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역사

정조반차도에 숨어있는 『정조의 애달픈 효심』

청계천에 숨어있는 정조의 애달픈 효심
정조대왕 능행 반차도
딸과 함께 광통교를 둘러보고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정조대왕 능행 반차도》다. 광통교에서 계속 직진해서 광교를 지나면 장통교에 이르기 전 《정조대왕 능행 반차도》라는 이름의 긴 벽화가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다.
  • 와! 정말 대단한데! 끝이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아빠! 그림에 모두 한자로 설명이 붙어 있어서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겠어요.
  • 이 그림은 1795년 정조대왕의 8일간에 걸친 수원행차를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라는 책 속에 나오는 반차도를 도자벽화형식으로 다시 그린 거야. 무려 180미터가 넘는 대작이지. 그림의 시작 부분에는 지도와 함께 《정조대왕 능행반차도》라는 제목이 붙어있지만, 사실 엄밀하게 이야기 하자면 《능행반차도》가 아니라 《원행반차도》가 맞는 표현이야.
정조대왕 능행 반차도 찾아 가는 길, 1.광통교에서 광교 방향으로 출발!, 2.광교를 지나 계속 직진!, 3.장통교에 이르기전 《정조대왕 능행반차도》벽화 등장!
왜 이 그림이 《능행반차도》가 아닌 《원행반차도》가 되어야 할까?
지금은 사도세자가 추존(죽은 뒤에 왕의 칭호를 줌)되어서 《장조》 가 되었지만, 실제 추존된 시기는 조선말기인 고종 때의 일이고, 정조대왕의 생전에는 여전히 `세자` 신분이었다. 아무리 정조가 조선국왕의 자리에 올랐어도,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노론세력이 여전히 정권을 잡고 정조를 견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지 못했다.
심지어 정조가 즉위한 지 4개월 만에 정조의 처소였던 존현각의 지붕위로 자객이 침입한 사건까지 있었다. 따라서 정조임금 당시에는 사도세자의 무덤을 지금처럼 《융릉》이라고 부르지 못했고, 《현륭원》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이 행차그림이 들어있는 책 이름이 《능행을묘정리의궤》가 아닌 《원행을묘정리의궤》인 것이다.
[여기서 잠깐]무덤의 등급

일반인의 무덤은 `묘(墓)`라고 하지만, 왕(왕비)의 무덤만은 `능(陵)` 이라고 한다. 한편 무덤의 등급 중에는 `묘(墓)` 도 아니고 `능(陵)` 도 아닌 것으로 `원(園)` 이 있는데, 이것은 영조가 천한 신분이었던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예우격상을 위해 최초로 적용한 제도로써 《세자(세자빈)나 왕의 사친私親의 무덤》에 사용하였다.
딸:여기도 한자가 엄청 많아요! 옛날 서울지도가 아닐까요? 아빠:반차도 앞에 있는 지도를 한번 볼래? 수선전도(首善全圖)라고 쓰여있어.
  • 반차도 앞에 있는 지도를 한번 볼래? 수선전도(首善全圖)라고 쓰여 있어.
  • 음, 여기가 어디지. 뭔가 복잡한 걸 보니 옛날 서울지도가 아닐까요?
  • 맞아. 정조의 아들인 순조임금 때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한양의 지도야. 수선(首善)이라는 말은 모범이 되는 곳이라는 뜻으로 곧 서울을 가리키는 말이지.
수선전도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 안에서도 정조의 지극한 효심을 엿볼 수 있다. 우선 창경궁이 있는 곳 주변을 살펴보자.
