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역사

광통교에 숨어있는 『조선 최초 왕비의 눈물』

청계천에 숨어있는 조선 최초 왕비의 눈물
  • “아빠! 아빠! 아빠!”
  • “응 그래 그래. 무슨 일인데 우리 딸이 이렇게 아빠를 급하게 찾을까?”
  • “이번 학기 사회과목 수행평가로 우리주변에 잘 알려지지 않은 문화재에 대해 답사보고서를 제출하래요.
    성적에 반영되는 거니깐 이거 엄청 중요한 거에요. 문화답사는 아빠가 전문가니까 같이 해 주실 거죠?”
  • “당연하지! 우리 공주님의 분부인데… 가만 있자, 우리 주변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문화재라…
    어디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까?”
  • “기왕이면 맛있는 것도 먹고, 주변구경도 하면서 재미있게 답사할 수 있는 곳이요!”
딸 아이와 함께하는 ‘숨어있는 역사’ 기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첫 코스로 잡은 것이 바로 서울도심 문화재탐방, 그 중에서도 특히 서울의 상징인 광화문 주변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에서 내린 다음, 5번 출구 바로 앞쪽에 있는 청계광장으로 갔다.
  • “아빠, 우리 어디서부터 시작해요?”
  • “청계천의 두 번째 돌다리인 저기 광통교부터 시작하자. 여기에서 200 미터만 가면 돼”
광통교 찾아 가는 길, 1.광화문 5번 출구로 올라와서 청계천 광장 방향으로 직진, 2.청계천광장에서 청계천을 따라 내려가세요., 3.청계천의 첫 다리인 모전교 밑을 지나서 계속 직진, 4.조금만 더 걷다 보면 드디어 광통교에 도착!
광통교 사진'
  • “아빠, 이 다리 모양이 좀 특이해요. 다리 난간에 있는 돌 기둥들도 좀 어색하고.”
  • “이야 우리 딸 대단한데? 아빠를 닮아 눈썰미가 있어. 광통교는 원래 왕릉에 있던 석물들을 가져다가 만든 다리거든.”
  • “예? 왕릉에서 가져다가 다리를 만들었다 구요? 흠 뭔가 냄새가 나는데요?”
그랬다. 광통교는 태조 이성계의 경처(京妻) 신덕왕후 강씨의 왕릉이었던 정릉 석물을 가져다가 만들었다. 그렇다면 신덕왕후 강씨가 누구인가? 이성계가 목이 말라 우물가에서 한 처녀에게 물을 달라고 청했을 때, 버들잎을 띄워 물을 천천히 마시도록 했던 바로 그 처녀다. 태조 이성계의 향처(鄕妻)였던 신의왕후 한씨가 조선건국 직전인 1391년에 사망했던 것을 고려한다면, 신덕왕후 강씨야말로 조선 최초의 왕비가 되는 셈이다.
[여기서 잠깐]경처 (京妻) 와 향처 (鄕妻) 란?

