中學), 동쪽(東學), 서쪽(西學), 남쪽(南學)에 설치한 《성균관》의 부속학교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사학》은 교육방침이나 내용 및 방법 등에서는 《성균관》과 비슷하였지만 《성균관》에 비해서는 규모가 작고 교육정도가 낮았으며, 공자를 모신 문묘를 두지 않은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사학》중에서도 《중학》이 있던 《중학당 터》는 현재 한국일보 별관 앞 화단자리인 중학동 14번지 이다.
이렇듯 조선시대 중등교육기관에 붙이던 《학당》이라는 명칭은 관습적으로 이어져서 구한말 서구의 선교사들이 세운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의 이름에도 《배재학당》 《이화학당》 과 같이 사용되었다.
딸:아빠, 여기에 한자로 뭐라고 쓰여 있네요? 무슨 천(川)인데… (위치: 광화문우체국 옆골목 중학천) 아빠:열천(洌川)이라고 쓰여 있는 거야.
  • 아빠, 여기에 한자로 뭐라고 쓰여 있네요? 무슨 천(川)인데… (위치: 광화문우체국 옆골목 중학천)
  • 열천(洌川)이라고 쓰여 있는 거야. 그 글자를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놔. 그리고 길 건너편 복원된 중학천의 시작 지점에도 비슷한 글자가 있으니 거기서 한번 대조를 해 보자.
딸:어? 조금 전 그 글자가 여기에도 있어요. 그런데 여기는 네 글자에요.
딸:아까 이 글자가 열이라고 했나? (위치 : KT광화문빌딩 뒤편 중학천 시작 지점) 아빠:열상진원(洌上眞源) 이야. 열상진원의 뜻을 네가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으로 한번 찾아볼래?
  • 어? 조금 전 그 글자가 여기에도 있어요. 그런데 여기는 네 글자에요. (위치 : KT광화문빌딩 뒤편 중학천 시작 지점)
  • 열상진원(洌上眞源) 이야. 열상진원의 뜻을 네가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으로 한번 찾아볼래?
  • 음, 잠시만요. 열상진원이라고 했죠? 아, 찾았어요. 뜻은 《차고 맑은 물의 근원》이라고 되어 있구요, 경복궁 향원정이 있는 연못 서북쪽 끝에도 같은 이름의 샘이 있다고 되어 있어요.
  • 그래 참 빨리도 찾았네. 그런데 그 《차고 맑은 물의 근원》이라는 해석은 틀린 거란다.
  • 에이, 그럴 리가요. 인터넷 백과사전에 나온 건데…
열상진원(洌上眞源)의 뜻이 《차고 맑은 물의 근원》이라는 해석은 틀렸다. 이는 우리의 음양오행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난 잘못이다. 심지어 인터넷 한자사전을 찾아봐도 열(洌)과 열(冽)은 같은 글자라거나 열(冽)은 열(洌)의 속자(俗字)라는 어처구니 없는 해석이 되어있다.
자, 열(洌)과 열(冽) 두 글자를 차분히 살펴보자. 차이점이 보이는가? 그렇다. 앞의 글자는 한자부수가 삼수변(3획)이고, 뒤의 글자는 부수가 이수변(2획)이다. 그리고 글자의 뜻도 당연히 다르다. 삼수변의 열(洌)은 거센 물결, 큰 강이름에 쓰이는 글자인 반면에, 이수변의 열(冽)은 차고 맑은 물을 뜻한다. 따라서 열상진원(洌上眞源)의 뜻이 《차고 맑은 물의 근원》이라는 해석은 열(洌)과 열(冽) 두글자를 혼동한 결과이다. 그럼 비슷하게 생긴 두 글자의 차이점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여기서 잠깐]음양론이란?