수선전도 상세사진, 자경전 월근문, 경모궁터, 창경궁
창경궁의 맞은편, 그러니까 지금은 서울대병원이 있는 자리에 ‘경모궁(景慕宮)’이라는 곳이 있었다. 이 경모궁은 원래 `수은묘(垂恩廟)`라고 불리던 사도세자의 사당을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경모궁` 으로 격상시킨 곳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처소를 경모궁이 바라다보이는 창경궁의 `통명전` 뒤쪽 높은 언덕 위에 새로 짓고, 이름을 ‘자경전’이라고 했다. 이는 곧 어머니가 남편이었던 사도세자의 사당을 늘 바라보도록 한 것이다. 게다가 창덕궁에서 경모궁으로 가는 궁궐담에 새로운 문을 만들고 그 이름마저도 `월근문` 이라고 했다. 월근문의 뜻은 달 월(月), 뵐 근(覲)으로 한 달에 한번, 즉 매달 만난다는 뜻이다. 사도세자의 사당을 매달 찾아 뵙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그 밖에도 정조의 효성에 관련된 일화들이 많다. 정조가 수원 사도세자의 능에 행차했을 때 송충이가 창궐하여 왕릉주변의 소나무를 죽게 만들자 몇 마리를 잡아오게 해서 `네놈이 내 아버지의 산소를 해친 놈이냐`면서 씹어먹었다고 전해진다. 그런 정조였기에 재위기간 24년 동안 다른 왕들에 비해 두 배나 많은 66회의 행차를 했는데, 그 중에서도 사도세자의 묘소참배가 절반이나 되었다.
정조(왼쪽 삽화):어마마마, 이제 늘 경모궁을 보실 수 있사옵니다. 정조(오른쪽 삽화): 네놈이 내 아버지의 산소를 해친 놈이냐!
  • 그런데 ‘반차도’는 무슨 뜻이에요? ‘도’는 그림이란 뜻인 것 같고, ‘반차’가 뭐지?
  • ‘반차’는 문무백관이 늘어서는 차례를 밀하는 거야, 쉽게 말해서 양반, 즉 문반과 무반들의 차례라는 뜻이지. 일반적으로 반차도는 행사가 끝나고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행사가 시작하기 전에 미리 그린다고 해. 왜냐하면 행사에 참석하는 인원들이 자신의 위치를 사전에 정확히 알고 있어야만 행사가 잘 진행될 수 있거든.
반차도를 잘 이해하려면 조선후기의 군사체계를 알아야 한다.
현대의 군대 편제는 사단-연대-대대-중대-소대-분대 식으로 되어 있지만, 조선후기에는 영營(부剖) - 사司 - 초哨 - 기旗 - 대隊 - 오伍 라는 속오군 편제를 따랐다.
우선 가장 작은 단위인 《오伍》에는 5명의 군사가 배속된다. 그리고 두 개의 《오伍》를 묶어서 한 개의 《대隊》를 형성하는데 여기에 취사병이 한사람 더 추가되어서 《대隊》의 정원은 11명이 된다. 따라서 대오는 군대의 가장 작은 단위를 나타내는데 지금도 “대오를 맞추다”, “대오를 정비하다”, “구국의 강철대오”와 같은 표현을 쓰고 있다.
한편, 3개의 《대隊》가 모여서 하나의 《기旗》가 되고 정원은 33명이 된다. 그런 세 개의 《기旗》가 모여서 정원 99명의 《초哨》가 되는데 바로 이 《초哨》가 군사편제상 가장 핵심조직이다. 반차도의 여기저기에 등장하는 《초관哨官》은 바로 이 《초哨》의 지휘관이다. 초관까지 합치면 초는 꼭 100명이 된다.
마병(기마병)초관(좌)과 보군(보병)초관(우)
△ 마병(기마병)초관(좌)과 보군(보병)초관(우)
이런 《초哨》가 5개 모여서 정원 500명의 《사司》가 되며, 《사司》가 5개 모여서 정원 2500명의 《영營》이 된다. 5개의 《초哨》는 각각 전초, 후초, 좌초, 우초, 중초로 불리고 《사司》도 마찬가지다.
  • 이 긴 행렬을 제일 앞에서 인도하는 이 사람은 누구에요? 엄청 높은 사람이었겠죠?
  • 그건 경기감사, 즉 경기도 관찰사야. ‘정리사’라는 벼슬도 겸직하고 있지.
  • ‘정리사’요? 앞에서 정리하는 사람인가?