조선시대의 일부다처제인 축첩제도와 마찬가지로, 고려 말에도 일부다처제의 한 형태인 경처, 향처 제도가 있었는데 고향에 두는 부인을 향처라고 하고, 수도인 개경에 두는 부인을 경처라고 했다. 하지만 적서의 차별이 있는 조선의 축첩제도와는 달리, 고려시대의 경처와 향처는 모두 정실부인이었다.
그러나 신덕왕후는 권력다툼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신덕왕후를 너무나도 사랑한 이성계는 호랑이 같은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여섯아들들을 모두 제쳐두고, 신덕왕후 소생의 10살짜리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것은 곧 비극의 시작이었다.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여섯아들들은 모두 불만이었고, 특히 다섯번째 아들인 이방원은 급기야 “왕자의 난” 을 일으켜서 신덕왕후 소생의 두 이복동생을 죽여버렸다.
향처 신의 황후, 태조이성계, 경처 신덕왕후, 경처의 막내 아들 이방석(태조 이성계의 세자책봉), 향처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 막내아들 이방석을 왕자의 난 통해 살해),
스스로 왕위에 오른 태종이 못마땅했던 태조 이성계는 신덕왕후 강씨가 죽자 몹시 애통해 하면서 신덕왕후 강씨의 왕릉을 지금 덕수궁 근처에 만들었고, 그 옆에 흥천사라는 절을 만들어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었고, 그 절의 종소리를 듣고서야 수라상을 받거나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이성계:'왕후, 오늘따라 그대가 더욱 보고 싶구려. 이방원 이녀석, 내 얼마나 잘 사는지 두고 보겠다.', 태종:'아직도 신덕왕후 생각만 하시다니...,' 태조 이성계 사후... 태종:'신덕왕후 릉에 있는 석물을 모두 파내어 광통교 만드는데 사용하라! 이제야 속이 좀 풀리는 구나!'
태조 이성계 살아생전에는 아버지의 눈치 때문에 신덕왕후릉(정릉)을 어쩌지 못했던 태종은, 아버지가 죽자 신덕왕후에 대한 복수를 시작했다. 우선 경복궁 코 앞에 있던 신덕왕후릉(정릉)을 사대문 밖인 지금의 정릉동으로 옮겨버렸고, 원래 정릉에 사용했던 석물들을 그 자리에 파 묻었다. 그러다가 때마침 흙으로 만들었던 청계천의 광통교가 홍수에 떠내려가자 땅에 파묻었던 정릉 석물을 다시 파내어 광통교의 복원에 가져다가 쓴 것이다. 백성들이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던 왕릉의 석물들을 발로 밟고 지나다니도록 한 것이다.
  • “그래도 한 나라의 왕비였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쫌 불쌍하다. 왕이 무서워서 반대하는 사람들이 없었나 봐요?”
  • “태종은 신덕왕후를 첩이라고 우긴 거야.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여서 사회와 신분의 서열에는 철저했거든.
    홍길동도 첩의 자식이라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했잖아. 아무튼 이 광통교의 석물들은 일제강점기 때 전차길을 만들면서 다시 땅속에 묻혔다가 2005년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거야.”
광통교 사진'
  • “근데 이건 왜 위쪽이 시꺼멓게 되어 있어요? 물에 젖은 건가요?”
  • “태종이 광통교를 만들 때 곱게 만들었겠니? 무덤 석물들을 거꾸로 하거나 일부는 조각해 놓은 부분을 정으로 쪼는 식으로 훼손해서 다리를 만들었던 거야. 커다란 호석(護石)의 윗부분이 약간 더 짙은 색인 것은 원래 거꾸로 놓여 있었기 때문에 물에 잠겨서 그렇게 된거야.”
  • “어? 이 기둥은 길게 점선처럼 홈이 파여 있네요? 이거 누가 장난친 건가?”
  • “그건 돌을 잘라내려던 흔적이야. 요즘처럼 현대화된 중장진가 없었던 옛날에는 큰 돌을 잘라낼 때 저런 식으로 홈을 판 뒤, 그 사이에 나무쐐기를 박아 넣고 물을 부어서 나무의 팽창하는 힘으로 돌을 잘라냈거든.”
광통교 사진
  • “이제 아빠가 문제 좀 내볼까? 광통교에서 불교의 흔적을 찾아 볼래?”
  • “불교의 흔적이요? 잠시만요. 찾았다! 여기 손을 모으고 합장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조선은 유교의 나라로 배웠는데 어떻게 불교의 흔적이 남아있는 거에요?”
  • “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영향 때문에 불교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어.
    그래서 석물 중 가장 큰 돌인 호석(護石)의 정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신장(神將:수호신)이 유교식으로 복두나 금관을 쓰고 홀을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불교식의 보관을 쓴 채로 합장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오른쪽에 있는 이 돌을 자세히 봐봐.”
영탁과 영저 사진, 불교 의식 도구인 금강령과 금강저 사진
다른 석물과는 달리 편평하지 않고 가운데 부분이 살짝 튀어나온 돌에는 영저와 영탁이 새겨져 있다. 방울처럼 생긴 것을 영탁, 그 옆에 있는 것을 영저라고 하는데, 원래 불교의식도구인 금강령(요령)과 금강저를 나타낸 것이다.
금강령은 맑은 소리로써 부처를 기쁘게 하고, 중생들의 잠자는 불성(佛性)을 일깨우기 위해 사용하던 도구이고, 금강저는 원래 삼지창처럼 몇 갈래로 갈라진 창과 비슷한 고대 인도의 무기였던 저(杵)를 불교의식도구로 수용한 것이다. 불법을 거스르는 모든 사악한 것을 물리친다는 의미인데, 의식도구로 사용하려다 보니 모양을 변형해서 맨 앞쪽의 창 끝을 한가운데로 모아지게 만들었다. 또한 영탁과 영저의 한 가운데는 음양오행과 도교의 영향을 받은 태극문양 까지 있다.
  • “우와! 이 다리 하나에 그렇게나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는지 몰랐어요.”
  • “지금까지 아빠가 설명해 준 부분은 광통교에서 오직 신덕왕후와 관련된 부분만 골라서 해 준 거야.
    광통교와 청계천의 준설에 얽힌 사연 등 다른 이야기도 엄청 많지.”
  • “정말요? 전에도 아빠 따라서 답사를 많이 다녔지만 사실 그때는 어려서 잘 몰랐었는데, 갑자기 답사가 재미있어졌어요. 다음은 어디에요?”
  • “다음 답사할 곳은 조금만 더 가면 보이는 “정조 반차도” 야.
    “지금까지 아빠가 설명해 준 부분은 광통교에서 오직 신덕왕후와 관련된 부분만 골라서 해 준 거야.
    광통교와 청계천의 준설에 얽힌 사연 등 다른 이야기도 엄청 많지.”
광통교 사진
최동군(글로벌사이버대학교 문화콘텐츠학부 외래교수)
사진/그림
박동현(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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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3-10-28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