음양오행의 기초인 음양론에서는 세상의 모든 만물을 음양으로 해석한다. 음양론은 해(양)와 달(음)의 성질로 세상만물의 이치를 상대적인 관점에서 설명하는데 심지어 사물이나 논리체계에도 음양이 존재한다고 한다. 즉 만물의 성질이 빠르고, 뜨겁고, 가볍고, 많은 것 등은 해와 같은 양(+)의 성질인 반면, 만물의 성질이 느리고, 차갑고, 무겁고, 적은 것 등은 달과 같은 음(-)의 성질이다. 숫자도 홀수와 짝수로 나눠지는데 1,3,5,7,9는 2,4,6,8,10보다 빠르기 때문에 홀수는 양수, 짝수는 음수로 해석된다. 같은 원리로 살아있는 세상은 양(+)이고, 죽은 세상은 음(-)이다. 그래서 돌아가신 할아버지 제사에는 두 번 (짝수=음수) 절을 하지만, 설날 할머니께 세배를 드릴 때는 한 번 (홀수=양수) 만 절을 한다. 또한 문상을 가서도 돌아가신 분의 영전에는 두 번 절을 하지만, 살아있는 상주들에게는 한번만 절을 해야 한다.
양수인 삼수변의 글자는 대체로 큰 강물처럼 양이 많고 흐름이 거친 것을 뜻하는데 반해서, 음수인 이수변의 글자는 이른 봄 겨우내 얼었던 얼음이 녹은 물처럼 물의 양이 적고 차고 맑은 것을 뜻한다.
따라서 열상진원(洌上眞源)의 뜻은 《열(洌)이라는 물 위(上)의 진짜 근원》이라는 뜻이다. 그럼 열(洌)이라는 물은 어디일까? 한강의 옛이름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아리수’이고 나머지 하나가 ‘열수(洌水)’였다. 따라서 열상(洌上)은 한강의 위쪽이라는 뜻이며, 열상진원은 한강의 진짜 발원지라는 뜻이 된다.
한양이라는 말도 한수(한강)의 위쪽(양)이라는 뜻이다. 만약 조선이 지금의 서울 강남처럼 한강의 아래쪽(음)에 수도를 정했다면, 도읍의 이름을 한양이라고 하지 않고 한음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결국 열상(洌上)이라는 말과 한양이라는 말은 같은 뜻이며 순조19년인 1819년 김매순(金邁淳)이 지은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는 한양(漢陽)의 연중세시풍속을 기록한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열상진원
  • 그런데 이상한 것이 하나 있어요. 물이 똑바로 흘러가게 만들지 않고 `열상진원` 이라고 쓰여있는 곳 바로 위쪽의 수조에서 물이 옆으로 흐르도록 했는데 이건 왜 그렇죠?
  • 그건 내가 이전에도 한번 설명한 적이 있는데, 물을 명당수로 만들기 위해서 그런 거야. 남향을 한 곳에서의 명당수의 조건은 서류동입(西流東入), 즉 서쪽에서 흘러와서 동쪽으로 들어가야 좋다는 거야. 그래서 아주 짧은 거리이지만 일부로 물길을 90도로 꺾어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잠시 흐르도록 한 거야. 따라서 이 장치는 경복궁의 향원지 서북쪽에 있는 열상진원샘을 보고 그대로 본 따서 만든 거라고 볼 수 있지.
  • 와, 그냥 조그만 실개천인줄 알았는데 아빠 말 듣고 보니 새롭게 보이네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궁궐 앞에 이런 하천이 흐르고 있었다니 여기서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일어났을 거 같아요.
  • 그럼 그럼,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이 중학천에서 일어났었단다. 조선개국공신 정도전의 비극도 바로 이곳 중학천 근처에서 있었어
1398년 8월26일, 현재 종로구청 부근(수송동 146번지, 옛 수송방 지역)에 살고 있던 정도전은 같은 개국공신인 남은과 함께 중학천 계곡을 끼고 있는 송현방 남은의 애첩의 집으로 향했다. 그래서 <취월당>이라는 정자에서 심효생, 장지화 등과 함께 술을 마시며 모임을 가지다가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방원 일파에게 죽임을 당했다.