앞서 이 행렬을 기록한 책이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라고 소개했다. 《원행》은 이미 설명했듯이 《원으로 가는 임금의 행차>이며, 《을묘》는 이 행차의 시기인 1795년을 뜻한다. 《정리》는 이 행사를 총기획하고 진행한 임시관청인 《정리소》를 뜻한다. 정리사는 《정리소》의 소속관리라는 뜻이다. 지금도 수원화성행궁에 가보면 《외정리소》라는 건물이 있는데 외정리소는 본관청인 《정리소》의 현지파견관청으로 이해하면 된다. 이 행렬을 경기감사가 인도하는 이유는 수원화성이 소속된 경기도의 최고책임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원행을묘정리의궤

1795년(을묘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에 행차한 뒤에 행사전반에 걸친 내용을 담아 간행토록 한 책이다. 관련된 모든 행사는 정리소(整理所)라는 임시관청을 설치하여 준비하였기 때문에 정리의궤라고도 부른다. 을묘년의 이 행사에서 정조는 현륭원 참배 이외에도 행차를 위해 한강 노량진에 배다리를 건설하게 하고, 임시 과거를 실시했고, 서장대에서 야간 군사훈련을 실시했으며,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어머니의 회갑잔치를 열었고, 주민들에게도 양로잔치를 비롯하여 각종 잔치를 베푸는 등 모든 내용이 그림과 함께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반차도를 청계천에 벽화형식으로 그린 이유는 청계천을 찾는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함은 물론이고 우리 문화 역사의 우수성을 알리는 효과를 기대한 것이다.
  • 이 거대한 행렬 중에서 정조는 어디쯤에 있는거에요?
  • 이 그림에 총 4개의 가마가 등장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임금의 가마란다.
  • 음, 아무래도 임금이 맨 뒤에 있지 않을까요?
  • 다시 한번 잘 찾아보렴. 호위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려있는 곳이 바로 임금이 있는 곳이거든.
  • 아하. 그렇다면 사람들이 가장 빽빽하게 몰려있는 두 번째 가마에요. 맞죠?
아빠:호위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려있는 곳이 바로 임금이 있는 곳이란다. 딸:아하. 그렇다면 사람들이 가장 빽빽하게 몰려있는 두 번째 가마에요. 맞죠?
원래는 가장 처음 등장하는 가마가 임금의 가마다. 가마의 이름을 봐도 정가교(正駕轎)로 되어 있어서 임금의 가마임을 알 수 있다.(궁궐에서도 정전(正殿)은 근정전, 인정전, 명정전과 같은 궁궐 최고의 건물만을 가리킨다.) 그리고 정가교의 바로 뒤에는 왕을 상징하는 초대형 용기(龍旗)가 따라가고 있는데 한사람이 들지 못하고 옆에서 4명이 보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 행렬에서 정조는 자신의 가마인 정가교를 타고 있지 않다. 대신 자신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타고 있는 두 번째 가마(자궁가교慈宮駕轎)를 바짝 뒤에서 따라가면서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심을 짐작할 수 있다.
임금의 가마 ‘정가교’
△ 임금의 가마 ‘정가교
헤경궁 홍씨의 ‘자궁가교’와 그 뒤를 따르는 왕의 말 ‘좌마’
△ 헤경궁 홍씨의 ‘자궁가교’와 그 뒤를 따르는 왕의 말 ‘좌마’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정조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그냥 안장만 올려놓은 빈말만 그려져 있다. 그 이유는 임금의 모습을 절대 그리지 않는 관습에 따른 것이다. 임금의 모습은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을 제외하고는 절대 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용안이 널리 알려지게 되면 임금의 안위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또한 절대지존에 대한 경외감도 미지의 상태에서 최고조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혜경궁을 따라가는 빈 말(좌마座馬)는 실제 정조를 나타내는 것이고, 그 이유 때문에 옆에서 시종들이 일산(日傘)과 부채(扇)를 들고 따라가고 있다.
  • 아빠의 설명을 듣고 있으니 정말 이 행렬이 살아서 움직이는 듯 해요.
    점점 이 주변의 숨어있는 이야기들이 궁금해 지는데요. 다음 유물은 뭐에요?
  • 음….이번에는 청계천의 지류 중에서 교보빌딩와 동아일보사 뒤편을 흐르는 중학천 유구를 찾아보자.
정조대왕 능행 반차도 앞을 지나 중학천 유구를 찾아가는 아빠와 딸
최동군(글로벌사이버대학교 문화콘텐츠학부 외래교수)
사진/그림
박동현(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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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3-11-06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