[여기서 잠깐]정도전의 최후

이때의 일은 태조실록에는 이렇게 싣고 있다. (전략前略) 그 집을 포위하고 그 이웃집 세 곳에 불을 지르게 하니, 정도전 등은 모두 도망하여 숨었으나, 심효생,이근,장지화 등은 모두 살해를 당하였다. 정도전이 도망하여 그 이웃의 전 판사(判事) 민부의 집으로 들어가니 … 정도전이 침실(寢室) 안에 숨어 있는지라, 소근 등이 그를 꾸짖어 밖으로 나오게 하니 … 정도전이 칼을 던지고 문 밖에 나와서 말하였다. “청하건대 죽이지 마시오. 한마디 말하고 죽겠습니다. 예전에 공(公)이 이미 나를 살렸으니 지금도 또한 살려 주소서.” 정안군(이방원)이 말하였다. “네가 조선의 봉화백(奉化伯)이 되었는데도 도리어 부족하게 여기느냐? 어떻게 악한 짓을 한 것이 이 지경에 이를 수 있느냐?” 이에 그를 목 베게 하였다. (후략後略)
실록의 기록에는 정도전이 목숨을 구걸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실록이 승자(태종 이방원)의 기록이라는 한계 때문으로 해석된다. 평소 정도전의 행실과 성품으로 보나, 죽기 직전에 남겼다고 하는 자조섞인 시로 보나 정도전이 이방원에게 목숨을 구차하게 애걸했다는 것은 상당히 과장된 듯 하다.
정도전의 시 <자조> 조존(조종하는 존재)과 성찰 두 곳에 온통 공을 들여서 책 속에 담긴 성현의 말씀 저버리지 않았네 삼십 년 긴 세월 고난 속에 쌓아 놓은 사업 송현방 정자 한 잔 술에 그만 허사가 되었네
조선을 이상적인 사대부의 나라(재상의 나라)로 만들려고 했던 정도전과 왕권의 불가침성을 전면에 내세운 이방원의 대립은 조선왕조 전반에 걸친 신권과 왕권의 대립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정도전은 훌륭한 재상을 선택하여 그 재상에게 정치의 실권을 부여한 뒤, 위로는 임금을 받들어 올바르게 인도하고, 아래로는 신하들을 통괄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중책을 부여하자고 주장하였다. 즉, 정도전은 임금은 단지 상징적인 존재로만 머물고 나라의 모든 일은 신하들이 회의를 거쳐 결정하는 나라를 이상적인 나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이 현실에서는 곧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로 삼정승이 국정을 주도하는 모델이다.
반면 태종이나 세조 등 강력한 왕권을 원하는 국왕들은 육조가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국왕에게 업무를 보고토록 하는 《육조직계제》를 선호했다. 《육조직계제》 정치체제에서는 삼정승은 자문역할에만 그칠 뿐이다. 그렇다면 조선왕조를 통틀어 가장 태평성대를 누렸던 세종시대의 정치형태는 어떠했을까? 세종은 《의정부사서제》와 《육조직계제》를 적절히 잘 조화시켰고 그 때문에 태평성대를 구가했던 것이다. 재상의 나라를 꿈꾸었던 정도전은 다음과 같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정도전은 자타가 공인하는 해동장량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정도전은 스스로도 자신을 한나라의 장량(장자방)에 비유하며 조선의 개국에 자신의 공이 가장 컸음을 공공연하게 자랑하곤 했다. 그리고 한 고조 유방이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 고조를 이용해 한나라를 세웠다고 말하면서, 자신 또한 태조를 내세워 자신이 원하는 새로운 왕조를 건설한 것이며, 조선 건국의 실질적인 기획자가 곧 자신이라는 뜻을 역설하기도 했다.”
정도전: 장량이 한 고조를 이용해 한나라를 세웠듯, 나 또한 태조를 내세워 내 원하는 새로운 왕조를 건설할 것이네.
관료: 어허, 말 조심하게나!정도전: 예전에 공(公)이 이미 나를 살렸으니 지금도 또한 살려 주소서. 이방원: 어떻게 악한 짓을 한 것이 이 지경에 이를 수 있느냐?
열천에서 아빠와 딸
  • 정도전 입장에서는 참 억울한 죽음이었겠어요. 조선을 세우는데 가장 큰 일등공신이었는데… 이런 억울한 죽음을 당한 다른 사례나 문화재는 없나요?
  •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례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 또 있지. 그 사람을 만나라면 이 청계천을 따라서 약 2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성제묘》로 가야해. 그곳에서 다음번 이야기를 계속하자.
최동군(글로벌사이버대학교 문화콘텐츠학부 외래교수)
사진/그림
박동현(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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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3-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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